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할때 졸음이 오는이유 / 장봉운 목사
여러분은 기도할 때에 졸음이 와서 기도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망쳤던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육신이 피곤해서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아무런 기도도 못하고 잠만 자서 주님께 면목이
없었던 경험이 누구나 있는 것이 정상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이 감람산에서 주님과 함께 마지막
밤을 보내면서 기도할 때에 주님은 제자들과 거리를 하고 홀로 피 땀을 흘리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죽음을 맞을 준비를 하는 동안 제자들은 그날 하루 너무도 분주하고 사건이 많아서 육신이 참으로
피곤했기에 잠들고 말았습니다.
그날 밤의 상황을 마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 그들이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막 14:37~40)
이런 중대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육신의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고 졸았습니다.
주님이 깨웠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졸음이 쏟아져오면 만사가 다 귀찮은 것이 육신의 한계가
아닙니까? 제자들도 마찬가지여서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잠
이외에는 그 어느 것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육신의 피곤 때문에 기도를 할 수 없는 경우가 많고 이를 자주 반복하게 되면
기도의 맥이 끊겨 결국 기도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란 노동이기 때문에 의지적
으로 계속하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하고 그것이 습관이 되어 몸에 익숙하지 않으면 우리는 기도를
지속적으로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런 연유로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기도 없이 신앙생활을 합니다.
낮의 분주함은 우리의 육신을 피곤하게 하여 기도할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수
없을 정도의 분주함은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시험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듯
기도를 방해하는 졸음이 있는가 하면 이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졸음이 있습니다.
“사람이 침상에서 졸며 깊이 잠들 때에나 꿈에나 밤에 환상을 볼 때에 그가 사람의 귀를 여시고
경고로써 두렵게 하시니 이는 사람에게 그의 행실을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의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욥 33:15~17)
이 말씀에서 볼 때 사람이 졸 때나 잠들 때 꿈과 환상을 통해서 주님은 우리들에게 계시를 주시는
것입니다. 꿈과 환상의 목적이 대체로 우리의 행실을 바로잡고자 하는 데 있습니다. 꿈과 환상은
일반적으로 우리의 속사람의 문제를 자각하게 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설 수 있도록 성령
께서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음성을 듣는 차원 중에 특히 계시적인 단계에 들어갈 때 기도하는 사람이 자주 ‘비몽사몽’(trance)이라는 졸음과 같은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베드로는 욥바 성에서 기도할 때 이런
비몽사몽을 경험했습니다(행 11:5). 바울 역시 그런 경험이 있음을 고백하고 있는데,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저희는 네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행 22:17:18)
라고 적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을 때에도 그에게 깊은 잠이 임하였습니다.
“해 질 때에 아브람에게 깊은 잠이 임하고 큰 흑암과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창 15:12~14)
이와 같은 몇 가지 성경의 예에서 볼 때 하나님의 임재가 있고 계시가 주어지는 상황에서 우리는
졸음이나 깊은 잠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를 성경은 ‘비몽사몽’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영어로
이를 표현할 때 주로 사용하는 단어가 ‘trance’인데 그 뜻은 ‘황홀경’이라는 의미이지만 실신 상태
또는 혼수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강하면 우리는 이와 같은 혼수상태에 빠져 계시를
받게 됩니다. 꿈과 환상이라는 수단으로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밤에 잠들 때 깊은 잠이 그치고 얕은 잠으로 들어갈 때인 깨어나기 직전이
이런 혼수상태와 흡사한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 의학적으로는 눈까풀이 자주 깜빡거리는
단계라고 해서 ‘REM’(Rapid Eye Movement)상태라고 부릅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꿈을 통해서 어떤 정보를 주시는 까닭은 욥기에서 보듯이 자신을 교정하기 위한 것이지만 이런
단계를 넘어서면 하나님의 지시하심이 주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런 단계에 들어가면 그
사람은 자주 계시를 받게 됩니다. 중보기도의 직분이 주어지기 시작할 때 이런 현상을
경험하게 됩니다.
기도할 때 자주 졸음을 경험함으로써 기도를 망쳤다고 안타까워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그
졸음이 단순히 육신이 피곤해서 오는 졸음이 아닌 경우가 있습니다. 기도하려고 자리를 잡으면
시도 때도 없이 몇 분이 되지 않아 그만 졸음이 오면서 머리가 무거워지고 몸이 나른해져서 그
자리에 꼬꾸라지려고 하기에 의지적으로 졸음을 쫓으려고 하지만 어느 새 졸아버려 기도를
망쳤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육신이 졸려서 오는 졸음이 있고, 영이 약해서 기도할 때면 의당 졸음이 와서 기도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육신의 약함으로 인한 졸음과 성령의 임재로
인한 졸음과는 말로 설명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한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요즘 집회에서
성령이 강하게 임하는 때에 회중들이 쓰러지고 넘어져 잠든 사람처럼 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적어도 90년대 이전에는 이런 모습이 흔하지 않았습니다. 예전의 집회에서는 몇 사역자 외에는
이런 역사를 일으키지 못했었는데 근래에 대부분의 집회에서 쓰러지는 현상은 일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예전에는 성령이 임하면 사람들이 뜨거워서 뛰고 구르고 찬양하고
울기도 하였지만 쓰러지는 일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이 쓰러짐이 대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부는 성령의 임재가 없어도 어쩔 수 없이 쓰러져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전례가 없는 예언의 풍성함이 부어지는 시대에 들어와 있습니다. 꿈과 환상을
통해서 성령으로부터 직접 가르침과 교정을 받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언이
예배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이 시대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계시 또한 풍성해질 것입니다.
이 계시를 받는 주된 수단이 비몽사몽입니다. 다시 말하면 정신 줄을 놓는 상태에 빠질 때 계시가
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도할 때 자주 졸음이 와서 기도를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면 이는 단순한
졸음을 넘어서 성령의 임재에 의한 기름부음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경험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집회에서 인도자에 의해서 임재 속에 들어가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그것은 오히려 맛보기일 수
있으며 진정한 임재는 여러분이 골방에서 조용하게 기도에 몰입할 때 일어날 수 있습니다.
다시 베드로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면, 그는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갔고 그 때의 시간은
제 육시였습니다. 식사하기에는 다소 늦은 시간이어서 베드로는 시장했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일로 인해서 식사 준비가 늦어졌기에 그는 그 자투리 시간에 기도하려고 옥상에 올라갔고 그곳
에서 비몽사몽을 경험하였습니다.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가 짧은 시간에 졸음 속으로 빠져 들어갔고 이와 같은 놀라운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군더더기는 걸러내고 주요 골자만 기록하기에 베드로가 기도할 때 이런 졸음 현상을
얼마나 자주 경험했는지에 관해서는 침묵하고 있지만 그가 이런 계시를 받기에 이르기까지
그는 늘 기도에 힘썼고 그럴 때마다 자주 임재에 들곤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는 일은 어느 한 날 갑자기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우리
에게 있어서 많은 단계들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임재연습’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이 집회에서
쓰러지는 임재의 경험을 했지만 별 유익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저 힘이 빠지고 정신이 몽롱
해지고 설명하기 힘든 묘한 분위기 속으로 들어간 것은 분명하지만 그 이상은 없습니다.
이것이 임재로의 초대인 것입니다. 성령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는 경험이 쌓여 어느 날 주님이
필요할 때에 주님의 시간에 여러분은 하늘 문이 열리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하늘이 열리면서 그곳으로부터 한 그릇이 내려오는 환상을 보았듯이 여러분 역시 하늘이 열리는
영적 경험 속으로 들어갈 날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것이 졸음이라는
달갑게 여겨지지 않은 임재의 경험을 거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임하는 성령의 임재와 육신의 분주함과 게으름 때문에 생기는 생리적인 졸음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육신적인 졸음과 성령의 임재는 겉보기에는 같아 보이지만 여기
에는 분명한 구별점이 있습니다. 성령의 임재 속에서 겪는 졸음은 그 사람이 일상적으로 기도에
많은 시간을 들이고 하나님과 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려는 갈망과 실천이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작은 자투리 시간도 아까워 옥상으로 올라가 기도한 것 같은 주님에 대한 갈망이 남다른 것입니다
늘 기도에 힘쓰고 구별된 삶을 살고자 하는 노력이 따라주어야 합니다. 육신을 힘들게 하여 기도에
방해를 받는 일은 절제하고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합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에 힘씀으로써 기도
생활이 일상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꾸준한 기도를 해오는 가운데 어느 날부터 졸음이 오기
시작한다면 이는 성령의 임재로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임재가 일어난다고 해서 당장에 신묘한
영적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런 유익도 없는 것 같은 의미 없는 졸음을 반복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때에 꿈과
환상을 통해서 성령의 음성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계시가 임해서 새로운 일을 행하게 되기
도 하는 것입니다. 일상적인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서 기도 생활도 등한히 하는
사람은 기도하려고 하면 영이 아직 힘이 약해서 육신을 이기지 못하고 졸음이 오고 몸이 쑤시고
잡생각이 많이 나고 할 말도 생각나지 않아 기도에 몰입하지 못한다면 그건 단순히 생리적인
작용에 의한 졸음일 뿐입니다.
기도하려고 하면 졸음이 오고 기도를 멈추면 다시 정신이 말똥말똥해지는 것은 영의 지배를 거의
받지 못하고 육신에 매여 사는 삶을 살기 때문에 오는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입니다. 이는 마치
예배 전에는 활동적이던 사람이 예배만 시작하면 슬슬 졸기 시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졸음은 영이 약하고 육신에 매몰되어 사는 사람들에게 기도할 때면 맞닥뜨리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를 극복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으로 변화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