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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주문을 지나 작은 다리를 건너면 선돌이 양옆을 호위하듯이 늘어서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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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기동 |
| 용주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후 병자호란으로 소실된 채 방치되어 오다, 조선시대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무덤을 인근지역으로 옮긴 후 아버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다시 짓고 원찰로 삼았다.
멀리 보이는 삼문은 보통 궁궐이나 사원, 사당 등에 세워지는 것으로 불교 건축물과는 거리가 멀다. 특히 삼문 좌우로 행랑채가 이어져 있는 모습은 궁궐 건축물에서 흔히 보이는 배치이다.
정조가 재위기간 동안 13번이나 인근에 있는 사도세자의 무덤에 행차하였기 때문에 임금의 행차에 필요한 사용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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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문에 이르러서는 마음을 허공과 같이 비우라는 글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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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기동 |
| 일주문을 지나 작은 다리를 막 건너기전 양쪽으로 도차문래(到此門來) 막존지해(莫存知解)라는 글귀가 새겨진 제법 큰 자연석이 세워져 있다.
'이 문에 이르러선 마음을 허공과 같이 비우라'라 뜻으로 사찰을 찾는 방문객들에게 욕심을 버리라는 부처님의 말씀으로 생각된다. 선돌의 글귀도 마음속에 새겨볼만 하지만, 주위의 풍경과 어우러진 자연석의 조화도 상당히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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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의 친필로 써진 대웅보전 현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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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기동 |
| 천보루의 누마루 아래를 지나면 대웅보전이 있다. 대웅보전 전각으로 오르는 계단 소맷돌에는 일반 사찰에서 볼 수 있는 연꽃이나 당초문 문양대신 궁궐 건축물 소맷돌에서 발견 할 수 있는 삼태극과 구름, 모란의 문양들이 새겨져 있다. 소맷돌의 문양에서도 사도세자의 원찰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용주사 대웅보전의 현판은 정조의 친필이다. 유교를 중시하고 불교를 배척하였던 조선시대에 임금이 사찰의 현판을 직접 쓰는 경우는 흔치 않은 일로 아버지 사도세자를 생각하는 정조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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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웅보전의 처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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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기동 |
| 용주사의 건립에는 여러 관청과 각 지방 고을이 공사 비용을 댔으며, 서울이나 다른 대도시 상인들도 돈을 보탰다. 한 절을 짓는 데 이렇듯 중앙과 지방 관청의 관리들이 참여하는 예는 많지 않다. 이것은 모두 정조가 용주사의 창건에 각별하게 관심을 쏟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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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종의 삼존불과 탁본한 삼존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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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기동 |
| 대웅보전 오른쪽 앞쪽에 위치한 범종각에는 범종이 있다. 에밀레종으로 불리기도 하는 경주 성덕대왕 신종, 강원도 평창 상원사 동종과 함께 용주사 범종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이 범종에서 특히 눈길이 가는 것은 종에 새겨진 삼존불이다. 비천상과 함께 결가부좌한 삼존불은 구름을 타고 하는을 나는 모습으로 천의를 하늘로 휘날리고 있다. 범종에 새겨진 삼존불의 정확한 모습은 효행박물관에 전시된 삼존불 탁본으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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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가 직접 쓴 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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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기동 | 용주사 경내에 위치한 효행박물관에는 정조가 직접 쓴 <어제봉불기복게>라는 책이 있다. 임금이 직접 쓴 책이라서 가장자리를 청동으로 제본하였으며, 연꽃 무늬로 표지를 꾸몄다. 책을 제본하는데 들인 정성을 짐작할 수 있다.
내용은 화산 용주사의 내력을 간략히 말한 뒤 부처님을 모신내력과 부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가사체이다. 정조의 단아하고 간결한 글씨체를 감상할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 또한 효행박물관에는 정조시대 영의정이었던 체재공이 쓴 용주사 대웅보전의 상량문도 볼 수 있다.
용주사를 짓는 사업은 시골의 한 묘를 지키는 단순한 사찰 창건 공사가 아니고 나라 전체의 관심거리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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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보루 안쪽 홍재루(弘濟樓) 편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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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기동 | 용주사 천보루에서도 정조를 만날 수 있다. 천보루는 누각의 바깥쪽 이름이고 천보루 앞쪽에는 홍재루(弘濟樓)라는 편액이 붙어있다. 홍재(弘濟)는 널리 대중을 구제한다는 뜻으로 정조임금의 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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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성전 벽에 붙여진 부모은중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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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기동 | 대웅보전 왼쪽에 위치한 효성전에는 사도세자의 위폐가 모셔져 있으며 내부 벽면은 '부모은중경'으로 도배되어 있다.
'부모은중경'은 본래 불교의 경전에 속하지 않았지만 조선시대에 일반에 널리 유행하면서 불교 경전의 하나로 취급되었다. 용주사에는 '부모은중경' 목판,동판,석판이 각각 보관되어 있다.
열한살의 나이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쓰라린 죽음을 목격한 정조는 아버지에 대한 효도를 표현하려 '부모은중경' 목판을 제작하여 용주사에 하사하였다. 그 후 정조의 아들인 순조가 '부모은중경' 동판과 석판을 제작하여 용주사에 하사하였고, 최근에는 효성전 앞에 삼층석탑을 세우고 1층 탑신에 '부모은중경'의 그림과 내용을 새겨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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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물관 뒷쪽에 세워져 있는 석장승 두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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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기동 |
| 효행박물관 뒷쪽에는 석장승 두 개가 세워져 있다. 장승은 원래 마을 어귀에서 이정표로서의 역할 이외에도 악귀가 마을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수호신의 역할을 한다.
사도세자의 아들로 임금의 자리에 올라 새로운 개혁과 왕권의 강화를 위해 험난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던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그의 이정표이자 수호신이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용주사에서 만날 수 있는 정조의 여러 흔적들에서 정조의 사도세자에 대한 효성을 발견할 수 있었지만, 그 보다는 오히려 정조가 어려운 주위 여건 속에서도 백성들을 위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좌절하지 않도록 아버지 사도세자가 그를 지켜줄 것을 원하지 않았나하는 느낌을 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