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청을 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상대방이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를 깨닫기 전에 대답하려는 경향이 많습니다. 경청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일까요?
언젠가 고해소에 앉아 있는데 누가 들어왔습니다. 저는 성호경을 긋고 고해를 들으려고 했습니다. 이분께서는 성호경도 하지 않으시고 또 고해성사를 본 지 얼마나 되었는지도 말씀하시지도 않고 그냥 자기 죄를 말씀하셨습니다. 문제는 무슨 말인지 제가 알아듣기가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너무 목소리가 작았습니다. 마치 혼잣말을 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리고 다 말씀하신 뒤에는 그냥 나가셨습니다. 훈화도 듣지 않으셨고, 보속도 받지 않으셨습니다. 무엇보다 사죄경도 받지 않고 그냥 나가셨습니다.
다급하게 “사죄경은 받고 가셔야지요?”라고 크게 말했지만, 그냥 가셨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분 등 뒤로 사죄경을 해드렸지만, 어쩌면 지금 우리의 모습이 이렇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들으려 하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며 화내고 분노합니다. 그러나 먼저 들으면 안 될까요?
가족 안에서 경청이 일상화되면 많은 부분이 바뀔 것입니다. 직장 안에서 또 교회 안에서도 귀를 기울여 들어준다면 얼마나 많이 바뀔 수 있을까요? 경청을 위해 필요한 것은 침묵입니다. 더 많은 말을 해서 상대를 이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침묵 속에서 경청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예수님께서 사형선고 당하실 때 스스로 변호할 수 있었지만 침묵하십니다. 사람들의 비판에 당신의 전지전능하신 힘으로 무찌를 수 있었어도 침묵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모범을 기억하면서 침묵 속에서 경청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을 따르는 길의 시작입니다.
오늘은 성토요일입니다. 주님께서 죽으셨기에 미사도 없습니다. 오로지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침묵 안에서 묵상하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뒤, 부활까지의 침묵. 그 침묵에 우리도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매년 맞이하는 일회적인 행사로만 그쳐서는 안 됩니다.
당신을 배반한 사람, 당신을 조롱하고 모욕했던 사람, 당신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고 십자가에 못 박았던 사람 등등….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침묵하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쩌면 그 침묵 속에서 예수님의 반대편에 있었던 사람의 소리를 들으셨을 것입니다.
우리도 가족 안에서, 직장 안에서, 또 교회 안에서 이렇게 침묵 속에서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많은 부분이 바뀌면서 주님의 사랑이 우리 일상 안에서 펼쳐질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아름다운 것에 가능한 한 많이 감탄하라. 사람들은 아름다운 것에 충분히 감탄하지 못하고 있다(반 고흐).
첫댓글 빠다킹(조명연 마태오)신부님 강론입니다.
그렇지요
물론 성서의 말씀에도
또한 우리가 나눔하는 대화도 경청이 대인관계의 진실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