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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옥,장택상의 이중플레이
정창화의 폭탄테러를 모면한 몽양에게 이제 암살위협은 심각한 것이었다. 더이상 미군정과 경찰은 몽양을 보호하지 않았다. 공공연한 테러와 암살의 순간순간이 몽양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1947년 5월 12일 몽양은 열한번째 테러를 당했다. 처음으로 당하는 총격이었다.
몽양이 탄 자동차는 초저녁인 오후 7시 30분경 혜화동 로터리 부근 보성중학교 입구를 지나고 있었다. 돌연 자동차 후미에서 괴한이 나타나 뒷유리창을 향해 권총을 발사했다. 다행히 몽양이 부상을 당하진 않았다. 피격을 당하자 동승하고 있던 이제황이 범인을 추격했다. 후에 한국유도대학(現 용인대) 총장을 지내기도 했던 유도인 이제황은 범인을 향해 질주했다. 동회 앞 범인은 권총 두발을 발사했다. 황급히 몸을 피한 이제황이 몸을 추스렸을 때 이미 범인은 사라지고 없었다. 관한 동대문 경찰서에서 수사를 진행했지만, 물론 범인의 윤곽조차 잡을 수 없었다.
이 총격은 바로 두달 뒤 일어날 여운형의 암살사건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리고 암살 당시와 정황이 너무 흡사했다. 범행장소도 혜화동 로터리였고, 총격도 자동차 후미에서 가해졌다. 범인들은 동일한 장소에서 재차 범행을 저지를 만큼 대담했던 것이다. 이미 1947년 5월을 넘어서면서 여운형이 심각한 테러 내지는 암살을 당하리란 사실은 정가의 상식처럼 널리 유포되고 있었다. 특히 제2차 미소공위가 성공적 전망을 열어놓으면서 여운형이 통일된 조선의 초대 대통령이 될 것이란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다. 대통령을 꿈꾸었던 정적들의 시기,질투가 여운형에게 집중된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한편 경찰 역시 여운형이 암살의 주된 표적이 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주한미군 정보참모부의 1947년 5월 24일자 보고에는 그 전날 조병옥,장택상이 제출한 보고서가 실려있다. 이에 따르면 조병옥,장택상은 우익집단이 미소공위를 파탄시키기 위해 관련자를 암살할 계획임을 보고하고 있다.
조병옥은 "김석황이 이끄는 극우파가 1.여운형,김규식,허헌을 암살하고, 2. 미소공위 소련측 대표를 암살하며, 3. 조병옥과 장택상을 암살할 계획"이라고 주장했다. 임시정부 김구측의 행동대원으로 알려진 김석황이 테러를 준비하고 있다는 조병옥,장택상의 주장이 정확한 진실을 전하는 것 같지는 않다. 김석황은 후에 김구 암살범인 안두희를 한독당에 가입시킨 '죄'로 구속되어, 한국전쟁시 최후를 맞은 인물이었는데, 아마도 조병옥,장택상은 여운형에 대한 테러혐의를 김구측에 미루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1947년 5월 하순 내내 조병옥과 장택상은 자신들이 공정한 업무를 수행한 때문에 우익으로부터 암살위협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곤 했다. 나아가 조병옥과 장택상은 자신들이 여운형과 마찬가지로 미소공위에 우호적인 인물로 낙인찍힌 것이 암살위협의 가장 큰 이유라고 밝혔다.
한편 장택상은 자신의 사심없는 공정성을 반증하듯이, 우익이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약 200여 정의 권총 중에서 80정의 권총을 5월초에 압수했다고 보고했다. 장택상은 이것이 2백여 정의 권총 중 일부일 것이라고 보고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병옥,장택상이 우익으로부터 직접 이 무기를 압수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우익청년단과 적절한 선에서 타협을 하고 거래를 했던 것이다. 조병옥,장택상은 자신들이 우익에 경도되지 않은 중립적 입장이며, 우익의 권총을 압수할 정도로 공정하기 때문에 암살위협까지 당한다고 선전했지만 이는 '이중플레이'에 불과했다.
조병옥은 무기를 압수하기는 커녕 우익테러단체의 무기은닉을 보호했고, 그들에게 무기를 제공하기까지 했다. 이승만의 조직인 독립촉성국민회 청년단의 조직부장을 지낸 문병극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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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1946년 2월 6일에 38선을 넘어 남으로 내려왔습니다. (중략) 조병옥 경무부장은 호신용 권총을 건네주며 어깨를 두들겨 격려했습니다. 당시 청년단의 무기는 미제 45구경 권총이었습니다. 이 권총은 인천의 미군 무기고 책임자인 흑인장교 매케인 대위를 미인계로 매수하고 70정을 한꺼번에 빼낸 일종의 법칙무기였습니다. 7정 중 우선 35정을 서울로 가져왔으나 나머지가 미군헌병대에 적발되었고, 나도 검거되는 불운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조병옥 경무부장이 사람을 보내 신병인수 형식으로 빼돌려 주었습니다. 조병옥은 나를 대공투쟁에 꼭 필요한 인물이라고 굳게 신임하여 문제가 생길 때마다 적극 비호해 주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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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익 '청년단체'에 무기를 대주면서까지 노골적으로 그들을 감쌌던 경찰의 핵심간부 조병옥,장택상은 왜 자신들에 대한 테러의 위협을 선전하고 다녔을가? 정말 우익의 암살위협이 있던 것일까? 만약 좌익의 암살위협이 있었다면 이해할 수 있지만 우익의 암살위협을 강조하는 이들의 태도는 진실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또한 암살의 배후조종자로 왜 김구측의 김석황을 지목한 것일까? 결국 나중에 김석황은 자기가 신봉하고 추종하던 김구에 대한 암살관련자로 몰려 운명을 다하고 말았지만, 김구의 뜻이 여운형 암살이었다고 판단하기엔 그 논리적,자료적 근거가 매우 희박했다. 반면 김구를 정적으로 생각하는 우익의 다른 측에서 여운형에 대한 암살을 계획,준비,실행하면서, 그 책임을 김구측에 떠넘기려는 속셈이었을 가능성은 보다 현실적 근거가 상당하다. 즉 "여운형을 제거하면서, 그 책임은 김구가 지게 한다."는 꿩도 먹고 알도 먹는다는 계획이 짜여졌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여운형이 암살되었을 당시 암살배후자로 수도경찰청에 연행되었던 신동운은 당시 한독당계 우익인사 50여 명이 경찰에 연행되어 있었다고 증언했다. 한편 백범 암살에 관계했던 홍종만도 당시 백의사의 고문이자 해방이래 정치테러 브로커격이었던 김지웅이 여운형 암살을 '한독당 소행으로 몰고 가려했었다.'고 증언한 바 있었다.
이 같은 이중플레이는 후에 김구가 암살되었을 때도 재연된 바 있다. 한독당 당수인 김구가 암살되었지만, 경찰은 안두희가 한독당 '비밀당증'을 가진 한독당원이란 이유를 들어 암살의 배후를 캐기보다는 한독당을 탄압하는 데 주력했던 것이다.
이런맥락에서 본다면 경찰 핵심간부들의 '우익암살' 운운의 정치적 함수관계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들은 암살정보를 흘려 김구측을 옭아매는 반면 자신들은 발을 뺐던 것이다. 여운형이 암살된다면 "여운형과 함께 암살위협을 받았던 자신들은 그 암살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알리바이가 성립될 수 있고, 실제 암살을 누가 조종했냐와는 상관없이 그 혐의는 결과적으로 김구측에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여운형 암살직후 경찰은 김구측을 암살의 배후 조종자로 몰아가려고 시도했지만, 암살이 너무 뻔한 인과관계를 지녔기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존 하지, 이승만에게 공개적으로 암살중지를 요구
이런 와중에서 1947년 6월 28일 존 하지는 이승만에게, 이승만과 김구가 계획중이라는 테러 행위를 즉각 중지하도록 요청하는 서한을 공개적으로 보냈는데, 이 서한은 모종의 정치 암살도 포함되어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공개서한 띄운건 여운형 암살 20일 전이었다. 하지는 서한을 통해 이승만진영이 여러 건의 정치암살을 계획하고 있으며 테러행위와 경제교란을 획책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다음은 6월 28일자 하지의 서한이다. ---------------------- 귀하의 정치의 기구 상층부에서 나온 줄로 짐작되는 보도에 의하면 귀하와 김구씨는 공위업무에 대한 항의수단으로서 조속한 시기에 테러행위와 조선경제교란을 책동한다 합니다. 고발자들은 이런 행동에는 기건(幾件)의 정치암살도 포함하기로 되었다 함을 중복설명합니다. 이러한 성질의 공연한 행동은 조선독립에 막대한 저해를 끼칠 터이므로 이러한 고발이 사실 아니기를 바랍니다. 조선의 애국심 전부가 건설적 방도에 발양(發揚)되고 아름다운 조선대중에게 유혈 불행 재변을 의미하며 조선의 독립할 준비가 아직 안되었다는 것을 세계에 보여주는 케케묵은 방식을 통하여 발현되지 않기를 나는 과거에도 바랐고 또 계속하여 바랍니다. ---------------------- 이 같은 공개서한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는 좀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 하지는 '미소공위를 파탄'시키기 위해 이승만진영이 경제교란,테러,암살등을 계획한다는 내부정보를 갖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셈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승만측의 실제 행동이 '가시권'에 들어올 정도로 구체화되었고, 공개서신으로 밀어붙이지 않으면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다급한 상황이 벌어질 찰나라는 것이다. 다른한편으론 이런 설명도 가능하다. 적어도 미군정 당국의 묵인 내지 방조를 얻지 않은 상태로 정치지도자에 대한 암살은 불가능했다. '허가'받지 않은 암살의 배후자가 받게 될 미군정의 보복은 암살의 이득보다 훨씬 강도높을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미군정이 '보호'하는 인물에 대한 테러,암살이 불가능하다는 사실도 분명했다. 그리고 누구도 감히 그런 암살을 계획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당시 미군정은 암살사건이 일어날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하지가 지적한 대로 암살의 목적이 미소공위를 파탄시키려는 것임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암살의 표적이 누구인가 하는 점은 거의 밝혀진 셈이었다. 미소공위 성공을 염원하는 사람, 미소공위 참가를 주도하는 사람, 미소공위 성공과 임시정부 수립으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사람이 바로 암살의 표적이었다. 대중적 인망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여운형은 가장 좋은 표적이었다. 게다가 공개적 활동을 주로하는 여운형은 테러리스트에게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박헌영도 테러,암살의 표적이 될 수 있지만, 그의 신분은 늘 비밀스러웠고 공개되지 않았다. 박헌영은 대중들 앞에 나서지도 않았고, 이미 이북으로 올라간지 한참되었다. 존 하지는 미소공위 파탄을 위한 테러가 준비되고 있다고 경고했지만 그 의미는 좀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1947년 6월,7월은 이미 제2차 미소공위가 파탄날 것이 분명 예견되는 시점이었다.(각주-제2차 미소공위 초창기는 어느정도 순조로웠고, 좌우합작위원회의 활동도 활발했던 시기였습니다.) 미,소는 미소공위 협의대상인 정당,사회 단체 범위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있었지만, 내심으론 한반도 분단에 따른 현상유지정책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특히 미국무부와 주한미군정은 한반도 문제의 유엔이관과 남한 단독선거 실시-단독정부 수립의 실현을 위한 마스터플랜을 이미 수립한 상태였다. 더이상 미소공위는 미국이 지켜야 할 대마(大馬)가 아니었다. 이제 미소공위는 국제여론과 한반도를 의식한 꽃놀이패에 불과했다. 언제라도 버릴 수 있지만, 미국의 품위와 국제적 체면을 지킬 수 있는 시점에 버릴 수 있다면 금상첨화인 셈이었다. 하지의 공개서한은 미소공위 파탄을 우려하는 목소리로 가득차 있었지만, 하지의 행동은 미소공위 파탄과 단독정부 수립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런 역설적 상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미군정에게 여운형은 어떤 의미였을가? 적어도 미소공위라는 틀을 깨지 않는 한에선 이용가치가 있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미소공위는 물건너간지 오래였다. 그의 사상적 경향도 의심스러웠다. 공산당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북한과의 관계는 매우 심각할 정도로 베일에 가려있었다. 미군정은 만약 자신이 단독정부 수립으로 치달을 때 여운형이 후원 내지 동조세력이 될 수 있을까의 여부를 계산했다. 그 결과는 극히 부정적이었을 것이다. 여운형은 미군정이 단정으로 나아갈 때 중대한 방해세력이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조만간 여운형에 대한 처리문제가 미군정 당국자의 골머리를 썩히게 될 상황이었다. 이때 때맞춰 여운형에 대한 암살공작이 미군정의 정보망에 걸렸다. 미군정은 누가 왜 그런 음모를 꾸미는지 알고 있었고, 어떻게 하면 이를 저지할 수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사태가 자연적으로 흘러가게 내버려 두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용도폐기'된 여운형의 제거였기 때문이고, 잘하면 자신의 손을 덜 수도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길 위에 놓인 장애물을 자진해서 치워주겠다는데 마다할 입장은 아니었던 것이다. 반면 미군정의 침묵과 묵인은 단정세력에겐 정권장악에 대한 '축하선물'을 의미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자신의 이름이 암살의 파렴치한 무대위에 등장하는 것을 원하진 않았다. 적어도 암살사건과 미군정을 무관하게 할 정도로 발을 빼는 작업이 필요했다. 이런 맥락에서 하지의 공개서한은 미군정이 공식적으로 여운형 암살과 무관함을 선언하는 대외적 행사였을 뿐이다. 미군정은 서한을 발표하곤, 뒤로 빠져버렸다. 손을 놓고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암살이 일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승만측을 감시,감독하거나 수사하지도 않았다. 물론 여운형을 보호하지도 않았다. 미군정은 여운형 암살을 공식적으로 허가하지 않는다고 밝혔지만, 이미 암살범들을 묵인,방조하고 그들의 계획에 협조하고 있었던 셈이다. 미군정의 속셈을 뻔히 알고 있던, 친일파로 가득찬 경찰은 오히려 암살에 적극 협조했다. 이것이 하지의 서한에 담긴 정치적 의미였을 것이다.
존 하지의 서한이 공개되자 당연히 이승만은 길길이 날뛰었다. 이승만 역시 하지에게 보내는 답신을 공개했다. 이를 통해 이승만은 하지의 서한이 '신탁지지를 강요하기 위해 위협적이며 입을 틀어막는 방식'이라며,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자기 조직내의 고발자가 누구인지 폭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승만은 자신의 죄를 지었다면 죄과를 받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밀고자가 명예훼손으로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테러,암살,방화범은 제2차 미소공위 덕분에 석방된 669인의 반미 공산주의자들이라며 책임을 떠넘겼다. 그러나 실상 석방된 이들 대부분 '대구 10.1 사건'의 여파로 억울하게 투옥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노회한 이승만은 존 하지의 서한을 김구에게도 돌렸다. '테러리스트'란 말을 제일 싫어했던 김구 역시 하지의 서한에 크게 반발했다. 김고도 밀고자의 이름을 밝힐 것을 요구하며, 이렇게 말했다. "각하는 우리에게 대하여 여러 차례나 반미분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실 우리는 미국의 민주주의 원칙을 위하여 투쟁하는 것 뿐입니다." 이승만이 암살음모의 배후조종자로 지목되자, 우익진영에선 총궐기의 기사로 들고 일어났다. 7월 4일 독촉국민회 회의실에선 미소공위에 대처하기 위해 급조된 무려 88개 단체의 대표 2백 여명이 모여 밀고자를 발표하라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들은 또한 미소공위 미측 수석대표 브라운 소장과 민정장관 안재홍을 비난했다. 그 이유는 6월 23일 회담차 서울에 입경한 미소공위 소련측 대표들이 탄 자동차를 반탁시위대가 가로막고 온갖 욕설과 투석 등의 봉변을 가한 사건과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심지어 경비를 담당해야 할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은 시위대를 해산시키기는 커녕 대표 3명을 미소공위 회담장인 덕수궁 안으로 인도해 브라운과 45분에 걸친 '회담'까지 알선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소련측 대표들은 미군측에 강력히 항의했고, 브라운 소장은 '폭도'들의 난동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던 것이다. 게다가 시위대의 대표가 이승만의 지시에 따라 시위를 벌인다고 말한 사실을 브라운이 지적하자, 이승만진영은 흥분했다. 민정장관 안재홍은 그날의 반탁시위를 주도한 엄항섭,김석황 등 우익인사에 대한 체포령을 내린 덕분에,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미운'격으로 비난을 당한 셈이었다. 게다가 이들은 과도입법의원에서 만든 보통선거법을 가지고 총선거를 실시해야 한다는 결의안까지 채택했다. 나아가 이들은 결의문을 미 국무성과 도쿄 맥아더 사령부에 타전하는 한편 서울 주재 미국,영국,중국,프랑스 영사와 AP,UP,INS,뉴욕타임즈 기자에게도 그 사본을 전달했다. 하지,브라운,헬믹,안재홍 등은 이들의 항의방문 때문에 한동안 골머리를 썩어야 했다. 이렇게 해서 하지 서한의 파동은 예상했던 대로 한고비를 넘기고 있었다. 하지는 이승만을 공박하고, 당황한 이승만은 대중적 여론을 모아 이에 반대함으로써 양자 모두 테러,암살과는 무관하다는 증거를 확보한 셈이었다. 10여일 지속된 이 소동은 점차 세인의 관심 밖으로 사라졌지만, 여운형 주변의 공기는 더욱 심상치 않았다. 여운형 자신도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존 하지의 공개서한을 받은 후 분노에 떨며 7월 3일 하지 장군에게 더이상 협조하지 않고 자율행동을 취하겠다고 성명했던 이승만은 여운형의 암살 3일전인 7월 16일 하지를 방문해 중요회담을 가졌다. 저녁 8시에 급히 하지를 방문한 이승만은 하지, 그리고 하지의 정치고문이자 미소공위 미측대표인 제이콥스와 긴밀히 회담했다. 회담 내용은 마샬 국무장관이 보낸 모종의 전문에 관한 협의였다고 알려졌지만, 이승만은 무슨 내용이 오갔는지에 대해선 함구했다. 그러나 미국무부의 정책을 왜 이승만과 하지가 협의햇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고, 게다가 며칠 전까지만 해도 견원지간 같던 이승만-하지가 '조선문제에 관해 서로 협조하기를 요망'했다는 사실도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설명이었다. 다음날 밤엔 이승만의 돈암장에서 랭던부부와 제이콥스가 초대되어 만찬이 열렸다. 후에 밝혀진 바지만, 몽양 암살범들은 7월초부터 몽양 암살의 기회를 노려왔고 몇차례 실패를 거쳐 7월 17일에는 마지막 계획을 짜고 있었다. 운명의 시간은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7월 18일이었다. 몽양은 자신의 영문비서 황진남을 지켜 미소공위 미측 수석대표인 브라운 소장과 약속을 잡아놓았다. 저녁 8시반경 몽양은 황진남과 이제황,박성복 두 경호원을 동반하고 필동에 있는 브라운의 숙소를 방문해 한시간 가량 면담을 하고 돌아왔다. 몽양이 브라운을 방문한 것은 암살 협박편지 때문이었다. 이날 몽양이 받은 편지에는 "당신이 우리측으로 되돌아 올 시간은 아직도 남아있다. 만약 따르지 않는다면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라고 쓰여 있었다. 편지의 서명은 조개문양 속에 들어 있었는데, 여간 기분나쁜 모양이 아니었다. 며칠 전에도 근로인민당사로 협박편지가 날라왔었는데, 편지 내용은 "이 편지를 본 즉시 양심이 있으면 네 생명을 끊어라. 그렇지 않으면 이쪽에서 생명을 빼앗겠다. 전남 대덕군 이철국(全南 大德郡 李哲國)"이라는 것이었다. 근로인민당측은 충남 대덕군을 전남 대덕군으로 표시한 것으로 미루어 협박자의 주소,성명이 가짜일 것으로 생각했지만, 일단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물론 예상했떤 대로 경찰은 협박자를 추적할 수 없다는 말만을 되풀이 할 뿐이었다. 그러던 차에 또 다른 협박장이 배달되었고, 몽양은 이런 악질적인 장난을 그만두게 하기위해선 미군정에게 항의하는 방법이 가장 빠른 길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여운형과 만난 브라운 소장은 여운형과의 인터뷰 내용을 비망록으로 만들었다. 게다가 자신을 만나 암살의 위험을 호소했던 여운형이 다음날 살해되었기 때문에 브라운의 비망록은 여운형을 만난 마지막 미국인의 기록인 셈이다. 미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반세기 가까이 묻혀있던 부라운의 비망록은 이런 내용이었다. ================== 미측대표/미소공동위원회/서울, 한국/1947. 7. 19 하지장군을 위한 비망록 제목:여운형과의 인터뷰 1. 여운형과 '땅딸보' 황(황진남을 의미)이 어제 저녁 내 숙소를 방문했습니다. 여운형은 나에게 공위의 강래전망에 관해 질문했습니다. 여운형은 "나의 생명이 위험하다, 나는 오늘 즉 7월 19일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향리로 가려고 한다. 경찰이 더이상 나, 혹은 우익이 아닌 다른 어떤 개인도 보호하려 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민족전선이 7월 27일 서울에서 개최될 예정인 대규모 시위를 계획하고 있다, 참가자들은 조선 각도에서 올라올 것이며, 내 추정으로는 참가자 수가 100,000명을 상회할 것이다, 나는 우익 청년들이 이 집회에서 좌익 시위자들을 공격하려고 준비하고 있음을 확신하며 만약 집회가 개최된다면 대규모 혼란이 발생될까 우려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집회를 허가해선 안되며, 대회 개최가 인가되어선 안된다."는 견해를 피력했습니다. 2. 그는 "미군사령부는 이승만을 추방해, 미국이나 다른 곳으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이승만은 현재 남조선에서 모든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3. 정치고문단에 의해 준비된 세 가지 비망록이 첨부되어 있습니다. 결론은 몇 가지 의문을 면할 수 없습니다. 알버트 E. 브라운/ 미육군 소장 / 미소공위 대표 ===================== 아울러 버취 중위가 만든 또 다른 비망록에는 이날 몽양이 브라운에게 항의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몽양은 수도경찰청장인 장택상이 자신 보고 서울에서 떠날 것을 경고하며 만약 서울에 남아있으면 안전을 책임질 수 없다고 말한 점에 대해 강한 유감을 표명했다. 물론 몽양 역시 이승만이 혼란과 테러의 책임자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왜 자신이 공개적 테러,암살의 표적이 되어야 하느냐고 항의한 여운형은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운명의 7월 19일은 토요일이었다. 아직 독립된 나라는 아니었지만 조선은 다음해 개최되는 '런던올림픽' 참가가 허용되었다. 이날 서울운동장에서는 아침 9시부터 조선체육회 주최로 올림픽 참가를 경축하는 종합기념경기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체육회장이자 조선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인 여운형은 참석하지 않았다. '양평으로 잠시 몸을 피할 것인가? 아니면 체육대회에 참가해 축하인사를 한다?'이런 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다시 아파왔다. 안그래도 요 며칠 사이 미소간에 미소공위 협의대상 정당,사회단체 선별문제를 둘러싼 논란이 심상치 않은 상태였다. 제2차 미소공위 마저 무산될 기미가 농후한 위기상황이었다. 만약 제2차 미소공위마저 무산된다면, 한반도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제 밥그릇도 못 찾아먹는 어리석은 민족이란 소릴 듣진 않을까? 미국사람들의 태도로 보아 단독정부 수립의 길로 치달을 가능성이 충분히 예견되었다. 아침을 드는 둥 마는 둥 한 몽양은 운전사 겸 경호원인 박성복을 불러 과도입법의원 김호(金乎)의 성북동 집으로 차를 몰게 했다. 재미교포인 김호의 집에는 지난 6월 16일 일시 귀국한 조선사정소개회 회장 김용중이 머물고 있었다. 6주 체류를 예상했던 김용중은 일정을 앞당겨 7월 20일 돌아갈 예정이었다. 몽양은 청년시절부터 아껴운 독립신보사 주필 고경흠과 함께 차에 올랐다. 김용중에게 작별인사도 할 겸 전할 말도 있었던 몽야잉 김호의 집에 도착한 것은 9시 20분 경이었다. 김용중과는 상하이에서 만난 후 30여년만이었지만, 서로 통하는 바가 있었다. 김용중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 몽양은 자신이 준비해 간 편지 한통을 건네주었다. 몽양으로서도 자신이 이 편지가 마지막 유고가 될 줄은 꿈에소 상상하지 못했다. 편지는 몽양의 친필로 쓴 3장에 걸친 영문편지였다. 주로 미군정과 자신의 관계를 담담한 어조로 써내려간 몽양은 마지막에 이르러 움켜잡고 있던 감정의 끈을 놓치고 말았다. 어떤 연유에서인지 김용중에게 건네준 이 편지 원본은 주한미군 정보참모부 당국에 입수되었고, 몽양의 서명이 또렷한 이 편지는 지금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의 문서상자 속에 들어있다. 50년 동안 햇빛을 보지 못한 편지 원본에서 몽양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 가령 위의 북조선에서 소련이 극좌파 분자만을 선호한다고 하면, 여기 남조선에서 미국은 그 반대극으로 가려하고 있소. '좌익'내지 극우파가 아닌 모든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히고 그 활동을 방해받고 있소이다. 1941년 1월 6일, 루즈벨트 대통령은 의회연설에서 세계는 4가지 기본적인 인간 자유를 구축해야 한다고 선포했소. 1.언론의 자유 2.종교의 자유 3.궁핍으로부터의 자유 4.공포로부터의 자유 친애하는 김선생, 선생에게 하는 말이오만은 나는 공포로부터의 자유가 없소. 나는 아직도 미군정하에서 국립경찰로 채용된 친일파의 손아귀에 고통받고 있소이다. ========================== 몽양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 "나는 공포로부터의 자유가 없소"는 몇 시간 후 현실로 입증되고 말았다. "미군정하에서 국립경찰로 채용된 친일파의 손아귀"에서 고통받던 몽양은 이제 영원히 그리고 완전히 공포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몽양을 마난고 돌아선 김용중은 몽양이 암살된 사실을 알고 격정을 가눌수 없었다. 30년만에 귀국한 조국은 애국자에 대한 마지막 대접이 어떤 것인지를 너무 적나라하게 보여줬기 때문이다. 전북 김제 출신으로 18세에 미국에 건너갔던 재미한국인 김용중은 이승만이 권좌에 오른 조국엔 다시 들어올 수 없었다. 짧은 만남이었음에도 몽양을 존경하게 된 김용중은 몽양의 좌우합작운동에 공감하고 있었다. 몽양의 죽음과 한국전쟁의 물신성을 체험한 김용중은 미국에서의 1950년대~60년대를 '한반도 중립화 통일운동'에 헌신했다. 그가 바라지않던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될 즈음, 그는 병상에서 칠순을 넘기고 있었다. 그리고 공동성명의 정신이 남북당국자들의 권력욕에 의해 철저히 무시된 직후인 1975년 쓸쓸히 이 세상을 떠났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