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규 베네딕토 신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민수기 6,22-27 갈라티아 4,4-7 루카 2,16-21
베들레헴은 유다의 작은 고을로 다윗 임금의 고향으로 언급되었으며(1사무 17,12 참조),
메시아 또한 이곳에서 태어나리라고 예언되었습니다.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미카 예언서 5,1).
루카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언을 성취하시면서 바로 이 고을에서 태어나십니다.
아기 예수님을 찾아낸 목자들은 천사가 전한 말씀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합니다. 그들은 예수님 탄생의 목격 증인입니다.
한편 요셉과 마리아는 유다교의 율법에 따라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고 천사가 일러준 대로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습니다.
목자들과 베들레헴은 모두 다윗 임금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양을 치는 목동이었던 다윗은
사무엘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 임금의 자리에 오릅니다.
히브리 말로 ‘기름부음 받은 이’라는 뜻을 가지는 메시아는 이후에 구원자를 의미하게 되고,
그 말을 그리스 말로 옮기면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 탄생 이야기는 구약 성경의 말씀이 실현되었다는 것과 메시아, 곧 그리스도의 탄생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두 가지 이름을 기억하게 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리며 새로운 구원의 시기가 시작되었음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이 모든 일과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되새깁니다.
마음에 품고 줄곧 생각하며 묵상한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이렇게 예수님의 탄생에서부터, 이미 천사가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한 때부터 마음으로 그분의 길에 함께하신 분이십니다.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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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덕 베드로 신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민수기 6,22-27 갈라티아 4,4-7 루카 2,16-21
교회는 예수님의 두 가지 본성(참하느님과 참사람)에 대한 깊은 신학적 성찰을 통하여
성모님을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합니다. 만일 성모님을 ‘하느님의 어머니’로 인정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신성(참하느님)이 부정되기 때문입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 교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어떤 선택까지 하실 수 있는지
잘 보여 줍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견고하며 절대로 끊을 수 없는 관계는 어떤 관계일까요?
바로 혈연관계입니다.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변화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가장 친밀하고 절대로 끊어 놓을 수 없는 관계,
가장 강하고 견고한 관계를 우리 모두와 맺으시기를 바라십니다.
제2독서는 이와 같은 하느님의 열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진정 여러분이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그리고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세워 주신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하느님께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여드레가 차서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게 되자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그것은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 준 이름이었다.”
성모님께서는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고 지으십니다.
가브리엘 천사를 통하여 당신께 전하여진 하느님의 모든 말씀에 순명하시는 성모님의 겸손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은 성모님께서 보여 주신
모범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며 사는 것입니다.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
매일미사 2024년 1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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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구 스테파노 신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민수기 6,22-27 갈라티아 4,4-7 루카 2,16-21
어릴 적, 꽤 오랜 시간 엄마가 집을 비울 때가 있었습니다. 날은 저물고, 비바람이 몰아쳐서
베란다 창을 다 닫아걸어도 창문 흔들리는 소리가 꽤나 요란한 밤.
엄마를 기다리는 시간은 불안하기만 합니다.
“형아~ 무섭다~” 동생의 칭얼거림에 애써 담담한 척...
“무섭긴 뭐가 무섭노 ~ 형아가 안 무섭게 해 줄게.”라고 허세를 부리고는
텔레비전 소리를 높이고, 온 집에 불이란 불은 다 켜놓으며 무서운 내 마음을 다스리지만,
텔레비전 소리도 온 집에 켜놓은 불빛도 두려움을 없애주진 못했지요.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요란한 창문 소리와 시끄러운 텔레비전 소리를 뚫고
‘딩동~’하는 초인종 소리가 들립니다. 날쌘 동생이 후다닥 뛰어나가 대문을 사이에 두고
묻습니다.“누구세요?” 그러자 문 너머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응, 엄마~”
“응, 엄마~” 이 가녀린 여성의 한마디는 창문을 뒤흔드는 무시무시한 바람 소리조차
아무것도 아니게 만듭니다. 이 가녀린 여성의 한마디는 크게 틀어놓은 텔레비전 소리로도,
온 집안을 밝혀둔 불빛으로도 없애지 못했던 두려움을 온전히 사그라들게 만듭니다.
아이들에게 엄마는 그런 존재지요.
왜 아이들은 “응, 엄마~” 이 한마디에 모든 두려움을 잊을까요? 엄마가 있으나 없으나
‘요란한 밤’이라는 상황은 그대로인데도, 왜 엄마가 있으면 괜찮아지는 걸까요?
‘엄마와 아이들 간의 관계성’ 때문입니다. 엄마는 아이들에게 의지가 되는 존재,
그 존재가 지금 내 곁에 있기에, 상황은 그대로지만, 그대로가 아닌 것처럼 되어버리는 겁니다.
‘엄마’가 함께 있느냐 없느냐가 거센 바람이 부냐 고요하냐 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니,
그것이 채워지면 나머지는 부차적인 것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천주의 성모 마리아대축일인 오늘, ‘관계성’이라는 단어를 붙들고 생각해봅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오 12,50)
- 나는 예수님과 어떤 관계여야 하는가?
- 내가 아버지의 뜻을 살아낸다면, 예수님의 어머니는 나와 어떤 관계가 되는가?
새롭게 시작하는 한 해도, 언제나 그랬듯 ‘요란한 밤’의 시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버지의 뜻 안에 머무르려 애쓴다면,
우리 영혼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 닫힌 우리 마음의 문 앞에 서서
“딩동~ 응, 엄마~”라고 해주실 테니...
부산교구 강인구 스테파노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
가톨릭 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