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있는 곳에 신(神)이 있다.
( Where there is love, there is the god )
- 저자: 레오 톨스토이
【마틴】은 지하(地下) 방 하나를 얻어 살림방을 겸하여 작업장으로 쓰고 있는 구두 수선공이다.
단 하나의 창문을 통하여 거리를 내다보는데 시선(視線)은 언제나 행인(行人)들이 신고 있는 신발에만 관심을 쏟고 있었다.
착하고 성실한 그였지만 인생 여정(旅程)은 결코 순탄(順坦)하지 않았다.
아내는 겨우 세 살난 아들 하나를 남겨놓고 하늘나라로 돌아갔다.
점원(店員)으로 있었기에 세 살배기 아들을 시골에 있는 누이 집으로 보낼 까도 생각했지만 낯선 가족들 틈에서 어린 아들이 겪을 외로움을 생각하니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아들과 살기 위하여 독립하였다.
세월이 흘러 아들이 철들 나이가 들음에 그 얼마나 마음의 의지(意志)가 되었는데 그만 아들이 일주일간 고열(高熱)에 신음 신음하더니 제 엄마를 따라 저 세상으로 떠났다.
아들을 묻고 돌아와 외로움 속에서 마틴은 하느님을 비난(非難)하면서 절망(絶望)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대체 하느님은 자비심(慈悲心)이 있는 분일까?
늙은 자기를 남겨두고 한창 자랄 아들을 챙겨갈 이유가 무엇인가?
그 후 마틴은 예배당(禮拜堂)에 나가지 않았다.
그리던 어느 날 마틴의 고향마을 사람이자 지난 8년 동안 순례자(巡禮者) 노릇을 한 분이 귀향길에 마틴을 방문하게 되었다. 마틴은 그 순례자를 만난 자리에서 닫혔던 마음의 문을 열고 자기의 슬픔과 절망(絶望)을 하소연하였다.
「저는 더 이상 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제가 하느님께 청하는 건 빨리 죽게 해 달라는 것뿐이에요. 이제 저는 이 세상이 어떤 희망도 없으니까요.」
그의 넋두리를 듣고는 순례자는 하느님의 판단(判斷)과 선정(選定)은 가장 완벽(完璧)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를 불평(不評)하고 비난(非難)해서는 안 된다고 타일렀다..
「그럼 사람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합니까?」
순례자는 하느님을 위해 살려고 마음을 먹으면 더 이상 슬픔도 절망도 없다고 하면서 복음서(福音書)를 읽기를 권(勸)했다.
무엇인지 가슴에 닿는바가 있어 그 날부터 마틴은 복음서(福音書)를 사서 읽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건성이었으나 차츰 그 깊이가 더하여 이제는 하느님이 자신에게 부탁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고, 그러자 무겁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면서 지난날의 비탄(悲嘆)도 차츰 사라졌다.
술에 취하여 세상을 욕(辱)하고 왁자지껄 소리지르던 거칠은 생활은 사라졌고 평화와 기쁨이 충만(充滿)한 기도(祈禱)의 생활로 변했다.
어느 날 펼친 복음서에는 「실행(實行)이 없는 믿음은 모래 위에 자기 집을 짓는 어리석은 짓 - 마태오 7장」이라고 나무라는 말씀이 쓰여 있었다. 마틴은 과연 자기의 믿음은 반석(磐石)위에 있는가를 골돌히 반성하였다
이어 복음서에 「죄(罪) 많은 여자를 용서하시는- 」쪽이 나왔다.
그 고을에 죄인(罪人)인 여자가 하나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왔다. 그 여자는 향유(香油)가 든 옥합(玉盒)을 들고서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香油)를 부어 발랐다.
그 장면은 읽은 마틴은 깊은 성찰(省察)과 통회(痛悔)를 하였다. 그동안 그는 손님들이 와도 별로 성심성의를 다하여 받든 적이 없었던 것을 깨달은 것이다.
자기 자신의 안일(安逸)을 먼저 생각했지 저【죄(罪) 많은 여인】과 같이 손님을 눈물로 발을 씻겨드리는 정성은 상상도 않 했던 자신을 꾸짖은 것이다.
그 날 밤 깜박 잠이 들었는데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아무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런데 어디선가 뚜렷하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틴, 마틴 ! 내가 갈 것이니 내일 거리를 내다보거라.」
정신을 차리고 눈을 비볐으나 그 소리가 생시에 들었는지 꿈속에서 들었는지 아니 환청(幻聽)인지 도저히 분간할 수가 없었다.
다음날 마틴은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났고, 기도문을 외운 뒤 불을 피워 양배추 수프와 메밀 죽을 준비했다. 그런 다음 찻주전자를 얹고 작업 치마를 두른 뒤 창가에 앉아 일을 시작했다. 어제 저녁 일이 꿈인 것도 같았고, 실제로 그 목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지하실(地下室) 창문을 통해 왕래(往來)하는 사람들의 구두를 보노라면 대번 그가 누구인가를 그는 알아낼 수 있었다. 다 닳은 가죽으로 덧댄 펠트 장화를 신은 사람은 보나마나 늙은 청소부 스테파니치가 분명하였다. 한참 바느질을 하고 나서 창문을 내다보니 스테파니치는 피로와 추위에 곤죽이 되어 쉬고 있었다.
「들어오라고 해서 차를 마시게 하는 건 어떨까? 마침 찻주전자도 끓고 있고.」
마틴이 창문을 두드려서 스테파니치에게 들어오라고 손짓하니 고마움을 표시하면서 쭈빗쭈빗 들어왔다. 호호 불면서 허겁지겁 뜨거운 차로 몸을 녹이는 것을 보고는 다시 잔을 가득 채워 권했다.
「더 드세요. 신의 가호(加護)가 있기를! 저는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계실 때 아무도 멸시(蔑視)하지 않으셨고, 평범한 사람들과 어울리셨던 것을 읽었습니다. 그 분은 "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을 모두의 종이 되게 하여라 . 가난하고 비천(卑賤)하고 온유(溫柔)하고 자비(慈悲)로운 사람에게 복(福)이 있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스테파니치는 차를 마시는 것도 잊어버렸다.
그는 쉽게 감동(感動)을 받고 눈물을 흘리는 노인이었고, 의자에 앉아 마틴의 말을 들을 때 눈물이 그의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마틴, 고맙습니다. 당신은 내게 영혼(靈魂)과 육신(肉身) 모두를 위한 양식(糧食)과 위로(慰勞)를 주었어요.」
스테파니치가 떠나자 마틴은 구두 뒤쪽의 이음매를 꿰매면서 계속 창 밖을 내다보았다.
초라한 행색(行色)의 낯선 여인이 아기를 팔에 안고 마틴의 창밖에 기대섰다.
여자는 벽 가까이 바람을 등지고 서서 아기를 따뜻하게 감싸려고 했지만 아기를 감쌀 만한 변변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여자는 여름옷만 걸치고 있었는데 그것조차 다 날고 해져 있었다. 마틴은 창문을 통해 아기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부인. 부인! 추운 날씨에 아기를 안고 왜 그런 곳에 서 계십니까? 안으로 들어오세요. 따뜻한 곳에서 아기를 달래는 게 더 낫지요」
여인이 들어오자
「거기 난로 가까이 앉아요. 몸을 녹이고 아기에게 젖을 먹이세요.」
「젖이 안 나와요. 제가 새벽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거든요.」
마틴은 큰그릇과 빵을 꺼냈다. 그릇에 양배추 수프를 담아서 데우고 죽 냄비를 꺼냈다.
우선 뜨거운 수프와 빵을 내왔다.
「앉아서 먹어요. 아기는 내가 돌볼 테니. 나도 아이들을 키워 봤기 때문에 아기 다루는 법을 알지요.」
여자는 성호(聖號)를 그은 후 탁자에 앉아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여자는 취직(就職)자리를 구해 여기 벽지(僻地)까지 왔는데 그 취직 자리가 아직 비어있지 않아 거리로 내몰리게 된 딱한 처지였다. 마틴은 벽에 걸려 있는 것들 가운데 낡은 외투를 갖고 여자에게 내밀었다.
「받아요. 닳고 해지긴 했어도 아기를 감싸는 데 적당할 거예요.」
눈물의 감사를 표시하면서 여자는 떠났다.
잠시 후에 사과 행상인(行商人) 노파가 창문 앞에 서 있는데 사과 바구니에는 다 팔고 몇 개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등에는 나무토막을 주워 모아 담은 자루를 지고 있었는데 그 무게에 어깨가 짓눌리는 것이다. 그 때 누더기 모자를 쓴 사내아이가 달려와서 바구니에서 사과 한 개를 슬쩍 집어넣고 달아나려는 참에 노파의 완강(頑强)한 팔에 붙잡혔다. 노파는 사정없이 아이의 머리채를 틀어 잡고 흔들면서 경관에게 넘기겠다고 위협까지 했다.
마틴은 사과 값을 대신 지불하고 용서(容恕)를 구했다.
완강히 거부하는 노파에게 성서(聖書)에서 읽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떤 주인의 종의 많은 빚을 탕감(蕩減)해 주었는데, 그 종이 밖에 나가서 그에게 빚진 사람의 멱살을 잡더라는 이야기였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용서(容恕)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용서받지 못할 테니까요.」
노파가 짐을 챙기자 사내아이가 나무토막이 들어있는 자루를 선뜻 지고 나섰다.
「할머니 제가 들어드릴게요. 저도 그쪽으로 가거든요.」
둘이 멀리 사라지자 마틴은 들어와 어둑해짐에 등불을 켜고 앉아 구두 한 짝의 마무리 손질을 끝내고 방안을 정리하였다. 모든 일을 끝내고 의자에 앉아 복음서를 꺼냈다.
마틴이 책을 펼쳤을 때 문득 잊고 있었던 어제 밤의 일이 떠올랐다.
그 때 누군가가 뒤에서 걷고 있는 듯한 발소리가 들려와 돌아다보니 어두운 구석에 사람들이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틴, 마틴, 나를 모르느냐?」
「누구십니까?」
마틴이 중얼거렸다.
「나였느니라.」목소리가 말했다.
그리고 어두운 구석에서 스테파니치가 걸어 나왔다.
스테파니치는 미소를 지어 보였고, 구름처럼 사라지더니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나였느니라.」목소리가 다시 말했다.
그리고 어두운 구석에서 아기를 팔에 안고 있는 여자가 걸어 나왔다.
여자는 미소를 짓고 아기는 웃었으며, 역시 사라졌다.
「나였느니라.」목소리가 다시 한번 말했다.
그리고 노파와 사과를 든 소년이 걸어 나와 미소를 짓더니 또한 사라져 버렸다.
마틴의 영혼은 기쁨으로 차 올랐다.
마틴은 성호(聖號)를 긋고 안경을 쓴 뒤 복음서의 바로 펼쳐진 부분을 읽기 시작했다.
그는 목자(牧者)가 양(羊)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
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福)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病)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監獄)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 마태복음 25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