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14 나해 연중15주일
사무하 6:1-5, 1-19 / 에페 1:3-14 / 마르 6:14-29
사랑과 권력
요즘에는 사람들이 공중파 방송보다는 넷플릭스, 유튜브, 디즈니 플러스 등과 같은 OTT(Over The Top)방식으로 언제, 어디서 그리고 다양한 방법으로 시청합니다. 코로나 시기, 저는 우연히 <더 크라운(The Crown)>이란 드라마를 보게 되었습니다. 엘리자베스2세의 일대기를 드라마화한 건데, 영국왕실과 성공회 간의 관계도 나오곤 해서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이 드라마를 통해 저는 찰스 황태자와 다이애나 황태자비 간의 드라마틱하면서도 슬픈 이야기를 더 잘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드라마를 보며 사랑과 권력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 등장하는 권력자들을 통해 저는 여러분과 함께 사랑과 권력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미갈에 대해서입니다. 제1독서인 사무엘 하권 6장 16절에는 그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야훼의 궤가 다윗의 도성에 들어올 때 다윗 왕이 야훼 앞에서 덩실 덩실 춤추는 것을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려다보고는 속으로 비웃었다.”이 대목만 놓고 보면, 여러분은 필경 ‘시나이 산에서 받은 계약의 궤가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마침내 예루살렘에 자리잡는 그런 경사스런 날에 함께 기뻐하지는 못할망정 비웃다니... 뭔가 문제가 있는 여자 아닌가!’라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미갈이 겪은 인생여정을 들으신다면 좀 달리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성서에도 언급하고 있듯이, 미갈은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사울의 딸입니다. 블레셋의 적장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일약 스타가 된 다윗은 사울의 총애를 받게 됩니다. “눈이 반짝이고 잘 생기고(사무상 16:12)”, 수금도 잘 타고, 시도 잘 짓는 등 모든 면에서 매력적인 다윗에게 미갈은 그만 홀딱 반하고 말았습니다. 성서에서 여자가 ‘사랑하다’는 동사의 주어로 등장하는 경우는 미갈이 유일합니다. 그러나 남성중심적인 시대에서 이 예외적이고 주체적인 사랑의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사울왕은 치솟는 다윗의 인기에 불안을 느끼고 그를 제거할 마음을 먹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자신의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한다는 걸 안 사울은 다윗을 죽일 속셈으로 블레셋 사람 백 명을 죽이면 사위 삼겠다고 제안합니다. 이에 다윗은 이백명을 죽이고 미갈과 결혼합니다. 다윗은 이로써 왕의 사위라는 권력을 얻게 됩니다. 아름답게 맺어져야 할 결혼이 권력에 눈 먼 두 남자의 무자비한 거래로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을 자신의 사위로 삼아 한 가족을 만든 사울왕이었지만, 그의 질투심과 불안은 멈추질 않았습니다. 성서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자기 딸 미갈마저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똑똑히 보고 나서는 다윗이 점점 두려워져서 끝까지 그를 원수로 여기게 되었다(사무상 18:8-9)” 그 결과, 사울은 창을 던져 다윗을 죽이려 하였고, 또 군인들을 보내 다윗을 잡으려 하였습니다. 이를 눈치 챈 미갈은 남편 다윗을 창문으로 내려 보내 피신시킵니다.(사무상 19“1-17 참조)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미갈은 자신의 전부를 걸었습니다. 한편, 자기 딸 미갈의 도움으로 다윗이 도망간 사실을 안 사울왕은 그녀를 발티엘이라는 남자에게 줘 버립니다.(사무상 25:44 참조) 세월이 흘러 사울 왕이 죽고, 다윗이 왕이 될 무렵, 그는 발티엘에게서 미갈을 찾아옵니다.(사무하 3:15 참조) 그러나 이것은 그녀를 사랑하기 보다는 권력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왜냐하면 다시 돌아온 그녀는 궁궐에 유폐된 채 오로지 창문을 통해 바깥풍경을 엿볼 뿐이었습니다. 사실, 하느님이 궤가 들어오는 국가적 행사에 왕비인 미갈도 당연히 참여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미갈이 다윗을 비웃었다는 구절은 이러한 배경을 알아야 비로소 그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녀는 아버지 사울과 갈라설 정도로 열정적으로 다윗을 사랑했지만, 두 남자의 권력투쟁의 한복판에 내몰려 그 사랑은 훼손되었고, 그래서 굴곡진 인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급기야 사랑했던 남자로부터 외면당함과 동시에 권력을 향해 달려가는 사랑했던 남자의 민낯을 보게 된 것입니다.
다음으로 헤로디아와 그녀의 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명성이 알려져서 급기야 헤로데 왕까지 알게 되자, 그는 예수님을 자기가 죽인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라고 긴장합니다. 사실, 헤로데왕은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 주변 아기들을 학살한 헤롯대왕의 아들이지만, 그의 어머니가 사마리아 출신이어서 일종의 100% 유대혈통이 아닌 관계로 정통성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는 정통 유대인 제사장 가문의 피가 흐르는 하스모니아 왕가의 헤로디아를 필요로 했습니다. 또한 헤로디아 역시 왕이 되지 못한 前 남편보다는 헤로데왕과 결혼함으로써 권력욕을 충족시키려 하였습니다. 그렇게 헤로데왕과 헤로디아 간의 결혼은 정치적 셈법에 따른 야합이었습니다. 이처럼 추악한 행동에 대하여 세례자 요한은 레위기 20장 10절, “이웃집 아내와 간통한 사람이 있으면, 그 간통한 남자와 여자는 반드시 함께 사형을 당해야 한다”는 조항에 근거하여 그들을 질책하였습니다. 이에 헤로데왕은 세례자 요한을 단칼에 제거하고 싶었지만 “민중이 두려워서(마태 14:5)” 감옥에 가둬놓기만 하였습니다. 헤로데왕의 마음을 잘 알고 있는 헤로디아는 그의 생일을 맞아 자신의 딸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습니다. 복음서에서는 헤로디아의 딸이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초대교회 시기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그녀를 살로메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를 근거로 1890년대 초 런던의 유명한 극작가인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854-1900)는 <살로메>라는 희곡을 썼고, 오스트리아의 화가 구스타브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는 <유디트Ⅱ: 살로메>라는 그림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왜 헤로디아는 그의 딸 살로메를 이용했을까요? 살로메의 훌륭한 춤솜씨도 춤솜씨지만 위에 언급한 문학작품과 여러 그림들을 통해 유추해 볼 때, 아마도 평소에 자신의 딸 살로메를 바라보는 남편의 눈길에서 이미 야릇한 감정을 읽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에 영악한 헤로디아는 남편의 성향을 이용하여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킵니다. 그렇게 소녀 살로메는 삐뚤어진 사랑, 잘못된 결혼을 덮을 희생제물로 소비되었습니다. 부패한 권력이 야만적 폭력을 휘두를 때, 사랑은 생명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파괴하게 됩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흔히 그리스도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부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느님이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이 세상만물을 창조하신 것은 사랑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창조의 원동력이며, 생명과 기쁨은 사랑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기 좋았다며 기뻐하시고, 최초의 인간 아담에게 당신이 만든 피조물을 보여주시며 아담이 이름을 붙일 때 곁에서 흐뭇해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이 자신의 짝을 발견 못하자, 그 짝을 창조해 주시고, 아담이 기뻐하자 함께 기뻐하며 그들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속성인 사랑은 생명을 창조하고 함께 기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앙인들은 믿음이 깊어질수록 그 사랑도 점차 하느님을 닮아 갑니다. 남녀 간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는 미갈과 헤로디아 그리고 살로메의 사랑을 보면서 상처받은 사랑과 상처를 주는 사랑에 대하여 살펴봤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런 상상을 해 봅니다. 만일, 사울과 다윗이 권력투쟁을 내려놓고 자신의 딸이자 아내인 미갈의 사랑을 제대로 받아주었다면, 미갈의 사랑은 일종의 화해의 치유이자 교량이 되어서 사울과 다윗은 서로를 라이벌로 보지 않고 아마도 그들은 화목하게 살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현실은 권력에 대한 욕망이 사랑을 일그러뜨렸습니다. 만일, 헤로데와 헤로디아가 자신의 야망이 잘못되었음을 회개하였다면, 세례자 요한의 생명은 물론이거니와 자신들의 딸 살로메마저 그 악행에 가담하게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예술적 재능이 풍부한 살로메는 그 재능을 더욱 키우면서 의붓아버지 헤로데왕이 아닌 건강하고 건전한 정신을 가진 청년과 만나 행복한 삶을 살지 않았을까요?
옛부터 많은 노래와 예술작품이 남녀 간의 사랑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만큼 이 사랑이 우리인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사랑으로 우리 인생이 아름답고, 기쁘고, 행복하길 바랍니다. 그것은 이 사랑 안에는 하느님이 우리를 만드신 그 거룩한 사랑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 사랑은 오늘 성경에서 들은 것처럼 쉽게 오염되어 잘못될 위험이 많기도 합니다. 특별히 돈, 권력 등과 같은 요인이 개입될 때 그 위험성은 더욱 높아집니다. 그럴 때 우리는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해 달라는” 주의 기도를 의식하면서 이 사랑이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기쁘고, 생명을 살리는 길로 나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우리 모두에게 사랑을 불어넣으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