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앨범 준비에 학업까지, 요즘 굉장히 바쁘게 활동하시는 것 같아요.
“네, 새 앨범 마무리 작업 중이고, 또 서울대대학원 국악과에 실기 박사과정이 생겨서 이번 학기부터 공부하고 있어요. 그리고 극동방송에서는 국악과 CCM을 접목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고, 이따금 학생들도 가르치느라 쉴 새가 없는 것 같아요.”
얼마 전까지 KBS 국악관현악단 소속이었던 이슬기 씨는 가야금 연주자로서는 물론이고, 가족들로 인해 항상 화려한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이화여대 교수인 어머니 문재숙 씨는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인 ‘가야금산조와 병창’ 보유자인 데다, 동생은 미스코리아 이하늬 씨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가족들 덕분에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죠. 특히 함께 가야금을 연주하던 동생이 미스코리아가 되면서 많은 변화가 있었어요. 이제까지 가야금을 하는 선배로서 동생에게 조언도 해주곤 했는데, 포지션이 바뀌면서 저와 음악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됐죠. 표면적으로 느끼기에는 연주자의 삶보다 미스코리아가 더 역동적이고 화려하고, 사람들에 대한 영향력도 크다는 점에서 충격도 컸어요. 제가 공연하는 것보다 미스유니버스 대회에서 하는 가야금 얘기가 파급효과가 더 크니까요. 물론 지금은 서로의 영역을 존중합니다. 어머니와 함께 셋이서 가족 앙상블 ‘이랑’을 결성했는데, 다들 바쁘다 보니까 시간 맞춰 연습하기가 힘들어요.”
너무 뻔한 질문인지 모르지만, 가야금은 어떻게 배우게 되셨나요?
“가야금을 배운 게 아니고 그냥 늘 집에 있었어요. 어머니가 가야금과 장구를 어린이 크기에 맞게 제작해 주셨거든요. 그래서 저는 다른 친구들 집에도 가야금이 다들 있는 줄 알았어요(웃음). 중.고등학교도 국악 하는 친구들과 생활했기 때문에, 대학 가서야 다른 사람 집에는 가야금이 없다는 걸 알게 됐죠.”
그래도 가야금을 평생 업으로 삼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있지 않을까요?
“어렸을 때부터 무대에 많이 서면서 자연스레 제 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고3 때 어떤 무대에서 ‘어메이징 그레이스’라는 가스펠을 가야금으로 연주했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컸어요. 그날 밤 무척 벅찬 마음으로 ‘평생 이 길을 걷겠구나’ 생각했죠.”
우리나라 전통악기이지만, 국악을 해서 오히려 소외감을 느낀 적은 없나요?
“계속 그 안에서 살았기 때문에 못 느꼈던 것 같아요. 대학 때 다양한 환경을 접하면서는 충격이 컸죠. 친구들 집에는 가야금도 없다고 하고, 제가 좋아하는 음악을 친구들은 낯설고 어려워하니까요. 그래서 친구들에게 제가 해온 음악을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에서 크로스오버 음악도 생각하게 됐어요. ‘어떻게 하면 쉽게 알려줄까?’가 시작이었죠.”
가야금은 어떤 악기인가요?
“가야금은 수줍음을 많이 타는 새색시 같아요. 다른 국악기에 비해서 야들야들한데, 아쟁이나 해금처럼 진하게 표현하기 보다는 되바라지지 않게 많은 것을 담고 있어요. 원래는 12줄인데, 제가 2장의 크로스오버 앨범에서 연주한 악기는 25줄이에요. 90년대 들어서는 서양음악이 많이 들어오고, 같이 연주할 기회도 많아지면서 계량이 많이 됐어요. 5음계 악기로는 표현하기 힘든 곡들이 많으니까요. 18줄에서 21줄, 23줄, 25줄까지 있는데, 25줄은 7음계를 모두 표현합니다.”
모든 변화에는 항상 찬반이 따르잖아요. 주위 반응은 어떻습니까?
“25현은 가야금이 아니라고 말씀하는 분도 계세요. 그런데 12현과 25현은 음색도 전혀 다르고 음악의 성격도 달라요. 국악계가 새로운 음악을 수용해야 하는 오랜 과도기를 걷고 있는 거죠. 저는 12줄 전통 음을 좋아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선생님의 ‘쑥대머리’를 들으면 눈물이 줄줄 흐르는 전율이 있거든요. 그래서 그런 것들을 전해주고 싶은데, 당장 이 얘기를 하면 어려워하니까 크로스오버라는 쉬운 미끼를 먼저 던지는 거죠. 음반의 성격도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점점 깊어질 거예요. ‘아, 이게 가야금 소리야?’에서 ‘아, 이게 가야금 소리구나!’로 변할 수 있도록이요.”
무엇보다 어머니의 반응이 중요했을 텐데요.
“처음에는 굉장히 걱정하셨어요. 어머니의 음악을 계승해주기 바라시는데 난데없이 재즈와 접목한다고 했으니까요. 그런데 ‘전통음악을 사랑하는 제 자신을 믿는다’고 말씀드렸어요. 첫 번째 앨범 녹음할 때 오셨는데, 재즈곡을 국악적으로 만든 연주를 들으시고 ‘네가 이렇게 애를 썼구나’ 하면서 안아주시더라고요. 그게 무척 힘이 됐어요. 음악으로 소통하고자 시작한 일인데, 평생 전통음악을 하신 어머니와 소통할 수 있다면, 이 음악으로 어떤 사람을 만나도 소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거든요.”
이번 앨범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제가 시리즈로 생각한 게 있어요. 처음 앨범은 'In the green cafe'였는데, 그린은 싹이 돋는 봄의 색깔이고 카페는 누구나 와서 소통하는 공간이잖아요. 그래서 앨범을 통해 가야금으로 얘기를 나누고 싶었어요. 싹을 텄으니까 이제 꽃이 피어야겠죠? 그래서 이번 앨범은 'Blossom'이에요. 다음에는 향기가 나고 열매를 맺는 곡들을 준비할 거고요. 이번 앨범에는 좀 더 국악적인 색깔을 드리우기 위해서 민요를 넣었어요. 그리고 3박과 5박으로 구성해서 장단을 알면 훨씬 더 재미있는 곡들을 일부러 넣었고요.”
공연은 어떻게 꾸미실 건가요?
“무대에서는 두 장의 앨범에 수록된 곡들을 대부분 들으실 수 있어요. 피아노와 베이스, 드럼, 기타 등 서양악기와 협연할 예정인데, 국악기와 서양악기가 어우러지는 모습과 곡마다 다른 색깔을 편하게 들려드릴 수 있도록 열심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가야금은 새색시라고 했는데, 다른 악기들에 낯을 가리지는 않나요(^^)?
“새색시가 은근히 적극적이에요(웃음). 12줄은 명주실로 만들어서 음색이 투박하지만, 25현은 명주실에 폴리에스테르를 섞어서 하프소리 같기도 하거든요. 일반 사람들이 듣기에 부담도 덜하고, 다른 악기와 협연할 때도 더 조화로운 편이에요. 물론 제가 지향하는 건 가야금 소리가 좀 더 튀어나오는 건데, 이번 콘서트에서는 25현을 이용해서 조화를 강조할 예정입니다.”
마지막으로 어머니가 기둥이면서 한편으로는 큰 산일 것 같은데요, 가야금 연주자로서 이슬기 씨의 포부를 말씀해 주세요.
“중학교 입학해서 ‘네가 문 교수님 딸이야?’를 듣던 그날부터 어머니는 벗어날 수 없는 무엇이었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 너무 부담스러웠는데, 어느 순간부터 ‘엄마 딸답게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하자’로 마음을 바꿨죠. 그리고 누구 딸이 아니라, 가야금 연주자 이슬기로서 제 자리도 찾기로 했고요. 지금은 가야금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걸 제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하는데, 시간이 지나봐야 알 것 같아요. 하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가야금으로 어떤 음악이든 잘 표현할 수 있는 연주자가 되고 싶어요.”
단아하고 차분한 이미지의 이슬기 씨는 예상과 달리 ‘가야금에 대해서 하고 싶은 얘기가 너무 많다’며 아기자기한 이야기보따리를 펼쳐보였다. 기자 또한 가야금 얘기가 이렇게 재밌을 줄은 상상도 못했던 터라, 속수무책으로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밤이 깊어가는 관계로 1시간 가까이 진행된 인터뷰는 여기에서 접고, 남은 얘기는 6월 25일 백암아트홀 무대에서 이어가기로 약속한다. 인터뷰를 위해 몇 곡 찾아들었던 그녀의 가야금 연주는 무척이나 신선했다. 이슬기 씨의 계획대로 우리에게 던진 이 달짝지근한 미끼가 언젠가는 가야금 산조와 병창까지 너끈히 안내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