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니체와 그의 어머니(왼쪽). 평생 ‘자유정신’을 옹호하며 가족, 사회, 국가 등 모든 공동체적 삶을 비판했던 극단적 개인주의자 니체는 나이 들어 정신 질환으로 어머니와 여동생의 보살핌을 받게 된다. 만약 그가 말년에 정신적으로 온전해 가족의 희생을 알았다면 가족과 결혼 제도에 대한 자신의 비판을 재고했을지도 모른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혼자 살기냐 함께 살기냐
요즈음 결혼이 줄어든 이유는 독신을 선호하는 사람의 수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처와 자식이 없이 혼자 사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는 식으로 비혼의 여러 장점을 보여주는 ‘나혼산’의 결말은 어떨까? 독일 철학자 니체는 결혼을 하지 않고 평생 혼자 살았다. 물론 청년 시절에는 친구들과 잘 지내며 우정의 중요성을 알았고 몇 명의 여자에게 사랑을 고백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혼기를 놓치고 점점 나이가 들면서 사교의 기회도 줄어들어 니체는 자신의 비자발적인 고독을 철학자의 숙명처럼 정당화했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홀로 지낼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에 타인과의 만남에서 얻을 것은 상처밖에 없다는 논리다.》
니체는 ‘일반적인 결혼’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여성의 해방이나 여성의 평등권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던 니체는 ‘여성에게 가려면 회초리를 잊지 말라’는 말을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당부하면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결혼이 자칫 생물학적인 퇴행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남성의 창조적 번식이라는 고차적인 이상에 걸맞아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유일한 결혼의 자격을 지닌 철학자는 결혼을 하지 않는다.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예외적으로 결혼한 것은 ‘그러한 명제를 제시하기 위해 아이러니와 결혼’했다고 니체는 변호한다.
무엇보다 ‘자유정신’을 갈구했던 그에게 결혼은 삶을 옭아매는 ‘거미줄’과 같은 구속이다. 니체뿐만 아니라 자유롭게 살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결혼이라는 사회적인 구속을 좋아할 리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가족에 대한 불신 또한 누구보다 깊었는데, 의견 차이로 불화를 겪었던 누이와 어머니를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가족의 존재 의미 자체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니체가 꿈꾼 자유로운 삶이 영원하지는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잘 드러나지 않다가 상실을 통해 그 의미가 드러난다.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인간의 삶은 질병으로 무너질 때 건강의 소중함을 깨닫게 한다. 니체도 예외는 아니었다. 평생 ‘자유정신’을 주장했던 철학자 니체도 병원에 누워 있을 때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평생 병에 시달렸던 니체는 1889년 1월 3일 정신 발작을 일으킨다. 토리노의 카를로 알베르토 광장에서 채찍에 맞는 말의 목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면서 쓰러지기 전에 니체는 이미 토리노에 머물 때 알몸으로 춤추고 있는 것이 하숙집 주인에게 목격되었다고 한다. 니체가 광장에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친구 오버베크는 니체를 바젤 병원으로 데려가서 ‘진행성 마비’라는 진단을 받게 된다. 한마디로 평생 치료 불가능한 정신병이다. 진료 과정 중에도 니체는 노상에서 아무나 잡고 포옹하고 키스하는가 하면 담벼락을 기어오르기도 했다. 이렇게 위대한 철학자인 니체 정신의 역사는 1889년 1월에 끝나고 그 후 정신의 혼미 상태는 무려 10년 이상 계속되었는데, 중요한 점은 극진한 간호와 돌봄을 가족이 도맡았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어머니가 간호를 하다가, 나중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여동생이 떠맡았다.
어머니가 니체를 돌볼 때 가장 힘들었던 점은 목욕시키는 일이었다고 한다. 니체의 정신병의 상태는 좋아지지 않는데, 니체가 목욕할 때 시끄럽게 굴기 때문에 바리케이드를 쳐서 차단한 후 침실에 큰 욕조를 가져다 놓고 그 안에 20통의 양동이로 물을 채워 목욕을 시킨 다음, 그 욕조를 밖으로 끄집어냈다고 한다. 이틀마다 다 큰 아들을 목욕시키는 일이 참으로 ‘번잡한 일’이었다는 고백이다.
니체의 작품에서 다루었던 행복의 조건은 그가 쓰러진 후의 상황과 비교할 때 여러 가지 모순점이 드러난다. 극단적인 개인주의자였던 니체는 모든 형태의 공동체의 삶을 부정하여 가족, 사회, 국가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니체는 국가를 ‘가장 냉혹한 괴물’로 비판했다. 그러나 독일 국가를 부정했지만 ‘장교’로 복무하려는 명예욕에 불탔고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위생병으로 짧은 군복무를 마친 후 니체는 평생 ‘국가의 연금’에 의존해서 살았다. 또한 의사의 진단을 온 가족이 불신해 니체는 나름의 치료법을 만들기도 하였지만, 실제로는 의사와 여성 간호사의 병간호를 꾸준히 받았다.
아플 때 가족이 가장 먼저 생각나듯이 질병으로 쓰러지면 우리를 품는 것은 가족이다. 만약 니체가 정신적인 붕괴 이후 10년이나 자신이 정성스러운 돌봄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생각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가 비판했던 가족과 여성, 결혼의 제도뿐만 아니라 국가에 대한 비판을 재고(再考)했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병든 자신을 간호하느라 고생했던 어머니와 여동생의 희생을 알았더라면 가족과 화해를 미리 이뤄냈을 것이다.
‘나혼산’ 프로그램에서 그려지듯이 혼자서 사는 것은 함께 사는 것보다 행복해 보인다. 그러나 공동체의 삶의 가치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가족과 국가는 이기적인 개인을 함께 연결하는 끈을 만든다. 마치 숨쉬는 것을 전혀 못 느끼는 것처럼 함께 살아가기의 필요성을 잊고 사는 일이 많다. 가족의 소중함도 가끔 잊고 이 세상에 나 혼자 태어난 듯 착각에 드는 일이 있다. 니체의 삶은 역설적이다. 건강할 때 그토록 비판했던 공동체의 삶의 의미를 정작 몸이 아플 때 알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병의 상태에서 그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 혼자는 살 수 있지만, 혼자서만은 살 수 없다.
보살핌이 필요한 프리드리히 니체가 죽기 1년 전(1899) 그의 여동생 엘리자베스와 함께. 강용수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원
프레드 이야기 기자 존 릴런드는 88세 프레드를 인터뷰했다. 프레드는 힘든 삶을 살아 왔다. 만 세 살도 되지 않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탓에 어머니와 할머니가 그와 형을 키웠다. 어머니는 재봉사로, 할머니는 청소부로 일했다. 그러다 대공황으로 어머니가 직장을 잃었다. 집 안의 석탄 난로 곁에 모여 지독한 추위를 견뎌야 했지만 그는 불행하지 않았다. "어릴 땐 아무리 가난해도 가족들이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걸 알면 행복해요. 세상에 대해 아는 건 그게 전부니까요." 그는 어떤 상황이 닥쳐도 자신이 문제라고 생각할 때만 문제가 될 뿐, 그렇지 않으면 괜찮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두 발가락의 일부가 괴저로 인해 이동이 제한 되고 몸도 약했지만 주어진 하루를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따뜻한 음식을 먹고 햇살 가득한 오후를 맞을 수 있음에 감사했다. 12월 초, 릴런드가 그의 아파트를 찾아갔다. 집주인이 방치한 아파트는 답답하고 한기가 돌았다. 날씨가 좋아도 혼자서는 나들이를 나갈 수도 없었다. 그 와중에도 그는 불평 대신 여전히 누릴 수 있는 즐거움에 집중했다.
"세상엔 나를 행복하게 해 주는 것들이 많아요. 씻고 옷을 입고 머리를 빗는 게 좋아요. 그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며 살 수 있길 바랍니다." 릴런드는 프레드와 대화하며 그를 따라해 보기 시작했다. 불평거리를 생각하는 대신 당연하다고 여긴 것들에 고마워하기로 한 것이다. 부모님과 애인에게 받는 사랑, 친구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 그러자 무언가에 감사한다는 건 우주의 상서로운 힘이 나를 위해 작용한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릴린드는 말했다. "삶은 외롭게 살아가는 전투가 아니었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선물이자 나를 든든히 받쳐 주는 힘이었어요."
이은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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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안녕 하세요......망실봉님
감동방에 좋은 글 고맙습니다
11월..수고 많으셨어요
12월에도 행복하세요..^^
반갑습니다
핑크하트 님 !
다녀가신 고운 걸음
멘트 감사합니다 ~
새로이 맞는 12월은
보람찬 일들로 가득하시길
소망합니다 ~^^
좋은글 감사 합니다
반갑습니다
공감 댓글주셔서
감사합니다 ~
오늘도
편안하고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동트는아침 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