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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피낭 4 - 꼴리우흐 해변을 구경하고 기차로 페르피낭에 돌아오다!
2026년 5월 13일 프랑스 페르피낭에 도착해 다시 기차로 꼴리우흐 Collioure 에 내려서 골목길을
걸어 예쁜 인테리어를 한 선물가게와 옷집이며 카페와 레스토랑들을 구경하며 해변에
가니, 긴 모래사장이 있으며...... 교회를 지나 방파제 끝에는 등대 Collioure Lighthouse 가 보입니다.
꼴리우흐 Collioure 는 지중해에 매력적인 마을로 중세 콜리우르 왕립 성은 바닷가에 있고
해안선의 경치가 예쁘니..... 17세기 노트르담 데 장즈 교회는 등대 역할을
했던 종탑이 있고 생 엘름 요새 Port Saint Elme 는 1552년에 지어진 별 모양의 성입니다.
해변에 성채는 왕궁 Royal Castle of Collioure 으로 중세시대 북아프리카 튀니지와 알제리 베르베르인
이슬람 해적들이 이탈리아와 남 프랑스에 스페인 연안을 약탈하고 다니던지라 방어를 위한 시설이니
해변에 있는 레스토랑에 들어가 점심을 먹고는 페르피낭으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골목길로 접어드는데.....
생 엘름 요새 Fort Elme 는 지금은 일반에게 공개되지는 않지만 언덕에 올라 바라 보는
마을의 전망은 훌륭히고 정상에서 반대편 해안도 볼수 있으며....길 오른쪽에 있는
방앗간이 볼만하다고 하며 길이 바위가 많고 가파르기 때문에 편한 운동화를 신어야 합니다.
해안에 거대한 성채는 튀니지와 알제리 등지에 거주하는 이슬람 해적들의 끊임 없는 습격 때문인데....
프랑스는 독일 카를 5세에 대항하기 위해 적인 이슬람 오스만과 동맹을 맺으니, 해적으로 오스만
해군 사령관이 함대를 이끌고 지중해 이탈리아 해안을 약탈하면서 프랑스 마르세유에 친선 입항합니다.
프랑수아왕의 대신들이 항구에 마중을 나왔는데 오스만 함대 선창에는 기독교도 노예들인 노잡이와 오는중에
해적질로 사로잡힌 기독교인들이 갇혀있었으니.... 프랑스는 왜 교황청을 비롯한 유럽인들의 거센
비난과 경멸을 무시하면서 기독교 세계의 철천지 원수인 이교도 이슬람 오스만 투크크와 동맹국이 되었을까요?
오스트리아 카를 5세는 신성로마 황제이자 결혼으로 네델란드와 스페인에 이탈리아 북부 및 남부와 신대륙을
지배하는등 유럽 절반을 장악했는데... 프랑스는 이탈리아 북부를 차지하기 위해 1525년 프랑수아 2세가
3만으로 밀라노를 점령했으나 파비아 전투에서 패해 스페인군에 포로가 되어 마드리드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프랑스의 프랑수아왕은 아들 둘을 자기 대신에 인질로 마드리드 감옥에 보내고 풀려난
이후 1536년 밀라노 영주 스포르차 공작이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죽자.....
바로 군대를 제노바로 진격시키니 카를 5세도 독일군을 토리노 까지 남하시키게 됩니다.
프랑수아왕은 기독교의 적인 이슬람 오스만 투르크와 동맹을 맺는데 국제사회에 "적의 적은 우군" 이라!
북이탈리아에서 프랑스와 독일(스페인) 양군이 대치하는 동안 해적인 오스만제국 해군이 스페인령
남이탈리아를 공격하면 독일군이 남하할때, 오스만군이 오스트리아 수도 빈을 공격하기로 한 것입니다.
프랑스는 훗날에도 저러한 이중적인 행태를 보였으니.... 그후 1618년부터 1648년 까지 독일에서
벌어진 30년 기독교 종교전쟁에서 가톨릭인 프랑스는 국내에서는 개신교도 위그노를
사탄의 자식이라고 죽이면서도, 독일 개신교도가 패하면 독일 황제의 세력이 커질 것을 염려합니다.
독일 개신교 제후들을 지원하러 독일에 상륙한 개신교 덴마크 왕과 스웨덴 왕의 지원군이 독일에서 구교도
오스트리아군에 패하자, 프랑스왕 루이 14세는 프랑스군을 보내 독일 개신교도를 도와 오스트리아
가톨릭군을 격파하고 독일의 종교 통일을 방해하게 되는 것이니..... 신앙심 보다는 "국익이 우선" 이라!!!
개인들의 일상에서는 종교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일수도 있고 또 중세에는 로마
교황청이 유럽을 사실상 지배하다시피 했지만..... 르네상스 이후 공교의 환상이
무느지니, 이제 왕국들은 그까짓 종교 보다는 국익을 훨씬 중요시하게 된 것입니다.
앙리 마티스 광장은 갤러리와 문화를 자랑하는 콜리우르의 예술적 정신을 포착한 곳이니 마티스,
드랭, 마이욜등 예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는데, 90년대 초부터 격년으로 열리는 콜리우르상
수상자들은 지역 스튜디오에서 예술을 창작하고 박물관 컬렉션에 작품을 기여하도록 초대됩니다.
천사성당, 즉 노트르담 데 장주로 알려진 교회는 콜리우르의 해변에 위치한 그림같은 가톨릭 성당이니,
17세기에 지어진 교회는 원형 종탑을 특징으로, 수많은 그림과 사진에 담겨 있으며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고 한때 등대 역할을 했는데, 이후 마티스와 피카소와 같은 유명한 예술가들을 끌어들였습니다.
마델록 타워는 1285년에 지어진 중세 감시탑으로, 언덕과 지중해의 멋진 전망을 제공하는데
남서부 피레네-오리엔탈 지역의 일부로 마사네 타워와 울트레성과 같은
명소도 있으니 그림 같은 경치로 유명하며 북쪽 구레유르 협곡 하이킹도 유명하다고 합니다.
꼴리우흐 기차역 Gare de SNCF Collioure 에 도착해 이제 라울 뒤피 거리로 가려는데 너무 피곤해
걷기가 힘든지라...... 택시를 타려고 하지만 아무리 둘러 보아도 보이지가 않으니 난감합니다.
라울 뒤피 거리 (Rue Raoul Dufy) 는 예술적 역사로 가득찬 활기찬 거리로, 마티스, 피카소에 뒤피
같은 유명한 예술가들이 지중해의 빛과 생생한 색채에서 영감을 얻었으며, 호텔 데 템플리에르 바
에서 창의적 인물들이 모여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논의하며 예술 작품을 음료와 교환하던 장소였답니다.
거리에 이름을 제공한 라울 뒤피 ( Raoul Dufy, 1877년 ~ 1953년) 는 프랑스의 화가로
회화, 소묘, 판화, 도예, 조각, 벽화, 서적 삽화, 태피스트리, 패션 디자인,
연극 무대 장식, 가구 장식, 공공 건물 장식 등 방대한 영역에 걸쳐 수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인상파 드가를 생각하게 하는 그림을 약간 어두운 색조로 그렸는데 마티스의 작품 《호사· 정밀· 쾌락》
을 보고는...... "이 그림을 보고 나는 그린다고 하는 참다운 의미를 파악할수 있었다. 정말 놀라운
발명이라 할 이 그림을 바라보고 있으면 인상주의적인 리얼리즘의 매력은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린다."
포비즘의 운동에 참가한 후부터 그는 자랑으로 여긴 속필 (速筆) 을 유감없이 구사하여
삶의 기쁨을 다채롭게 표현하는 화가가 되었으며, 보트 경주, 수욕장 풍경, 길거리
축제 등 환희의 소리가 울리는 장소와 장면은 그가 애호하는 모티브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레옹 보나의 작업실에서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화가의 그림에 흥미를 갖게 되었으니, 초기는 클로드
모네 (Claude Monet) 와 외젠 부댕 (Eugene Louis Boudin) 의 회화에 가까운 경향을 보였는데
야수파의 양식에서 영향을 받은후 강렬한 색채와 두꺼운 검은 윤곽선을 특징으로 하는 회화를 제작했습니다.
뒤피의 그림 소재는 다양하니 여성 누드, 목욕하는 사람들, 연회, 뱃놀이, 경마장, 요트 경기,
서커스, 투우, 오케스트라, 산책길의 풍경, 해변, 창이 열린 실내등 쉽게 접할수 있는 것을
간결하면서도 리드미컬한 양식으로 작품에 담아 삶의 기쁨과 평화를 일깨워 주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택시를 타지 못해 저 거리를 가지는 못하고 꼴리우흐 Gare de Collioure 역에서
14시 38분 로컬 기차를 타고 북쪽으로 달려서 15시 01분 페르피낭역에
도착해서는 내일 오랑주로 가기 위해 고속열차인 아베 좌석을 예약하러 매표소로 찾아갑니다.
우리는 5일 짜리 유레일 모바일 셀렉트 패스가 있는지라 내일 페르피낭에서 멀리 프랑스의 오랑주로 가는
기차 일정에서 2번과 3번 기차는 보통열차라 그냥 타도 되지만, 1번 고속 기차는 예약을 해야 합니다.
1. Perpignan ⇒ Nimes Mai, 14. 09 : 51 am AVI 9737
2. Nimes ⇒ Avignon Mai, 14. 13 : 49 pm TER 76414
3. Avignon ⇒ Orange Mai, 14. 15 : 08 pm TER 86568
프랑스어 : Nous avons l'Eurosystème.
Je voudrais réserver une place dans un train.
Perpignan ⇒ Nimes Mai, 14. 09 : 51 am AVI 9737
deux ( 2 Persons ) Class 2, € 12 × 2 = € 24
그런데 매표소 창구 앞에 역무원 2명이 가로막고 서서는 기차표를 구입하러 가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확인하고 있으니.... 다가 가서 위의 표를 보이며 우린
유레일 패스가 있는데 페르피낭에서 님 가는 고속열차 좌석을 예약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직원은 단호하게 NON (NO)! 이라고 말하는데.... 그러면서 창구로 다가갈수 없다고 말하기에
아? 이거 또 늘 하는 프랑스 철도 SNCF 노조에서 스트라이크가 일어났나 싶어 그 이유를 묻습니다.
그러자 하는 말이 저 AVI 9737 기차는 스페인 기차이므로 여기 프랑스에서는 예약이 불가능
하니 스페인 땅인 지로나로 되돌아 가서 예약을 하거나 아니면 온라인으로 예약을
하라기에.... 그럼 여기서 프랑스 기차인 떼제베를 타면 가능하지 싶으면서도 돌아섭니다.
사실 내일 3차례 기차를 타야 하고 또 오랑주에서 돌아올 때도 서너번은 타야 하니..... 기차를 타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는게 부담스러운데다가, 또 오늘 오후에 페르피낭을 다 보기도 힘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페인의 오래된 고도 지로나 여행은 오랑주에서 바르셀로나를 거쳐
스페인 사라고사로 가는 길에 잠깐 보기 때문에.... 무거운 배낭을 멘체
그것도 단 1시간 반에 거쳐야 하는게 마음에 걸렸던지라 그만 쿨하게 포기하기로 합니다.
휴대폰 레일플래너 앱 My Trip (나의 일정) 에서 오랑주로 가는 6차례 기차 일정을 모두 삭제한 다음에
다시 내일 페르피낭에서 지로나 가는 일정과 모레 지로나에서 바르셀로나로 가는 일정을
다시 검색해 추가한 다음 활성화를 한후 My Pass 에서 Show Ticket 를 클릭해 QR 코드를 만듭니다.
그러고는 부킹닷컴에 들어가 오랑주 호텔 예약을 취소하고는 다시 지로나를 검색하니 호텔 요금이
너무 비싸서 놀라는데.... 오랫동안 검색해서 기차역에서 구시가지로 가는 도중에
있는 호텔을 검색하는데 화장실이 공용이라고 되어 있으니 게스트 하우스 같은 형식인가 봅니다?
우리 호텔 Hotel urban by balladins Perpignan : 4 Avenue Du Général De Gaulle
에서 아침에 맡김 배낭을 찾아 방에 들어가는데.... 여긴 가족이 경영하니 24시간
프런트 데스크에 트윈룸 55유로이며, 아침 8 유로는 따로 신청해야 하는지라 추가합니다.
페르피낭역 Perpignan Station 이 50m 이고 체크인은 다른 호텔 보다 빠른 2시에, 체크아웃은
11시 30분이며, 이틀 전 까지는 취소 가능하고 1박 1인 기준 € 1.70 의 도시세를 지불해야 합니다.
시내는 페르피낭역 Gare SNCF 에서 1번이나 4번 Bus 를 타고 아르고 Arago 정류소에 내려 7번
버스를 바꾸어 타고 Majorque 정류소에 도착해 마조르크(마요르크) 왕궁 Palais des Rois de
Majorque 을 보는 것이었지만 페르피낭은 내일 둘러보기로 하고 오늘은 사전 탐색이나 하려고 합니다.
호텔에 체크인을 한 다음에 샤워만 하고는 나와 구글 지도를 보고 A4 용지에 손으로 그려온
지도를 들고 나서니..... 페르피낭역에서 호텔 앞을 지나는 대로인 죄네할 드롤르가
Avenue Du General de Gaulle 가를 걸어서 가다가, 큰 대로를 만나 우회전을 합니다.
조금 걸어가 다시 좌회전을 해서 운하를 따라 올라가는데.... 저만치 성문인 카스티예문
Le Castillet 이 보이는 곳 까지 가서 운하를 구경하다가 동아일보
이진영 논설위원이 횡설수설란에 쓴 사후 90년만에 별 단 드레퓌스 라는 글이 떠오릅니다.
에밀 졸라는 1898년 신문 ‘로로르’ 에 프랑스 현대사 물줄기를 바꿔놓을 글을 기고했다. 대통령에게 보내는 글은
‘나는 고발한다’. 쉬쉬하던 ‘드레퓌스 간첩사건’ 이 조작됐고, 가담한 이들을 고발하니 나를 신문해도 좋다는
내용이니 졸라는 군법회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사건은 전 세계가 주목하는 스캔들이 됐다.
드레퓌스 사건은 1894년 유대인 알프레드 드레퓌스 육군 대위가 군사기밀을 독일에 팔아넘긴 혐의로 체포되며
시작됐다. 독불전쟁에서 패배후 희생양을 찾던 군부가 빼앗긴 알자스 유대인을 반유대주의 분위기에
편승해 증거도 없이 스파이로 몰고간 것. 드레퓌스는 종신형으로 ‘악마의 섬’ 에 유배됐다. 이후 진범이
잡혔는데도 군부가 은폐를 위해, 진범을 찾아낸 조르주 피카르 중령을 좌천시키고 진범을 풀어주자 게재됐다.
거대한 국가권력에 맞서 개인의 무고함을 주장하기란 쉽지 않은 일. 드레퓌스 사건 당시 프랑스는 패전후
민족주의와 유대인 차별로 들끓었다. 프랑스인은 가톨릭 신자였고 로마 가톨릭교회도 드레퓌스 재심에
반대했다. 드레퓌스 무죄를 주장했던 이는 소수 지성인과 양심적 군인이었다. 진범을 찾아낸 피카르
중령은 “무엇때문에 유대인을 위해 애를 쓰느냐” 는 상사의 질책에 답했다. “드레퓌스는 죄가 없으니까요”
세계언론이 주목하면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수 없게 됐다. 드레퓌스는 1906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중령으로 제대했고, 프랑스는 그에게 최고 영예의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했다.
이후 군부를 개혁하고 공화정을 안착시켰으며 정교분리인 ‘라이시테’ 원칙을 수립했다.
군부 편에서 드레퓌스 재심을 거부했던 대통령은 1899년 엘리제궁에서 유부녀와 밀애중에 숨졌다.
프랑스 하원이 90년전 작고한 드레퓌스 중령을 준장으로 추서하는 법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하원은 “반유대주의는 과거의 일이 아니다.
공화국은 차별에 맞서 경계심을 유지하고 단호함을 보여야 한다” 고 밝혔다.
세계 곳곳에서 차별과 증오가 마녀사냥에 나서고 불의한 권력이 개인의 인권을 유린할때마다 131년
전의 드레퓌스 사건과 진실의 편에 섰던 ‘나는 고발한다’ 가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소환된다.
그러고는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 오다가 Casino (카지노?) 라고 적힌 작은 슈퍼로 들어가
캔맥주를 사서 돌아와 기분좋게 마시면서 고단했던 하루 피로를 풀고는 잠이 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