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87
1월31일[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연중 제4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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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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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CY0sgg1dVpg
(장동현 미카엘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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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돈보스코라면>
도움이 필요한 청소년들의 아버지요 친구, 전세계 저희 모든 살레시안들의 영적 스승이요 사부이신 돈보스코(1815-18888)의 축일입니다.
혈기왕성하던 젊은 시절, 아이들 위해 하루 온종일 뛰어다니던 시절이 그립습니다.
지금도 마음으로는 아이들 위해 뭐든 못할일이 없을듯 하지만...이제 어느덧 연세도 먹을만큼 먹어 세월의 무게를 넘어서기가 힘들어 씁쓸할 뿐입니다.
함께 사는 또래 형제가 현실을 망각하고, 피정온 어린이들 앞에 아재 개그를 남발하다가 리액션 단 1도 없고, 전혀 미동도 없는 아이들 모습에 좌절하니, 아~ 옛날이여! 하는 노랫가사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여름방학만 되면 전국 본당에서 수천명의 아이들이 다녀가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이제는 젊은 살레시안들의 부족으로 운영진을 꾸릴수 없으니 참으로 슬픈 현실이 아닐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망하고 낙담만 하고 있어서는 안되겠지요. 하느님께서 때로 한쪽 문을 닫으시지만, 인내롭게 기다리고 있다보면 언젠가 반드시 다른 쪽 문 하나를 슬그머니 열어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절망감과 상실감으로 가득한채 굳게 닫혀 있는 문만 뚫어지게 바라보지 말고 주님께서 슬그머니 열어놓으신 다른 쪽 문이 어디 있나 눈에 불을 켜고 찾아봐야겠습니다.
사제 수도자 성소가 급감하는 현실은 유능한 평신도 지도자들과 동역자들을 찾아 양성하고 사명을 적극적으로 공유하라는 신호입니다.
영세자수나 교우수가 급감하는 현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좀더 시야를 넓히라는 하느님의 초대입니다. 우리 교회가 지역사회 구성원들과 보다 깊이 연대하고, 그들의 필요성에 구체적으로 응답하라는 요청입니다.
돈보스코의 직속 후계자이자 살레시오회 2대 총장 복자 루아 신부가 수도회를 이끄는 내내 입만 열면 외쳤던 말이 있습니다.
"돈보스코라면 어떻게 생각하셨을까요? 돈보스코는 어떻게 결정하셨을까요? 돈보스코라면 어떻게 행동하셨을까요?"
루아 신부의 그런 노력으로 인해 살레시오회는 주변 많은 사람들의 우려섞인 시선을 떨치고 승승장구 일취월장을 거듭할수 있었습니다.
눈을 떠도 아이들 생각 눈을 감아도 아이들 생각뿐이었던 또 다른 돈보스코가 필요한 오늘입니다.
돈보스코가 지금 우리 시대 사셨다면, 분명 요즘 잘 나가는 탑클래스 아이돌 가수 못지않게 올림픽 체조 경기장에 수만명 청소년들 모아놓고 그들을 열광시키고 혼을 쏙 빼어놓으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시대탓 상황탓 할일이 아니라 이 시대 힘들어하는 우리 청소년들을 위해 가장 필요한 사목이 어떤 것인지 고민하고 또 고민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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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3IyBuvTX30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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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로 청하는 것이 자주 바뀌면 안 좋은 이유>
터미네이터, 에이리언 2, 타이타닉, 아바타 시리즈를 감독한 사람이 놀랍게도 동일 인물입니다. 전세계 역대 흥행 순위에 홀로 가장 많은 영화를 올려놓은 감독입니다. 제임스 카메론입니다. 어떻게 한 사람에게서 저러한 세계 최고 흥행 영화들이 줄줄이 나올 수 있는지 신기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영화들이 나오기까지는 엄청난 인내와 기다림이 있었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카메론 감독은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를 보고는 충격에 빠집니다. 그리고 자신도 역사에 길이 남는 그러한 SF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꿈을 접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그를 위대한 감독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영화 전공자도 아니면서 공상과학에 관한 읽을 수 있는 모든 책을 섭렵했고 시중에 파는 공상과학에 관한 책이 없자 도서관에 가서 있는 모든 책을 다 읽었습니다. 생계가 막막한 관계로 그는 트럭 운전사를 하며 돈을 벌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다 영화계에서 일할 기회가 되어 자신이 개발한 스톱모션 기술로 제노제네시스라는 단편 영화를 만들어 투자유치를 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책으로만 공부했던 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투자를 하려던 사람들까지도 떠나갔습니다.
영화에 관한 실전 기술을 배우기 위해 영화계에서 일하다가 감독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피라냐 2’라는 영화인데 감독 이름만 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피라냐 물고기가 날아다닌다는 설정의 영화에 감독으로 이름이 오르게 되어 그는 감독으로 시작하기도 전에 더는 감독을 맡기면 안 되는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그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집세를 낼 수가 없어서 결국 쫓겨나 차에서 자야 했습니다. 차에서 웅크리고 자면서 영화 시나리오를 썼습니다. 그 심리적 압박이 얼마나 컸던지, 자신이 불 속에 있는데 어떤 사람처럼 생긴 기계가 자신을 죽이러 오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의 열정은 그러한 꿈까지도 시나리오로 만들게 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터미네이터(1984)란 영화가 될 시나리오였습니다. 하지만 어떤 영화계에서도 그 시나리오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카메론은 만약 자신의 시나리오를 영화로 만든다면 단 돈 1달러만 받겠다고 했습니다. 대신 감독은 자신이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결혼까지 하게 될 영화 제작자 게일 앤 허드라는 여성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터미네이터는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이어 에일리언 2, 터미네이터 2까지 흥행시키며 일약 흥행의 보증수표가 되었습니다.
이어 세계를 또 한 번 놀라게 한 영화가 타이타닉(1997)입니다. 타이타닉은 10년 넘게 글로벌 흥행 순위 1위를 지켰습니다. 워낙 완벽주의를 추구하던 그의 성격 덕분에 이미 천문학적 제작비로 떠들썩했었는데, 처음 계획했던 제작비의 두 배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제작사는 영화 촬영 중단을 통보합니다. 이때 카메론 감독은 자기 보수와 흥행 개런티까지 다 포기하겠다며 제작사를 설득했습니다. 그리고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12년 동안 잠수를 탑니다. 사람들은 그동안의 성공 때문에 부담스러워 더는 영화를 찍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바타(2009)는 그때까지 10년 넘게 흥행순의 1위를 달리던 자신의 영화 타이타닉을 자신이 또 경신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지금까지 아바타를 넘는 영화는 없습니다. 이 흥행에 힘입어 사람들은 아바타 2가 곧 나올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또 13년을 기다리게 하였습니다. 결국 올해 2023년에 아바타 2가 개봉했습니다. 개봉하자마자 이미 글로벌 흥행순의 6위에 올랐습니다. 두 편의 영화를 찍는 데 25년이 걸린 것입니다.
사람들은 타이타닉의 흥행에 대한 부담으로 12년 동안 영화를 찍지 못했고, 아바타의 부담으로 13년을 찍지 못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의외였습니다. 그는 터미네이터도 그랬고 아바타도 그랬으며, 이번에 아바타 2도 컴퓨터그래픽 기술이 자신이 원하는 수준으로 발달할 때까지 기다린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아바타 5편까지 계획되어 있습니다.
제임스 카메론이 70이 넘은 나이에도 꾸준히 세계 1위의 영화를 만들어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두 가지가 있겠습니다. 세계 최고가 되겠다는 꿈이 있었고 그 꿈을 포기하지 않고 정진한 데 있습니다.
어쩌면 기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기도는 무언가 청하는 것입니다. 그 청하는 것이 바뀌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을 청하며 자신도 그 청하는 것에 합당한 사람이 되어갑니다. 이것 청했다가 저것 청했다가 하면 나의 성장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한 가지 엄청난 것을 청합시다. 평생 그것만 청할 수 있는 것이면 좋습니다. 그러면 시간이 지나며 분명 나의 믿음도 성장하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그래서 9일 기도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적어도 54일 동안 한 주제로 기도하라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7기도를 25년간 바치고 있습니다. 7기도의 목적은 연옥에 가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내 가족 중 다섯 명도 연옥벌을 면하고 나는 순교자의 지위에 오르기 위함입니다. 또 청하는 것도 있습니다. 내가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신학의 발자취를 남기는 것입니다. 분명 죽을 때까지 꾸준히 청할 것이고 그러면 저도 70이 넘어서도 발전하리라 생각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를 매우 기다리게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처음에 예수님께 이렇게 청했습니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마르 5,23) 그런데 도중에 하혈병에 걸린 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 치유를 받습니다. 그녀의 믿음은 야이로보다 낫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마르 5,28)
야이로는 예수님의 능력을 과소평가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집까지 와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분이 직접 손을 얹어야 죽어가는 아이가 살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야이로의 믿음을 성숙시킬 필요를 느끼셨습니다. 그래서 바로 고쳐주시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의 능력과 사랑을 믿는 대로 응답해주십니다. 만약 나의 믿음이 충분하지 않은데도 곧 죽을 병자를 살려달라고 한다거나 오늘은 이 사람, 오늘은 다른 사람의 회개를 위해 기도한다면 그 사람은 돌아가실 것이고 또 다른 사람은 회개하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은 내가 믿음이 커지기를 원하시는데 그러려면 한 주제로 평생을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야이로도 기다리는 사이에 딸이 죽습니다. 예수님은 야이로를 안심시키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 5,36)
죽더라도 기도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시려는 것입니다. 야이로는 결국 예수님은 딸이 죽어도 되살릴 수 있는 분임을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기도의 시련을 주십니다. 기도해도 들어주지 않으십니다. 그 이유는 우리 믿음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의 기도 주제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믿음이 증가합니다.
예수님은 기다리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야 우리가 발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작은 달팽이가 사과나무를 기어오르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무당벌레가 말합니다. “너 그렇게 천천히 가면 언제 저 꼭대기에 올라갈래? 그리고 아직 사과가 열릴 때가 아니야.” 달팽이는 말합니다. “괜찮아 무당벌레야! 아마 내가 저 꼭대기에 도착할 때쯤 사과가 열릴 거야.”
사과나무는 사실 달팽이가 기다리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동시에 달팽이가 하늘로 오르게 합니다. 믿음을 증가시킬 수 있다면 헛된 기다림은 없습니다. 믿음은 기다림 속에서 성숙합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허락하시기 위해 40년을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태어난 자녀가 죽어가자 그 자녀가 죽기까지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그의 죄가 어느 정도 사해졌습니다.
나의 믿음이 인내로 성장하는 것만으로 오랜 기도의 기다림은 가치가 있습니다. 죽기까지 청하며 기도할 수 있는 한 가지 청을 정합시다. 그것을 청하며 우리는 하늘로 오르고 성숙한 신앙인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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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1988년 5월 4일 군에서 제대한 후에 교구 성소국장 신부님을 만났습니다. 복학하기까지는 10개월 정도 시간이 있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어디에서 봉사하고 싶은지 물었습니다. 저는 청소년들이 있는 곳에서 봉사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돈보스코 센터’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저는 수녀님들은 본당에서 보았지만 수사님들을 직접 본 적은 없었습니다. 돈보스코 센터는 살레시오 수도회 수사님들이 운영하는 청소년들을 위한 ‘직업훈련원’이었습니다. 학생들은 낮에는 기술을 배웠고, 밤에는 방송통신 고등학교 과정을 배웠습니다. 전원 기숙사에서 지냈고, 매일 아침에 미사가 있었습니다. 제가 하는 일은 미사 전례를 도와 드리는 것과, 교리를 가르치는 일, 자습 시간에 함께 있는 것이었습니다. 수사님들께서 늘 강조하는 것은 학생들과 함께 있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수사님들은 학생들과 함께 농구를 하였고, 학생들은 수사님들을 가족처럼 따랐습니다. 스페인에서 오신 모 신부님, 이태리에서 오신 공수사님, 임수사님, 폴란드에서 오신 현신부님이 생각납니다. 살레시오 수도회는 오늘 축일로 지내는 성 요한 보스코 사제가 설립한 수도회입니다. 10개월 짧은 시간이었지만 제게는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20년 후인 2008년 저는 본당에서 그때 함께 일하던 직원들을 만났습니다. 두 분은 인연이 닿아 결혼하였고 아들을 3명 낳아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런 인연으로 형제님은 청소년 분과장으로 봉사하였고, 자매님은 구역장으로 봉사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혈하는 여인’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12년 동안 온갖 방법을 찾았지만 하혈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신다는 이야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해 주셨다는 이야기, 중풍병자를 자리에서 일어나게 해 주셨다는 이야기, 듣지 못하는 사람의 귀를 열어 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혈하는 여인은 자신의 병을 차마 이야기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병을 고치고 싶은 간절함에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그리고 기적처럼 12년 동안 멈추지 않았던 하혈이 멈추었습니다. 소경처럼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중풍병자처럼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다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나병환자처럼 깨끗하게 되고 싶다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여인의 간절한 손짓은 비록 말은 없었지만 여인의 몸을 깨끗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저도 여인과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1984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103위 시성식을 위해서 방한하셨고, 서울 신학교에서 미사를 집전하셨습니다. 중앙 통로 쪽에 있던 저는 교황님께서 제 옆을 지나가실 때 발을 살짝 내밀었습니다. 사제가 되고 싶은 간절함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제가 된 지 32년이 지났으니 그때의 간절함을 하느님께서 들어주신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에게 자유와 평화를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은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기 위한 표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듯이 살면서 많은 아픔과 고통을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청하는 것입니다. 욥 성인이 그랬던 것처럼 더욱 열심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모두는 우리에게 주어진 신앙의 길을 충실하게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산 이와 죽은 이 모두를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분께 의지하며 걸어간다면 병이 나았던 여인처럼, 죽음에서 다시 살아났던 소녀처럼 살아서도, 죽어서도 주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탈리타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무엇으로부터 일어나야할까요? 재물, 명예, 권력의 유혹으로부터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욕망, 욕심, 시기로부터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착각으로부터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2023년 1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탈리따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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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5,21-43: 걱정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예수님께서는 야이로라는 회당장의 죽은 딸을 살려주시고(21-24.35-43), 12년 동안이나 하혈하던 부인의 병을 고쳐주신다(25-34). 이 기적의 의미는 예수님은 잠자는 사람을 깨우듯이 죽은 사람을 되살리실 능력을 지니신 분이라는 것이다.(39절) 그리고 이분이야말로 구약시대에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린 기적을 행한 엘리야(1열왕 17,17-24) 혹은 엘리사(2열왕 4,25-37)보다 훨씬 위대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회당장은 죽어가는 딸을 위해 주님께 도움을 청하고 있다. 이것은 모든 부모의 자녀들에 대한 사랑의 마음일 것이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23절) 회당장이 이렇게 청하자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그의 집으로 가고 계셨다. 많은 군중 틈에서 12년 동안 하혈하던 여인이 등장한다.
그 여인은 의사들에게 병이 낫기 위해 가진 것을 모두 쏟아부었다. 오랜 투병 생활로 그의 심신은 피폐해졌고, 죽음에 가까이 이르고 있었다. 그 여인은 가진 것을 다 잃어버렸다. 그녀의 생명까지도 쇠약해졌기 때문이다. 여인은 고통 속에서 주님께 부르짖었다. 주님의 옷을 만진 것은 믿는 마음의 부르짖음이었다. 육체로는 스스로 부당하다고 여긴 여인은 마음으로 다가가 믿음으로 하느님께 손을 댄다.
여인은 그 순간 치유되었음을 느낀다. 아드님의 치유 능력을 통하여 당신 아드님의 신성이 드러났고, 치유로써 여인의 믿음이 드러났다. 여인은 주님을 선포하였고, 주님과 더불어 여인도 영예로워졌다. 여인은 신성의 증인이었고, 주님은 여인의 믿음의 증인이셨다. 주님께서는 여인의 숨은 믿음을 보시고, 눈에 보이는 치유를 선사하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건강해져라.”(34절)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고 소식을 전해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36절) 회당장은 믿었고 그 딸은 되살아 일어났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고 집으로 가시어 사람들을 다 내쫓으셨다.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말씀하시고 나서,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세 사도와 함께 아이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셨다.
소녀를 깨우실 수 있는 분에게는 소녀가 그저 자고 있었을 뿐이다. 예수님께서는 아이의 손을 잡고 “탈리타 쿰!”,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41절) 뜻이다. 주님의 목소리에 소녀의 숨이 곧바로 돌아왔다. 소녀는 깨어났고 살아난 아이를 부모에게 돌려주셨다. 소녀는 되살아난 몸으로 일어났고,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음식을 먹었다.(43절) 우리 자신 역시 주님 앞에 나아가기 부당한 하혈하는 여인과도 같을 수 있으며, 잠을 자는 소녀와도 같다. 주님이 말씀 한마디로 치유 받을 수 있도록 믿음으로 주님께 다가갈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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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은총을 받은 뒤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1월 31일의 복음 말씀은, “예수님은 불치병을 고치시고,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분”이라는 증언이고, “예수님은 우리의 희망이신 분”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르며 밀쳐 댔다. 그 가운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 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과연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마르 5,25-29)
군중이 예수님을 따르며 밀쳐 댔다는 말은, 6장 56절에 연결됩니다.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6)
앞의 3장 9절-10절에도, 군중이 예수님을 밀쳐 대고, 예수님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의 이야기에서, 예수님을 따르면서 손을 댄 사람들도 대부분 ‘병의 치유’를 원한 사람들이었을 것이고, 그들 모두가 ‘치유의 은총’을 받았을 것입니다.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던 여자’는 ‘치유의 은총’을 받은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당시 상황에서는 여자 혼자서만 특별히 은총을 받은 것이 아닌데, 왜 특별히 여자의 이야기만 기록되었을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특별히 관심을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왜 특별히 그 여자에게만 관심을 보이셨을까?>
“예수님께서는 곧 당신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군중에게 돌아서시어,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반문하였다. ‘보시다시피 군중이 스승님을 밀쳐 대는데,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십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가 그렇게 하였는지 보시려고 사방을 살피셨다.
그 부인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 떨며 나와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다 아뢰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마르 5,30-34)
예수님에게서 ‘기적의 힘’이 나간 일은, 그 여자에게만 일어난 일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진 사람들 모두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그 여자를 찾으신 것은 ‘몰라서’ 그러신 것이 아니라, 그 여자 스스로 나서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상황을 종합해서 생각하면,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만 특별히 관심을 가지시고, 그 여자만 특별히 고쳐 주신 이야기가 아니라, 여자 자신의 증언을 이야기 형식으로 기록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나는 절망 속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 덕분에 구원을 체험했다.”라는 증언...... 다른 병자들은 병을 고친 뒤에 그것으로 만족하고 떠나버렸지만, 그 여자는 자신이 얼마나 큰 은총을 받았는지를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증언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는 분이고,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은총과 사랑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받는 태도’와 ‘받은 후의 삶’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몸의 병’을 고친 것으로 만족하고 그냥 예수님을 떠나버린 사람들 경우, 예수님께서 치유의 은총을 취소하시는 것은 아닌데, 그들 자신들이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지 않는다면, 구원받지 못하고 끝나게 됩니다.
영혼의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몸의 치유’는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따라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는 말씀은, “이제부터는 더욱 굳은 믿음으로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라.”로 해석됩니다.(“믿었기 때문에 구원받았다.”가 아닙니다.)
여자 자신의 말로 바꾸면, “나는 예수님 덕분에 ‘몸의 병’을 고쳤고, 치유를 통해서 구원을 체험했고, 이제는 ‘영혼의 구원’을 받기 위해서 노력하는 중이다.”입니다.
몸의 치유는 ‘구원의 시작’이고, 영혼의 구원은 ‘구원의 완성’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믿음’을 강조하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은총을 받은 뒤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한 교훈입니다.
<이야기에 나오는 여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수건으로 피와 땀을 닦아 드린 ‘베로니카’라고 전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탈리타 쿰!’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 그러자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사람들은 몹시 놀라 넋을 잃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그들에게 거듭 분부하시고 나서,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이르셨다."(마르 5,36.41-43)
“믿기만 하여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는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회당장이 아직 믿지 못하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당사자인 소녀는 예수님을 알고 있었을까? 또 예수님을 믿고 있었을까? 그것은 알 수 없습니다.>
이 이야기도 ‘믿음’을 강조하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은총을 받은 뒤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만일에 이 이야기를 ‘믿음’을 강조하는 이야기로 오해한다면,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죽은 사람도 살아난다.”는 더 큰 오해로 이어질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예방하려고 예수님께서는“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사람들에게 ‘거듭’ 분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신 일의 진정한 의미는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을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 일의 진정한 의미는 “예수님은 생명의 주인이신 분이며 죽음을 지배하시는 분”입니다>
회당장의 딸이 살아난 이야기는 회당장 자신의 증언이 아니라, 그 일을 직접 목격한 제자들의 증언으로 생각됩니다. 회당장과 그의 딸이 그 뒤에 예수님을 얼마나 잘 믿었는지,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전해지지 않습니다. 그 뒤의 일은,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주는 숙제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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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오늘 우리는 회당장의 딸을 살리시고 하혈하던 부인을 고쳐 주신 이야기를 듣습니다. 액자처럼 구성된 두 이야기는 모두 믿음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께 딸의 치유를 청하며 소개되는 인물은 ‘야이로’라고 불리는 회당장입니다. 야이로는 히브리 말로 ‘빛을 주신다’ 또는 ‘빛을 밝혀 주신다’는 의미를 가집니다(민수 32,41 참조). 그의 이름은 오늘 복음에서 매우 상징적인 구실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으로 이미 죽은 회당장의 딸을 되살려 주십니다. 이 이야기에서 강조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이 말씀은 두려울 수밖에 없는 죽음 앞에 있는 이들을 위로하면서 동시에 죽음도 넘어서는 믿음을 강조합니다.
하혈하던 여인의 이야기도 치유를 넘어 믿음에 관한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나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행동합니다. 그에게 병이 낫는 것은 치유가 아니라 ‘구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의 믿음에 답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두 이야기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혈하던 여인은 온갖 노력을 하였지만 병을 고치지 못하고 더 나빠졌습니다. 병으로 죽을지도 모른다던 회당장의 딸은 결국 죽습니다. 모두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나아지지 않는 여인과 결국 죽음에 이른 회당장의 딸은 우리가 현실에서 만날 수 있는 절망의 모습들입니다. 이 절망에서 벗어나는 길은 치유가 아니라 구원입니다. 야이로의 이름처럼 예수님께서는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빛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굳건한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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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이종민 마테오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두 가지 기적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혈을 앓던 한 여자의 치유 이야기와 죽었던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이야기입니다.
둘 다가 절망적인 상황에서 베풀어진 기적입니다. 열 두해 동안 온갖 치료를 해도 낫지 않는 하혈병을 가진 한 여인에게, 그리고 예수님께서 가시던 도중에 이미 죽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에게 베풀어진 기적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기적의 이야기는 사뭇 다른 상황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는 적극적인 믿음 안에서 하나는 주위 사람들의 의심과 비웃음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라는 적극적인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으로 이 여인은 치유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와서 아이가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전할 때,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아이가 잠이 들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비웃는 사람들을 다 내쫓으십니다.
그리고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당신 일행만을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십니다. 의심과 비웃음을 몰아내고 오직 믿음만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아이에게 생명을 돌려주십니다.
의심은 믿음의 가장 큰 적입니다. 예수님 곁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기적을 기다리지만, 과연 예수님의 칭찬을 받을 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의심을 다 내쫓아버리고 믿음만을 남겨두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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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죽음이 생명으로 가는 현장체험>
예수께서 ’군대’ 라는 마귀가 들린 사람을 고쳐 주시고, 그 마귀의 무리를 2,000마리 돼지 떼에 불어넣어 물에 빠져 죽게 하신 일로 더 이상 게라사(게르게사)에 머무를 수 없었다.(마르 5,1-20)
자초지종을 모두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은 마귀 들렸던 사람이 치유됐다는 사실을 기뻐하기보다 막대한 손해를 입은 일을 더 아깝게 여겼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께 떠나달라고 간청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이방인의 지방 게라사에 한나절도 채 계시지 못하고 배를 타고 다시 호수 건너편으로 가셔야만 했다. 예수와 제자들은 떠났지만 이곳에는 마귀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를 찾은 이가 또 다른 제자가 되어 예수의 복음을 계속 선포할 것이다.
예수께서 배를 타고 다시 돌아오신 곳은 비유설교(4,1-34)를 행하셨던 바로 그 호숫가이다. 예수께서 그곳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큰 군중이 몰려들었다. 군중 속에는 예수님의 자비를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오늘 복음은 두 편의 기적사화를 전해주고 있는 바,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되살린 소생기적사화와 그 중간에 하혈병을 앓던 부인이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댐으로써 스스로 치유를 받는 치유기적사화가 그것이다.
이 두 편의 기적사화는 본디 따로 전해 오던 것을 마르코가 한데 묶어 햄버그 형식으로 편집한 것으로 보인다. 햄버그 형식의 편집은 일종의 화술(話術)로서 긴장감을 고조시켜 새로운 정상(頂上)을 일구어내는 기법이다.
그 기법은 심하게 앓고 있는 아이를 살려달라는 간청을 향한 발걸음 도중에, 엉뚱한 하혈병 여인이 치유되고, 그 사이에 죽은 아이에게 생명을 다시 선사하는 소생기적으로 마무리된다.
어린 딸이 죽어 가는데 아버지의 체면이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당시 유대사회에서 제법 높은 지위를 가진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의 발 앞에 사정없이 무릎을 꿇었다.
야이로는 카파르나움의 회당장이었을 가능성이 크며, 그렇다면 이미 예수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마귀 들린 사람을 치유하실 때(1,21-28),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었을 때(3,1-5) 바로 그 자리에 있었을 것이고, 예배를 주관하고 감독하는 직책을 맡은 회당장 야이로가 다른 바리사이파와 헤로데 사람들과 함께 예수를 제거하려는 모의(謀議)에 가담했을지도(3,6) 모르는 일이다.
아무튼 오늘은 그가 예수께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간곡히 부탁을 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무언(無言)으로 청을 받아들여 회당장의 집을 향하셨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둘러싸고 밀어대며 따라가는 장면이 돌발사태를 예고한다.
12년간 투병에 육체적 심리적 고통은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가산마저 탕진해버린 한 여인, 그녀에게 삶이란 곧 죽음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엎치락뒤치락 떠밀려 가는 군중 속에서 마지막 남은 한 가닥 믿음을 예수님의 옷자락에 걸고 따라가고 있었다. 여인의 믿음은 빗나가지 않았다. 옷자락을 통한 치유의 힘은 여인을 낫게 하였고, 이어 예수님의 말씀은 죽어 가는 여인에게 생명을 선사했다.
"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34절) 죽어 가는 여인의 삶에 생명이 선사되는 동안 다른 살아 있던 생명이 죽음을 맞이하였다. 수많은 병자들과 마귀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치유하시고 바람과 풍랑까지도 다스리시는 예수께서 죽음만은 어찌할 수 없다고 사람들은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예수께 죽음이란 잠시 지나가는 잠과도 같다.(39절) 예수께서 죽은 소녀의 손을 잡고 "탈리타 쿰"(Talitha cumi), "소녀야, 일어나라"(41절) 하고 말씀하시자 소녀는 마치 잠에서 깨어나듯 벌떡 일어나 걸어다녔다.
부활한 것은 아니나 소녀는 소생하였다. 죽음에 생명이 선사된 것이다.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잠자고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코웃음을 치는 사람들에게 죽음이 생명으로 바뀌는 현장체험은 허락되지 않았다.
오직 예수께서 택하신 사람들, 예수 앞에 무릎을 꿇었던 아버지(부모)와 나중에 거룩한 변모의 산(마르 9,2)과 죽음의 피땀을 쏟은 게쎄마니(마르 14,33)에서도 스승과 함께 있을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만 그 현장체험이 허락되었다.
이 제자들은 미구(未久)에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을 체험하게 될 것이고 또 그 증인이 될 것이다. 예수의 부활은 예수께서 진정 생명의 주인이며 생명을 선사하는 분임을 증명하는 사건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때까지는 함구되어야 하며, 오직 믿음을 가진 자의 마음속에만 참 생명의 의미와 고마움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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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민 미카엘 신부님]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서 마르코 복음 5장 21절부터 43절까지 조금 긴 내용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두 가지 이야기입니다. 첫 번째는 하혈하는 부인의 치유 이야기이고 두 번째는 예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는 이야기입니다.
우선 하혈하는 부인의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부인은 열두해 동안 하혈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러 의사들에게서 고생만 잔뜩 하고 자신이 가진 모든 재산을 다 사용했지만 아무런 효험도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나빠졌다고 합니다.
이제 아무런 희망도 없는 상태에서 죽음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는 군중 속에 끼어 있다가 뒤에서 그분의 옷을 만졌습니다. '옷만 만져도 구원받을 것이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결국 피는 그쳤고 부인은 예수님께로부터 이런 말씀을 듣습니다. '그대 믿음이 그대를 구원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이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하는지 잠시 묵상하겠습니다. '피 흘리는 병'을 앓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전에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서를 보면 예수님은 많은 병자들을 치유하셨습니다. 이때 병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데 병을 단지 생물학적으로 또는 신체적인 병으로만 이해해 버린다면 오늘 복음은 우리와 상관이 없는 이야기로 끝나버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그런 병을 앓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신앙의 차원에서 보아야 합니다. 복음은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서 기록된 것이지 치료를 이야기하는 의학 서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피를 흘렸다고 했을 때 그것은 신앙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피는 생명을 의미합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께서 노아와 계약을 맺을 때 하셨던 말씀이 있습니다. 창세기 9장 4절에 '다만 생명 곧 피가 들어있는 살코기를 먹어서는 안된다.'고 나와 있습니다. 피는 바로 생명을 말합니다. 그래서 피를 열두해 동안이나 흘렸다는 것은 생명을 조금씩 조금씩 잃어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명력을 잃어버린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하여 부인은 삶에서 아무런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점점 무기력하게 되어 갔습니다.
물론 많은 애를 써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녀의 환경은 점점 그녀로 하여금 생명력을 잃어가게금 했습니다.
결국 아무런 희망이 없는 상태에서 부인은 예수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게 됩니다. 옷만 만져도 구원받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기겠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피가 그친 것입니다. 즉 생명력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부인은 자신의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겨버리는 '믿음'으로 인하여 생명을 되찾기 시작한 것입니다. 즉 자신의 삶이 죽음의 상태에서 구원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야이로라는 회당장의 딸을 되살리는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야이로라는 회당장이 예수께 와서는 다음과 같이 간청합니다.
'제 어린 딸이 다 죽게 되었습니다. 와서 손을 얹어 주시어, 아이가 구원받아 살도록 해 주십시오.' 그래서 예수께서는 회당장의 집으로 가시는데 가는 도중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는 딸이 죽었다고 말해줍니다. 그 말을 예수께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겁내지 말고 믿기만 하시오.' 회당장의 집에 도착하시고 나서는 제자들과 함게 소녀에게 가서 소녀의 손을 붙잡고는 '소녀야, 일어나거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곧 소녀는 일어서서 걸어다녔습니다. 그 때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도 하혈하는 부인의 이야기와 마찬가지 입니다. 소녀가 다 죽어가게 되었고 또 죽었다고 합니다. '죽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죽음을 단지 육신적인 죽음으로 이해하면 이 이야기 또한 우리와 별로 상관이 없는 이야기로 끝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한번도 죽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차원에서 보아야 합니다. 죽었다는 것을 단지 생물학적으로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내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죽었다는 것은 완전히 생명력을 상실한 상태를 말합니다. 더 이상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며 완전히 끝장이 난 상태를 말합니다. 인생 종말, 갈데까지 간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소녀의 나이가 열두살이라고 하는데 그 당시로서는 그렇게 어린 나이가 아닙니다. 성녀 아녜스는 열세살때에 순교하였습니다. 그것도 청혼을 거부당한 한 청혼자의 고발로 체포되어 순교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열두살이란 나이는 어쩌면 독립적이고 책임감을 가져야 할 나이로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죽었다는 것은 자신의 삶이 완전히 파괴된 상태, 회복 불능 상태에 빠진 것을 말합니다.
과거에 집안에서 자식이 엄청난 사고를 저질렀을때 부모는 이런 말을 합니다. '앞으로 내 집안에서 자식은 없는 것으로 여기겠다.'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 죽은 것으로 생각하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소녀의 인생이 끝장났다고 보지 않습니다. 믿음을 요구하시고 소녀를 일으켜 세우십니다. 부모와 주위 사람들에게는 개인적인 판단과 선입견으로 아이를 보지 말고 '믿음으로' 바라 볼 것을 요구하십니다. 지나친 욕심과 기대감을 가지고 자식들을 대하지 말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대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소녀에게는 절망에 빠지지 말고 자신의 인생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일으켜 세우십니다. 죽음의 상태에서 생명의 상태로 바꾸십니다. 바로 부활의 세상을 체험케 하십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삶에 있어서 생명력을 상실한 상태, 즉 죽음과 같은 상황은 언제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고 구원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은 '믿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이야말로 잃어버린 생명을 되찾을 수 있으며 삶에 있어서 구원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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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손길>
마르코 5,21-43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하혈하는 부인을 고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배를 타시고 건너편으로 가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 호숫가에 계시는데,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곡히 청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나서시었다.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르며 밀쳐 댔다.
그 가운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 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과연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곧 당신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군중에게 돌아서시어,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반문하였다. “보시다시피 군중이 스승님을 밀쳐 대는데,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십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가 그렇게 하였는지 보시려고 사방을 살피셨다. 그 부인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 떨며 나와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다 아뢰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는,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 외에는 아무도 당신을 따라오지 못하게 하셨다. 그들이 회당장의 집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소란한 광경과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는 것을 보시고,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다 내쫓으신 다음,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당신의 일행만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다.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탈리타 쿰!”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 그러자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사람들은 몹시 놀라 넋을 잃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그들에게 거듭 분부하시고 나서,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이르셨다.
<손길>
그분께서
나에게
구원의 손길
건네시고
나는
그분께
믿음의 손길
내미니
그분의 손길
나의 손길
모아지는
바로 그곳에
새 세상이
열린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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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음의 손>
어려서의 기억입니다. 배가 아프다고 하면 어머니께서는 놋쇠 밥그릇뚜껑을 따뜻하게 하여 배에 올려놓고 쓰다듬어 주셨습니다. 때때로 “내 손이 약손이다.” 하시며 배를 만져주시면 곧 통증이 멈추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일반적으로 배를 차게 하면 탈이 나니까 밥그릇 뚜껑을 이용해 따뜻하게 해 줌으로써 그 원인을 치료해 주었던 것입니다. 거기에다 어머니의 사랑과 믿음이 담긴 약손이었으니 낫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마을 사람들에게서 명예와 존경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회당장이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누구 앞에 엎드린다는 것은, 항복한다는 것이요, 모든 것을, 맡긴다는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그의 믿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딸이 병으로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 다가온 큰 고통이 그를 무릎을 꿇게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의 능력을 만났습니다. 그렇다면 고통도 은총의 한 부분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의 시련과 역경, 고통, 눈물을 거두어 주리라!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라. 믿음으로 승리하여라!
일반적으로 회당장처럼 높은 직책을 가지고 있으면 근심 걱정거리가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회당장의 내면을 보면 감당할 수 없는 아픔을 안고 있었습니다. 회당장은 그 고통을 통하여 그동안 보지 못했던 곳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고 자신의 무능력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국 무릎을 꿇고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마르5,23) 하고 간곡히 청하였습니다. 만약에 회당장이 죽어가는 어린 딸을 절망과 슬픔 속에서만 바라보고 있었다면 아이를 살리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지위도 있고 부러워할 것 없는 회당장이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린 딸에 대한 한없는 사랑은 그보다 더한 일도 하게 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가능케 합니다.
우리는 일상 안에서 남모르는 근심 걱정거리를 안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말못할 고민이나 근심 앞에서 회당장처럼 무릎을 꿇는지, 아니면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마르4,39) 하고 두려워하는 태도를 보인 제자들의 모습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시련과 고통, 어둠 속에서도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내 안에 자리를 잡고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로마5,3-4) 오늘은 믿음의 손이 그리운 날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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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폭 아줌마가 운영하는 시장’이라는 제목의 유튜브 영상을 우연히 본 적이 있습니다. 태국의 공익광고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조폭처럼 무서워 보이는 한 아주머니가 임대료를 받기 위해 시장에 갑니다.
시장에 들어서자마자 한 장사꾼에게 임대료를 내라고 호통치고, 고기 파는 상인에게 가서는 정육점 저울을 빼앗아 바닥에 내동댕이칩니다. 이어서 누군가에게 손가락질하며 어떤 노점상의 물건을 전부 가져가라고 명령합니다. 분명 갑질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이었습니다.
이 모습을 누군가가 영상에 담아 인터넷에 올렸고, 사흘도 되지 않아 이 영상을 조회한 수가 자그마치 백만 회를 넘겼습니다. 이 영상을 본 네티즌들은 어떤 댓글을 남겼을까요? 분노로 가득 찬 댓글이었고, 아주머니의 심보를 지적하면서 이 사장으로 장을 보러 가지 말자고 호소하는 댓글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시장 상인들이 나서서 아주머니에 대한 진실을 설명했습니다. 임대료를 내라고 호통친 상인은 이미 열 번이나 임대료를 연체하고 있었던 것을 봐주고 있는 것이고, 정육점의 저울을 집어던진 것은 그들이 오랫동안 무게를 속여 팔았기 때문이며, 노점상의 물건을 가져가라고 한 것은 처지 딱한 상인이 노점을 계속 운영할 수 있게 자신이 직접 물건을 구매한 것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사건의 표면만 보면 세상에서 제일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가장 따뜻하고 잘 배려하며 누구보다 정의로운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이 실상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계속해서 추측성 기사만 내보내며 한 사람을 세상에서 가장 못 된 사람으로 만드는, 그래서 제일 나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지금의 우리 모습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섣부르게 판단하고 단죄하면서 또 하나의 죄, 그것도 가장 크고 무거운 죄를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른 견해를 가질 수는 있지만, 다른 이에게 돌을 던질 권리가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한 회당장이 자기의 어린 딸이 죽게 되었다고 손을 얹어 살려달라고 청합니다. 그래서 회당장의 집으로 가는데, 도중에 그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달받습니다. 그들의 말에 상관없이 집에 가서는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라고 말씀하시지요.
이에 대한 반응은 냉랭합니다. “예수님을 비웃었다.”라고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죽음만을 보고서는 섣부르게 판단하고 있습니다. 죽음까지도 지배하시는 예수님을 제대로 바라보고 있지 못하고 있기에 그들은 감히 주님을 향해 비웃음을 던졌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소녀를 향해 “탈리타 쿰!”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지금도 우리에게 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불신의 늪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우리를 향해, 온갖 비웃음과 잘못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우리를 향해, 함부로 판단하고 단죄하는 우리를 향해 그 모든 것을 뒤집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탈리타 쿰!”(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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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완성에로 이끄시는 믿음의 영도자>
“우리도 온갖 짐과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그러면서 우리 믿음의 영도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오늘 히브리서는 주님을 믿음의 영도자요 완성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복음은 믿음의 여인 얘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며칠 전 믿음의 탄생과 완성에 대해 이미 얘기한 바 있지만 오늘도 믿음에 대해, 믿음의 길에 대해 얘기하고자 하는데 주님이 바로 우리 믿음의 길잡이이시라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을 길이라고 하셨는데 보통은 아버지께 가는 길이라는 뜻에서 얘기하지만 오늘은 믿음의 길이라고 얘기해도 좋을 것입니다.
믿음의 영도자라고 하셨기 때문이고 믿음의 완성자라고도 하셨기 때문입니다.
풀어 얘기하면 주님께서 영도하시는 대로 따라가면 우리 믿음이 완성될 것이라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복음의 여인을 예로 들어 한 번 보겠습니다. 오늘 여인은 믿음이 훌륭하다고 칭찬을 듣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믿음이 처음부터 훌륭했을까요? 아마 열두 해 동안 병을 앓은 결과일 것입니다.
병을 앓기 전에는 믿음이 없었을 것이고, 병을 앓기 시작한 후에도 한동안은 믿지 않았을 겁니다.
믿기는커녕 오히려 하느님을 원망했을 것이고, 주님을 만나기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믿음이 미약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마중물이셨습니다. 우리말에 믿음을 주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는데, 주님이야말로 믿음을 주시는 분이고 그래서 믿음의 마중물이셨습니다.
오늘도 그러셨지만, 네 믿음이 너를 구하였다고 주님은 늘 믿음을 북돋우시고, 겨자씨만한 믿음이어도 그것으로 산을 옮길 수 있다며 믿음을 북돋우시잖아요?
물론 왜 이리 믿음이 없냐고 나무라실 때도 있지만, 그것은 거의 언제나 제자들을 향한 나무람이고 제자라면 더 큰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었지요.
아무튼, 주님은 믿음을 주시는 분이시어서 불신자를 믿는 사람이 되게 하시고, 인간을 믿는 사람에서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되게 하시고, 심판자로 하느님을 믿던 사람을 구원자로 믿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믿음을 주시는 주님은 힘 또한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은 당신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아셨다고 하잖아요?
이처럼 주님은 힘주시는 분이시고,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 힘이 전달되지 않지만 믿는 사람에게는 믿음만큼 그 힘이 고스란히 전달됩니다.
그래서 이제 그 힘으로 어떤 어려움을 겪고, 어떤 죄를 지어도 절망하지 않고 이겨낼 수 있습니다.
물론 주시는 힘을 받을 경우만 이겨낼 수 있고, 믿는 사람만이 그 힘을 받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믿는 사람에게 문을 열어주듯 믿음은 개방이요, 믿는 사람이 주님께 자신을 개방할 것이고 힘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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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믿음의 전사>
- 믿음도 보고 배운다 -
“탈리타 쿰!”
우선 오늘 강론을 읽기전 또는 읽은후 성가480장 "믿음으로" 4절까지 불러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어제에 이어 ‘믿음’이 주제입니다. 주님의 전사는 믿음의 전사입니다. 저는 병사兵士나 군사軍士라는 말마디보다 전사戰士란 말을 좋아합니다. 수도생활 초창기부터 참 많이 사용해온 ‘주님의 전사’란 말마디입니다. 평생 현역의 주님의 전사로 죽어야 제대라고 자주 말하곤 합니다. 영적전쟁은 살아있는 그날까지 계속될 것이고 죽어야 비로소 끝날 것입니다.
전사에게,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에게 평생 훈련은 필수입니다. 믿음의 훈련입니다. 사고사事故死나 객사客死, 병사病死가 아닌 싸우다 전사戰死해야 전사戰士라고 말하곤 하며 그렇게 되길 소원합니다. 일하다 공부하다 기도하다 죽는 다면 말 그대로 영적전사이겠습니다.
전사들에게 훈장처럼 달려 있는 부상이요 병들입니다. 저 또한 분투의 노력을 다해 반듯하게 살아왔지만 아픈 곳이 한둘이 아닙니다. 이 또한 주님을 섬기다가 믿음의 전투중 입은 영적상처의 상징으로, 또 영적전쟁의 승리의 표징인 훈장으로 생각하면 위로가 됩니다. 또 제 자신의 죄에 대한 보속補贖으로, 세상 죄에 대한 대속代贖으로 여기며 위로를 받습니다.
참 많은 이들의 저에 대한 관심사가 건강입니다. 속으로는 아프고 불편해도 안 그런척 건강하다고 말하곤 합니다. 이 또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사실 좀 불편하고 아파도 영적으로 건강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에게 우선적인 것은, 한결같은 것은 영적 전의의 열정입니다. 영적 사기의 충천입니다. 아무리 무기가 좋고 전략이 뛰어나도 영적 전의의 열정이 식어버리면 영적승리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정말 한결같은 전의와 열정, 훈련이 필수입니다. 아주 오래 전 고백이 새롭게 떠오릅니다.
‘왜관수도원에서 파견받아 떠나기 전날 밤 밤새 수도원 성전에서 주님께 3천배 절하였다 전날밤 9시부터 다음날 아침 4시까지 “불암산이 떠나면 떠났지 난 안 떠난다” 다짐하며,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성철 스님의 종신불퇴終身不退 말씀을 좌우명으로 삼아 살아왔다. 지금까지 오늘 하루만 살았다. 나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다’
여전히 살아있는 동안 유효한 고백이겠습니다. 언제나 거기 그 자리의 불암산은 정주의 표상이자 한결같은 인내와 믿음의 표상입니다. 불암산을 바라볼 때 마다 인내의 정주, 믿음의 정주를 새롭게 확인합니다.
이어 또 둘의 비유가 생각납니다. 용수철의 비유를 들며 주님의 전사는 영적탄력, 믿음의 탄력이 좋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육신의 탄력은 떨어져도 마음의 탄력, 정신의 탄력, 영혼의 탄력은 떨어져선 안된다면 분투의 치열한 노력을 통해 신망애信望愛의 탄력을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또 좀 저속하다 생각되지만 팬티끈과 팬티천의 비유도 잊지 못합니다. 팬티끈이 영혼이라면 팬티천은 육신이요, 팬티끈만 탄력이 좋아 튼튼하다면 팬티천은 낡고 떨어져도 이리저리 기워입으면 끝까지 입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팬티끈의 탄력이 떨어져 느슨하거나 끊어지면 좋고 새로운 팬티천도 무용지물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한마디로 영혼이 튼튼하고 탄력이 좋아 육신을 끌고 가야지 육신한테 영혼이 끌려가선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평상시 영혼 건강을 위한 믿음의 훈련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아 실천하라고 여러번 강론에도 인용했던 일이 생각납니다.
주님의 전사는 믿음의 전사입니다. 믿음도 보고 배웁니다. 자녀들에게 물려줄 최고의 유산도 믿음입니다. 제가 수도형제 도반들에게 가장 많이 보고 배우는 것도 믿음입니다. 공동전례기도 바칠 때면 그 간절한 믿음의 고백을 감지하곤 합니다. 우리는 오늘 제1독서 히브리서에서 참 좋은 믿음의 격려를 받습니다. 그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형제 여러분,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구름처럼 에워싸고 있으니, 우리도 온갖 짐과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영적전쟁은 단거리 100m 경주가 아니라 평생 한결같이 끝까지 달려야 할 장거리 마라톤 경주같습니다. 아무리 잘 달려도 도중 하차 하면 말짱 도루묵입니다. 지금까지가 아니라 지금부터가 중요합니다. 늘 새롭게 시작하는 파스카의 삶이어야 합니다. 불퇴전의 자세로 초발심의 자세로 진인사대천명의 자세로, 일일시호일의 하루하루를 살아야 합니다.
죽어야 끝나는 영적전쟁이요 영적 마라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친히 은총을 주시기에 이렇게 영적전쟁에 항구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를 구름처럼 에워싸고 있는 믿음의 증인들, 성인들이 이웃 믿음의 형제들이 큰 도움이 됩니다. 혼자의 믿음은 약하지만 믿음의 성인들과 형제들로 이뤄진 교회공동체의 믿음의 힘은 무궁무진, 그대로 하느님의 힘을 반영합니다.
오늘 기념하는 성 요한 보스코 참 놀라운 성인입니다. 살레시오 수도회의 창립자입니다. 성 요한 보스코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지만 어머니의 믿음을 그대로 보고 배워 믿음의 성인이 되었습니다. 믿음의 기적, 사랑의 기적입니다. 이미 살아 있을 때부터 많은 기적으로 성인으로 인정된 돈 보스꼬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수단의 돈 보스코’ 라고 불린 살레시오회 이태석 신부도 생각납니다. 오늘 영명축일을 지내는 저의 왜관수도원에서 수련시 수련장이셨던 사랑하는 김구인 요한 보스코 신부님과 성 아우구스티누스 연구의 대가인 존경하는 영원한 현역, 성염 요한 보스코 교수님도 떠오릅니다. 이미 성인의 경지에 이른 이분들의 믿음입니다. 성 요한 보스코 사제의 한생이 주님의 전사로서 참 치열했던 영적승리의 삶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청소년들을 참으로 사랑했던 성인의 두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청소년은 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랑받기에 충분합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알도록 사랑하십시오.”
마지막 임종시 유언도 감동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고 아무에게도 악을 행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나의 아이들에게 천국에서 기다리겠다고 전해 주십시오.”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의 모범은 현 프란치스코 교황님입니다. 87세 고령에도 영원한 현역의 백전노장百戰老將입니다. 오늘 1월31일부터 2월5일까지 제40차 사목 여정중 그 불편한 노구에도 아프리카의 콩고와 남수단을 방문합니다.
참 좋은 하느님의 선물들이, 우리를 구름처럼 에워싸고 있는 믿음의 증인들이 성인들이요 믿음 좋은 이웃 형제들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믿음의 영도자이자 완성자인 예수님과 더불어 참 좋은 믿음의 사람, 회당장 형제와 하혈병 치유를 받은 자매를 만납니다. 참으로 주님을 감동시킨 이들의 믿음은 그대로 주님께 응답받습니다. 하혈병을 앓던 자매에 대한 주님의 치유선언입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그대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딸대신 여러분 자신의 세례명을 넣어 나에게 주신 주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 오늘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어진 회당장 딸의 치유도 참으로 통쾌합니다. 둘 다 믿음의 승리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을 감동시켜 응답을 받아낸 이들의 믿음입니다. 회당장 아버지의 믿음 덕분에 주님의 도움으로 부활의 삶을 살게 된 그의 외동딸입니다.
“탈리타 쿰!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오늘도 힘들고 어려우면 예수님의 손을 붙잡고 “탈리타 쿰!”하며 곧장 일어나 새롭게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다시 시작해야 믿음의 탄력, 영적 탄력도 손상되지 않습니다.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자포자기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것이 대죄요 이런 경우는 하느님도 어쩌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서의 예수님의 모습은 그대로 히브리서의 묘사와 일치합니다. 우리가 늘 시선을 두어야 할 분은, 할 곳은 믿음이 영도자이자 완성자이신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눈길을 늘 이런 예수님께 두고 살게 하십니다. 히브리서의 가르침의 권고로 강론을 마칩니다.
“우리는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분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히브12,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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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마르5,41)
<믿음에서 나오는 참사랑!>
오늘 복음(마르5,21-43)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을 하고 있었던 부인을 고쳐주시는 말씀'입니다. 이 기적사화에서 '야이로의 믿음'과 '하혈하는 여인의 믿음'을 만납니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5,23)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5,28)
그러니 이 두 기적은 믿음이 낳은 기적입니다. 지금 우리 시대에 꼭 필요한 기적입니다. 믿음 안에서 사랑이 다시 깨어나고 다시 살아나야 하는 기적!
오늘은 '젊은이들을 사랑하고 청소년 교육의 심혈을 기울이셨던, 그리고 청소년 사도직을 중점적으로 하는 살레시오 수도회와 수녀회를 설립하신 성 요한 보스코 사제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요한 보스코 성인은 청소년들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젊은이들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야 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문제, 자녀들의 문제로 힘들어 하는 이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 문제의 일차적이고 근원적인 책임은 가정에 있고, 그들을 낳은 부모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의 결핍과 사랑의 모범이 되지 못해서. 세상의 가치를 따라가는 것에 너무 많은 힘을 쏟다보니, 사랑하지도, 사랑의 모범도 되지 못한 것에 그 일차적이고 근원적인 책임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나의 일방적 사랑이 아닌, 너를 더 생각하는 눈높이 사랑을 할 때, 자녀들이 진정으로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요???
'믿음 안에서 나오는 참사랑'이 넘쳐나는 성가정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달려가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그러면서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히브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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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u9_Tr2-K5C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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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이르셨다."(마르 5, 43)
삶의 여정을
따라가는
우리들
생활입니다.
아프하며
살아가고
아프하며 성장하는
우리들 삶의
관계입니다.
아픔과 성장은
피할 수 없는
우리들 삶입니다.
그래서
더딘 성장도
빠른 성장도
있을 수 있습니다.
빠르게
더 빠르게의
조급함을
멈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장 가까운
관계가 오히려
우리가
겪어야 할
건강한 과정과
필요한 고통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오해하고
방해하려 듭니다.
모두가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잘못된
방식이며
접근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오늘 하루를
또 살아갈 수
있습니다.
생명을
불어 넣어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생명있기에
성장도 있고
아픔도 있습니다.
소중한 생명이
놓쳐버린 것은
바로 소박한
우리의
일상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겪어야 할
성장통을
앓고 있는
소녀를 깨우신 후
제일 먼저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모두를
평범한 일상의
감사로
모아들이십니다.
함께 먹고
함께 나누는
생활의 기쁨이
최고의
기쁨입니다.
생활의 여정이
성장의
여정입니다.
생활 안에서
더 단순한
지혜를
선사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기본에
충실할 수 있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성급함이 아닌
함께 나누는
생활이 바로
가장 중요한
기본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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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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