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평동)
1954년 음력8월10일 안동 임동 중평동(일명 챗거리)에서 태어나
1959년부터 1960년말까지 임동교회에서 교원선생님들께
국문해독하고 유치학습을 받았습니다.
양력생일이 12월25일이라서 크리스마스때는
항상 예수그리스도역으로 연극을 하였습니다.
1961년~1966년까지 임동국민학교에 다니며
어린 초등생활을 하였습니다.
1학년때 담임유정희선생님이 우리를 교실에 모아놓고
책읽을수 있는 사람 손들어라고 했을때
버쩍 손드는 아이가 나와 김상진 둘이였습니다.
둘다 교단으로 불려나가서 둘의 키를 재어보시더니
내가 상진이보다 조금크니까
나보고 급장을 하라고 하여 내리 6학년까지
급장을 하는 행운을 잡았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급장은 상당한 권력이 있었지만
천방지축 어린 친구들의 통제(선생님이 시킴)에
항상 어려움이 많았던 기억이 남니다.
(임동교회)
어린아들을 안동으로 유학시키기위한 어머니의 모정으로
과외공부도 좀하고해서 시험을 치루고 당당히
안동중학교에 입학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1967~1969년까지
영란이 누나와 자취를 하던 중학생활은
오로지 뛰어놀던 생각만이 남아 있습니다.
공부보다는 노느것이 더즐거웠던 시절이였던 모양이였습니다.
그리고 1970년에서 1972년말까지 고등학교 시절이 기억이 나지요.
마뜰 벌판에서 친구들과 농구/배구/축구를 즐기던시절과
사춘기소년의 꿈많은 상상력때문에 공부보다는
운동과 상상을 좋아하던 젊은 남원기는
힘겨운 입시준비를 마치고 예비고사도 페스하고
강지원선생님의 권유로
인하공과대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화학공학과 황만섭이는 금속공학과에 둘이서 입학을 하여
면학을 키울려고 하였으나 고삐에서 풀린 망아지처럼
내마음되로 할수 있는 자유를 얻은 탓으로
테니스/낚시/검도/축구/그림/노래와 당구
그리고 키타/술/미팅 등등 대학시절 많은 경험을 하고
1995년9월 3학년일학기를 마치고 군에 들어갔습니다.
안동36사단에서 신병교육을 받을때
어머니가 가끔 음식을 싸들고 찾아 오셨습니다.
교회간다고 내무반에 예기를 하고 나와서 외곽초소에서
어머니가 가져오신 음식을 먹곤하였습니다.
먹고남은 음식 나머지는 초소선배들에게 주시고 어떤때는 같이 먹고
어떤때는 내무반으로 몰래 가져온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무거운 뒷모습이 항상생각이 납니다.
그리고 우리는 6주훈련을 끝내고 대구 2군사령부로 이동하여 운전병과
정비병의 자격을 갗추기위한 겨우네 모진훈련을 받았습니다.
13주의 모진훈련을 받고 우리는 다시
부산의 군수사내 항만사령부로 배치되어
트레일러 운전병이되어 전국으로 군수품을 날렸습니다.
1978년도에 제대를 하고 3학년2학기로 복학을 하니 이제는
사회입사준비를 하여야하는 복학생의 부담을 안게되었습니다.
1973년봄에서 1979년겨울까지의 대학생활이
마무리될쯤 1979년 봄
나는 나의 영원한 동반자인 이선자를
신입생 환영회때 만나서 가정을 꾸렸고
나는 또다른 행복감에 들떠있었습니다.
첫댓글 남원기 후배님 부모님은 참대단하셨던 걸로 기억을 합니다..경제적인 능력도 있으셨겠지만 자식에 대한 열정 특히 어머님의 자식에 대한 애착심.물론 우리들의 부모님들도 다를바는 없으셨겠지만 너무 자식이 공부를 하고싶어도 가르칠 능력이 없어서 가슴에 한이맺치신 부모님도 그당시는 많았지요.남원기 후배님 부모복이 있어서 부인복도있고 자식복도 많으시겠지요? 그당시 영란이와 원기후배를 많이 부러워 했던 기억이 세삼 떠오르네요~~~
재미있게 잘 내려가다가 결혼과 동시에 끝나버리네요 좀 더 소개를 해주시지
간단하지만 성장과정을 알게되어 더 반갑습니다. 동생되는 우리기수 남동기는
중학교 까지는 임동에서 나왔는데 선배님은 더 일찍이 안동으로 유학을 가셨네요,
재주많은 우리코스모스께서 1절만 올리신것 같습니다. 나중에 2절이 나오면 인사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