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이주 비극의 시작
호태왕의 작전에 말려 수도인 곰나루(지금의 공주)를 버리고 일본으로 망명한 오오진천황은 삼도에 나라밝지를
세우고 그곳에 정착하게 된다. 하지만 이때문에 외밝지와 본국(한반도)은 비극적인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밝지인들은 천황이 망명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앞다투어 일본으로 향했다. 하지만 배가 부족하여 밝지인(일본인)
은 조그마한 조각배를 타고 위험한 현해(지금의 대한해협)를 건너는 모험을 강행한다. 험난한 현해의 파도에
많은 사람들이 빠져죽었으며 그들은 죽음을 면하기 위해 얼굴을 검게칠하고 기둥에 의지한채 항해를 계속해야
했다. (얼굴을 검게 칠하면 귀신들이 자신들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 본국(한반도)엔 더이상 천황이 존재하지 않았다. 한반도에 남아있던 밝지의 담로국인 십제는 본토의
백성들이 계속 일본열도로 넘어가는 상황을 그대로 볼 수 없었고, 마침내 밝지가 다스리던 본국을 십제의 영토로
흡수해 버렸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혼란이 있었지만 이를 잘 견뎌낸 십제는 그 이름을 남부여로 고치고 새로운
왕조를 이끌어나가게 된다.
십제가 본토를 흡수하자 일본의 천황은 이제 옛 담로국이었던 십제를 만만하게 볼 수 없게 되었음을 깨닫고
사신을 보내 양국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기로 했다. 이로서 비류천황의 이복동생 온조가 일으켰던 십제는
남부여라는 이름의 나라로 다시 태어나 밝지로부터 독립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옛 강대했던 밝지는
3개(남부여, 일본, 외밝지)로 쪼개져 그 강대한 힘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실라의 성장
부여인들이 대거 천황을 따라 일본으로 이주해버렸으니 남부여의 힘은 미비하기 그지 없었다.
(대략 120현민이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이는 본국의 백성 절반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이틈을 이용해
실라는 화랑군을 동원해 남부여의 옛 십제땅을 공격해 점령하고 한강유역을 손에 넣게 되었다. 남부여의
명농왕은 실라와의 공존을 모색하여 그의 딸을 진흥왕에게 시집보냈다. 하지만 진흥왕은 남부여가 옛 밝지와
같은 강대국이 아닌것을 간파하고 구천땅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명농왕은 크게 노해 직접 3만의 대군을 이끌고
실라와 싸웠지만 실라군에게 참패하고 자신도 전사하고 말았다. 명농왕이 죽자 그 시호를 성왕이라 했다.
남부여를 격파한 실라는 밝지의 속국인 가야마저 점령하고 한반도 남부의 패자로 군림했다. 이때 멸망한
가야인들의 다수는 일본으로 건너가 오늘까지 그 뿌리를 이어가고 있다.
이후 남부여는 의자왕 때 재기하여 실라를 압박했지만 후에 의자왕의 폭정과 사치로 인해 나라가 피폐해졌고
결국 나, 당 연합군의 공습을 받아 멸망하고 말았다.
외 밝지의 멸망
거련열제(장수왕) 이후 수도를 펴라로 옮기고 적극적인 서진정책을 펴 온 가우리는 온달을 대장으로 하여
외밝지를 공격해 갈석산을 빼앗고 그 기세를 몰아 배찰산, 유림관마저 점령하니 이로써 외밝지의 시발점인
대방고지 위밝지는 590년 만에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서기 576년, 주 무제는 외밝지가 옛 강력했던 세력이 아님을 간파하고 8만의 군사를 동원해 진주, 서경등을
어렵지 않게 점령했다. 이 과정에서 외 밝지는 별다른 저항도 못하고 무너졌는데 그 이유는 외 밝지 안에서
내분이 일어나 북주의 공격을 막을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주 무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업성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외 밝지의 속령인 북제를 멸하고 말았다.
본국인 본밝지는 남부여와 나라 밝지로 분열되어 외밝지를 도울 여력이 없었으므로 외 밝지는 산둥반도와
양쯔강 상, 하류에 있던 성양군, 광능군마저 상실하고 그 역사를 마감하고 말았다.
밝지는 아직도 존재한다.
밝지는 아직도 그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비록 국호가 일본으로 바뀌기는 했지만 나라엔 아직도 천황이 존재하며
그들만의 전통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첫댓글 잘 봤습니다..드라마 주몽으로인해 덤으로 고구려 공부까지 했었는데, 역사는 재미 있으면서도, 등장인물이 너무 광범위한 암튼 암기 목록이 너무 많아 뇌 저장공간이 빡쎄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