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연꽃 / 임보
탱자나무 울타리 속
과수원집
내 어렸을 적
앉은뱅이 가시내처럼
풀리지 않는
세상의 아픈 비밀
연못 위에 떠 있는
푸른 가시방석
* 가시연꽃은 둥근 잎을 물 위에 띄우고 물속에 숨어 산다.
가끔 자신의 잎을 뚫고 솟아오른 가시투성이의 꽃대 끝에
등대의 불빛 같은 작은 보라색 꽃을 무슨 비밀인 듯
수줍게 내보인다.
연밭에서 / 임보
1
수만 평의 연밭에 빼곡이 들앉은 수만 그루의 연들을 보고 있노라면,
광화문 네거리 맨땅 위에 주저앉아 붉은 띠를 머리에 동여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수만 명의 붉은 악마들이 떠오른다
붉은 악마에 맞선 푸른 승려 군단 같다
어디서 무슨 경기를 벌이고 있기에 뙤약볕에 나앉아
저리도 눈부신 축포를 터뜨리며 이리 야단법석이란 말인가
천상의 어느 연화세계에서 지금 신나는 축구경기라도 벌이는 모양이다
은하컵을 놓고 ‘전갈’과 ‘사자’가 한판 맞붙고 있는가?
대형 중계 스크린을 걸어 놓지 않아도 그들은 잘 보고 있는 듯,
하기야 솥뚜껑 같은 푸른 원형 안테나를 제각기 몇 개씩 매달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귀가 먹어 그들의 왁자지껄한 환호 소리를 들을 수 없지만
개구리 놈들은 연상 알아차리고 여기저기서 툼벙 점벙 난리들이다
2
연밭에서 수만 그루의 연들이 푸른 잎을 앞세우고 앉아 있는 걸 보면
방패 뒤에 숨어 포진을 하고 있는 중세의 병사들이 생각난다
무엇을 향해 저리 삼엄한 진을 치고 있단 말인가
빛의 화살들이 푸른 방패 위에 쏟아져 내린 걸 보노라면
천상의 어느 군병들과 힘을 겨루고 있는 것만 같다
진중에선 붉은 나팔들이 여기저기서 터지며 진군을 보채지만
한 발짝도 적진을 향해 돌진하는 놈은 없다
제트기처럼 날랜 제비들이 허공을 스치며 지나가고
몇 놈의 잠자리들이 헬리콥터 시늉을 하며 맴돌아도
무저항의 평화 군단은 미동도 없다
종일 빛의 화살을 날리다 지친 천상의 군병들도
어쩌지 못하고 마침내 노을 속에 붉게 묻히고 만다
- 임보 시집 <아내의 전성시대>
****************************************************
임보 시인의 최근 시집 <아내의 전성시대>에서 만난 연꽃
병사들이다. ‘연꽃’하면 으레 ‘염화시중의 미소’나 일찍이
송나라의 유학자인 주돈이(1017~1073)가 말한 ‘애련설’의
내용인 진흙에서 나왔어도 진흙에 물들지 않음과 ‘향원익청
(香遠益淸’)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그런데 시인은 정(靜)적인
공간인 연밭에서 “붉은 악마에 맞선 푸른 승려 군단”,
“방패 뒤에 숨어 포진을 하고 있는 중세의 병사들”이라는
동(動)적인 힘을 보아낸다. 고요하고 평화로웠던 연밭은
세력과 세력이 승부를 겨루는 각축의 장으로 돌변한다.
일상과 상투성을 벗어난 시인의 시각은 참으로 놀랄만한
새로운 풍경을 독자 앞에 펼쳐놓기 시작한다.
일종의 ‘데포르메’(Deformer)기법으로 객관적인 연꽃
묘사가 아닌 시인의 내면에 비쳐진 형상을 보여준다.
식물성인 연꽃에서 ‘붉은 악마의 함성’과 ‘축구경기’의 활기찬
움직임을 보아내는 시인의 눈이 경이롭기만 하다.
‘솥뚜껑 같은 푸른 원형 안테나’라는 그럴 듯한 표현에
절로 웃음을 머금게 된다. 둘째 연에서 연밭은 축구 경기장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삼엄한 전쟁터가 된다.
푸른 잎을 방패 삼아 빛의 화살들을 막아내고 있다.
‘무저항의 평화 군단’이라 방어만 하지 한 발짝도 공격을 하지
않는다니 연꽃의 청정함과도 잘 부합된다. 시인의 환상여행이
뜬구름처럼 떠도는 이야기가 아니라 연밭에 뿌리를 두고 있는
실제 상황임을 알려주는 이웃으로 개구리, 제비, 잠자리 등을
등장시켜 활기를 더해준다. 제비와 잠자리를 제트기와
헬리콥터로 표현한 시인의 재치와 해학이 빛의 화살처럼
눈부시게 읽는 이를 즐겁게 해준다.
마침내 노을 속에 붉게 묻히고 마는 저녁의 안식과 평화가
찾아오고 필자의 시야에도 한 폭의 연꽃 풍경화가 펼쳐졌다.
시인의 세밀한 관찰과 상상력은 생명의 환희로움을 점입가경의
풍경화로 완성해 간다. 연밭에서 축구 경기장이나 전쟁터라니
호기심의 발동으로 읽는 재미를 더해 준다. 살벌한 승부의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시인이 우화적이고 동화적인 소재와
표현으로 이야기 보따리를 술술 풀어놓아 독자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
시력 50년의 연륜과 언어를 절차탁마하는 내공이 쌓여
“시도 재미있는 글이어야 한다”는 시인의 지론대로 맺어진
결실이다. ‘사랑’이 깃든 시인의 풍자가 웃음을 통해 삶의 회한과
성찰을 끌어오기에 잠시나마 마음이 순화되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된다.
/ 주경림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