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란 선무원종일등공신
풍암공(楓菴公) 김홍원(金弘遠) 장군(將軍)
위패(位牌) 봉안(奉安) 고유제(告由祭)
12.13.토 12:30. 보령 성주 호국사
일주일 전 내린 눈이 나라 전체를 덮었는데 지난 밤에도 보령쪽에 많은 눈이 내린다는 소식이다. 고산의 石靑 재교 아재가 밤 10시경 차를 운전하기 어려운 눈발이라면서 오늘의 뜻 깊은 행사에 너무나 좋은 여건이 될 거란다.
423년 만에 뵙게 되는 선무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 풍암공(楓菴公) 김홍원(金弘遠) 장군 위패(位牌) 봉안(奉安)하는 날이라 모든 먼지를 흰 눈으로 덮게 되니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지세었다.
부산, 울산, 인천 등지에서 후손들이 참석하는데 지장이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된다.
두껍게 내린 눈에 ‘임란공신 충의회’측 春岡 송재훈 부회장님과 淸巖 임성필 사무국장이 설삽으로 행사장을 정리하는 수고를 하시고, 부산 石汀 김기현 고문님 일행은 부산에서 세벽 5시에 출발하여 1시간 일찍 현장에 도착하시고, 인천 大伽倻 말암고문님 일행도 고산 石靑 작가와 산마을밥상집에 계신다는 연락이 와서 한숨 놓인다.
고유제 행사는 12시 30분에 진행되었다..
獻官.尊稱略
初獻官 石汀 기현
亞獻官 大伽倻 말암
亞獻官 ?? 수현
終獻官 滿齋 경태
終獻官 惠黙 재덕
祝官 石靑 재교
執禮 春岡 송재훈
참석자: 경태, 재욱
사무국장: 淸巖 임성필
찍사: 南齋
초헌례(初獻禮)
初獻官 石汀 기현
執禮 春岡 송재훈
독축(讀祝)
祝官 石靑 재교
維
檀君紀元 四千三百四十七年 甲午十月丁酉朔 二十二日 戊午 壬亂功臣忠義宣揚會 會長 代
高靈金氏 十世 後孫 幼學 金基顯 敢昭告于
忠南保寧市 聖柱面 聖柱里治下 護國祠
朝鮮宣祖 壬亂功臣 追慕配享祠也
宣祖大王含 四百二十二位 每歲奉審
漏功臣中 倡義功臣一位 晩時同配 玆以
告由然 宣武原從一等功臣 高靈金公弘遠 護國奉君
群臣義路 沈陸倭徒 發勇對抗 非恐死過
聖主避禍 孤域寄留 扈從冒苦 棄裔扶黎
先他後己 愛下遵上 豈不偉事 朝降勳階
其尉萬一 體埋魂永 碧落猶全 身去名揚
精備牲弊 聖祠香火 裔務當宜 世必遵則
遇昧雲仍 晩覺具禮 恭薦芬馥 用伸追慕
靈伴舊志 香席降臨 洋洋歆饗虔告 謹告
유
단군기원 사천삼백사십칠년 갑오십월정유삭 이십이일 무오 임난공신충의선양회 회장 대
고령김씨 십세 후손 유학 김기현 감소고우
충남보령시 성주면 성주리치하 호국사
조선선조 임란공신 추모배향사야
선조대왕함 사백이십이위 매세봉심
루공신중 창의공신일위 만시동배 자이
고유연 선무원종일등공신 고령김공홍원 호국봉군
군신의로 심육왜도 발용대항 비공사과
성주피화 고역기유 호종모고 기예부려
선타후기 애하준상 개불위사 조강훈계
기위만일 체매혼영 벽락유전 신거명양
정비생폐 성사향화 예무당의 세필준칙
우매운잉 만각구례 공천분복 용신추모
령반구지 향석강임 양양흠향건고 근고
역문
이곳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리의 호국사는 조선조 선조대
왕시 임란공신들을 배향하고 있는 곳입니다.
선조대왕을 포함 421위는 해마다 우리가 제를 올리지만
창의공신중 1위를 늦게나마 배향하고자 합니다.
그 1위는 선무원종일등공신 고령김씨 홍원입니다.
나라를 보호하고 임금을 섬김은 뭇 신하들의 의로운
길로, 전쟁을 일으킨 왜구의 군사들에게 용맹하게 대항할
적에 죽음을 당해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성왕께서 화를 피하여 외로운 지역에 머무실 적에,
괴로움 무릅쓰고 잘 모시었으며, 자손을 버리고 백성을
보살피고, 다른 사람을 우선하고 자신을 뒤로했으며,
아랫사람을 사랑하고 상사를 존경했으니, 어찌 그 위대함
을 섬기지 않으리오.
조정에서 공훈의 훈록을 내리었으니, 그 공로 만분의
일이라도 위로가 되리니, 몸은 비록 땅에 묻히었어도
혼령은 영원히 하늘나라에서 더욱 온전할 지니,
몸은 갔어도 이름은 세상에 드날리었도다.
정성스레 제사음식 장만을 하여, 성스러운 사당에서 제사
지냄은 자손의 의무로 당연한 일이며, 세인들이 반드시
좇아야할 도리이네.
우매한 여덟분의 우리 후손들은, 늦게나마 깨달아 예를
갖추어, 공경히 향기로운 술과 음식을 올리오며,
추모하는 정성을 펴오니, 신령들은 옛 동지들을 짝하여
함께 좋은 자리에 강림하시어 차린 음식 흠향하옵소서.
감히 고하옵니다.
아헌례(亞獻禮)
亞獻官 大伽倻 말암
亞獻官 수현
종헌례(終獻禮)
終獻官 滿齋 경태
終獻官 惠黙 재덕
음복례(飮福禮)
의병도대장 송암(松菴) 선생 헌작례(獻爵禮)
위패 前 기념촬영
기념촬영
春岡 송재훈, 재욱, 南齋, 石靑 재교, 수현, 大伽倻 말암, 石汀 기현, 惠黙 재덕, 滿齋 경태, 경태, 촬영: 淸巖 임성필
회 식
산마을 밥상
훌륭하신 조상님을 영원히 기리게 됨에 모두가 마음이 흡족하여 후손된 도리를 늦게나마 찾게 되어 마음이 흐뭇하다.
19세에 임란을 맞이하여 송암 김면 장군 휘하에 동참하시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시며, 큰 전적을 세우시고 선무원종일등공신이 되시어 27세에 돌아가신 일생을 구국으로 마감하신 선조님의 비문을 올린다.
묘갈명
임진란 때 송암선생이 가족과 문생을 거느리고 창기하여 토적할 때에 공도 그 중 한사람이었다.
방년 19세에 종군하여 여러번 기이한 공을 세우고 군성이 크게 떨치었다.
숙부 연(演)은 송암 선생의 명으로 집으로 돌아가서 가족을 보살피고 사촌 홍한(弘漢)은 무계전에서 전사하고 익년 계사에 송암 선생이 순절하니 공은 지극히 집안과 나라를 위하여 통분을 금치 못하고 송암 선생을 대신하여 중병을 거느리고 혈전하기를 7년 간에 걸쳐 국위를 크게 선양하고 난이 평정한 후에 녹훈 1등에 대호군을 가작하였으나 나아가서 벼슬할 뜻이 없었다. 호연히 귀향하여 구업만을 다스리고 있었다.
경사년(1600년)에 이르러 졸하니 득년 27세 아까운 나이었다.
장례를 고령 칠동 선영하 신좌원에 하였는데 공의 휘는 홍원(弘遠)이요. 호는 풍암(楓菴)이다.
그 선대는 고령인 고양부원군 남득의 후예이다. 그 후 수세대를 지나 고조 휘는 장생(莊生)인데 병참이고, 증조 휘는 구(鉤)인데 원으로 역임 九군하여 공적이 많아서 병참을 증직 받았고 조부 휘는 두문(斗文)인데 무장이 되고 고의 휘는 길(洁)인데 덕행이 높고 세상사람들이 송계(松溪) 선생이라 칭하고 대학유(大學儒)였다.
비는 창녕성씨 준의 따님인데 부덕이 현숙하였다.
공은 만력 갑술 선조7년(1574)에 출생하여 천자가 특기하여 장자(長者)로 기대되고 시종 입지거지가 탁월하더라. 배는 현풍곽씨 참봉 륜의 여인데 부덕이 높고 군자의 가문을 이었더라.
공이 졸한 오랜후에 졸하여 김해군 생림면 북곡리 유좌원에 분장하였다.
생2남2녀를 두었는데남에 익휘와 성휘이며, 여는 신유서 이용서에게 출가하였다.
손 증손은 다 기록치 않는다.
아~! 공은 예법가문에 생장하여 듣고 따를 것은 충의요. 보는 것은 학문이다.
약관에 종군하여 공을 세우고 물러나서 란정 후이나 아깝게도 요절하니 고사에 종군의 청영(미혼 총각)의 군산함과 풍이의 병수(나무에 기대앉아한) 미행은 고금에 다를 바 없다.
그 후손인 기호가 명기를 청함에 명에 이르기를 평시에는 강학에 전념하고 국난때에는 목숨을 바쳐 진중하고 임기응변함이 때에 맞았더라.
기린각에 그 이름을 녹재함이 큰 공에 보답함이라.
내가 명함이 거짓이 아니오니 영원토록 수고하리라
종후손 성도 손씻고 공경으로 쓰다.
1989년 4월 제후손(諸後孫)이합모 헌성하여 수묘개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