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성수 야고보 신부
주님 성탄 대축일 - 낮 미사
이사야 52,7-10 히브리1,1-6 요한1,1-18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예수님 성탄의 기쁨이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이 성탄을 두고서 요한복음의 저자는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네.”(요한 1,14)
오늘 우리도 가난한 목수 집안에서, 누추하고 냄새나고 비좁은 마구간에서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하느님을 봅니다. 저는 구유에 잠든 이 연약한 아기를 바라보면서,
어째서 전능하신 분이 이토록 보잘것없는 탄생을 택하실 수밖에 없었는지 묻게 되었습니다.
그 해답은 오래지 않아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요한 1서 4,16)라는 말씀 안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영적 가난과 비참한 조건 속에 놓여 있든 간에,
변함없이 사랑한다는 사실을 전하기 위하여 이렇듯 우리와 같은 가난과 비참 속에서
태어나시길 마다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한동안 우리는 코로나19의 대유행으로 인해 여러 실패와 상처를 마주하였고,
불확실성의 체험으로 인해 절망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구유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넘치는 사랑 안에서 다시금 희망을 되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탄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고통과 절망을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끊임없는 사랑으로
지지해주시는 분임을 잘 드러내 주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약하고 여리게 태어나셨지만, 우리 구원을 위하여 가장 강하고 영광스럽게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기억하며, 그 사랑에 우리 자신을 맡길수 있다면
‘그 무엇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로마서 8,35 참조)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구유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의 방식 말고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이 하느님의 사랑이 나와 같이 걱정과 고통에 놓인
모든 이웃을 향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영광이 목자들의 둘레를 비추었습니다.
당대 천대받던 이들의 밤을 비춘이 사건은 하느님의 사랑이 낮은 곳에서부터 높은 곳에
이르기까지 당신 자녀들 모두를 위한 것임을 이야기해줍니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하고 궁핍하게 태어나셨습니다.
바로 우리가 당신과 같은 처지에 놓인 이웃을 사랑해야만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태오 복음서 10장 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하느님께서 거저 주셨던 그 방식대로, 우리도 우리 자신을 기꺼이 하느님과 이웃에게
선물로 내어줄 때 주님 탄생의 기쁨을 온전히 간직할 수 있습니다.
오늘 밤,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모든 사랑에 담긴 그 무상(無償)을 묵상하고 감사드리며,
그 사랑을 돌려드리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 모두가 되겠다고 기도해봅시다.
주님의 영광이 여러분 인생의 모든 날을 밝고 아름답게 비추어주기를 빕니다.
필리피서 2장 5절의 말씀으로 마치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인천교구 방성수 야고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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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철 요한 세례자 주교
주님 성탄 대축일 낮 미사
이사야 52,7-10 히브리1,1-6 요한1,1-18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9)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신 주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주님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주님의 빛 안에 모두가 충만한 기쁨이 넘치는
성탄이 되기를 바라며,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그 은총이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이들은 구세주의 탄생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구약의 모든 백성들이 구세주의 오심을
기다렸듯이, 현재를 사는 우리도 특별히 대림 시기를 지내며 차별, 대립과 갈등이 가득한
이 세상에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으로 오실 구세주의 탄생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우리 모두에게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큰 사건입니다.
모든 이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뜻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이 구세주의 탄생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 모두를 구원하신다는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이 성탄입니다. 그래서 성탄 밤 미사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티토서 2,11)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는 이렇게 성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분은 사람에 대한 사랑 때문에 사람이 되시고, 영혼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인간 영혼과 결합 되십니다.”
이처럼 성탄의 의미는 모든 이들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가톨릭 교회 교리서』도 “말씀은 이처럼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려고
사람이 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주셔서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공동번역성서』 1요한 4,9)”(458항)라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모든 이들을 비추는 참빛이시며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사람이 되어 오신 구세주께서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끝나지 않는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의 어려움은 단순히 코로나19 감염 때문만은 아닙니다.
모든 이들이 코로나19로 인해 야기된 인간적, 사회적 그리고 경제적 어려움을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3년 전 코로나19가 시작되면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에
‘나만 잘하면, 우리나라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이 얼마나 편협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전 세계 모든 이가 형제자매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서로 도와야 함을 깊이 느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제까지 생각했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좀 더 넓은 마음으로 모든 이들을 향한
사랑의 연대와 다른 이의 아픔에 대한 공감과 돌봄의 중요함을 깊이 체험하였습니다.
전 인류에게 위협으로 다가온 감염병 확산은 공동의 집을 살아가는 우리가 한 형제임을
느끼게 해 주었고, 교황님의 말씀처럼 형제애만이 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또한 어렵고 고통받는 이들의 소리를 뒤로 하고 자신만의 이익, 자국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형제애가 아닌 무관심이 더욱 점철되고 있습니다.
자신만의 안위나 소수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문화는 서로의 인간관계를 어렵게 하고,
사회적으로는 양극화 현실을 더욱 부추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당당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못하고 있고, 말을 한다 하더라도
그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실 속에서 모두가 소통 부재로 인한 불만과 화만 가슴에 쌓아두고
살아가는 실정입니다. 그래서인지 점차 우리는 이웃이 외치는 고통의 소리에 귀를 닫으려 하고,
같은 마음으로 함께 슬퍼하지도 못하며, 서로의 의견을 듣지 않는 세상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런 어려움 속에 예수님께서 빛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 빛은 소수의 몇몇을 비추는 빛이 아니라, 모든 이들을 비추는 참빛이십니다.
빛으로 오신 구세주는 우리에게 열린 마음으로 모두와 함께 이 기쁨을 느끼기를 원하십니다.
모두가 함께 그 빛이 주는 희망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모두가 성탄을 통해 주시는 당신의 사랑을 깊이 느끼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는 그 누구도 예외가 없다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인간이 되신 사랑을 깊이 느끼는 이 성탄에 우리 모두 구세주의
사랑을 살아가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회에서 소외되고, 고립된 이들에게 다가서는 형제애를 나누는 시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경제적인 고통 속에 있는 이들에게 나눔의 손길을 베푸는 시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마음의 문을 닫고 있는 이들, 자신만이 옳다는 생각에 갇혀있는 이들에게는
만나고 대화하는 시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 밖에도 다양한 빛의 자녀다운 행동으로 우리 모두 하느님 안의 한 형제로서
함께 기쁜 성탄을 보냈으면 합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성탄의 기쁨이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천주교 인천교구 정신철 요한 세례자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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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수 아우구스티노 주교
주님 성탄 대축일 밤 미사
이사야 9,1-6 티토 2,11-14 루카 2,1-14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
찬미 예수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 성탄을 축하드리며, 교구민 한분 한분 모두에게
주님께서 탄생하시듯, 충만한 은총을 누리시기를 빕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완전한 구원을 이루어주시기 위하여, 아주 긴 시간을
기다리셨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시어 믿음의 역사를 시작하시고,
그 후손인 다윗에게 구원자 메시아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아들이시며 말씀이신 예수님을 우리 가운데 보내시어,
우리를 당신과 다시 화해시켜주시고 구원을 이루어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긴 시간을 기다려주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집트의 비참한 노예 생활에서의 기적적인 탈출과 황량한 광야에서 40년 힘든 여정에
만나와 메추라기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양식을 베풀어주시면서 그들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뼛속 깊이 새겨주셨습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차지하고, 주변의 나라가 부러워할 만한 문화를 이루어주시어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자부심을 충분히 느끼게 해주셨습니다.
비록 그들이 하느님의 뜻에 등을 돌리고 타락한 역사에 빠져 유배의 고통을 겪게 되지만,
그 고통의 시간에, 지난 긴 역사에서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하느님의 자비와 권능을 돌아보고
깊이 회개하여 하느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그들 몸속 깊이 새겨져 있던 하느님의 진실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가난하고 가진 것 없던 시절에도, 부유함을 누리며
하느님의 뜻을 잊고 살던 때에도, 하느님께서 자신들에게서 눈을 돌린적이 없으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특히 유배의 긴 고통의 시간 속에서 자신들이 왜 이렇게 비참해졌는지
반성하면서 이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이제 그들은 오래전부터 주님께서 해주신 약속 곧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다윗 가문에서 영원한 왕권을 세워주시리라는 약속이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태어날 한 아기에게 왕권이 주어지고 그 이름이 용맹한 하느님이요
평화의 군왕으로 불릴것이라며, 다윗의 왕좌와 그의 왕국 위에 놓인 그 왕권은 강대하고
그 평화는 끝이 없으리라고 예고합니다(이사 9,5-6).
그런데 그 아기는 화려한 왕의 모습이 아니라 가난하고 비천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십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아이를 낳는데, 여관에 빈방이 없어서
아기는 말구유에서 태어납니다. 이미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자리에서 이 세상에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당신을 낮추어 오신 주님은 그 태어나신 자리도 이렇게 낮은 곳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누리려고 하다 보면, 낮은 곳에 임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이렇게 비천한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다면,
이 땅에는 그분의 탄생을 겸손되이 받아들인 두 사람이 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입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하게 되리라는 천사의 말에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이는 의심하는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비천한 자신이 주님의 어머니로 선택되었다는 말에
더할수 없이 놀라는 반응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이라는 천사의 말에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대답하는 데에서, 마리아가 평소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종이라는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아기 예수님 탄생에 관해 목동들이 전하는 놀라운 소식을 들었을 때,
그리고 어린 예수님이 성전에서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했을 때, 그 말의 뜻을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이 모든 것을 마음에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루카 2,19.49-51).
요셉은 마리아와 약혼한 사이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아이를 잉태한 것이
드러났습니다. 요한복음 8장의 간음한 여인처럼 이스라엘의 율법에 따라 마리아도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처지였습니다. 요셉이 그렇게 한다 해도 그를 비난할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조용히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마리아가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보내 주려고 결심한 것입니다.
이보다 더 착한 사람이 없을 듯 싶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은 달랐습니다. 마리아가 아이를 잉태한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천사의 말을 듣고 요셉은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였습니다.
요셉은 여기에서 인간의 선한 생각도 하느님의 뜻에 미칠 수 없다는 사실을 배우고,
기꺼이 하느님께서 예수님과 마리아를 통해 하실 일에 자신의 삶을 봉헌합니다.
이렇게 마리아는 구원자 그리스도를 세상에 낳아주는 도구로,
요셉은 이 일에 꼭 필요한 협력 자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의 자비를 믿고 사는 우리는 구원의 역사에서 마리아로
혹은 요셉으로 불림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마리아처럼 주님의 거룩한 도구로,
요셉과 같이 협력자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우리 가운데 태어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형제자매님들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사십니다.
그분에게 시선을 주십시오. 고해성사 안에서 기다리시는 그분에게 가십시오.
성체성사를 통해 당신 자신의 생명을 주시는 그분에게 달려가십시오.
가난한 이웃 형제들에게 손을 내미시는 그분의 손이 되어주십시오.
형제자매님들 안에 주님께서 태어나시길 기도합니다.
주님의 강복을 여러분 모두에게 전합니다.
천주교 대전교구
김종수 아우구스티노 주교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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