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대부분의 식물들은 꽃을 피웁니다.이끼식물과 양치식물 등 꽃을 피우지 않고 포자에 의하여 번식하는 식물인 포자식물을 제외하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식물들은 왜 꽃을 피울까요. 당연히 열매를 맺고 종족을 번식시키기 위함입니다. 자손을 번식시켜야 한다는 그 대단한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식물은 온 힘을 기울여 꽃을 피워냅니다. 어떤 식물들은 꽃뿐만 아니라 향기까지 뿜어내면서 벌과 나비를 초청합니다. 아무래도 꽃과 함께 향기까지 원 플러스 원 서비스를 제공하니 손님들이 많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래야 더욱 높은 확률로 수정이 될 것이고 그러면 열매를 맺어 종족 번식을 더욱 용이하게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식물 그가운데서 나무를 예를 들겠습니다. 나무들은 대부분 추운 겨울(북반부에 해당)을 이겨낸뒤 이른 봄부터 부지런히 꽃을 피울 전략에 돌입합니다. 잎보다 꽃을 먼저 내는 식물도 있고 일단 잎을 내보낸뒤 꽃을 피우는 식물도 존재합니다. 나무에 있어 꽃은 모든 것을 상징한다고 보면 됩니다. 자신만의 대단한 작품이지요. 가동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동원해 꽃을 피워냅니다. 사람들이 별로라고 볼 수도 있는 꽃들도 나무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공력을 동원한 거대한 작품입니다. 꽃 색깔도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변 환경과 계절을 고려해 그런 빛깔을 갖도록 진화된 것입니다.
그런 귀한 꽃을 가급적 오랫동안 유지하고 싶은 것이 나무일 것입니다. 물론 수정이 이뤄지면 빨리 떨구어 열매를 키우는데 집중하는 것이 유리할 것이지만요. 나무는 사람들을 위해 꽃을 피우는 것은 물론 아니지요. 하지만 대부분의 꽃들은 수정이 이뤄져도 어느정도 시간을 두고 꽃잎을 떨어뜨립니다. 나무도 그토록 공을 들여 만든 작품을 버리기가 아쉽기도 할 것이라 생각이 들지만 실상은 꽃잎을 인위적으로 떨구는 것이 더욱 힘들다는 것을 나무들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아쉬움을 뒤로 하고 과감하게 꽃을 버리는 매정한 나무들도 있습니다. 표현은 매정하다고 했지만 실상은 나무의 생존 전략이기도 할 것입니다. 바로 여름철 능소화와 겨울철 동백나무입니다. 능소화는 여름철 꽃이 귀한 시기에 피어나 귀여움을 받는 나무입니다. 여름철 대표 꽃이 바로 능소화와 배롱나무꽃 아닙니까. 능소화는 화야산방이 위치한 경기 북부지역에서는 6월말에 피어납니다. 능소화는 꽃잎이 시드는 것을 좌시하지 않습니다. 피운 후 벌나비가 다녀가면 그냥 꽃이 떨어져 버립니다. 능소화나무에서 꽃이 시드는 것을 볼 수 없는 이유입니다.
능소화가 꽃을 과감하게 떨어뜨리는 것을 두고 일찍 숨을 거둔 처녀의 모습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겨울철 무심하게 꽃이 떨어지는 동백나무와 비교해서 하는 말일 것입니다. 동백꽃은 일찍 숨을 거둔 총각을 비유해서 표현됩니다. 특히 제주 4.3사태때 숨져간 영혼들을 기리면서 동백꽃이 시들지 않는 정신의 상징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반면 능소화는 총각이 아닌 일찍 숨진 처녀들을 기리면서 붙여진 이야기일 것으로 판단합니다.
혹자는 동백나무와 능소화는 두번 핀다고 하지요. 나무에서 한 번 피고 떨어져 땅에서 또 한 번 피어난다는 말일 것입니다. 봄철 일찍 피어나 반가운 꽃인 목련화는 처음 피어날 때는 너무도 청초하고 순결해 보이지만 조금 지나면 지저분해지면서 꽃잎이 떨어집니다. 그런 목련화에 비해 능소화나 동백꽃은 떨어져도 보기에 나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조금만 지나면 지저분해지는 것은 목련화나 능소화 동백꽃이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차가 조금 있다는 것이겠지만 말입니다. 꽃이 상대적으로 큰 나무들의 숙명이기도 합니다. 꽃이 작은 벚나무꽃은 져서 땅에 떨어져도 그다지 지저분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과는 차이가 납니다. 떨어진 능소화를 치우는 것도 일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그래도 꽃이 별로 없는 여름철에 주변을 밝게 해주는 능소화가 있어 좋습니다. 능소화는 하늘을 능가하는 꽃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으니 예전 우리들의 선조들은 이 능소화를 매우 과대평가한 것이 아닌가 보입니다. 옛 선비들은 능소화꽃이 질때 송이채 떨어지는 것을 보고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과거시험에 장원급제한 인물에게 주어지는 어사화에 사용되기도 했고 양반들의 꽃이라고 여겨져 평민들은 함부러 키우지 못하게 했다고 전해집니다.
식물학적으로는 능소화와 동백꽃이 질때 꽃송이가 통째로 떨어지는 이유는 꽃자루가 없이 꽃부리가 아래쪽에 붙어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한 능소화는 더운 여름철에 피는 꽃이어서 그 꽃을 유지하기가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가급적 빨리 떨어뜨리고 새로운 꽃을 피워내는 것이 경제적이고 수정될 확률도 높을 것이라는 판단에서 생긴 버릇이 아닌가 보여집니다. 동백꽃도 추운 겨울 피는 꽃인 만큼 오래 유지하는 것보다 조기에 끝을 내고 새 꽃을 피워내는데 집중하기 위한 하나의 생존전략일 것이라고 추측해 봅니다.
오랫동안 아름다움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는 인간들에 비해 조기에 낙화하는 전략을 구사하는 능소화와 동백꽃이 훨씬 멋져보이고 진정한 아름다움을 아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요즘 제철인 능소화를 볼 때마다 나무들의 전략과 살아가는 자세가 훨씬 어른스럽고 총명하다고 느껴집니다.
2024년 6월 30일 화야산방에서 정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