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순례, 저런 해설
(전주교구 신앙문화유산해설사 3기 이상원 라파엘)
2007년 해설사 3기로 봉사를 시작한지 17년.
참 여러 모습의 순례단을 만났었고, 여러 가지 의미 있는 해설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잊혀지지 않고 기억에 남아있는 몇 사례들을 돌아보고자 한다.
▽ 잊고 싶은 사례 하나
오래전 천호성지에서의 일이다.
여느 때와 같이 먼 곳 서울에서 온 순례단을 주차장에서 만나 부활성당으로 안내하여 올라갔는데 미사 시간에 보니 순례단원 숫자가 줄어있었다. 궁금했지만 그러려니 하고 말았는데, 식사 시간이 되니 미사 시간에 보이지 않던 일부 순례단원들이 합류를 한 게 아닌가? 아마 다른 일정이 있었나보다 했는데 그분들의 대화에서 내용을 알게 되었다. 배낭에서 무언가를 꺼내 보이며 한참 자랑을 하는데, 알고보니 미사 시간에 뒷산으로 올라 고사리를 채취했다는게 아닌가? 참 어이없고 기가 막히는 순간이었다.
후에 성지 관장 신부님께서 농약을 살포한 산나물을 채취하지 말라는 경고판까지 세울 정도였으니 성지순례가 아니라 성지관광이란 말이 어울리는 순례단이었다.
▽ 잊고 싶은 사례 둘
치명자산 성지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때 서울의 모모 사도회에서 3일간에 걸쳐 교대로 버스 3대 인원이 성지순례를 왔는데 첫날 당시의 루갈다 광장에 있는 성지 식당 대가집에서 점심 식사 후 산상 순교자묘역을 참배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식사 시간에 모든 테이블에서 아예 술병을 내놓고 마셔대고들 있었다. 막상 산상 순교자 묘역을 참배하러 오를 때는 많은 분들이 술 마신 핑계로 올라가기를 포기하고 말았다. 음주를 말려보았지만 들은 체도 아니하였다. 둘째 날도 역시 똑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보다 못한 나는 단체 책임을 맡은 회장에게 전화로 그간의 사정을 전하고 주의를 당부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둘째 셋째 날 온 버스는 계속 다른 버스였다. 원래 3대의 버스를 3일간 예약을 했다는데 다른 버스들이 온 것이었다.
운전기사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니, 순례 일정을 마치고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도 술들을 많이 마시고 떠들고 춤을 추고 하는 바람에 운전하기가 어려울 지경이라 아예 계약을 취소했다고. 그러면서 천주교 성지순례가 조용하고 얌전한 여행으로 알고 계약을 했는데 이렇게 엉망인 모습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노라고. 버스 운전기사의 말을 들으며 부끄럽고 곤혹스럽기 짝이 없었다.
물론 셋째 날은 회장이 사전에 음주는 안 된다고 공지를 하고 대다수가 음주를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뒤에서는 또 음주하는 모습들이 보였다.
▽ 잊고 싶은 사례 셋
한 번은 모 교구 레지오마리애 꾸리아에서 약 80명이 치명자산 성지로 순례를 왔었다. 산상 순교자묘역을 참배하고 기념성당과 기적의 바위 등을 거쳐 하산하는 도중에 성직자 묘역 참배까지 순례를 마치고 아래 평화의전당에 도착했는데 관장 신부님으로부터 호출이 있었다. 그 순례단이 휴식 시간에 음주 파티를 열고 있으니 제지를 해야되지 않겠느냐는 말씀이었다. 신부님이 직접 말씀하시기가 저어하기 때문이었다. 성지 직원과 함께 순례단이 모임을 진행하는 곳으로 찾아가 음주를 제지하였는데 불만이 가득했다. 산상 순교자묘역 참배도 끝났으니 음주도 가능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결국 술자리는 정리했지만 신심 단체 회원들의 성지순례로는 보기에 썩 좋은 모습이 아니었다.
△ 잊지 못할 사례 하나
몇 년 전에 의정부 교구 탄현동 본당의 순교자공경회 회원 40여 명이 이틀간 일정으로 전주교구로 순례를 왔다. 이틀간의 일정을 함께 동행하며 해설을 하게 되었는데, 첫째 날 나바위, 여산, 되재를 거쳐 천호 피정의 집에서 1박하고, 둘째 날은 초남이, 숲정이, 서천교, 초록바위, 전동성당, 한옥마을, 치명차산 성지로 이어지는 풀코스였다.
그런데 첫날 저녁 천호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그저 편히 쉬고 다음 날을 준비하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모두 강의실로 모이는게 아닌가? 무슨 일정이 따로 있나 하고 지켜보니 그룹별 토의가 있고 전체가 모여 오늘 순례했던 성지에 대한 소감 발표와 내일의 성지를 사전에 공부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그 단체는 지도신부님 동행도 없었지만, 식사 시간에 음주는 고사하고 쉬는 시간에도 기도하는 자세로 신앙 선조들의 모습을 닮고자 노력하는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 잊지 못할 사례 둘
어느 해 특이하게도 개신교 장신대 학생들이 치명자산성지로 순례를 왔는데 마침 내가 해설을 담당하게 되었다. 산에 오르며 십자가의길 초입의 피에타상 앞에서 산 위에 묻혀계신 순교자 일가족에 대해 사전 설명을 하고 산을 오르려 하는데 어느 학생 하나가 신발을 벗는 것이 아닌가? 신발을 벗고 오르면 바윗돌 때문에 발이 아파 힘들어서 안 된다고 하니 그 학생 대답에 온몸이 저려 오는 듯했다.
"주님을 위해 자신과 가정과 그 많은 재산을 오롯이 봉헌한 유항검님과 아들 내외 동정 부부와 그 일가족이 묻혀계신 성스러운 땅을 어찌 감히 신발을 신고 오르겠습니까?"
그 대답을 들은 나는 과연 그동안 어떤 마음과 자세로 성지순례를 했었나~? 숙연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잊지 못할 사례 셋
가장 근래에 있었던 순례단의 아름다운 모습을 잊지 못하고 있다. 우리 교구 성지 안내와 해설로 알게 된 춘천교구 자매님들 일행이 은퇴하신 원로 주교님을 모시고 이틀간의 순례를 온 것이다. 또 감사하게도 이틀간 해설을 나에게 부탁했기에 주교님 일행에 맞도록 일정, 식당, 해설 내용을 나름대로 준비했다.
첫날, 나바위, 여산, 천호성지까지.
숙소는 치명자산성지 평화의전당으로 정하여 몸과 마음 모두 편안하도록 신경을 썼다. 마침 우리 주교님께서도 그 주교님 일행이 치명자산성지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알고 직접 찾아오시고 주교님 일행에 맞추어 음식까지 준비해 주셔서 순례단 모두가 감사의 인사를 아끼지 않으셨다.
둘째 날 전동성당, 한옥마을, 풍남문, 초록바위, 서천교, 숲정이를 거쳐 초남이 성지까지. 이틀간의 안내와 해설을 마치고 마지막 인사 때 당시의 나의 건강 상태를 말씀드리며 힘든 상황인데도 (당시로 1년 전 폐암 수술 두 차례, 시술 두 차례) 이렇게 큰 무리 없이 안내와 해설을 하며 함께 성지를 순례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 주님께 감사하다는 말씀으로 일정을 마치게 되었다.
그런데 너무나도 감사한 일은 그다음에 있었다. 해설사로 저를 지명해 주심에 감사드리며 순례단원들에게 산티아고 순례기를 쓴 내 책과 첫 순교복자 윤지충과 권상연의 공술기 “어떻게 천주를 배반할 수 있었습니까?”를 비롯하여 전주교구 성지 기념품 몇 가지를 선물로 드렸는데, 그 답례로 주교님께서 병원비에 보태라며 금일봉을 주셨다. 평소에는 금전적인 대가를 받지 않지만 주교님께서 주신 봉투였기에 내용은 보지도 않고 감사의 마음으로 받았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확인하니 상상 이상의 금액이 들어 있어 깜짝 놀랐다. 너무나 놀라서 이번 성지순례를 준비하신 분께 연락을 드렸더니 불편한 몸인데도 이틀간의 해설을 정성으로 해준 모습이 고맙다며 수고비조가 아닌, 주교님의 사랑이 담긴 금일봉이라며 편하게 받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지금 고백하지만 사실 주교님의 그 금일봉은 당시 나의 폐암 수술 후의 치료비에 일정 부분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었다.
△ 잊지 못할 사례 넷
약 2년 전 겨울에 있었던 일이다. 성지 신부님께서 특별한 순례단이 왔으니 함께 안내를 하자는 것이었다. 성지에 도착하니 특별한 손님들이란 바로 미군사령부 군종 신부들인데 각각 사무장을 대동하고 치명자산을 찾은 것이었다. 군산 비행장 공군부대에 계신 신부님이 가까운 곳에 순교자의 삶을 알아볼 수 있는 성지가 있어 꼭 방문해 보고 싶었다며 미군사령부 본부 군종신부님을 모셨다고 하였다. 평화의전당에서는 헨리코 신부님이 해설을 해주셨고, 산상 순교자묘역과 기념성당 안내는 내가 담당하였다. 체구가 커서인지 두 분 신부 모두 무릎 관절이 좋지 않아 오르내리는데 매우 힘들어하였다. 종교 역사와 박해의 과정, 그리고 산 위에 모셔져 있는 순교자들의 삶을, 전문 통역사가 아닌 분과 함께 어렵게 해설을 했는데 해설을 듣고 궁금한 사항을 묻고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그렇게 진지할 수가 없었다.
나는 지금도 해설 요청이 오면 특별한 경우 아니면 언제든지 봉사하고 있다. 그러면서 해설을 할 때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호남교회사연구소 소장 이영춘 신부님의 강의에 쫓아다니기도 했고, '한국천주교회사' 다섯 권을 워드로 필사했으며, 전주역사박물관에서 진행하는 전라도 지역의 역사 탐방에도 참가하고, 새로 쓴 택리지 저자와 자주 만나 외인의 입장에서 바라본 순교와 성지에 대해 들어보기도 했고, 우리 천주교 역사 특히 순교 역사와 불가분의 관계인 유교에 대해서도 공부를 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지금까지 신앙문화유산 해설 봉사를 계기로 전국 167개 성지를 거의 도보로 순례하고 축복장을 받은 일, 진산에서 전주까지 첫 순교자 압송로 60여km를 매년 도보로 순례했던 일, 초남이에서 거제까지 아홉 살 어린 나이 유섬이님이 끌려갔던 통영대로 유배길을 전국 여러 교구에서 참가한 순례자들과 함께 13일간 걸었던 일 등은 나의 해설사 활동에서 큰 흔적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극적인 일은 이 나라의 첫 순교자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 그리고 윤지헌 프란치스코님의 유해를 230년 만에 찾은 일이며 그분들의 유해를 손으로 직접 만져볼 수 있었다는 사실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극적이며 대단한 감격이었다.
이렇게 봉사를 하면서도 전주교구 성지를 다녀가신 분들이 다시 우리 교구를 찾을 수 있도록 관심을 유도하기도 하였다. 방법은 우리 교구에서 진행되는 순교에 관련된 모든 행사를 알려주고 참가를 권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로 성지순례 목적지를 정할 때 전주교구를 추천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도보 성지순례 등에 직접 참가한 분들을 만날 수도 있었다. 그것은 꼭 나의 권유와 안내, 그리고 해설 덕분이 아니라고 한대도 작은 빌미는 되지 않았을까 자부해본다.
그렇지만 정작 우리 교구 신자들이 교구 내 성지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지 않나 싶어 안타까울 때도 있었다. 그나마 레지오 단원들에게 교구 내 성지순례를 권장하는 모습에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초록바위와 서천교, 전주 옥 터, 김제 순교지 등이 어디인지 모른다는 교우들을 보며 아직도 더 많은 관심과 알림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제 우리 교구에 순교현양원이 조직되었고 앞으로 주요한 사업들을 하게 될 터인데 많은 신자들이 관심을 갖고 적극 동참해 주기를 기대해 본다.
그동안 해설을 하면서 주님께 받은 은혜가 한량없이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 이 봉사활동이야말로 나에게 딱 주어진 사명과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할 때까지 우리의 자랑스러운 신앙의 선조들처럼 피의 순교 곧 적색 순교는 할 수 없을지라도, 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처럼 자신을 오롯이 주님께 바친 백색 순교는 할 수 없을지라도,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펼치며 주님 가르침에 따라 현대의 녹색 순교자의 삶을 살아가기로 다짐하며, 신앙 선조들께서 매일 바쳤다고 성지 신부님께서 알려주신 기도를 나도 조용히 바친다.
“주님, 순교의 은혜를 입게 해주십시오.”
첫댓글 순례자가 보여주었던 부끄러운 모습도 마음에 담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아름다운 모습도 마음에 담습니다. 삶속에서 말씀을 살아 실천했던 신앙선조들, 순교자들의 영성을 곰곰히 생각하며. 순례길을 뜨겁게, 묵직하게 걷게 해 주는 좋은 글 잘 읽었어요. 늘 건강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에구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선조들의 삶을 현장에서 느껴볼 수 있는 기회가 바로 성지순례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삼우미사를 치른 호남교회사연구소 명예소장이신 김진소 대건안드레아 신부님은
평소 교회사 공부면 하려면 현장으로 가야 하느니...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지순례를 통한 선조들의 영성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