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2]만날 사람은 언제 어느 때든 만나게 된다
‘우연偶然이 필연必然이고 필연이 우연’이라는 진리眞理를 새삼 실감한 엊그제 이틀간 얘기를 펴보입니다. 그간 졸문에서 여러 번 말씀드렸던 대한민국 국보급 전각篆刻예술인 친구가 최근 남쪽 출신의 귀인貴人을 만났다는 낭보朗報를 전해 왔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그 귀인을 만나고 싶었는데, 상경을 위한 좋은 핑계가 생겼습니다. 유일한 손자녀석이 초등학교 입학식을 한다는 것입니다. 굿뉴스이자 빅뉴스이기에 한달음에 올라왔지요. 변호사라는 귀인은 일견 평범한 듯 보였으나, 그와 같이 온 그의 친구(변호사사무실 실장)와 수인사를 나눈 후, 불과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 ‘민증’(주민등록증을 내세운 신상털기, 이를테면 고향이 어디냐, 무슨 띠냐는 등을 묻는 것입니다)을 까는 과정에서, 세상에나 만상에나, 그가 나의 친애하는 동갑내기 친매제(누이동생의 남편)와 절친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지요.
몰론 그런 인연이야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을 것입니다. 허나, 귀인의 이력과 꿈이 별났습니다. 남원시 대강면 풍계리 출신, 남원 Y중학교와 서울의 한 야간고등학교를 나왔다는군요. 그리고는 전주교육대학을 졸업한 후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었다지요. 그러구러 6,7년 후 뜻한 바 있어 천직天職인 교사직을 버리고 유수의 대학 법학과를 야간으로 들어가, 그 어렵다던 사법고시를 합격하여 변호사로 환골탈태했다는 것입니다. 나의 매제와는 교육대학시절 동아리활동을 같이 하며 친해진 것이구요. 그 인연이 지금껏 이어졌다는 것인데,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정년퇴직한 친구를 사무실장으로 채용해 같이 일하고 있다는 것도 특이했습니다. ‘한번 맺은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라는 것을 대번에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그를 왜 귀인이라고 하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익어가는 나이 60대 후반을 맞아 그가 고향마을과 인연이 깊은 조선초 명정승 황희를 기리는 ‘지혜관’을 고향마을에 세우고, 고향에서 무료변론 활동을 할 생각이랍니다. <황희지혜관>에는 <방촌집> 등에서 뽑은 어록語錄 20여개를 나무나 돌 등에 잘 새겨 전시해놓음으로써 후세들에게 귀감을 삼겠다는 것이고, 그 작업을 할 전각의 대가를 찾던 중, 제 친구를 만나게 된 것이지요. 황희의 후손도 아닌 타성他姓인데도, 어릴 적부터 듣고 자랐던 위인이 삶의 멘토였기에 그를 세상에 크게 내세우려는 뜻이겠지요. 그러니 어렵게 전각예술을 지탱하고 있는 친구에게는 참으로 귀한 VIP고객인 셈이지요.
저로서는 생각이 올바른 친구를 한 명 사귀는 셈이구요. 그가 나온 중학교를 나온 제 친구가 여럿이고, 그가 나온 고등학교는 제 명예고등학교이며, 대학교로는 저보다 8년이나 후배가 되더군요. 어디 그뿐인가요? 그가 최근 그의 할아버지의 문집 번역을 맡겼다는 한문번역가는 제가 잘 아는 후배였지요. 제 누이를 ‘최여사’라고 친히 부르는 인연 말고도, 한 다리 건너면 모두 다 아는 이런 관계를 뭐라고 부를까요? 그래서 한 말이 ‘만날 사람은 언제 어느 때든 꼭 만나게 된다’라고 한 것이죠. 두세 달 전에 한 출판사 대표와 전각가 친구가 저를 통해 만나게 되는 것처럼 말이죠. 당장에 호형호제하기로 했지요. 호號로 불러도 서로 무방하겠기에, 풍산형, 금정형, 우천형 하며 ‘좋은 얘기’들이 이어졌습니다. 또한 그 자리에서 제주살이를 하고 있는 동생부부에게 전화도 하여 이런 우연과 인연의 신기함을 주고받기도 했구요.전라고6회 동창회 | [찬샘레터 61/인연因緣]만날 사람은 만나게 된다 - Daum 카페
그날밤은 청국장 한정식을 먹으며 네 명이 모두 흥이 겨웠으나 아쉽게 헤어졌지요. 어제 오후에 그의 사무실을 불쑥 방문했는데, 두 친구가 반색을 하더군요. 맨먼저 들이댄 것이 조부의 문집 원본인데, 그 문집을 입수하게 된 것도 가히 드라마틱하더군요. 조부의 제자라는 어느 노인이 선생님의 장손인 그에게 눈물을 흘리며 전해준 게 <만회집晩回集>이니, 한문문맹자인 손자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문집 한 권을 우리말로 번역하는데 1천만원은 우습습니다. 중문학박사로 유명했던 허세욱교수도 조부의 제자였다는 대목에서, 그 허박사가 제 장모의 조카라고 했더니 또 놀랄 밖에요. 조부는 약종업에 종사하며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전국의 곳곳을 다니며 한시를 숱하게 남겨놓았더군요. 그 한시 번역도 시급한 일입니다. 후손으로서 선조가 남긴 글과 한시가 무슨 내용이었는지 아는 것은 의무이지 않겠습니까?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는 칭찬은 빈말이 아니었습니다. 초서草書로 휘갈긴 글들은 우리 눈에는 ‘흰 것은 종이고 검은 것은 글씨’로 보일 뿐이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지요. 문맹文盲이 따로 없습니다.
(5) 근묵 동영상 - YouTube문득 위암 오세창 선생님이 평생 모아 책으로 엮은 <근묵槿墨>이 생각나 사기를 권했습니다. 성균관대출판부에서 100만원짜리 한 질(5권)을 50만원에 살 수 있다고 알려주니, 그 자리에서 송금을 하며 고맙다고 치하까지 합니다. <근묵>은 고려말부터 조선조 말까지 1136명의 문신들이 남긴 친필 필적들을 집대성해놓은 책이니, 그 소중하고 귀중함을 어찌 말로 할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국보급 기록유산이지요. 최근 국가문화재 지정을 신청했다고 합니다. 그가 뒤늦게나마 초서를 배우려는 열의를 보이기에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며 초서연구가 후배를 소개해 주겠다고 약속도 했지요. 배움에 60대 후반의 나이는 결코 늦는 게 아니라고 역설도 했답니다. 우리가 초서를 배우지 않으면, 그 맥이 끊길 게 뻔한데, 이거야말로 국가적으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는데, 어떤 위정자들도 그것이 가장 시급very urgent하고 가장 중요한very important 일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커다란 비극이지요. 우리의 민족자산인 기록문화 유산이 꽃을 피우기는커녕 우리 당대에 완전히 멸실될 수도 있다는 것을 왜 모를까요? 한심지경이자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아무튼, 새로이 사귄 변호사 친구의 계획한 일에 제가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같아 기쁜 하루였습니다. 그가 뽑아놓았다는 황희 정승의 어록 20개에, 어제 제가 1개를 더 얹었더니 매우 좋아하더군요. 한문 번역도 한문투의 번역은 최대한 지양하고, 가능하면 최대한 요즘의 우리 언어로 바꾸지 않으면 ‘죽은 언어’일 뿐이라는 게 제 지론입니다. 물론 내공은 형편없지만, 그 일에 제가 작은 보탬이 된다면 그것도 보람 있는 일이겠지요. 이런 게 <살아 있는 휴먼스토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번 서울나들이는 가방을 메고 초등학교에 처음 등교하는 손자의 의젓한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큰 즐거움에, 벗을 사귀게 되는 기쁨이 더하게 되었으니, 이를 금상첨화錦上添花라고나 할까요? 흐흐.
*땅이름 오수의 유래: 통일신라 말기 혹은 고려초, 거령현 居寧縣(현 전북 임실군 지사면 영천리)에 사는 김개인金盖仁이 하루는 술에 취해 개천가(현 오수천獒樹川)에서 잠이 들었다. 이때 마침 들불이 크게 번져 주인의 목숨이 위태롭자, 평소 따라다니던 개가 제 몸의 털에 물을 적셔 주인을 살린 후 숨졌다. 잠에서 깬 개인은 자신을 살린 개의 죽음에 슬피 울며 노래를 불렀는데, 이 노래가 견분곡犬墳曲이다(곡명은 기록돼 있으나, 노랫말은 아쉽게도 전하지 않는다). 또한 늘 지니고 다니던 지팡이를 개의 무덤에 꽂았는데, 이 지팡이가 큰 느티나무로 자라자, 이 곳 땅이름을 ‘큰개 오獒, 나무 수樹’ 오수로 불렀다.
고려의 대문장가인 시인 이규보李奎報는 “사람들은 짐승을 우습게 생각하나, 자신이 받은 은혜를 개보다 쉽게 저버리네. 주인(임금, 부모, 조국 등)이 위험에 처할 때 제 몸을 던지지 않으면 어찌 이 개와 견주어 얘기할 수 있겠는가”라고 읊었다. 당시 정치의 실세 진양공 최이崔怡가 이 설화를 듣고 뭇 사람에게 글로써 널리 알리게 한 까닭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으리라.
- 최자崔滋가 1254년 펴낸 『보한집補閑集』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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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수 원동산에는 1천여년 전에 이 의로운 <오수개>을 기리며 세운 의견비義犬碑가 현존하고 있다. 앞면에는 개 발자국 4개와 승천하는 개의 형상이 뚜렷하고, 뒷면에는 당시 시주한 30여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시주자 이름이 네 자인 것으로 봐, 통일신라말로 추정하고 있으며, 정확한 건립 간지干支를 정밀 조사하고 있다.
한편, 오늘날 1500여만명의 반려동물 인구의 각광을 받고 있는 오수는 30여년 동안 각고의 노력 끝에 <오수개>의 복원에 성공했다. 국내 유일의 <의견테마랜드>와 <반려동물장례식장> 그리고 <펫추모공원>을 조성했으며, 국내 유일의 최고급 <반려동물호텔>도 짓고 있는 등 세계적인 반려동물 성지로 거듭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