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이 닫힌다 사방의 문이 닫힌다 석탄이 바닥난 갱도 막장이 무너져 파묻힌 사람들이 다시 석탄이 되기까지 사막에선 다시는 석유가 솟지 않았다 사람이 살지 않는 사막의 하늘엔 별자리마다 별이 뜨고 막힌 도로 끝에 자동차들 산처럼 쌓여 바퀴가 빠진 채 녹슬어 갔다 고속도로를 달려가는 자전거와 마차들 저녁 밥 짓는 연기보다 서둘러 사라진다 텅텅 비어버린 고층 빌딩 캄캄한 구멍마다 고양이가 운다 죽었던 강은 인간의 영혼보다 깨끗한 눈을 떠 다시 흐른다 석유도 석탄도 사라진 자리에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아들딸이 한 집에서 텃밭을 가꾼다 먼 옛날 지진과 해일이 쓸어간 뒤 전쟁이 끝나고 샘물을 길어 밥을 짓는 인간의 손이 꽃처럼 아름답다. ☆★☆★☆★☆★☆★☆★☆★☆★☆★☆★☆★☆★ 《2》 가보지 않은 곳
강인한
길 솟은 억새와 쑥 덤불이 웃자란 곳 몇 걸음 아닌데도 나는 늘 거기까지는 가보지 않았다
금연구역 경계를 벗어난 몇 발짝에서 멈춰 우산을 들고 바라보면 빗속의 능선들이 적막해서 아름다웠다 비안개가 북에서 남으로, 비구름이 서에서 동으로 골짜기를 파고들며 애태우고 있었다
내가 피우는 담배 연기는 맛있게 우산의 경계를 빠져나와 굵어진 빗줄기에 소스라쳐 사라져버리고
저 여름철의 헛것들이 시들고 쓰러져서 제 스스로를 거둔 다음에야 내가 가보지 않은 곳이 환하게 드러나 보였다 등성이로 올라서지 못한 산 발치에 낙엽을 다 떨군 교목 한 그루가 여름내 우듬지에 숨겨둔 까치집을 내보일 때
저쪽에 대여섯 채의 둥근 지붕이 떠올랐다 맨 앞에 마중 나온 그 집의 문간에는 오래된 주소가 아닌지 셀로판지와 검은 리본에 묶여 시든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 《3》 가을 석양 무렵에
강인한
바라보느니 백제 금관을 온몸으로 받쳐든 저 은행나무가 웬일로 눈물겹구나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시려운 바람을 잔가지에 패옥(佩玉)으로 달고 멸망한 나라를 지금도 생각하느냐
하늘 아래 새로운 그 무엇도 없이 오늘 하루가 어제 하루와 다를 바 없거니
눈물겹구나 시든 사랑을 부르며 먼 산의 능선을 향해서 날아가는 새 한 마리. ☆★☆★☆★☆★☆★☆★☆★☆★☆★☆★☆★☆★ 《4》 가을의 시
강인한
저 익어 가는 후원의 금싸라기 별리를 아는 젊은이들의 은밀한 대화 속에서 가을이 호박빛 우수를 달고 조심조심 후원의 담을 넘는 소리를 해 어스름녘에 나는 들었네.
여름날, 나의 여학생이 그 자그만 에프롱에 차알찰 넘치는 햇 물을 담아 노역에 지친 내 손을 씻어줄 때 나는 비스킷처럼 연한 사랑을 깨물며 먼 하늘을 바라보았네 아주 먼 하늘을.
서쪽의 고원을 넘어오는 한 가닥의 미풍 황혼을 물고 새들이 오고 있네 그 새들이 깃을 치며 보내라, 여름에 얻은 모든 것을 보내라고 노래를 부르네.
여기 있는 한 무리의 새들이 시절에 맞추어 떠나고 나면 은익(銀翼)의 새들은 바람을 뚫고 내려앉을 것이네 비인 우리들의 가슴에 둥지를 틀 것이네.
고적이 흐르는 가을 담벼락 위에 나는 여름에 만났던 여학생의 얼굴을 그리다 지우다 마을의 지붕을 덮는 꿈을 가버린 새들의 그 큰 그림자를 생각하네 가만한 숨을 내쉬어보네. ☆★☆★☆★☆★☆★☆★☆★☆★☆★☆★☆★☆★ 《5》 강변북로
강인한
내 가슴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달이 지나갔다. 강물을 일으켜 붓을 세운 저 달의 운필은 한 생을 적시고도 남으리.
이따금 새들이 떼 지어 강을 물고 날다가 힘에 부치고 꽃노을에 눈이 부셔 떨구고 갈 때가 많았다.
그리고 밤이면 검은 강은 입을 다물고 흘렀다. 강물이 달아나지 못하게 밤새껏 가로등이 금빛 못을 총총히 박았는데
부하의 총에 죽은 깡마른 군인이, 일찍이 이 강변에서 미소지으며 쌍안경으로 쳐다보았느니 색색의 비행운이 얼크러지는 고공의 에어쇼, 강하나를 정복하는 건 한 나라를 손에 쥐는 일.
그 더러운 허공을 아는지 슬몃슬몃 소름을 털며 나는 새떼들.
나는 그 강을 데려와 베란다 의자에 앉히고 술 한 잔 나누며 상한 비늘을 털어 주고 싶었다. ☆★☆★☆★☆★☆★☆★☆★☆★☆★☆★☆★☆★ 《6》 건너편의 풍경
강인한
내 눈 높이로 걸려 있는 나지막한 허공
능선 위에 서 있는 나무들의 생각이 환하다 이 겨울엔 산도 생각이 맑아져 저렇게 조용히 하늘 아래로 흐르는구나
고집스레 무성하던 초록의 의상을 가을 한철 다 벗어버리고 메마른 가지와 가지 사이로 홀연히 건너편의 풍경을 열어주는 나무들
달리는 차창 안의 나에게. ☆★☆★☆★☆★☆★☆★☆★☆★☆★☆★☆★☆★ 《7》 겨울비 하염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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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겨울인데 개나리꽃 팔랑팔랑 찬바람에 홑적삼 도망 나온 가시내 가슴처럼 베란다의 철쭉도 꽃망울을 슬쩍. 시절이 왜 이럴까 세월이 거꾸로 가는지 환장을 하였는지. 분 바른 계집애들 치마는 허벅지로 샅으로 자꾸만 올라가고, 날궂이 살인마가 날뛰는 막다른 골목 이 골목인가 저 골목인가. 담배를 개비로 팔고 술도 잔술로 팔고 독한 추억에 취한 그네 시큰한 옛 노래에 실어 내리는 겨울비, 하염없이 늙은 개는 콧등으로 쓰레기 더미를 뒤지네. ☆★☆★☆★☆★☆★☆★☆★☆★☆★☆★☆★☆★ 《8》 겨울의 황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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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편 하늘에 붉은 황토의 강물이 흐른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곱다란 사금으로 빛난다.
검은 고압선에 꼬리 잘린 연이 매달려 철사보다 가느다란 늑골이 드러나고,
파헤쳐진 구덩이 보이지 않는 아픔의 거대한 창자 속을 시청에서 나온 인부들이 몇 꾸부정히 들여다본다. 콜타르 같은 어둠을 곡괭이로 찍어낸다.
방충대를 허리에 두른 집총 자세를 하고 총력안보! 총력안보! 정신없이 일렬로 뛰어가는 가로수들 머리카락이 잠시 뻣뻣이 불탄다. ☆★☆★☆★☆★☆★☆★☆★☆★☆★☆★☆★☆★ 《9》 고백
강인한
질척이는 소문을 밟지 않고 건너뛰는 법을 배웁니다. 불편한 항쇄 족쇄를 절컥대며 납작하게 잠드는 법을 배웁니다. 발에 맞지 않은 구두가 아주아주 편안해질 때까지 오래 참겠습니다. 고린도전서 십삼 장처럼, 깨끗한 한 발만 치켜들어 치사스런 양심일랑 미련 없이 배설하며 보여주시는 것만을 보겠습니다. 당신이 바라신다면야 이 천한 몸 갈기갈기 찢어 한 사발의 진한 정력이 되어드리겠습니다. 푸르른 하늘 아래 납작납작 걷는 법을 배웁니다. 납작납작 사는 법을 배웁니다. ☆★☆★☆★☆★☆★☆★☆★☆★☆★☆★☆★☆★ 《10》 구름의 산수
강인한
한 뙈기 감나무 발치에 텃밭을 일궈 아욱 상추 고추 가지랑 강낭콩 들깨 시금치가 자랐다.
어머니는 푼돈을 주고 그걸 사서 내게 사철 국을 끓여주고 반찬을 해주고.
봄부터 안개를 헤집으며 생쥐는 마루 밑과 굴뚝 사이로 감꽃을 목에 걸고 다녔다.
셋방 젊은 총각이 행여 영그는 홍시 감을 따먹지 않을까 주인 노파는 일삼아 감을 세어 두었다.
초가지붕보다 높은 잔가지 끝에도 발갛게 감이 가물가물 열렸는데
노파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쑤셔대며 감 하나 나 하나, 감 둘 나 둘,
세고 또 세다가 눈이 시어서 다시 처음부터 감 하나 나 둘, 감 셋 나 넷. ☆★☆★☆★☆★☆★☆★☆★☆★☆★☆★☆★☆★ 《11》 금환식(金環蝕)
강인한
먹물 칠한 유리조각으로 해를 본 적 있네 일식의 검은 해를 본 적 있네
어둠도 키를 넘는 어둠이라야 보이는 것이 우리들 사랑이라면
나, 눈먼 사람되어 저 깊은 숲에 갇히려 하네 향기로운 그 감옥에 스스로 갇히려 하네
꽃잎 다 흩뿌려진 다음 청청한 팥배나무 느릅나무가 이웃하여 주고받는 바람 한 솔기 얼굴에 스치고
여름 밤 캄캄한 돌 속으로 미적미적 들어가는 두꺼비 울음처럼 돌 속의 금빛 울음 끌고 가는 한 줄기 유성처럼
먹빛 어둠이라야 우리 서로 마주설 수 있다면 한 덩이로 이글이글 타는 해여 달이여 그대들의 검은 불길 속 나, 꿈결인 듯 맨발로 걸어 들어가려 하네 ☆★☆★☆★☆★☆★☆★☆★☆★☆★☆★☆★☆★ 《12》 나무는 죄가 없다
그러나 오월이 되면 알리라 유유히 떠다니는 허연 솜꽃, 버드나무의 무수한 영혼들 피부병과 안질을 거느리고 단박에 도시 전체를 장악하는 버드나무의 힘을
잘라라, 잘라버려라 모가지를 잘린 버드나무 시청으로 가는 버드나무의 일렬횡대 아, 무서운 근본을 끝까지 숨길 수는 없어 다시 돋아나는 것, 돋아나고 마는 것
그래도 어쩌자고 봄은 오는가 도시의 매연 속에 끌려와 십 년 해마다 팔을 잘리고 목을 잘려도 지긋지긋한 시늉, 목숨의 시늉이여
벚나무, 버드나무 나무가 무슨 죄랴. ☆★☆★☆★☆★☆★☆★☆★☆★☆★☆★☆★☆★ 《13》 낯선 시간 앞에서
강인한
낯선 시간 앞에 서 있다 네가 벗어놓은 그림자가 여기 있다
카페모카의 오후 세 시, 달콤한 수요일 생크림으로 추억은 장식되었으나 이 추억은 치명적이다
내 앞의 빈 의자 위에 걸쳐져 있는 너의 그림자는 타르보다 쓰고 낯선 시간을 마주한 나는 시력을 잃는다 갑자기 초라해진다
봉인된 시간 속에서 나는 기억해 내고 싶은 것들을 찾아낸다 이제 긴 밤이 찾아온다 떨리는 손으로 나는 너의 얼굴을 조용히 들어올린다 ☆★☆★☆★☆★☆★☆★☆★☆★☆★☆★☆★☆★ 《14》 내 이마의 꽃밭에서
강인한
내 이제 이마의 조브장한 안마당에 터를 장만하면 비 내리겠지. 은실 비 내리겠지. 은실 비 맞는 내 꽃모종 수정에 뜨물 부어 순 기르듯이 눈물을 길어 잎을 티우고, 씨를 얻어보리.
아기씨의 족두리에 꿰인 구슬 알맹이들이 몸 부비며 수줍어하는 밤 이슥한 순금의 회오리바람.
불씨 빌려오듯이 소중한 금빛 고단한 잠은 깨우지 않고 꽃 잠은 깨우지 않고 멀리서 초록 두꺼운 해 가림 하며 쉬임 없이 보살피리.
잔등이에 금이 간, 저 소용돌이를 타는 거북이 거북이의 닳아진 발바닥을 가슴에 얹고 이랑 진 등허리에 살을 출렁이게 하는, 아기씨 긴 자락 나부끼는 은실 웃음 담으랴면
굽이 저승에서 동아줄 늘여 내 꿈 낚는 한 천 년을 천 년을 땀 흘려도 싫지 않으리.
살찐 은어가 무지개 빛 비늘로 한 마장의 물결을 걷어올리는 모양 익히어 수정 속 같은 바람 데불고 한 천 년을 땀방울로 꽃밭을 매며 살아보리, 살아보리.
하마 오늘 밤, 이승에서 밝히는 새우잠 속에라도 아기씨 눈썹 적실 비 내리겠지. 은실 비 내리겠지. ☆★☆★☆★☆★☆★☆★☆★☆★☆★☆★☆★☆★ 《15》 넘어지기 위해서
강인한
아이고 추워라. 서로의 체온을 비벼보아도 사보텐처럼 가시 돋힌 아픔과 목마름을 나눌 수밖에 가진 것이 없구나, 우리는. 썩은 두엄자리에 오줌을 누면 멀리서 개 짖는 소리 막막하게 싸락눈처럼 이마에 떨어지고, 빈 하늘엔 환장한 환장한 귀신들만 길없이 함부로 날아다닌다. 아이고 추워라. 이 밤에 나는 일어선다. 열 번씩 거듭 열 번을 넘어지고 다시 넘어지기 위해서. ☆★☆★☆★☆★☆★☆★☆★☆★☆★☆★☆★☆★ 《16》 누락
강인한
어디서 빠져나왔을까 아침에 방을 쓸다가 빗자루에 걸려 뒹구는 나사 하나
주방에서 발견된 쇠붙이 팥알만큼 작지만 아무래도 위험한 누락
전기밥솥의 수상한 밑창에도 싱크대의 경첩에도 빠진 구멍이 없는데
누가 나를 찾았을까 내가 외출하고 없는 동안 빈 아파트에서 울렸을 전화벨 소리 빠져서는 안될 중요한 시간에 나는 빠져나왔을까
시내버스에 앉아서 휴대폰을 귀에 대고 껄껄거리는 낯선 사내의 뒤꼭지를 보다가
문득 퓨즈가 나가버린 내 기억의 나사 하나를 들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엘리엘리 나의 하느님 ☆★☆★☆★☆★☆★☆★☆★☆★☆★☆★☆★☆★ 《17》 눈먼 새 이야기
강인한
벼락 맞은 고목 나무가 검은 산발(散髮)을 하고 섰는 중학교 교정을 빠져나와 내 어린 사랑은 불붙는 황혼 속으로 달려가고, 바닷가 소금밭으로, 환희의 소금밭으로 즐거운 맨발로 달려가고 있었지,
그때 문득 새 한 마리가 교사(校舍)뒤 수풀에서 솟구쳐 올라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가고 있었지, 그리고 어디선가 죽은 사람의 날카로운 휘파람이 날아와 새의 작은 가슴을 뚫고 지나갔지 새는 뜨거운 조약돌이 되어 바다에 떨어졌고 파도 위 한 점 부표처럼 떠서 흐르는 내 어린 사랑,
상실의 슬픔은 그때부터 내 온몸의 구석구석에 검은 발을 드리우고 성긴 빗방울이 내 머리속에 방울져 듣다가 마침내 흐득이기 시작하였지,
여름밤 서늘한 별빛이 자릴 옮겨 물먹는 지금 상처 난 어깨의 구멍으로 소금기 많은 바람은 불어오고 내 어린 사랑은 어둠에 묻힌 고목나무 가지에 숨어 한 마리 눈먼 새가 되어 울고 있지, 한 줌 회진(灰塵)으로 나직나직 바람에 불리우고 있지 ☆★☆★☆★☆★☆★☆★☆★☆★☆★☆★☆★☆★ 《18》 달이 떠오를 때까지
강인한
깨어진 술병의 사금파리에 발을 베었을까 그 갈매기 기울어진 목선의 빈 돛대 위에서 쉬고 있었을까 끼룩끼룩 차갑게 울다가 사라진 뒤 어디쯤 우리들이 찾아 헤매는 수평선이 걸렸는지 하늘도 구름에 몰려 어둑한 그 때 어둠 속에 점점이 희게 빛나는 것들 무엇일까 반딧불인 듯 멀리서 흔들리며 눈부시게 빛나는 바다 위의 신기루같이 아니 유령의 도시같이 불을 켜고 어서 오라 어서 오라고 우는 듯 조는 듯 흔들리는 것, 바람이 불고 구름이 바람과 몸을 바꿔 모래밭을 철썩이는 파도가 서로 떨어져 웅크리고 앉아 있는 우리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슬그머니 보름달을 밀어 올릴 때 스무 살의 바다 깨진 유리 조각처럼 지느러미가 슬프게 빛나고. ☆★☆★☆★☆★☆★☆★☆★☆★☆★☆★☆★☆★ 《19》 당신 앞에서
강인한
나의 위치는 화분 산하가 다 보이는 곳이다. 나의 향함은 다만 결실 목숨의 마디마디를 끊어 강물에 띄워 보내는 일이다.
푸르른 바람 앞에 서면 나는 기가 된다. 펄럭인다. 애련과 사랑으로 가득히 스치는 풍경에도 펄럭인다.
바람 속에 나부끼는 나의 팔다리에서 움이 돋아 나의 온몸에 비늘이 돋아 서걱이다가 그 하나하나가 떨어져 나가면 나는 발가숭이로 선다.
떨어져나간 나의 분신들은 천 조각 만 조각 고향의 하늘 속에서 데모를 하고 유서가 되고……
하루의 피곤한 눈물이 줄줄이 흐르는 꽃 그래 나는 당신 앞에서 울음을 참으며 울음빛으로만 핀다.
높은 바람 속에서는 때로 기가 되어 보기도 하나 당신 앞에 서면 끊어도 끊어도 죽지 않는 목숨이 된다.
내가 밟아온 길에서는 흙먼지만 날리고 언제나 계절이 없던 것을.
나의 모국어는 강 흙탕물이 붉게 흐른다. 밤마다 밤마다 골수에 흐르는 붉은 눈물처럼, ☆★☆★☆★☆★☆★☆★☆★☆★☆★☆★☆★☆★ 《20》 돌에 대하여
강인한
어떤 사람은 돌을 水石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돌을 壽石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돌을 예술로 치고 어떤 사람은 돌을 돈으로도 치지만
나는 돌을 돌이라고 부른다.
돌에 이름을 붙이는 부질없음이여 돌을 돌 이상으로 섬기는 어리석음이여
사람이 사람끼리 모여 살듯 돌은 돌끼리 모여서 산다. ☆★☆★☆★☆★☆★☆★☆★☆★☆★☆★☆★☆★ 《21》 멀리 보이지만 아주 가까운 곳에서
강인한
유령들을 본다 동아줄을 목에 매달고 눈에서 초록빛 인광을 뿜는 그들 질퍽거리는 시궁에서 막 일어난 것일까 검고 비릿한 비늘이 온몸에 돋아난 사람들 지워진 악몽의 그림자를 복원하기 위해 피를 달라고 손을 내밀어 친절한 악수를 청하는 그들 머리에서 호박 넝쿨이 머리카락처럼 자라고 알 수 없는 비밀계좌로 내 뼈아픈 노동의 일부를 정기적으로 흡수해 가는 그들 유령들을 또다시 본다 죽어도 죽지 않는 노예의 언어로 말하고 그래도 옛날이 좋지 않았느냐고 밤마다 건강에 좋은 망각의 식은땀을 흘리라고 당당하게 권유하며 웃는 그들이 맨션아파트에서 나오고 국립묘지에서 나오고 지하도에서 나오고 대낮의 쓰레기통 속의 신문지 위에서 기어 나오고 있는 것을 본다 거울 속에 그림자가 없는 그들을 본다 ☆★☆★☆★☆★☆★☆★☆★☆★☆★☆★☆★☆★ 《22》 모든 구름에는 은빛 자락이 있다
강인한
지워질 듯 희미한 기억이 있어 그 아스라한 기억의 물살을 더듬어 더듬어서 천 리 만 리 바다거북 떼지어 헤엄쳐 간다 세기말의 한 해가 저물 무렵에도
코스타리카 해안 제가 태어난 뭍을 향하여 죽을힘을 다하여 기어가 기어가서 알을 낳는다 눈물 흘린다 묵묵히 돌아서는 바다거북들
저 수평선에 덮인 구름 거북이 바라보는 세상의 마지막 풍경 모든 구름에는 은빛 자락이 있다 알을 낳고 다시 바다로 되돌아가는 바다거북 지친 눈자위 동그랗고 까만 테가 그려져 있다. ☆★☆★☆★☆★☆★☆★☆★☆★☆★☆★☆★☆★ 《23》 무너지는 것들
강인한
어디로 갔을까, 내 얼굴은. 개인 날에도 내 몸은 늘 흐리고 헛간의 축축한 바람벽에 기대어 늘어진 마늘타래처럼 시들고 있네.
어디로 갔을까, 우리들은. 모두들 쓸쓸히 빈 제기(祭器)에 한 자리씩 올라앉아서 캄캄하고 캄캄한 눈을 비비고 아, 이제 무엇를 바라보나. 한 줄금 비가 내리고 비에 묻어서 황토마루의 황토흙 몇 덩어리 아픔도 없이 무너지고 있네. ☆★☆★☆★☆★☆★☆★☆★☆★☆★☆★☆★☆★ 《24》 물소리가 그대를 부를 때
강인한
엊그제가 입동立冬이던가 코트 깃을 세우며 퇴근하는 길 가까운 데서 물소리가 나를 불렀다 이상하여라 골짜기도 보이지 않는데
누가 나를 부른는 걸까 고개 돌려 바라보니 눈부신 노란 은행나무 곁 은사시나무가 물소리를 내고 있었다
너무 오래 잊고 지냈었구나 뿌리깊은 곳에서 길어 올린 한 줄기의 은빛 그리움이 스스로 깊어져서 바람에 볼 부비며 잎새마다 부서져 물소리를 내는 것을
내가 잊고 있던 부끄러운 사랑도 뿌리 깊이 묻혀 있다가 어느 날 문득 그대가 무심히 내다보는 유리창에 물소리로 물소리로 흐를 것인가. ☆★☆★☆★☆★☆★☆★☆★☆★☆★☆★☆★☆★ 《25》 바다의 악보
오, 달콤한 붉은 입술은 적포도주를 담은 글라스 아니 두 장의 장미 꽃잎 같다 하지만 오래전 당신은 이 해변을 떠났다
저만치 과거로부터 떠밀려온 트렁크에는 자물쇠가 채워졌고 두근거리며 들키기 싶은 당신의 사랑이 들어 있을 것이다
두려운 비밀을 향해 걸어가는 내 발자국마다 한 장 두 장 물 젖은 악보가 따라오고 입벌린 소라고둥이 트렁크 위에 앉아 소리친다 이제 곧 태풍이 불어온다고 내 마음 속 잠자는 태풍이 검은 수평선을 끌어낼 것이라고
그리운 당신의 기억을 이 해변에 떠도는 세이렌의 노래로 남겨두고서 나는 이제 돌아갈 곳이 없다 돌아갈 곳이 없다 ☆★☆★☆★☆★☆★☆★☆★☆★☆★☆★☆★☆★ 《26》 바람벽에 기대어
강인한
바람벽에 기대어 저 멀리 밤을 흔들며 사라지는 아스라한 열차 소리를 듣는다
바람벽에 기대어 내 아이들의 곤히 잠든 핼쓱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나니
먼 데 개 짖는 소리를 데불고 집으로 돌아오시는 아버님 내 이제 돌아가신 그분의 발소리를 듣는다
바람벽에 기대어 알 수 없는 아득한 곳으로 흘러가서 돌아오지 않는, 돌아오지 않는 얼굴들을 눈 감고 생각하나니. ☆★☆★☆★☆★☆★☆★☆★☆★☆★☆★☆★☆★ 《27》 바람이 센 날의 풍경
강인한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이다 플라타너스는 플라타너스대로 은행나무는 은행나무대로 바람 속에 서서 잃어버린 기억들을 되찾으려고 떨며 지느러미를 파닥거린다 흘러가버린 저녁 구름과 매캐한 소문과 매연과 뻔한 연애의 결말들은 길바닥에 차고 넘쳐 부스럭거리는, 창백한 별빛을 이제는 그리워하지 않겠노라고 때 이른 낙엽을 떨군다 조바심치면 무엇하냐고 지난겨울 싹둑싹둑 가지를 잘린 나무들은 눈을 틔우고 잎을 피워서 파닥파닥 할 말이 많은 것이다 할 말이 많아서 파닥거린다 춤을 춘다 물 건너간 것들, 지푸라기들 허공을 날아 높다란 전깃줄에 매달려 몸부림치고 소스라치는 저 검은 비닐들을 이제는 잊어야, 잊어야 한다고 빗금을 긋고 꽂히고 내리꽂히는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부러져버린 진보와 개혁 그 허깨비 같은 잔가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비리고 썩은 양심은 아래로 잦아들어 언젠가는 뿌리깊은 영양이 되겠지만 뭉칫돈을 거래하는 시궁 속의 검은 혀 아무에게서나 주무르는 시뻘건 후안무치에 대해서도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이다 많아서 상처투성이의 지느러미를 파닥거리며 나무들은 바람 속에서 아우성치는 것이다 반려인간
강인한
한강공원 쪽으로 난 굴다리 앞에서였다. 내 앞에 유모차를 끌고 가는 걸음이 느린 여자가 보였다. 저만큼 이쪽으로 유모차를 끌고 오는 중년 여자도 있었다. 좁은 길에서 유모차 두 대가 잠시 멈추더니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서로 다른 길로 비켜갔다.
내 앞으로 지나가는 유모차엔 고양이 한 마리 빤히 나를 올려다보았다. 걸음 느린 유모차를 앞질러 보니 강아지가 한 마리 그 속에 앉아 있고.
고관절이 안 좋아서 유모차를 끌게 한 거라고 당뇨가 심해서 새벽 운동을 시키는 거라고 전생에 사람이었던 고양이와 강아지의 대화를 아까 들은 것 같았다. ☆★☆★☆★☆★☆★☆★☆★☆★☆★☆★☆★☆★ 《28》 병 속의 바다
강인한
캄캄한 아가리 벌리고 가시만 남은 유령상어들이 덤벼든다. 왁자한 웃음소리 덜렁거리며 모자 쓴 유령들이 달려온다. 칼을 휘두르며 덤벼든다.
도망치다 혼자 남은 잭 스패로우 텅 빈 술병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본다.
투명한 유리병 속 바다가 출렁인다. 한 송이 꽃처럼 활짝 바다 위에 범선이 떠있다.
평생 쫓겨다니는 사내 발바닥에 눌어붙은 그림자, 지긋지긋한 건달의 껍데기를 벗어나려 그림자는 몸부림친다. 오욕으로 찌든 사내의 몸을
발바닥에서부터 힘껏 벗어버리고 병 속의 바다를 향해 출렁출렁, 그림자 홀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 《29》 부재
강인한
푸른 하늘을 새가 날고 있다 악보를 질러가는 꽃 빛 울음소리
어디에 덫이 있었을까 문득 걸려서 수직으로 떨어져 내리는 점 하나
누가 숨겨논 살의가 있었나보다 내 마음의 빈 허공에 얼음 빛으로 남은 한줄기 부재. ☆★☆★☆★☆★☆★☆★☆★☆★☆★☆★☆★☆★ 《30》 비의 향기
강인한
山椒나무 잎새들이 비에 젖는다 서늘한 너의 속눈썹이 생각났다
헤어지면서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너의 등에서 문득 山椒 냄새가 난 것 같았다
새 울음소리 낭자하던 자귀나무 혼자 비를 맞는 밤
네 젖은 몸 깊은 곳 山椒나무가 있을 것이었다. ☆★☆★☆★☆★☆★☆★☆★☆★☆★☆★☆★☆★ 《31》 가을 석양 무렵에
강인한
바라보느니 백제 금관을 온몸으로 받쳐든 저 은행나무가 웬일로 눈물겹구나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시려운 바람을 잔가지에 패옥(佩玉)으로 달고 멸망한 나라를 지금도 생각하느냐
하늘 아래 새로운 그 무엇도 없이 오늘 하루가 어제 하루와 다를 바 없거니
눈물겹구나 시든 사랑을 부르며 먼 산의 능선을 향해서 날아가는 새 한 마리. ☆★☆★☆★☆★☆★☆★☆★☆★☆★☆★☆★☆★ 《32》 빈손의 기억
강인한
내가 가만히 손에 집어든 이 돌을 낳은 것은 강물이었으리 둥글고 납작한 이 돌에서 어떤 마음이 읽힌다 견고한 어둠 속에서 파닥거리는 알 수 없는 비상의 힘을 나는 느낀다 내 손 안에서 숨쉬는 알 둥우리에서 막 꺼낸 피 묻은 달걀처럼 이 속에서 눈뜨는 보석 같은 빛과 팽팽한 힘이 내 혈관을 타고 심장에 전해온다 왼팔을 창처럼 길게 뻗어 건너편 언덕을 향하고 오른손을 잠시 굽혔다가 힘껏 내쏘면 수면은 가볍게 돌을 튕기고 튕기고 또 튕긴다 보라, 흐르는 물 위에 번개치듯 꽃이 핀다, 핀다, 핀다 돌에 입술을 대는 강물이여 차갑고 짧은 입맞춤 수정으로 피는 허무의 꽃송이여 내 손에서 날아간 돌의 의지가 피워내는 저 아름다운 물의 언어를 나는 알지 못한다 빈 손아귀에 잠시 머물렀던 돌을 기억할 뿐. ☆★☆★☆★☆★☆★☆★☆★☆★☆★☆★☆★☆★ 《33》 사랑의 간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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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 무성한 목련나무는 봄밤에 등을 켠 기억을 잊어버렸는지 이름표를 떼고 이웃한 모과나무에게 자꾸만 말을 걸고 싶어한다
벌레들이 뜯어먹다 버려 둔 이파리 모과나무는 이 여름 갈색으로 대롱거리는 철 이른 낙엽을 의붓자식 바라보듯 무심하다
달걀만 한 어린 모과 열매들 푸른 잎 사이 조마조마하게 눈만 반짝이며 숨었다 향기까지는 여름이 길다
사랑하는 이여 뜨거운 내벽을 두드리는 나의 질문에서 그대가 들려주는 응답까지의 거리는 기억력이 나쁜 목련나무와 시력이 안 좋은 모과나무의 사이 좋은 여름나기 그래 그래 꼭 그만한 거리일는지도 모른다. ☆★☆★☆★☆★☆★☆★☆★☆★☆★☆★☆★☆★ 《34》 사랑하는 이여 먼 훗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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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지친 설악산 비선대 아래 한 줄기 여울물로 내가 흐르면 저만큼 목화구름으로 따라오라 그대 나의 사람아
홍련암 소슬한 벼랑 아래 한 가슴의 파도로 내가 솟구치거든 무지개 바람으로 입맞춰다오 그대 나의 사람아
우리 사는 세상이야 흰 날에 멧등을 오고가는 푸르른 이내 같은 것, 노을 같은 것 우리들 그리움만 산천에 남아 바위옷이 되고 죽은 나무 둥치에 파릇한 이끼로 어제런 듯 피어나리니
먼 훗날에 그대 나의 사람아. ☆★☆★☆★☆★☆★☆★☆★☆★☆★☆★☆★☆★ 《35》 삭제되는 풍경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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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린다 먼 산이 삭제되고 건너편의 거리가 한 줄 두 줄 하얗게 삭제된다
베란다에서 거실로 이사온 화분들 소리 없이 푸르다 고무나무 콤펙타 바킬라 켄차야자 슬며시 손을 내리는 스킨다비스
아침에 문득 거실 바닥에 떨어진 동그란 열쇠고리 아니, 부처님의 손가락처럼 몸을 말아 뻣뻣이 말라죽은 지렁이 한 마리
어느 화분에서 기어 나왔는지 그놈은 상대를 밝히지 않은 관엽식물과의 불화 끝에 단식을 하다가 마침내 자살한 것인지
눈이 내린다 하루종일 모음과 자음 따로따로 삭제되고 삭제되는 문장들. ☆★☆★☆★☆★☆★☆★☆★☆★☆★☆★☆★☆★ 《36》 산수유 꽃 피기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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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 꽃 피기 전 해야 할 일 못다한 것이 바람 속에 왜 이제사 생각나는지
아프다 아픔을 견디다 견디다 혼자 눈떠보는 밤이 있다
어떤 나무의 죽은 가지에 새 속잎이 돋는 걸까 아프게 아프게 연초록의 어린 사랑이 피어나는 걸까
오래 잊었던 일 새록새록 죄다짐으로 살아나서
아픔의 잎잎이 내 안에서 돋아난다 사금파리처럼
때로는 붉은 번개로 창자를 긋는 밤이 있어 눈뜨는 홑겹의 외로움이 슬프다. ☆★☆★☆★☆★☆★☆★☆★☆★☆★☆★☆★☆★ 《37》 세상의 봄빛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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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거리나무 숲을 먼발치에 두고 원적암* 가는 길 층층나무 자귀나무를 지나 늠름한 비자나무 푸른 어깨 사이로 곤줄박이 호르르 날리고
우리 집 죽어 가는 화분 행운목 마른 줄기에 파아란 눈 어머니, 어머니가 지난 밤 하늘에서 내려와 그 서럽게 파아란 눈도 저를 위해 살그머니 맺어 놓으셨지요 ☆★☆★☆★☆★☆★☆★☆★☆★☆★☆★☆★☆★ 《38》 어디서 왔을까 네 이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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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 하나가 돌멩이 위에 떨어진다. 가만히 돌 속으로 걸어가는 비의 혼, 보이지 않는 얼룩 하나, 햇볕 아래 마른 돌멩이 위에서 지워진다.
어디서 왔을까, 네 이름은 내 가슴속에 젖어 물빛 반짝이다가 얼룩처럼 지워져버린 네 이름은.
빗방울 하나가 돌멩이 위에 떨어진다. 내 한 생도 세상 속으로 떨어진다. 마른 돌멩이 위에서 내 삶의 한 끝이 가만히 지워진다.
☆★☆★☆★☆★☆★☆★☆★☆★☆★☆★☆★☆★ 《39》 어떤 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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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중계방송이 스모그처럼 흐르는 거리거리에 가을 바람은 늘어진 전깃줄에 추녀 끝의 사양(斜陽)에 가만히 젖고 있네. 뼈아픈 실책(失策)처럼 풍경은 저녁 햇살에 간신히 걸리어 있네. 지난 여름 한철 내 몸은 늘 흐렸네. 몰아치던 캄캄한 충격도 이제는 하얗게 시드는 풀잎일 뿐, 마른 풀 냄새가 나는 우리들의 말 앞뒤를 잘도 재는 우리들의 말 우리들의 정직한 손은 거리의 낙엽이듯 가벼워라. 가벼워라. 가벼워라. 믿음의 끝까지 다 허물어진 그림자 그림자를 거느리고 내려가면 우리 마을이네. 아무것에도 흥분하지 않고 항시 비켜서서 조용히 기다리는 등불 같은 얼굴들이 거기 있네. ☆★☆★☆★☆★☆★☆★☆★☆★☆★☆★☆★☆★ 《40》 오후의 실루엣
강인한
앉아서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공간 카페 손님이 그래서 많다
당신은 내 앞에 떠 있다 강이 있고 건너편에는 내가 떠 있다
우리들은 하반신이 지워진 채 마주앉아 앞에 놓인 강에 뛰어들 것인가 말 것인가 오래 들여다본다
지워진 다리들이 비가 내리는 산책로에 우산을 같이 쓰고 가만가만 걸어가는 것일까 아니면 걸음을 멈춰 마주보고 있을까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담배 두 대, 커피 한 잔 그리고 오후의 카페를 나선다
언젠가 비가 왔고 비에 젖어 눈을 뜨던 길들이 소리 없이 등뒤로 사라진다 ☆★☆★☆★☆★☆★☆★☆★☆★☆★☆★☆★☆★ 《41》 유턴을 하는 동안
강인한
좌회전으로 들어서야 하는데 좌회전 신호가 없다 지나친다 한참을 더 부질없이 달리다가 붉은 신호의 비호 아래 유턴을 한다 들어가지 못한 길목을 뒤늦게 찾아간다
꽃을 기다리다가 잠시 바람결로 며칠 떠돌다가 돌아왔을 뿐인데 목련이 한꺼번에 다 져버렸다 목련나무 둥치 아래 흰 깃털이 흙빛으로 누워 있다
이번 세상에서 만나지 못한 꽃 그대여, 그럼 다음 생에서 나는 문득 되돌아와야 하나 한참을 더 부질없이 달리다가 이 생이 다 저물어 간다. ☆★☆★☆★☆★☆★☆★☆★☆★☆★☆★☆★☆★ 《42》 입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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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미 울음소리 붉고 뜨거운 그물을 짠다 먼 하늘로 흘러가는 시간의 강물
저 푸른 강에서 첨벙거리며 물고기들은 성좌를 입에 물고 여기저기 뛰어오르는데
자꾸만 눈이 감긴다 내가 엎질러버린 기억의 어디쯤 흐르다 멈춘 것은
심장에 깊숙히 박힌 미늘, 그 분홍빛 입술이었다 ☆★☆★☆★☆★☆★☆★☆★☆★☆★☆★☆★☆★ 《43》 통화중
강인한
파이로 번스나 루우 아처가 나오는 추리 소설을 읽고 있지요. 살인자는 젖빛 안개 속에서 안질에 걸린 빨간 눈을 내놓고 있어요. 요즈음 신문을 읽으세요? 당신은 농담도 퍽 잘하시는 분 멋있어요. 그리고 쎄련되고 쎄련되었어요. 나 당신한테 반하고 싶어요. 우리 유언비어를 좀 나누지요. 당신의 것과 내 것을 맞바꾸기로 해요. 신문은 통 재미없어요. 늘상 거짓말이고 터무니없이 부풀은 풍선만 가득가득 그래요, 구겨진 휴지 뭉텅이만 내 머리 속에서 날마다 부시럭거려요. 눈이 좀 내릴 것 같지요? 추리 소설에 맛이 들어서 허튼 소문의 바람에 맛이 들어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이야기도 재미있데요. 잠이 들면 알아요. 베개가 너무 높아서 휴지가 조금씩 머리에서 흘러나오고 다 망가진 활자의 꿈이 베갯가에서 좀 벌레처럼 고물거려요. ☆★☆★☆★☆★☆★☆★☆★☆★☆★☆★☆★☆★ 《44》 패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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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바뀌고 색깔 고운 드로프스를 나눠 먹듯 어린것들은 한 살씩 나이를 나누어 먹고 좋아라 하지만, 수출 목표를 초과 달성하고 국민 소득이 오르고 월급도 올랐다지만, 노상 곤마(困馬)를 타다가 축으로 몰리고 마침내 패에 걸렸다. 귀찮다, 귀찮다, 귀찮다, 내리는 겨울비를 맞으며 죽었던 적의 대마(大馬)가 불끈 일어선다. 승부엔 지더라도 패에는 지지 말랬는데 날은 이미 기울고 내 손은 가난하여 팻감이 없다. ☆★☆★☆★☆★☆★☆★☆★☆★☆★☆★☆★☆★ 《45》 평일의 햇살
강인한
얼었던 땅이 햇볕 아래 조금씩 녹고 있네. 지나온 내 반생의 꿈을 야금야금 허물어 내리는 오후의 햇살 이제는 아프지 않네. 시시한 놈! 시시한 놈! 소리치며 구두창에 달라붙는 엉망진창의 흙, 막내 동이의 칭얼거림을 끄을면서 한길을 건너 밭두렁으로 밭두렁에서 징검다리로 느릿느릿 질척이는 나의 지름길. 살아가면서 방이 좁아지고 쓸모 없는 세간이 불어나듯이 얻어지는 노여움도 줄여보는 방법이 깨달아지네. 구두창의 진흙을 털며 깨달아지네. 얼었던 땅이 햇볕 아래 조금씩 녹고 있네. 질척이는 지름길 위에 지폐처럼 시드는 평일의 햇살. ☆★☆★☆★☆★☆★☆★☆★☆★☆★☆★☆★☆★ 《46》 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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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쭉정이에 별이 맺히는 밤길을 돌아 죽은 햇살의 따스한 남쪽을 뒤집어쓰고 풀 씨는 흙먼지 속에 메말라 있다. 차디찬 이불 속에 가만히 발을 오그리고 고단한 꿈을 헤집는 내 어린것들아, 어리석은 책장을 덮고 돌아눕는 밤마다 지붕을 밟고 뛰어다니는 도깨비들의 시뻘건 웃음소리 들린다. 자거라, 자거라, 내 아이들아 산다는 것이 차마 이렇게 말못할 부끄러움뿐인 것을, 눈물나게 그리운 것 하나도 피우지 못한 쭉정이, 쭉정이 같은 손으로 얼굴을 쓸면 까실하게 묻어나는 겨울의 예감. 보드라운 흙먼지 속에 숨어서 풀 씨는 오늘밤에도 간을 말린다. ☆★☆★☆★☆★☆★☆★☆★☆★☆★☆★☆★☆★ 《47》 풍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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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끝 바위돌에 붙어 꿈꾸다가 내려다보는 저 아래에는 물새 울음 한 점 흐르지 않고 붉은 산호도 보이지 않는다 바다가 없으므로 나는 비명도 못지른다 검푸른 바위옷이 발치에서 말라간다 이 밤에 나는 위험하다 벌거벗은 뿌리에 본드를 칠하고 매끈한 먹빛 수석 위에 결박당해 붙어 있다 십자가의 예수처럼 수반 위 세치 높이에서 한 줌 물안개도 피지 않는 허공이 천길 벼랑인 것을 차라리 나에게 목숨을 날릴 태풍을 다오 뛰어내릴 쪽빛 바다를 다오. ☆★☆★☆★☆★☆★☆★☆★☆★☆★☆★☆★☆★ 《48》 한밤의 표정
강인한
깊은 밤 아파트 창문을 닫는다 스위치를 내린다 일체의 소음을 지우고 허공에 뜨는 사각형의 정적
책상 위의 스탠드를 켠다 사물은 재빨리 어둠 속에 숨고 작은 손거울 속에 문득 유령 같은 얼굴이 떠오른다
밑도끝도 없이 검은 밤을 배경으로 흘러나오는 흑백의 표정 비정한 명암. ☆★☆★☆★☆★☆★☆★☆★☆★☆★☆★☆★☆★ 《49》 허공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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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쇠를 구멍에 넣고 돌린다 문이 열리고 부재중의 낯선 시간들이 이 방 저 방에서 손님 같은 나를 내다본다 이 허공의 집 14층 아내와 나는 배고픈 거미다 내가 쳐 논 아침의 은빛 덫에는 피자 가게 광고 전단과 북한의 핵 개발 보도가 펄럭일 뿐 저녁 불빛 아래 신문을 펴 들면 지저분한 글자들이 우수수 마루바닥에 떨어져 쓰레기가 된다 아이들은 자라서 뿔뿔이 흩어져 갔다 서울에 두 놈, 보스턴에 한 놈 창 밖으로 어둠이 내리고 새끼들이 ……우리 새끼들이 보고 싶어 베란다를 내다보며 뱉어내는 아내의 고적한 목소리에 비가 내린다 밤 12시 거실의 불이 꺼진다 우리 부부는 나뭇잎 한 장씩을 챙겨 덮고 소리 없이 늙어 간다 허공에서 ☆★☆★☆★☆★☆★☆★☆★☆★☆★☆★☆★☆★ 《50》 환희
강인한
깡마른 가지를 하늘로 뻗치며 캄캄한 어둠 속에서 아우성친다 파란 봄의 혈액
견고한 죽음을 찢고 죽음 위에 다시 태어나는 아름다운 독이여. ☆★☆★☆★☆★☆★☆★☆★☆★☆★☆★☆★☆★
첫댓글 오늘도 좋은글 좋은 공간에서 만남으로
고운마음 담아서 전합니다
행복한 하루가 되세요
감사합니다
자유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잠시 쉬어갑니다
많이 덥습니다
건강관리 잘하시길 바랍니다
시원한 마음으로 행복하시고 편안한 오후시간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