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언론 매체를 장식하는 트렌드 용어 중 유독 눈에 밟히는 단어가 있다. 바로 ‘무빈소 장례’다. 빈소를 차리지 않고, 조문객을 받지 않으며, 고인을 안치실에서 곧바로 화장장으로 모시는 이 간소화된 형태의 장례를 두고 일부 언론은 ‘실속형 장례’, ‘합리적인 1인 가구의 선택’, 심지어는 ‘시대의 변화에 발맞춘 새로운 소비 트렌드’라며 앞다투어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대단히 위험하고 경박한 시선이다. 전통적인 격식이 간소화되고 혼례의 형식이 다양해지는 오늘날, 의례의 외형이 다소 가벼워졌을지언정 그 안에 담긴 본질적인 무게까지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기 때문이다. 언론이 한 인간의 엄숙한 죽음과 이별의 과정을 그저 하나의 ‘소비 형태’나 ‘유행’인 양 다루는 것은, 우리 사회의 마지막 정신적 보루를 무너뜨리는 일과 다름없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본질적 의례의 가치, 결혼식과 장례식은 인간이라는 사회적 존재가 공동체를 영위하는 한 결코 소멸하지 않을, 소멸해서도 안 될 본질적 의례이다. 생의 절정에서 맞이하는 환희가 결혼식이라면, 생의 커튼이 내려진 후 마주하는 깊은 비애는 장례식이다. 이 환희와 비애야말로 인간이 삶을 살아내며 마주하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자, 동물과 인간을 구별 짓는 종교적·문화적 경계선이다.
인류학자들은 문명의 시작을 ‘시신을 매장하고 애도한 흔적’에서 찾는다. 죽은 이를 기억하고, 그를 떠나보내며 슬픔을 나누는 행위야말로 인간이 사회적 연대감을 형성하는 첫걸음이었기 때문이다. 장례식의 빈소는 단순히 고인의 시신을 거두는 물리적 공간이 아니다. 그곳은 고인이 이 세상에 남긴 삶의 궤적을 돌아보고, 유족들이 슬픔을 세상 밖으로 꺼내어 위로받으며, 살아남은 이들이 다시 삶을 살아갈 힘을 얻는 ‘치유와 연대의 공간’이다.
그런 빈소를 생략한다는 것은, 단순히 비용을 아끼고 절차를 줄이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한 인간의 마지막 존엄을 배웅할 기회를 스스로 박탈하는 것이며, 유족에게는 슬픔을 사회적으로 공유하고 소화할 시간을 빼앗는 행위다.
언론의 경박한 상업주의와 트렌드 중독, 오늘날 언론은 이러한 죽음의 무게를 깊이 있게 성찰하기는커녕, ‘경제성’과 ‘효율성’이라는 자본주의의 잣대로만 무빈소 장례를 재단하고 있다. 고물가 시대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거나, 허례허식을 줄인 합리적 지출이라는 식의 프레임은 대중에게 위험한 착시현상을 일으킨다.
언론이 이를 ‘트렌드’라는 세련된 포장지로 감싸 안을 때, 대중은 죽음에 대한 예의를 생략하는 것을 ‘현대적인 선택’으로 오인하게 된다. 이러한 보도 행태는 결국 우리 사회의 공동체적 결속을 약화시키고, 인간을 그저 태어나서 소비하다가 흔적 없이 사라지는 ‘부품’처럼 여기게 만드는 비인간화를 부추길 뿐이다. 언론은 유행을 선도하는 유행 잡지가 아니다. 사회의 가치관을 바로 세우고, 시대를 관통하는 본질이 무엇인지를 성찰하게 만드는 책임이 언론에 있다. 죽음마저 하나의 소비 상품으로 전락시키는 언론의 가벼움에 준엄한 비판을 던지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라진 동방예의지국, 우리의 부끄러운 자화상, 과거 우리는 ‘동방예의지국’이라 불렸다. 이 칭호는 단순히 인사를 잘하고 어른을 공경한다는 뜻에 그치지 않는다. 삶과 죽음의 예(禮)를 알고, 이웃의 슬픔에 내 일처럼 천 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 함께 밤을 새워주던 공동체적 온정과 품격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모습은 어떠한가.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자부심은 어느새 사라진 우리의 부끄러운 역사가 되어버렸다. 이웃의 상가(喪家)를 찾기보다 부조금 계좌번호를 요청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졌고, 이제는 그 빈소마저 번거롭다는 이유로, 혹은 돈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없애버리는 것이 ‘현대적 트렌드’로 칭송받는다. 효율성과 개인주의라는 괴물이 우리의 오랜 미덕과 정신적 유산을 집어삼키고 있는 것이다. 죽음 앞에서조차 가성비를 따지고, 타인의 슬픔에 동참하는 것을 비효율로 여기는 사회에 무슨 미래가 있겠는가.
지금, 정신을 바로 세워야 할 때, 우리는 지켜야 할 것은 지켜야 한다. 시대가 변하고 기술이 발전해도 결코 변해서는 안 되는 인간성의 핵심이 있다. 그것이 바로 예(禮)이고, 애도(哀悼)이며, 연대(連帶)다.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정신을 바로 세우지 않으면, 우리 사회가 쌓아 올린 가치와 도덕성이 무너지는 것은 정말 한순간이다. 무빈소 장례의 확산을 그저 ‘시대적 흐름’이라며 방관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면,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는 부모의 죽음조차 스마트폰 클릭 몇 번으로 처리해 버리는 극단적 단절의 시대를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장례의 격식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유연해질 수 있다. 하지만 그 안에 깃든 고인에 대한 존경, 유족에 대한 위로, 그리고 생명의 유한함에 대한 겸손함은 결코 간소화될 수 없다. 언론은 무분별한 ‘무빈소 트렌드’ 부추기기를 즉각 중단하고, 죽음의 참된 의미를 조명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역시 가성비라는 자본의 논리에 매몰되지 않고,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마지막 예의가 무엇인지 스스로의 정신을 칼날처럼 벼려내야 할 때다. 무너지는 둑을 막아서는 것은 결국, 지켜야 할 가치를 끝까지 지키고자 하는 우리의 바로 선 정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