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우 바오로 신부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사도행전 6,8-10; 7,54-59
마태오 10,17-22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모든 탄생이 신비이듯 모든 순교 또한 신비입니다.
모든 신비는 하느님의 뜻을 찾는데서 시작됩니다.
다시금 하느님께서 높아지시고 우리는 다시금 낮아지는 것입니다.
인간은 서로를 죽이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다시 살아가게 하십니다.
생명이 생명의 의미를 모르고 사는 우리들에게 순교는 생명의 참된 의미가
하느님께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수시로 무너져 내리는 우리의 믿음을 순교는 다시 일으켜 세워줍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탄생 앞에 내어드릴 것은 성 스테파노 순교자같은 믿음뿐입니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는 기꺼이 자신을 내어드리는 봉헌이 있습니다.
봉헌은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다시 보게 하며 깨닫게 합니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하느님을 향해 가는 우리들입니다.
박해는 하느님을 외면하기에 자신을 볼 순 없지만 순교는 하느님을 따르기에
자신과 주위를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기에 성탄이며 사랑하기에 순교가 닫힌 하늘을 열 수 있습니다.
하느님 없는 인생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성 스테파노 순교자는
하느님 존재를 우리 현실 안으로 끌어들여 놓아주십니다.
순교 없이 생명은성장할 수 없듯 신앙 없이 생명은 하느님을 품을 수 없습니다.
순교는 성탄처럼 소금과 빛이 되는 탄생입니다.
하느님으로 행복한 우리의 성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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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사도행전 6,8-10; 7,54-59
마태오 10,17-22
오늘 교회는 그리스도교 첫 순교자인 복된 스테파노의 천상 탄일을 기념합니다.
그는 설교를 통하여 사랑의 복음을 전한 첫 열매입니다.
그 사랑은 하느님께서 직접 당신 아드님을 지상에 파견하시고
우리 가운데에 당신 천막을 세우게 하셨습니다.
오늘부터 여러 증인들의 기념을 통하여 교회는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강생하신 목적,
곧 사람들을 사랑으로 충만한 하늘로 데려가시려는 것임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의 선교 대화에 속하는 복음은 열두 제자에게 하신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마태 10,16).
제자들은 스승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걱정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곁에 영원히 함께 계시고, 그분의 영을 통하여
그들을 도와주실 것이라고 안심시키십니다.
스테파노 첫 순교자는 스승을 본받아 희생된 첫 어린양입니다.
가말리엘 학파에서 바오로의 동료였던 스테파노는 사도들의 설교를 충실히 받아들였고
일곱 부제 가운데 사랑의 봉사를 위하여 선발되었습니다.
“은총과 능력이 충만한 스테파노는 백성 가운데에서 큰 이적과 표징들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바꾸어 놓은 복음을 가만히 놓아둘 수 없었습니다.
반대와 폭력이 쏟아져도 뜻을 굽히지 않았고, 위협에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강한 그는 피를 흘리면서도 계속 복음을 증언하였습니다.
스승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하느님께 자신의 영을 받아 주시고
그 박해자들을 용서해 주시라고 청하였습니다.
스테파노는 목숨을 잃는 희생의 순간까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복음을 증언하였고
계속해서 증언하는 이들의 행렬을 이끕니다.
믿음의 영웅적인 행위 없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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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진 베르나르도 신부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사도행전 6,8-10; 7,54-59
마태오 10,17-22
말과 말씀 - 설명과 해석
말과 말씀을 구태여 구분 지을 필요는 없지만,
말은 아무래도 쉽고 가볍게 할 수 있는 것처럼 들리고,
말씀은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 좀 더 귀 기울여야 하는 것으로 들립니다.
빈 말도 있고 저잣거리 말도 있으며, 지껄임이나 에두른 말도 있습니다.
이와는 달리 말씀이라고 하면, 무언가 ‘쓸 수 있는 말’, ‘쓸모 있는 말’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저잣거리 외침 정도나 지껄임 정도의 말로 오신 것이 아니라,
진정 우리에게 필요하고 없어서는 안 되는 ‘말씀으로 오신 분’이라고 알아들을 수도
있습니다.
박해와 순교의 순간에 애써 말하려 하지 말고,
‘너희 안에서 하느님의 성령이 말씀하시도록’ 하라는 것도,
말씀이신 하느님께서 꼭 필요한 말씀을 주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굳이 구분할 필요는 없겠지만, 설명은 말하는 이에게 주도권이 있고, 해석은 듣는 이에게
주도권이 있습니다.
설명의 설(說)이 ‘말을 달리한다’는 뜻풀이를 가지기에,
‘쉽게 말해서’, ‘달리 말해서’ 등으로 쓰겠지만, 어느 경우에는 쉽게 말하려던 것이
더 어렵게 되고 달리 말하는 것이 더 꼬이게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애써 말하려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기다리라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성 스테파노 순교자는 박해자들에게 애써 말하는 설명이 아니라,
순교라는 것으로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게 했고,
말씀은 적중하여 많은 이들에게 올바로 해석되었습니다.
전주교구 박동진 베르나르도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
가톨릭 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