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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샘은 지난여름에 김성수 단우님 농장에서 얻어 온 백합 씨앗 세 톨을 그날 같이 받아 온 거름과 함께 화분에 심었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두 달이 훌쩍 지나가고 백합이 꽃망울을 한창 키우고 있을 무렵, 그간의 백합꽃 성장 실태에 관해 궁금해 하는 분이 있을 것 같아, 대구흥사단 카페에 백합꽃 사진을 올린 적이 있었다.
이 날이 10월 22일 수요일 오후였다.
그리고 하루가 지나자 여느 때처럼 여러 개의 댓글이 올라오고, 이 중 뜻밖에도 필명이 멋진욱인 YKA 등산대장으로부터 묘한 경쟁심을 유발시키는 댓글을 보게 되었다.
“백합은 우리 집에도 피려고 발버둥 치고 있습니다. 누가 먼저 피우는지 배틀 한 번 하시렵니까? 꽃 먼저 피운 사람이 증거 사진을 먼저 올리고 밥 얻어먹기 말입니다. 그땐 김성수 단우님도 모시고. 히히.”
최근에 기부 많이 하기로 유명한 김장훈 가수가 역시 기부 많이 하기로 소문난 김제동 전문엠씨한테 <기부 배틀>하자는 제의가 있었다는 얘기는 들어도 이렇게 <백합꽃 먼저 피우기 배틀>을 제안 받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지난 8월 31일에 대구흥사단 사회봉사단에서 겨울에 김장담그기 봉사활동을 할 목적으로 손수 가꾸어 오던 고추를 따는 <벙개 모임>을 했는데, 화훼농장주인 김성수 단우님께서 그때 참석한 단우들 모두에게 거름과 함께 백합 씨앗을 나누어 준 적이 있었다.
바로 그 백합 씨앗을 함께 받아왔던 멋진욱으로부터 백합꽃 먼저 피우기 배틀 제안을 받은 것이다.
윤 샘은 이 댓글을 보자마자 가슴 저쪽 깊은 곳에 잠재되어 있던 이상야릇한 흥분이 슬금슬금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윤 샘은 우선 멋진욱의 선전포고에 대한 승낙으로 카페에 흔쾌히 댓글부터 달았다.
“백합 먼저 피우기 배틀----조--오습니다요. 결코 안질끼다이. 오늘 저녁에 가서 부채로 부쳐 볼까나???”
이렇게 시작된 신장미전쟁, 아니 백합전쟁은 1455년 영국에서 발발해 30여 년 동안 왕권 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어 수 만 명이 희생되었던 장미전쟁에 버금가는 현대판 장미전쟁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윤 샘은 평소에도 작고 사소한 것, 하찮은 것, 그리고 보잘 것 없는 것에도 소중한 의미를 두고 사는 분이라 이번에도 역시 이 댓글을 보고는 가만히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같은 날짜에 같은 거름을 가지고 화분에 심었고, 그간 꽃을 가꾸어 온 경험만 해도 40여 년이 넘기 때문에 배틀하자는 제의에 꼭 이기고 말겠다는 승부욕을 불태웠다고나 할까?
그래서 배틀하자는 제안을 받은 날 학교에서 귀가하자마자 백합의 생육상태를 확인하고자 베란다부터 달려간 윤 샘은 그만 너무나 기쁜 나머지 까무러칠 뻔하고 말았다.
거기엔 기분 좋게도 백합 두 송이가 이미 활짝 피어서는 특유의 짙은 향기를 내뿜고 아픔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이긴 전쟁이나 다름없었다.
서둘러 증거를 남기려고 항상 휴대하고 다니는 디지털 카메라를 가방에서 끄집어내어 셔터부터 눌러댔다.
“찰칵, 찰칵, 찰칵!”
베란다 전등을 켜 놓은 상태였지만 밤이라서 사진은 마음먹은 대로 잘 나오지 않았다.
(꽃이 활짝 핀 윤 샘의 백합꽃)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집에는 컴퓨터가 없다.
아니, 있다고 해도 디카에서 컴퓨터를 통해 카페에 증거사진을 올리려면 케이블이나 잭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도 없다.
지금까지 컴퓨터 작업은 학교에서만 했기 때문에 커다란 낭패였다.
‘분명 우리 집에 꽃이 피었다면 멋진욱 집에도 꽃이 피었을 텐데, 그러면 오늘 밤에 멋진욱이 사진을 먼저 올린다면 내가 진거나 다름없잖아? 어차피 이 싸움은 같은 날짜에 꽃이 핀다고 보고, 누가 먼저 카페에 사진을 올리느냐가 승패를 좌우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데 말이야.’
윤 샘은 속으로 적이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윤 샘은 이럴 때일수록 집에 그 흔한 노트북 하나 없는 것이 한스러웠다.
윤 샘의 성격은 늘상 그렇지만 싸움이 붙었으면 무조건 이겨야 하는 성미였다.
잠은 자는 둥 마는 둥 했다.
매번 밝아오는 새벽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도 더디게 오는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빨리 날이 밝아야 학교에 일찍 가서 사진을 올릴 텐데······.’
윤 샘은 이리 뒤척이고 저리 뒤척이고 하며 날이 밝기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길고도 길었던 어둠이 지나고 새벽이 다시 왔다.
어젯밤에 찍은 사진이 어둡게 나오는 바람에 증거사진으로 인정을 못 받을까봐, 아침 햇살을 받고 있는 백합꽃을 확인사살이라도 하듯이 다시 찍고 또 찍었다.
윤 샘은 평소보다 일찍 문을 나서서는 매일 학교로 같이 통근하게 되어 있는 동료교사인 조 샘을 기다리는 시간조차 아까워하기 시작했다.
조 샘도 오늘은 어쩐 일인지 10분이나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 샘이 평소와 같이 생글생글 거리며 인사를 하며 승용차에 오르기가 바쁘게 윤 샘은 인사할 겨를도 없이 쏜살같이 학교로 달려갔다.
짙은 안개가 아직 운동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른 시간이라 아이들은 아직 학교에 나오질 않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또 학교 가을소풍 일정을 잡느라 샘 전체가 모이는 긴급 교무회의를 한다고 문자 메시지가 떴다.
일찍 와서 사진을 카페에 올리려고 했는데 산통이 다 깨지고 말았다.
윤 샘 마음은 콩밭에 가 있는데 회의시간은 자꾸 길어지고 1교시 수업시간이 다 되어서야 회의를 마쳤다.
교장 선생님의 마지막 당부 말씀도 듣지 못하고 3학년 교실로 달려간 윤 샘은 컴퓨터 앞에 몸을 던지듯이 재빠르게 앉았다.
하이고, 미칠 지경이다.
오늘 따라 또 컴퓨터 부팅이 늦다.
더군다나 흥사단 카페에 들어가려는데 금요일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접속자가 많은지 더 느리게 화면이 뜬다.
아이디를 치고, 비번을 잽싸게 밀어 넣었다.
“이런, 이런, 아이고, 미치겠다. 비번이 틀리다니······.”
영어 알파벳 소대문자 구분이 안 되었다.
너무나 급하게 접속하다 보니 소대문자 구분도 헛갈렸다.
“샘요! 우리 수업 안 해요?”
“응? 그래. 지금 수업한다.”
아이들조차 그동안 그렇게도 하기 싫어하던 수업을 빨리 하자고 보챘다.
‘안 되겠다. 일단 멋진욱이 사진 올렸는지 확인만 해야겠다.’
급한 마음에 흥사단 카페의 여러 방을 수색해 보니 일단 안심이었다.
어디에도 멋진욱이 올린 글은 없었다.
아니, 오늘 다녀간 명단에 멋진욱은 아예 없었던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일단 안심하고 수업을 시작했다.
마음이 안정이 되지를 않는다.
자기도 모르게 자꾸 수업을 빨리 끝내려고 하고, 아이들한테는 질문을 던지고는 대답을 빨리 하라고 재촉하기도 했다.
‘이건 아닌데······.’
하면서도 윤 샘은 매사를 서둘렀다.
지금쯤 멋진욱은 출근을 했을 거고, 조만간 사진을 먼저 올릴지도 모른다는 강박이 윤 샘 가슴을 억누른다.
‘한 시간 자습하라고 하고 먼저 사진을 올릴까?’
‘아니지, 안 되지. 내 눈과 입만 쳐다보는 초롱초롱한 우리 아이들을 자습시키면 안 되지. 그것은 지금까지 살아온 내 교육 철학에도 안 맞는 것이야.’
이렇게 생각한 윤 샘은 오전 수업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빨리 오기만을 기다렸다.
점심시간만 된다면 내보다 열 배 이상 컴퓨터를 더 잘하는 조 샘을 불러서 도와달라고 해야지 하고 다짐하면서 맞은 편 벽에 걸려 있는 시계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다.
점심시간이 되었는데 조 샘은 다른 볼일이 있어 시간을 낼 수가 없단다.
윤 샘은 디카 사진을 컴으로 옮기는 데 아직 서투르다.
잘못 하다간 애써 집에서 찍어 온 사진을 다 날릴 수가 있다.
이럴 땐 나이를 먹는 것이 원망스럽다.
좀 더 젊어서 총기 있게 기계만 다룰 수만 있었다면, 5분 쉬는 시간에 벌써 사진을 올렸을 텐데 하고 자신에 대한 자책도 해 봤다.
다행스럽게도 아직 멋진욱은 사진을 올리지 않았다.
그리고 또 오후 수업 두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모른다.
아침에 출근해서부터 오후 수업이 끝나는 지금까지 시간이 왜 이렇게 느리게 가는지 답답하기 그지없다.
윤 샘은 6교시 수업이 끝나기가 바쁘게 저 멀리 다른 층에서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조 샘을 붙잡았다.
“빨리 와서 내 작업 좀 도와줘요. 사진 빨리 올려야 된단 말입니다. 이러다 배틀에서 지겠어요.”
“아따, 윤 샘, 아침부터 하루 종일 와 이리 깝칩니까? 그게 뭐 그리 대단한 배틀이라고? 그냥 밥 한 끼 사 주면 될 걸. 호호호.”
“무슨 말씀을요? 이 배틀은 절대로 질 수가 없습니다. 밥값보다도 저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입니다. 빨리 와서 좀 도와 줘요.”
두 샘이 교실로 들어와서 책상 앞에 앉으려는 찰나에 또 윤 샘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휴대 전화기에서 교실이 떠나갈 듯이 벨이 울렸다.
“이 바쁜데 웬 전화야, 또? 미치겠다, 미치겠어.”
휴대 전화기 덮개를 열고 약간은 짜증나게 인사를 하려는데 벌써 상대방은 다그치며 말을 하고 있었다.
“윤 샘, 차 좀 빼 주세요. 지금 급한 약속이 있어서 빨리 나가봐야 하거든요.”
귀를 쩌렁쩌렁 울리며 들리는 남자 동료 교사의 전화기 목소리에 화를 낼 수도 없어, 조 샘을 책상 앞으로 끌어다 앉히고는 밖으로 나가면서 소리를 질렀다.
“내 카메라 사진 중 백합꽃 사진을 대구흥사단 카페에 좀 올려 주이소.”
조 샘은 아침부터, 아니 어제부터 수도 없이 들은 백합꽃 배틀 얘기라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윤 샘은 자신이 주차해 놓은 건물 뒤편까지 그렇게 날렵하지도 못한 몸으로 달려가면서도 5분 순간에 승패가 갈릴 수도 있다는 불안한 생각이 뇌리를 짓누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만 하루가 되도록 준비해 온 배틀이 한순간에 무너지기 때문이다.
왜 하필 오늘 따라 주차장 공사한다고 차도 마음대로 못 대게 해서 이런 상황을 만드는지 원망스러웠다.
옆에서 차를 빼 주기를 기다리는 동료 교사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면서, 그리고 미안하다는 인사도 제대로 건네지 못 하고, 차를 대충 빼서는 아무렇게나 주차해 놓고 교실로 달려오고 말았다.
“어떻게 되었어요, 어떻게? 제 백합 사진 올라갔어요? 멋진욱 백합 사진 아직 안 올라왔죠?”
“멋진욱이라뇨? 등산대장이라더니?”
“그 사람이 맹 그 사람입니다.”
“아, 예! 이렇게 하면 됩니까? 제목을 <앗싸! 이겼다!>로?”
“어디 한 번 봅시다.”
대구흥사단 카페의 윤회공책에 윤 샘 이름으로 <앗싸! 이겼다!>란 제목이 커다랗게 들어가 있고, 이 제목을 클릭하니 장장 80여일 동안 애지중지하며 가꾸어 온 백합꽃 두 송이가 활짝 웃고 있는 사진 속 모습을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는 순간, 윤 샘은 그만 안도의 한숨을 크게 지으며 울컥하고 한 사발이나 되는 감격의 눈물을 쏟고내고 말았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제 안심입니다. 나는 이번 배틀에서 지는 줄 알고 어제부터 마음을 얼마나 졸였는지 모릅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조 샘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나중에 한턱내겠습니다.”
윤 샘은 올림픽에서 금메달이라도 딴 어린 선수마냥 조 샘의 두 손을 잡고 펄쩍펄쩍 뛰고 있었다.
이때 컴퓨터 시간은 2008년 10월 24일 금요일 오후 4시 42분에서 깜박이고 있었다.
영국의 장미전쟁 이후 553년만에 일어난 신장미 전쟁, 아니 백합 전쟁은 이렇게 만 하루만에 윤 샘의 승리로 막을 내리고 있었다.
한편, 현대판 대구흥사단 야사에 따르면 멋진욱은 댓글에 배틀을 신청한 뒤, 정작 본인은 그런 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고 한다.
✿✿✿✿✿ 이 글은 순수하게 허구임을 밝혀 둡니다.
이 글의 주인공인 윤경희 단우님, 만일 글에 문제가 있으면 바로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2008년 10월 28일
멋진욱 김지욱 서.
(아직 배틀할 생각도 안 하고 있는 멋진욱의 백합꽃, 게다가 한 송이는 떨어져 버렸다.)
첫댓글 완전한 한편의 문학작품이군요. 오늘이 중간고사 시험일이어서 감독하랴, 채점하랴, 휴대폰에 답장도 미처 못하고 여기부터 먼저 들어왔슴다요 보면서 월매나 웃었는지....천상 조선생 불러서 이 단편 보여주고 , 문화답사나 등산에 조샘 끌고가서 인사시켜야겠네...절대 이견 업심다. 작품으로 승화시킨 그대의 역량에 감사를 표할 뿐.....
후유~! 안심입니더. 혹시나 단우님 명예에 누가 되지나 않을까 걱정 많이 했습니다. 배틀 얘기 자세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히히.
허---걱 이기 뭐꼬???? 어제는 바빠서 , 또 이렇게 화려하게 작품으로 완성시켜준 감동에 겨워 고마버 해띠마는.....뭐라꼬???? 자신은 배틀 제안한 사실을 가 까맣게 이자뿌리고 관심도 없었다꼬???? 꼭 그 이야기를 써야 햇등교?? 완저이 내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혼자 설친 꼴이 되뿌릿네. 히---잉 -----"옥의 티" 라고 아뢰오
우하하 콩트 대 성공이라 아뢰오^*^
단지 재미있으라고 작품에서만 그렇게 표현했을 뿐, 장윤자 군과 둘이서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을까 하고, 화분에 물을 줬다가 거실에 들였다가 생 난리를 다 쳤답니다. 그런데도 그놈의 우리 집 백합은 아직도 필 낌새를 안 보입니다. 사진 속 모양이 벌써 2주째 그대로입니다. 히히.
윤 샘이 주인공인 멋진 콩트네요. 어제는 대~충 읽었고,오늘 차근히 읽어보니 기승전결이 뚜렷한 완결 작품이 됩니다그려. 아이디어가 참...헤헤. 잘 읽었어요.^*^
그래서 다 아시다시피 제가 전쟁에서 졌기 때문에 맛있는 메기메운탕을 샀습니다. 김성수 단우님이 안 계셔서 완전한 대접은 못 되었습니다만. 히히.
하하하!!! 진짜 많이 웃었습니다. 대단한 작품입니다. 한 참 웃고 돈 벌러 갑니다. ^*^
제미있게 읽었습니다. 굉장히 사실적으로 재미있게 묘사했네요.....즐거움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많이 길어서 끝까지 읽느라 고생이 많으셨을 겁니다. 죄송합니당. 즐휴하세용. 히히.
그래도 글의 살아있는 묘사와 빠른 전개로 눈에 영상이 선하게 그려져서 재미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