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은혜, 은혜
(고린도후서 6 : 1-10)
오늘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라고 합니다. '은혜'를 성경 원어에서 《카리스》라고 하는데, '감사', '친절', '호의', '은혜'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카리스마》라는 말로 더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카리스마'는 '카리스'에서 유래된 말로서, '호의를 베풀다', '은혜를 베풀다', '선물을 주다', '은사'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은혜'라는 말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값없이 무제한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가 넘쳐흐르는 선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은혜는 받았는데 그 은혜를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 고린도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교회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고린도교회에 영적인 은사를 많이 주셨습니다. 예언과 방언, 영분별, 병고치는 은사 등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은사를 주신 것은 교회의 유익과 덕을 주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면 유익하게 써야 하는데, 그들은 그 은혜를 헛되게 한 것입니다. 은혜를 받는 것이 중요하지만, 또한 받은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고, 유익하게 사용할 것인가도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어떤 은혜를 받고 살아가고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받는 것은 없는지를 살펴 봅니다.
1.“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라고 말합니다.
사도바울이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서 권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비롯해서, 우리를 일꾼으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은 다양하십니다. 때로 하나님께서 단독적으로 일하실 때가 있습니 다.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에게 직접 환상으로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일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일하신 것을 봅니다. 하나님은 다메섹에 사는 제자, 아나니아에게 나타나셔서 바울을 찾아가 안수하고 그를 제자로 세우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나니아 라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셨던 것이고 이것이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에 사람들과 함께 일하십니다.
사도바울은 이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9절에,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하나님의 동역자,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은 정말 영광된 일요, 은혜입니다.
요즘 좋은 직장들을 놓고서 경쟁이 심합니다. 구글, 테슬라, 삼성, 증권사… 좋은 스펙도 있어야 하고, 경력도 있어야 합니다. 내가 일하고 싶다고 해서 누구나 나를 환영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력서를 써도 답이 오지 않은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를 당신의 동역자요 일꾼으로 여겨주시는 것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수 없어서 우리에게 일들을 함께 하자고 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하나님과 일을 할 만한 능력이 있기에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의 일을 함께 하기에는 죄성도 많고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사람들과 함께 일하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부족하고 연약한 자를 더 유용하게 사용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일하시는 것 자체를 은혜로 여기고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예배 기도 찬양 섬김 봉사 감사 찬송이 맡겨질 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기쁨으로 감당합니다.
2.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고린도교인들 중에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유익하게 사용해야 하는데, 도리어 하나님의 은혜를 무익하고 헛되게 만들어 버리는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 중에 최고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자신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과 화목하려고 해도,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결국 사람 스스로는 죄로 인한 사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로 받게 되면, 어떤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죄에서 씻음받아서 구원을 받게 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후에 고백하기를,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 구원받고, 하나님의 동역자로 살아가는 것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으면 자기 의와 자랑에 빠지게 됩니다. 뭔가 잘 되면, 자신이 한 것처럼 자신을 자랑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기도를 열심하고,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봉사했고, 선한 일들을 많이 해서 하나님께서 이러한 복을 주셨다고, 은근히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고린도교인들이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사를 주셨으면 그것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유익되게 사용해야 하는데 그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자신에게 있는 은사가 더욱 중요하다며, 자신의 은사를 자랑하고 다른 은사자들을 업신여겼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십자가를 자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자랑이 곧 전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 날마다 여호와의 은혜를 자랑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증거하는 전도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전도는 하나님의 은혜 받은 이야기를 세상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어야할 이유를 정확하게 말해 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라”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음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49장 8절에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이는 여호와께서 이사야선지자를 통해 하신 말씀입니다. 바벨론의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이 놓임을 받고 완전히 회복될 것을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그 예언대로 이스라엘은 바벨론에서의 포로생활을 마친 후,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오는 구원의 날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지금'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지금’이라는 말을 두번이나 사용하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는 바로 '지금'이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이 이루어지는 때라는 것입니다.
모든 은혜는 과거나 미래의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과거에 아무리 많은 은혜를 경험했다고 할지라도, 지금 그 은혜를 잃어 버렸다면 과거에 받은 은혜는 아무 소용없는 것입니다.
이사야 55장 6절에,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하나님의 은혜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그 은혜를 받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부르짖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는 사람들은 은혜를 구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는 일에 게으르지 말아야 합니다. 은혜는 현재형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떠한 상황가운데 처하던지 상관없이, 날마다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며 지금 받아서 누려야 합니다.
3.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자로다.
사도바울은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짖이 없는 사랑가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못생기고 말주변도 없는 천막 수리공인 바울이 어떻게 이처럼 위대한 능력자가 될 수 있었겠는가? 이는 오로지 하나님을 향하는 깊은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다메섹을 향하는 길에서 주님을 만났으며, 광야에서 3년 동안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신앙의 단련이후 그의 생애는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자신의 의를 이루려고 그리스도를 핍박했던 그가 오직 하나님만을 의뢰하며 신뢰하는 생활로 새롭게 창조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하는 진실한 신앙은 삶을 재창조하는 능력을 가지게 합니다. 불행을 행복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근심을 찬송으로 바뀌게 합니다.
이사야 61장 3절에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정복 왕인 「나폴레옹」의 학교 성적은 42명 중 42등이었습니다. 과학자 「뉴톤」은 뒤에서 둘째였습니다. 문학가인 「엘리어트」는 국어 시간에 글짓기를 너무 못해서 줄곧 야단을 맞았습니다. 발명가 「에디슨」은 학교를 전전해야 할 만큼 문제아였습니다. 「베토벤」은 음악가로서는 치명적인 귀머거리가 되었습니다. 「화니 제인 크로스비」는 맹인이었으며, 온갖 질병을 앓았음에도 불구하고 9000여 편의 찬송시를 남겼습니다. 하나님을 향하는 진실한 신앙 앞에서는 어떠한 여건과 환경이라 할지라도 극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환경과 여건을 극복하는 정신도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전혀 불가능하게 보는 것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그 속에서 가능성과 가치를 보게 하십니다. 가치를 발견하게 되면 새로운 창조가 이루집니다.
평범한 진흙도 도공의 손에 들어가면 전혀 새로운 것으로 재창조되게 됩니다. 도공은 평범한 흙에서 훌륭한 도기로서의 가치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범하게 보는 나무에서 조각가는 훌륭한 조각품을 만들어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눈에 무가치하게 보이는 것에서부터 가치를 발견하고 재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성도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인들의 멸시를 받던 갈릴리의 어부였으며, 세리였으며, 무가치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가치를 찾아내셨고, 훌륭한 제자로 재창조하셨습니다. 이렇게 재창조 된 제자들은 역시 세상의 무가치한 것에서부터 가치를 창출해 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 인정받는 사람이 되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