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세상 한 가운데 고도(孤島)로 존재하지 않는다
교회는 분명히 세상 안에 실재한다. 물론 여러 분야(정치, 경제, 문화, 교육...)와 구별되며 교회 그 고유한 사명과 특성을 갖고 있다. 교회는 세상 한 가운데 고도(孤島)로 존재하지 않는다. 하느님 백성이 세상 한 복판에서 구체적인 생활환경에 놓여 있으며,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 현대인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 받는 모든 사람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고뇌”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선의의 모든 이와 기꺼이 협력하고 대화함으로써 인류구원의 사명을 완수하려 한다.
그러나 많은 교우들과 성직자들이 교회를 세상 한 가운데 떠 있는 고도(孤島)로 여긴다. 단적인 예를 우리는 이른바 ‘정교분리’에 대한 오해에서 볼 수 있다. 대부분 이를 정치(the politics)와 종교(the religion)의 분리라고 이해하며, 때문에 교회가 세상일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정교분리’는 정부(the State)와 교회(the Church)라는 사회적 조직 사이의 구별을 의미한다. 이는 적극적으로는 신정체(神政體)의 극복을, 소극적으로는 교회와 정부가 독립적으로 운영된다는 것을 뜻한다.
정교분리를 정치와 종교의 분리로 오해하는 태도는 신앙인에게는 신앙과 생활의 철저한 분리 현상과 현대인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에 대한 무관심 현상으로 나타난다. 인간관과 세계관 그리고 가치관의 분열현상이라 부를만하다. 투표를 하는 행위, 상행위를 하는 행위, 교육 행위, 교회 생활에 참여하는 행위 따위는 모두 한 인간이 수행하는 활동이다. 이런 다양한 행위의 배경에는 인간관과 세계관과 가치관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스도 교회는 인간을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이웃과 관계, 하느님과의 관계, 그리고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을 이해한다. 그리스도교는 세상을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무대이며, 사랑과 정의, 자유와 평화 같은 인류 보편적 가치의 실현되어야 할 현장으로 가르친다. 때문에 투표를 하든, 상거래를 하든, 교육을 하든, 교회 생활에 참여하든, 그 모든 활동은 그리스도인의 이 인간관, 세계관, 그리고 가치관을 실현하는 구체 행위들이다. 신앙과 생활은 분리될 수 없으며, 세상일에 무관심할 수 없는 이유다.
그럼에도 인간의 존엄성 증진과 공동선 실현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활동을 세상일에 대한 불필요한(쓸데없는) 개입으로 치부하고 비판하는 목소리를 여기저기서 듣는다. 사제가 교리나 강론을 통해,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사회현상을 놓고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으로 해석하는 것을 두고도 ‘정치적 발언’ 쯤으로 치부하고 거북해 한다. 우리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경제 정책이 ‘재화의 보편적 사용의 목적’을 훼손하고 ‘재화의 사적 소유권’을 절대화한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경제는 경제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고 비판한다. 하느님께서 선물한 인간의 자유와 국가의 권력 사이의 긴장 관계를 살펴보며 오늘의 현실을 성찰하는 것도 친정부 혹은 반정부, 좌 혹은 우의 이데올로기로 해석해버린다.
교회는 세상에 존재하지만 항상 세상과 구별되는 대조사회
무엇보다도 우려할 만한 현상은 이 같은 비판과 더불어 빠짐없이 나오는 걱정(?)은 ‘쓸데없는’ 개입으로 교회공동체를 분열시킨다는 해석이다. 다양한 생각을 갖고 있는 이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는 공동체이므로 불편부당해야 하며 교회공동체를 분열시키는 행위는 삼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 역시 같은 태도를 보인다.
이런 태도(세상과의 분리와 세상일에 대한 무관심)는 교회의 본질을 벗어날 수 있다. 구약성경은 이스라엘 민족공동체가 당대 주변의 강력한 여러 제국과 구별되는 대조사회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발전시키는 과정을 밝히고 있다. 무력과 금력으로 그 영광과 위용을 드러내는 제국과는 달리, 이스라엘 공동체는 하느님과 맺은 계약에 충실한 백성으로서 이웃, 특히 고아와 과부와 이방인으로 대표되는 사회적 약자와의 연대 및 지지를 실현하는 공동체여야 함을 일관되게 가르친다.
신약성서는 예수의 제자공동체 역시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실천함으로써 당대의 유다이즘과 로마 제국과의 차별되어야 함을 가르친다. 교회는 세상에 존재하지만 항상 세상과 구별되는 대조사회여야 한다. 세상을 넘어서는 교회란 초월적 실재로서의 교회(종말론적 실재로서의 교회)이긴 하지만 동시에 지금 여기의 ‘대조사회로서의 교회’를 의미한다.
‘대조사회로서의 교회’는 항상 긴장 속에 놓여 있다. 이 긴장은 현실이 불완전하며, 항상 변화 발전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 긴장은 불편함을 수반하지만 이 불편함은 반드시 걸어가야 할 과정이다.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음과 같다. 교회 전례력의 대림시기와 사순시기는 이를 분명하게 기념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불편함을 외면하려고 한다. 불편함 대신에 ‘평화’를 찾는다. ‘평화’라고 한 것은 그 ‘평화’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평화와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사랑과 정의의 열매로서의 평화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정의를 결정적으로 드러낸 사건은 십자가 죽음이다. 철저한 자기 비움과 버림의 절정으로서의 십자가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완전한 실현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불의에 대한 정의의 승리를 드러내는 사건이다. 폭력에 맞서는 비폭력 평화주의의 완전한 실현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신앙은 고통스러운 사랑과 정의를 실현하도록 우리를 초대하며, 이 초대는 당연히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불편함을 외면하고 싶어 한다. (십자가 죽음을 외면하고 영광의 부활에만 시선을 둔)신앙생활은 여러 가지 여가 활동 가운데 하나 정도로 전락한다.
박동호 신부(서울 신정동본당,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지난 12월 9일 수원 권선동 수원대리구청에서 ‘교회,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라는 주제로 ‘사회교리주간 토론회’가 열렸다. 이날 발제를 맡은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는 '교회의 사회참여에 대한 성찰'이라는 주제로 교회의 대형화, 중산층화, 세속주의화 등을 다루면서 교회의 정체성을 세상 안에서 찾아가는 길을 모색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서는 여기서 제기된 문제의식을 독자들과 공유하려고 한다. 싣는 차례는 다음과 같다. -편집자
1. 200 주년 사목의안 - 교회의 대형화 2. 200 주년 사목의안 - 교회의 중산층화 3. 200 주년 사목의안 - 교회의 세속주의화 4. 성경의 사유화(私有化) 5. 신앙생활의 개인주의화 6. 세상 안의 교회, 세상을 초월한 교회 - ‘지금 여기’ 대조사회로서의 교회 7. 여가활동으로서의 신앙 8. 외면하는 사회교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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