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연신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사람의 잘못 여섯 가지를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나, 남을 깎아내리면 자기가 올라간다고 착각함.
둘, 바꾸거나 고칠 수 없는 일로 걱정함.
셋, 어떤 일을, 자기가 이룰 수 없으니까 불가능한 일이라고 주장함.
넷, 대중의 편견을 생각 없이 따름.
다섯, 생각의 발전과 진보를 무시하여 독서하고 공부하는 습관을 들이지 아니함.
여섯, 다른 사람에게 자신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라고 강요함.
정말로 우리들은 이러한 잘못을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바로 나를 중심에 두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지요. 내가 중심에 있기에 그 무엇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며, 그래서 주님도 이 가운데 함께 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옛날, 바른 나라의 왕이 참된 나라 왕의 초대를 받아 놀라갔습니다. 참된 나라의 왕이 자기 나라 풍습에 따라서 다가와 뺨에 입을 맞추려 하자 바른 나라의 왕은 질겁했지요. 모르는 사람끼리 입술을 갖다 대는 것은 바른 나라에서는 불결한 행동으로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른 나라의 왕은 자신이 교육을 제대로 받은 신사중의 신사라는 사실을 증명할 생각으로 참된 나라 여왕에게 다가가 엉덩이를 슬슬 어루만졌습니다. 왜냐하면 이 행동이야말로 바른 나라에서는 “댁의 아내가 참으로 아름답고 건강하구려.”라는 칭찬이었거든요.
하지만 참된 나라의 왕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노발대발했지요. 왕은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선전 포고를 했고, 바른 나라와 참된 나라의 전쟁으로 숱한 사람들이 죽어갈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바로 다른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잘못으로 변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들도 이러한 잘못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주님이 아닌 내가 중심이 되어서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잘못을 또다시 반복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등불의 비유 말씀을 해주십니다. 등불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두는 것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 말은 곧 무엇을 의미할까요? 당연한 진리를 쫓으라는 것입니다. ‘나’를 중심에 세움으로 인해서 진리에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중심에 세워서 진리를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무엇을 중심에 두고 있었는지요? 이제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잘못들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요?
사람의 잘못 여섯 가지에서 벗어나도록 노력합시다.
스스로 결정 짓는 것
-구경국 신부-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많이 먹는다’는 속담처럼 자주 경험하거나 열심히
연습을 하여 숙달이 되면 저절로 잘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런데
숙달이 숙련을 창조하는 것은 학문이나 기술의 연마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희생, 봉사, 선행, 기도 등과 같은 사랑의 실천에 있어서도 역시
예외가 없습니다. 본당공동체 등에서 항상 봉사하는 사람들이 이 단체 저 단체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계속 뒷짐을 지고 구경만 하고 있는 것을
보면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봉사와 같은 사랑을 실천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그것으로써
하느님께 점점 더 가까이 가는 데에 반해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법조차 잊어버리게 되어 저절로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게
된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라는 오늘의 복음 말씀은 주고받는 것을
주님께서 능동적으로 주도하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계속 실천함으로써
사랑을 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는 사람은 더 많은 사랑을 받게 되고 사랑의 실천을
미루기만 하는 사람에게는 주님의 사랑이 저절로 유보되어진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하느님께로부터 더 많은 사랑과 은총을 받느냐
그렇지 못하냐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임의로 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결정 짓는 것입니다.
안면보시(顔面普施)
-김현숙 수녀-
등불! 빛은 밝음과 따뜻함 그리고 확산의 속성이 있다. 아무리 작은 빛이라도 스스로 퍼져 나간다. 이는 다른 사람을 비추기 위해서다.
지금은 옛 정취로 남아 있는 호롱불. 학창 시절 늦은 귀갓길, 인적이 드문 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올 때 우리 집 대문에서 비쳐오는 불빛만 보아도 긴장했던 다리의 힘이 확 풀리며 안도의 큰 숨을 쉬곤 했다. 그리도 밝게 빛나던 등불이 이젠 대낮에도 어느 사무실이나 켜져 있건만 밝음과 따뜻함을 쉽게 느낄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불빛이 내 시야와 가슴에 담아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빛의 강도가 아무리 높다 해도 안목이 더 높아지지 않고 인정이 메마른 탓일까? 스스로 누군가에게 빛을 밝혀주려는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일까?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줄 수 없는 가난한 사람도 없고, 또 아무것도 받을 것이 없는 부유한 사람도 없다고 했다. 다만 무언가 채워야 한다는 생각이 무언가 나누어 주려는 마음보다 앞서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을 뿐이다. 나눈다고 할 때 좋은 것, 나눌 만큼 풍요로운 것이 없다는 생각이 또 앞서기 때문이다.
언젠가 상담 워크숍에서 자신의 life story를 나눈 기억은 아직도 내 영혼을 흔든다. 한 자매님이 다른 사람을 위해 장기를 기증하듯이 자신의 상처를 나누겠다고 하면서 아픔과 수치로 점철된 자신의 깊은 생채기를 보여주었다. 자신의 아픈 과거와 현재를 우리에게 선물로 나눈 것이다. 나는 자매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예수님을 생각했다. 자매님을 통해 그 자리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아픔과 결핍을 서로를 위한 선물로 나누게 되었다.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간증(干證)이었다. 그리고 참으로 건강하다는 것은 내가 누군가에게 보시할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서로를 위하여 자신을 선물로 기꺼이 내놓는 것임을 배웠다. 보시 중에 으뜸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안면보시(웃는 얼굴)라고 했던가! 나의 아픔과 상처를 나눌 수 있다면 밝고 따뜻한 등불이 되지 않을까! 그래서 등불처럼 환하게 웃어보자. ●
양극화의 해법
-오상선신부-
자본주의 경제의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의 심화,
즉 양극화 문제이다.
부자는 더욱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이는 더욱더 가난한 이가 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한계이기도 하다
.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인류가 안고 있는 최대의 과제 중의 하나 일지도 모른다.
제도상의 보완을 통하여 각 나라마다 나름대로 노력은 하고 있지만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도 갈수록 심화되는 양극화 문제에 대한 해결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지만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다.
새정부에게 경제활성화를 기대하고는 있지만
경제활성화는 부익부빈익빈 현상을
더욱더 가속화시킬 위험이 있다는 점에서 걱정스럽기 짝이 없다.
그런데 나는 문득
양극화 문제는
바로 부익부 빈익빈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란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오늘 말씀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바로
부익부 빈익빈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경제적 측면에서의 부익부 빈익빈이 아니라
영적인 부익부 빈익빈을 말하는 것이다.
경제적 부익부 빈익빈 현상의 해결책은
영적인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숙고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나누면 나눌수록,
주면 줄수록 더욱더 풍요로워지는
영적인 부자됨의 신비는
경제적, 물질적 부익부 빈익빈 현상과는
정반대 현상이기 때문이다.
경제적 측면의 부익부 빈익빈은
서로 자기 것을 챙기려는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면
영적인 부익부 빈익빈은
서로 자기 것을 버리고 주려는 열망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나누면 나눌수록
영적으로는 더욱더 가진자가 되고
자기 것으로 챙기면 챙길수록
영적으로는 매마른 영혼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스승 예수님의 해법은
인류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이 얼마나 절묘한 해법인가!
우리 모든 크리스천들이
우리 사회의 양극화 현상을 문제시하고 아파하고 있다면
우리 스스로가
스승 예수의 영적인 부익부 빈익빈에 대한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실제로 영적인 풍요를 위한
나눔의 삶에 매진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 스스로가 이것을 하지 않고
정부가 무슨 답을 제시해 주길 바라고
부자가 회개하여 빈자에게 도움을 주길 바란다고
결코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주님은
<너희가 해 주어라!>고 하신다.
우리의 영적인 풍요의 삶은
인류가 안고 있는 부익부 빈익빈의 문제를
가장 잘 해결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답이리라.
오늘
나는 무엇을 주고, 나눔으로써
영적인 부자가 될 것인가?
받으려 하지말고,
나의 것으로 챙기려 하지 말고
오히려 주고, 나누고, 베품으로써
나의 영적인 풍요를 체험해 보자.
이를 체험하는 크리스천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우리 사회는 희망이 있고, 기쁨이 있는
그런 세상으로 한발자욱 더
나아가게 되지 않을까?
오늘 우리가 축일을 지내는
성 요한 보스코는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영적인 부자가 아니었겠는가
등불은 등경 위에 둔다
-조욱현신부-
등불의 존재이유는 무엇인가? 등불은 어두운 곳에서 밝혀주는데 그 존재이유가
있는 것이다. 대낮에 등불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밤에 필요한 것이다.
하느님의 진리가 바로 감추어두려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에게 드러내 보이고
증거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진리를 전하려할 때에 때로는 박해를 당하기도 하고
어려움을 당할 수 있다.
진리의 반대 세력이 그것을 막으려고 온갖 술수를 다 부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진리는 드러나게 되고,
진리가 옳다는 사실이 밝혀져 승리를 가져다 줄 것이다.
감추어 둔 것이 드러나게 마련이라는 말씀이 우리의 행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그것이 지금은 당장 드러나지 않고 사람들을 속일 수 있다고
하더라도 마음은 항상 불안한 상태에서 살게 된다.
그렇게 순간을 피하는 것이라도 하느님 앞에 감추어진 비밀로 있을 수는 없다는 것
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부족하고 나약하여 실수를 하고 죄를 짓게된다 하더라도
결정적으로 등불을 외면하면,
즉 진리를 외면하게 되면 우리는 어두움 속에서 헤매게 된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진리를 받은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하느님의 말씀을 감추거나
가리지 말고 외면하지 말아야 하겠다.
오히려 다른 이들을 비추는 등불과 같이 진리의 말씀을 사는 생활을,
다른 이들을 비추어 증거하는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빛으로서 증거의 삶을 산다는 것은 그리 대단한 일을 통해서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주님의 복음 한 말씀을 가지고도 빛을 낼 수 있다,
아무리 짙은 어두움도 성냥불빛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성냥불빛에 어두움은 서서히 걷혀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행이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세상의 어두움을 물러가게
하는데 충분하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이 때 우리는 작은 것이라도 성실하게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 앞에 이러한 겸손된 삶을 청하자.
너희가 되어 주는 만큼 보태어 받을 것이다
-야고보아저씨-
사람의 뇌의 크기를 재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뇌가 크면 사람의 머리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사람의 뇌의 무게는 통계학적으로 대략 1,200g - 1,500g정도 한다고 합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그보다 훨씬 큰 사람도 있고, 가벼운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문헌으로 무게를 재서 기록에 남긴 사람은 러시아의 문호 투르게네프가 2,012g 이라고 하고, 독일의 철학자인 칸트는 1,650 그램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걸 어찌 알겠습니까? 죽은 다음에 해부해서 그 무게를 달아보고 그렇게 보고 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뇌의 무게를 가지고 머리가 좋고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코끼리의 뇌는 대략 4,000그램이나 나간다고 하고 향유고래는 대략 9,000그램이나 나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코끼리의 30분의 일밖에 되지 않는데 코끼리 머리보다 더 나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아기들은 태어나자마자 400그램 정도 나간다고 하지만 성인이 되었을 때는 남성들이 여성들보다 150그램 정도 더 무거지지만 여성들보다 남성들이 머리가 더 좋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난해에 사법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의 비율을 보면 여성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으며, 고등학교와 대학에서도 성적 우수자들은 여성들이 훨씬 많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공부를 잘하는 것은 여성들이 더 잘한다는 것이 입증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남성들이 뇌가 많아서도 아니고, 여성들이 뇌가 작더라도 더 집중력이 강하고 학습 분위기가 더 좋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북한에서는 머리가 좋은 사람들을 “골 찬 사람” 이라고 하고, 머리가 좋지 않은 사람들을 “골 빈 사람”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골이 찬 사람들은 그만큼 뇌도 무거울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뇌의 밀도에 따라서 말할 수 있다고 하는데 사람의 뇌의 밀도는 3.12, 침팬지는 1.79, 사자는 0.67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뇌의 밀도도 머리와 관계가 깊을 것이라고 생각은 한답니다. (나카하라 히데오미/홍성민 옮김/ 뇌력사전 참조)
내가 아무리 내 컴퓨터를 잘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5-10%도 활용하지 못하고 마냥 업그레이드만 해서 용량만 키우고 사실은 5%도 사용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뇌도 마찬가지여서 내가 사용하는 나의 뇌도 5%도 사용 못하고 있다는 것을 자주 느끼고 머리가 커서 어떤 모자도 맞지 않아 언제나 모자를 살 때 고민하는데도 머리가 좋은 것하고는 전혀 다르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떤 때는 좋은 머리와 나쁜 머리를 구별할 수 없고, 내 머리가 점점 나빠지는데 머리크기는 그대로이기 때문에 내 골이 지금 텅텅 비어가고 있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과학자들은 뇌의 양과 뇌의 크기와 뇌의 밀도에 대하여 사진을 찍고, 무게를 잴 수 있는 기술들이 발전하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내 마음의 크기를 잴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 심장의 무게는 잴 수 있을 것이고 내 허파와 뼈들의 무게까지도 전부 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묘한 인체의 구조 중에서 아마 측정할 수 없는 것은 마음뿐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누구든지 자신의 마음의 크기를 나름대로 재고 살려고 하지만 정답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나는 호수처럼 큰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물 컵 보다도 더 작고, 적은 것인 줄 요즘 겨우 알게 되었답니다. 내 마음을 되나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내 행실은 금방 되나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이나 자신의 생각을 나타내는 행동이나 말은 금방 밖으로 표출됩니다. 아무리 큰 소리로 떠들어도 자신의 진심을 마음에 숨기고 살고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아무리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하느님으로부터 왔으니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면 그 마음도 무한정으로 커질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사람이 출중하지 못하고 용렬(庸劣)한 사람이 되어 자신의 좁은 문 안에서 맴돌고 있는 것이 바로 나의 모습이라는 생각입니다. 그건 하느님의 마음을 닮지 못하고 지금 내 마음의 빗장을 잠그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능출불유호? 하막유사도야?’(誰能出不由戶? 何莫由斯道也?)라는 말이 있습니다. 논어의 옹야 편에 있는 말입니다. <누가 문을 통하지 않고 나갈 수 있는가? 어찌하여 올바른 도를 따르지 않는가?> 주님을 통하지 않고 어떻게 하늘나라에 갈 수 있으며, 주님을 통하지 않고 어찌 도를 따른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행하라는 선행을 외면하고 나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가? 어찌 다른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어찌 내가 한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은 조금도 반성해 보지 않는 것인가? 내가 도를 따르지 않고, 선행을 실천하지도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어찌 선행을 실천하라고 하는가? 또 내가 따르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따르지 않는다고 책망할 수 있는가? 그것은 자신과 자식들에게도 같은 이치라는 생각입니다. 용렬한 내 마음을 탓하지 않고, 됫박으로 야박하게 되어 주면서 고봉으로 받으려고 하는 ‘밴댕이 창자’ 같은 내 마음을 탓하지 않고 사는 내가 내 아집의 문을 닫아걸고 있는 모습을 다시는 보기 싫습니다. 매일 그렇게 결심하면서 인생의 후반부에서 망설이고 있습니다. 내가 먼저 따라야하는 그 길에서 나는 문을 닫아걸고 그 안에서 맴돌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주님, 제 마음을 더 크고 넓게 가지도록 자비의 은총을 베풀어 주소서. 당신의 사랑으로 제가 넘치도록 되어주고, 넘치도록 자신을 나누게 하소서. 빗장을 벗어 버리고, 당신께 뛰어 달려가는 길을 깨닫게 하소서. 자비와 사랑의 주님!!!
-순교자와 함께하는 하루-
“이 세상에서 자기 주인에게 불충실한 것도 흉악한 범죄이거늘 하물며 천지만물의 주인이신 대주재(大主宰)하느님을 어떻게 배반하라고 하십니까?”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최양업 신부의 여덟 번째 편지 중에서)
새벽을 열며
분별의 지혜가 더 절실한 현대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은 마르코복음 4장에 실려있는 4가지 비유 중 두 번째 비유인 ’등불의 비유’를 들려준다. 그런데 사실상 등불의 비유는 오늘 복음의 전반부에만 해당되고, 후반부는 종말보상률(24-25절)에 관한 가르침이다. 그러니까 두 대목은 서로 떨어져 전해 오던 것을 마르코가 한데 묶어 비유설교의 틀 안에 집성한 것으로 보인다. 복음사가들은 종종 이런 의도적인 편집을 통하여 그 의미를 서로 연결시키기도 하고 부각시키기도 한다. 따라서 오늘 복음대목은 4가지 비유들의 핵심적인 주제인 하느님나라의 신비를 밝히는 방향으로 풀이되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앞서간 복음에서 ’알아들을 귀’가 있다고 생각되는 12제자들과 다른 제자들에 국한시켜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와 씨 뿌리는 비유의 의미를 설명해 주셨다. 따라서 오늘 복음대목도 마찬가지로 이들에게만 훈시(訓示)된 것이다.
우선 복음의 전반부인 등불의 비유를 살펴보자. 등불을 등경 위에 얹어 놓아야 함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불을 끌 때 됫박을 사용하는 것은 당대의 습관이다. 그런데 등불을 됫박 아래 두거나 침상 밑에 둔다는 것은, 물론 그런 사람은 없겠지만, 좀 과장되고 지나친 표현이다. 이 표현 때문에 그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이 힘을 얻는다. 즉 감추어 둔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비밀을 밝혀지기 마련이라는 것이다.(22절) 아무리 감추어 두고 비밀로 해도 그것은 밝히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것은 등불이기 때문이다. 등불을 끄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 씨가 복음의 말씀이라면 등불의 비유에서 빛을 내는 등불은 복음의 선포를 뜻한다. 등불의 본질은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이다. 따라서 등불은 복음자체인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며, 예수 그리스도는 그 자체가 복음선포라는 말이 된다. 사실 등불은 성서에서 예수님이 아닌 엘리야와 모세(묵시 11,4), 또는 세례자 요한(요한 5,35)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예수께서는 등불보다 훨씬 더 높고 강한 상징인 빛이시며, 세례자 요한은 이 빛을 증언하러 왔을 뿐이었다.(요한 1,4-9) 따라서 복음자체이며 동시에 선포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빛으로서 특정한 장소와 시간에 머무름 없이 온 세상에 드러나 밝게 비추이실 것이다.
복음의 후반부는 종말보상률에 관한 훈시이다. 굳이 종말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아도 무방하다. 무엇을 주고 난 후 되돌려 받을 때까지의 시간을 감안한다면 그 때가 종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보상률은 두 단계로 구별된다. 하나는 인과(因果), 또는 동태(同態) 보상률이고, 다른 하나는 은총(恩寵), 또는 가감(加減) 보상률이다. 앞의 것은 달아 주면 달아 주는 만큼 받는다(24절)는 것이고, 뒤의 것은 가진 사람은 더 받고, 가지지 못한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긴다(25절)는 것이다. ’되로 주면 되로 받고 말로 주면 말로 받는다’는 속담이나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속담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되는 대목이다. 이 대목을 독자적으로 본다면 인간의 선행(善行)과 악행(惡行)에 대한 하느님의 종말적 동태보상, 또는 하늘에 영적(靈的) 재물을 쌓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종말적 은총보상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다른데 있다.
문제의 해결점은 전반부의 등불비유와 후반부의 보상률을 서로 연결시켜주는 관절어(關節語)에 있다. 바로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23절), 또 "내 말을 마음에 새겨들어라"(24a절)는 말씀이다. 말씀인즉,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등불의 비유를 잘 알아듣고 그 뜻을 마음에 새겨 간직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등불의 비유에서 등불보다 훨씬 강한 빛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았다. 그러므로 빛이신 예수와 그 말씀을 알아듣는다 함은 다시금 씨 뿌리는 비유의 의미를 곱씹어야 한다는 말이겠다. 이 땅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만큼 하느님나라의 신비를 깨우치게 될 것이고, 종말에 가서는 깨우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신비를 통찰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도들의 시대보다 들어야 할 것, 알아야 할 것, 보아야 할 것이 훨씬 더 많은 우리들 세상에서는 무엇이 하느님나라의 신비를 밝히는 것인지를 정확히 분별하는 지혜가 더 절실히 요구된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즐거운 명절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