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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Life For Music
귄터 반트는 위대한 음악가의 마지막 세대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빌헬름 2세 황제 시대에,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2년 전에 태어났다. 1912년 1월 7일에 엘버펠트(오늘날에는 부페르탈이라는 도시의 일부이다)에서 태어난 그는 학창시절뿐만 아니라 경력의 초반도 격동의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에 보냈다. 이 시기는 문화적 풍요로움뿐만 아니라 중요한 정치적/사회적 투쟁과 극도의 인플레이션, 대량의 실업 사태로도 특징지어진다. 1848년 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민주적인 독일 공화국을 수립하고자 했던 이 두 번째 시도는 1433년 1월에 히틀러가 ‘권력 장악’에 성공함으로써 끝났다. 그러나 이 무렵은 유복한 사업가의 아들이었던 귄터 반트가 청년기를 형성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당시 그는 스물한 살이었고 부페르탈 오페라 극장에서 레페티퇴르(가수 연습 코치)로 일한 지 2년째였다. 쾰른과 뮌헨에서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 학생으로 지낸 뒤, 그는 일찌감치 극장에서 일하기로 결정했다. 그의 생각에는 겉보기에도 비실제적이었던 대학교 지휘 수업으로는 장래 직업을 위한 준비가 될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지휘자가 되겠다는 것은 열두 살 때 이래 그의 철석같은 바람이었다. 그는 상당히 젊은 시절부터 이미 특정한 인격적 특징과 능력 때문에 주목을 받고 있었다. 쾰른에서는 일부 교수들이 후원해준 덕분에 음악적 훈련에 매진할 수 있었다. 아들이 자기 사업을 잇거나 잘나가는 변호사가 될 것으로 기대했던 엄격한 성품의 아버지는 자식이 사실상 음악가라는 직업에 들어섰을 때 더 이상의 지원을 거부했다. 젊은 귄터 반트는 자신의 결정이 올바른 것이었으며 또한 필요했다고 여겼기에 이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는 자신이 평생 견지했으며 오래지 않아 ‘완고하다’는 평판을 얻은 엄격한 윤리적 원칙에 따라 주변 상황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원칙은 선배 음악가들 같은 다른 대가들이나 정부 당국과의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이런 사람은 그 자신이 혐오했던 나치 일당 입장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동료 음악가들이 보기에 지휘라는 업에 대한 귄터 반트의 헌신적인 태도는 그의 엄청난 음악적 재능만큼이나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그는 피아노를 빼어나게 연주했을 뿐만 아니라 즉흥 연주도 잘 해냈으며, 악보 해독과 피아노용 축약 편곡에도 능숙했다. 따라서 부페르탈 오페라 극장에서의 첫 경력(첫 번째 시즌은 무보수였다)은 순조롭게 시작되었다. 성악가들은 그와 리허설하는 것을 즐겼고 지휘자들 역시 무대 리허설 동안 그가 피아노로 반주하는 것을 좋아했다. 이것은 1970년대에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과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일한 것을 끝으로 오페라 하우스에서의 경력이 끝난 뒤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그는 언제나 첫 리허설을 이끌었고, 첫 독창 리허설부터 초연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맨 마지막 공연에서 지휘했다. 그는 언제나 사전에 연습했던 성악가와 함께 공연에 임했으며 여기에 대단히 큰 가치를 부여했다. 독일 오페라계가 이전의 음악 극장에서 순회공연을 벌이는 슈퍼스타와 합작하는 제작소의 위치로 타락하게 되면서 이렇게 하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그는 오페라 지휘를 그만두었다.
젊은 레페티퇴르는 언제나 음악감독의 조수로 일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반트 역시 부페르탈에서 많은 드레스 리허설에 참여해 반주를 맡아야만 했다. 저녁에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그는 달이 템포에 맞춰 떠오르게끔 처리하고, 천둥번개를 일으키거나 무대 뒤의 합창단을 지휘했다. 그의 첫 ‘실제’ 무대 데뷔는 로베르트 슈톨츠의 오페레타 ‘비단에 싸인 비너스’였다. 반트는 극장 음악을 작곡하기도 했으며 초기에 쓴 관현악 반주 가곡과 발레곡으로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부업이었을 따름이다. 본질적으로 그가 원했던 것은 오로지 훌륭한 지휘자가 되는 것뿐이었다. 그의 기준은 높았고 야망은 거대했으며, 모든 비판에도 불구하고 당대 가장 유명한 지휘자였던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와 빌헬름 푸르트뱅글러 혹은 오토 클렘페러는 그의 역할 모델이었다. 그들이 누리는 지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될 수 있는 한 많은 실제 경험을 쌓아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이것은 초심자인 그로서는 시골에 내려가 ‘밑바닥서부터 구르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알렌슈타인(오늘날의 올슈틴)의 동(東) 프로이센 극장이라는 소극장에서 이류 오페레타와 오페라를 지휘하던 처지에서 규모는 비슷했지만 수준 높고 평판도 좋은 데트몰트 오페라를 거쳐 당시 독일에서 손꼽히는 오페라 극장 중 하나였던 구 쾰른 오페라의 상임 지휘자라는 자리에 오른다는 것은, 나치 시대에 이 젊은 지휘자와 같은 비당원에게는 당연히 쉬울 수 없는 일이었다.
나치 추종자들이 이끄는 극장 중 어느 곳도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SDAP. 나치당의 정식 명칭 - 옮긴이) 당원이 아닌 자를 고용하려 들지 않았으며, 반트는 알렌슈타인을 벗어나겠다는 희망을 거의 포기했다. 바로 그 때 예기치 못한 운명이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었다. 누구도 예기치 못하게 그는 데트몰트에서 자리를 얻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쾰른 오페라 극장의 감독인 알렉산더 슈프링의 대리인이 그를 발견했다. 슈프링은 리허설을 감독하게 해본 뒤 이 재능 있는 지휘자를 즉석에서 채용했다. 이 쾰른의 ‘대장’은 음악극장의 열정적인 운영자였으며 감독이자 총지배인이었다. 또한 헌신적인 나치당원이었던 슈프링은 바이로이트 및 제3제국 수상실과의 좋은 정치적 관계를 자기 극장의 예술적 수준에 대한 보호장치로 이용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전시 후반에 많은 극장이 문을 닫을 때까지 자신의 극단을 유지했다. 슈프링 같은 사람만이 당시 스물일곱 살이었으며 엄청난 음악적 능력의 소유자였던 귄터 반트 같은 비당원을 자신의 팀 일원으로 채용할 수 있었을 것이며, 새로운 일자리와 예술적 목표가 생겼다는 것은 반트로서는 지극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1939년부터 반트는 이곳에서 글루크와 모차르트에서 리하르트 바그너와 지크프리트 바그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빈프리트 칠링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양의 발레와 오페레타를 지휘했다(그는 이미 알렌슈타인에서 이런 레퍼토리들을 600회 이상 지휘한 바 있었다). 첫 해에 지휘한 오페라 가운데 20 곡 이상이 그에게는 처음 접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젊은 지휘자가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그들의 특별 법정에 설 위험에 처하자 음악감독은 그를 보호했다. 아름다운 옛 쾰른 오페라 하우스가 파괴되고 만 뒤 그는 반트에게 잘츠부르크로 와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이라고 충고했다. 그곳은 ‘권역 외’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허약한 체질 때문에 징병 대상이 아니었던 귄터 반트는 그곳에서 모차르테움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서 남은 전쟁 기간을 보냈다. 미군 지원 부대에 뮤지컬 편곡자로 고용되었던 짧은 시기가 지난 뒤, 서른세 살의 청년은 1945년 9월에 폭격으로 엉망이 된 쾰른 극장으로 되돌아왔다. 같은 해 10월에 반트는 임시 근거지에서 우선 오페라 극장을, 그리고 나중에는 교향악 연주회를 재건하고 예술적으로 재조직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로부터 반 년 뒤 그는 계약을 맺어 독일 최연소 음악 총감독 자리에 올랐다.
이상의 설명은 실제보다 단순화된 측면이 있다. 비록 이 젊은 지휘자가 음악가로서 엄청난 명성을 누리고 있었던 데 비해 다른 후보자들은 정치적으로 ‘타락했다’는 낙인이 찍혀 있었지만, 반트는 자신의 진보적인 착상을 실현하기 위해 전통주의자와 옛 나치 추종자, 쾰른 상류층 사회 간에 맺어진 다소 부정한 동맹과 맞서 싸워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투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했고 콘라트 아데나워가 시장으로 재직하던 무렵의 시당국과 무엇보다도 음악에 굶주린 쾰른 청중의 신뢰를 얻어냈다.
처음에는 오페라와 연주회 모두 책임지는 것이 타당하고 논리적인 것으로 보였다. 왜냐하면 같은 오케스트라가 양쪽 모두에서 연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귄터 반트는 과거에 그랬듯이 양자를 분리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쾰른 극장에 언제나 음악 총감독이 두 명 있었던 데는 이유가 없지 않았다. 반트는 한 사람이 양쪽을 모두 이끄는 것은 조직적인 그리고 운영상의 측면에서 많은 이점이 있기는 하지만 결국에는 잘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따라서 1948/49년 시즌에 그는 오페라 쪽 지휘자 자리를 포기한 채 단지 객원 지휘자로만 지휘했고 오직 자신의 ‘귀르체니히 오케스트라’에만 전념했다. 그 결과로 귄터 반트는 음악 총감독 자리도 사임했으며 스스로를 ‘귀르체니히의 카펠마이스터’라고 일컬었다. 이는 프란츠 뷜너에서 프리츠 슈타인바흐, 헤르만 아벤트로트에 이르는 쾰른 극장의 전임자들이 확립한 위대한 연주회 전통에 대한 확신의 표현이었다. 귄터 반트가 오페라 극장을 떠난 뒤 단독으로 책임지게 된 이 오케스트라의 이름은 19세기에 이 오케스트라가 창단되고 연주회를 열었던 건물에서 딴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부터 내려오는 이 건물은 처음에는 라인 지역의 귀족 가문이었던 귀르체니히 가문의 별장이었으며, 그 다음에는 상업 센터로 운영되다가 그 뒤에는 도시의 축제 행사장 겸 콘서트홀로 바뀌었다. 전쟁 기간 동안 파괴된 귀르체니히는 1955년에 다른 형태로 재건되었다. 이곳은 바로 귄터 반트 자신에 의해 음악적으로 봉헌되었다(그는 이곳에서 베토벤의 ‘9번’을 지휘했으며, 이것은 작곡가 자신의 원래 악보에 따른 최초의 공연이었다).
페르디난트 힐러는 귀르체니히에서 베르디의 ‘레퀴엠’을 한 번 지휘한 적이 있었으며 브람스나 슈트라우스, 말러, 피츠너의 신작도 (많은 경우) 작곡가 자신의 지휘로 공연되었다. 쇤베르크와 스트라빈스키의 작품 역시 귀르체니히에서 연주되었다. 귄터 반트는 나치에 의해 단절된 이 위대한 전통을 되살려내 자기 시대의 예술적 기준에 맞게 이어가고 싶어했다. 처음부터 옛것과 새것, 나치가 ‘퇴폐적’이라고 금지한 것까지 포함한 고전-낭만 음악에서 젊은 현대 작곡가까지 망라한 반트의 프로그램은 오래지 않아 유명해졌다. ‘현대의 고전’에 속하는 작품들도 귀르체니히에서 그의 지휘 아래 꾸준히 연주되었으며, 버르토크 벨러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작품 초연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아르놀트 쇤베르크나 안톤 베베른 같은 ‘제2 빈 악파’ 작곡가들은 이보다 나중에, 특별 연주회 사이클이 아닌 통상적인 공연에서 연주되었다.
반트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작곡가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데도 열성을 다했다. 그는 올리비에 메시앙과 볼프강 포르트너, 베른트 알로이스 침머만의 작품을 초연했으며 타데우시 바이르드(Tadeusz Baird), 외르크 바우르(Jörg Baur), 죄르지 리게티의 작품도 프로그램에 올렸다. 첫 해에는 대중이 때로 항의하기도 했지만 반트의 뜻은 꺾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상황은 작품에 대한 더 나은 이해를 고취하기 위해 그가 청중에게 직접 해설하고 곡을 되풀이해 연주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페로탱과 몬테베르디, 비발디의 성악곡과 같은, 오늘날에는 대개 전문 악단의 전유물이 되어 있는 고음악 역시 그의 귀르체니히 음악회에서 연주되었다. 1952년에 그는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의 ‘성처녀를 위한 저녁 기도’를 원래의 가사와 파트 악보에 따라 공연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도, 반트는 언제나 그랬듯이 가능한 경우에는 원래의 텍스트와 버전을 사용했고 기본적인 고전-낭만 핵심 레퍼토리에서 모든 외부적 영향과 연주 관행의 흔적을 제거했으며, 원래 악보에 대한 충실함의 화신으로 유명해졌다. 전후 독일에서는 최초로 베토벤 교향곡 5번이 베토벤이 출판을 허가한 형태로 공연되었다. 그리고 그가 항상 브루크너를 오리지널 텍스트 에디션으로 지휘한 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스스로 말했듯이 ‘작곡가를 신뢰하는 사람’이었으며, 음악을 연주할 때는 언제나 작곡가의 의도를 ‘진정하게’ 파악하고 원래 악보에 충실하게 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이러한 작업을 오늘날에는 대단히 강조되는 개념인 ‘정격’이라는 말이 사용되기 오래 전부터 실천했다.
귄터 반트는 단기간 내에 자신의 오케스트라를 독일 최고의 악단 중 하나로 끌어올렸으며, 이 사실은 ‘클럽 프랑세 뒤 디스크’(Club Français du Disque)에서 녹음한 대략 30종의 고전-낭만 음악과 현대음악 음반으로도 증명된다. 이것은 오직 귀르체니히의 지휘자를 유명하게 했던 엄격하고 철저한 리허설 덕에 가능했다. 객원 공연 때뿐만 아니라 쾰른에서 ‘통상적인’ 프로그램을 연주할 때는 특히 최소한 5회의 리허설을 요구했고 필요한 경우에는 리허설 횟수를 추가했다. 그러나 그는 음악 수준과 오케스트라의 문화, 오케스트라 시즌과 그 연속성을 지켜감으로써, 그리고 질적 저하를 막기 위해 분투함으로써 악단원들을 돕는 데 열성을 다했다. 반트는 오케스트라 인원을 충원하고 수준을 높였으며, 급여를 올리고 직장 보험 가입이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단원들이 방송국이나 더 큰 도시의 스카우트 제안에 걸려들지 않게 막는 데 성공했다.
귄터 반트는 자신의 일을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봉사로 인식했으며 결코 음악과 청중 사이의 스포트라이트 아래 서려 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허황된 스타 지휘자의 반대편’이었으며 스스로를 자신이 만들어내는 음악 뒤에 감추었다. 그의 지휘를 듣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매우 잘 이해했으며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나 신곡도 받아들였고, 입장권 매진으로써 그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반트는 오래지 않아 베를린과 뮌헨의 오케스트라들 그리고 밤베르크 심포니를 객원 지휘하게 되었으며 독일 연방 공화국 공법 협회 방송국(ARD)의 방송 교향악단도 지휘했다. 이와 동시에 그는 비스바덴에서 카를 슈리히트의 후임자로 선임되었다. 프랑스, 영국, 스페인 이탈리아, 스칸디나비아 제국(諸國), 스위스 등지에서 신생 연방 공화국의 ‘음악 대사’ 역할을 자주 그리고 성공적으로 수행했으며, 아직 외교 관계가 수립되지 않은 나라에서 공연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1959년에는 서독 지휘자로는 처음으로 소비에트 연방의 최고 오케스트라들을 지휘했다. 1964년에 그는 하이든의 오라토리오 ‘천지창조’에 대한 기준이 된 녹음으로 ‘프랑스 외 악단의 수장인 외국인으로서는 대단한 명예’인 ‘그랑프리 나쇼날 뒤 디스크’(Gran Prix National du Disque)를 수상했다.
그러나 그의 주된 일터이자 그가 특히 몰두했던 일은 쾰른의 오케스트라였으며, 그곳에서 음악에 대한 그의 사심 없는 헌신과 철저한 리허설, 비관습적인 프로그램은 거의 30년에 걸쳐 음악적 자취를 남겼다. 따라서 대성당으로 유명한 이 도시의 전후 문화적 발전은 귄터 반트라는 이름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귀르체니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를 28년 넘게 역임한 이 비범한 지휘자는 이렇게 해서 훗날의 명성을 위한 기초를 쌓았던 것이다.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쾰른에 계속 남아 있었고 다른 사람들과 달리 연주 여행을 자주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지역 언론들은 귄터 반트에게 ‘지방 지휘자’라는 딱지를 붙였지만, 이와 동시에 통찰력 있는 비평가들은 그의 음악관과 활동이 비상한 수준임을 알아차리고 곧바로 그를 토스카니니나 클렘페러 같은 위대한 선배들과 비교했다. 독일 음악 비평계의 대가였던 한스 하인츠 슈투켄흐미트는 이미 1951년에 반트의 ‘명석함과 예술에 대한 진지함, 지적 집중력’을 높이 평가했다. “이 조용하고 절제된 인물은 과시적인 태도 없이 마술을 부린다.”
그로부터 11년 뒤에는 다른 사람도 아닌 헤르베르트 아이메르트(일류 언론인이자 종군 기자 출신으로 쾰른의 복서독일 방송의 음악 부서 책임자이자 훗날 서독일 방송국의 ‘저녁 음악 프로그램’과 ‘전자 스튜디오’의 총책임자가 된 인물)가 반트를 ‘일종의 만능 지휘자’라고 추켜세웠다. “이 말은, 단순하게 말하자면 자기에게 주어지는 거라면 뭐든지 지휘하는 부류와는 정반대라는 뜻입니다. 그는 빈틈없는 귀를 가졌고 이것은 빈틈없는 예술적 양식과 관련되지요. 이것은 그의 해석에서 기본 원리가 됩니다. 반트야말로 진정 오늘날의 지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현대음악을 옹호하는 지휘자에 속할 뿐만 아니라,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과거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삶에 대해서도 이해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메르트는 많은 예 중 하나로, 안톤 베베른의 음렬음악의 자취가 섬세하게 아로새겨져 있는 반트의 드뷔시 해석을 거론했다.
전후 쾰른 시 행정가의 세 번째 세대에 속하는 사람은 독일 지휘자들 사이에서 볼 수 있는 이러한 초시간적인 성격과, 자신의 음악적 비전과 질적 기준을 지칠 줄 모르는 끈기로 고수해내는 인물에 대해 불편함을 느꼈다. 언제나 자기 의무를 다하는 무어 인처럼 그 역시 수십 년 동안 음악적 발전이 이루어진 뒤에도 없어서는 안 될 인물처럼 보였다. 계획은 새로운 ‘시대정신’에 따라 그가 법적 은퇴 연령에 도달하게 되자마자 어떤 식으로든 ‘현대적인’, 다시 말해 더 고분고분한 유형의 음악 총감독으로 교체한다는 쪽으로 입안되었다. 이 계획은 실행되기 전에 대중에게 누설되었고, 반트는 분명히 속았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받아들였고, 언제나 그랬듯이 자기 자신에게 충실한 태도로 62세 생일이 지난 직후인 1974년 1월에 공직 생활을 떠나 스위스에 정착했다.
이렇게 해서 이제 그에게는 자신의 오케스트라라고 할 악단이 없어졌지만, 그렇다고 그가 실업자로 지낸 것은 아니었다. 반대로 그는 베른 음악협회(Bern Msikgesellschaft)를 위해 여러 시즌에 걸쳐 공연을 지휘했고 오랜 세월에 걸쳐 스위스 밖으로 여행을 다니면서 BBC 런던과 도쿄 NHK, 독일 ARD 방송 같은 곳의 오케스트라들을 객원 지휘했다.
쾰른의 서독일 방송국과 협력해서 안톤 브루크너의 교향곡 5번을 녹음한 일은 귄터 반트가 처음으로 브루크너 교향곡 전곡 녹음을 남기는 계기가 되었고, 이 5번 녹음은 독일 음반 비평가상(Preis der deutschen Schallplattenkritik)을 비롯한 많은 상을 받았다. 영국과 미국, 프랑스의 언론들도 이례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그는 단번에 독일 ‘최고의’ 브루크너 해석가가 되었다. 쾰른 방송 교향악단과의 브루크너 시리즈는 계속되었고, 프란츠 슈베르트의 교향곡 몇 곡과 ‘로자문데’ 발레와 장면 음악도 녹음되었다. 이 사이클은 국내외에 걸쳐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으며 이로써 반트는 모범적인 슈베르트 해석가로도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언론에서는 뒤늦은 영광에 대해 떠들어댔고 음악 애호가들은 다음 녹음들을 기다렸다. 반트는 녹음을 계속했고, 쾰른뿐만 아니라 각지에서 그렇게 했다.
그 뒤 귄터 반트는 다시금 대중을 놀라게 했다. 70세 때 1982/83년 시즌이 끝나고 난 뒤, 그는 다시 한 번 지도자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이번에는 함부르크의 북독일 방송 교향악단이었다. 그는 순회 지휘자로서의 삶에 지쳤고 다시 음악적 보금자리 같은 것을 찾고 싶어했다. 그리고 그것에 성공했다. 한스 슈미트-이서슈테트가 이끌었던 조직과 재건의 단계 이래, 반트의 지도 아래 이 함부르크의 오케스트라는 ‘제2의 황금기’를 누렸고 그것은 1991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반트를 ‘시골 지휘자치고는 그릇이 큰 인물’ 정도로 평가절하했던 그 비평가가 이제는 그를 ‘위대한 거장’이자 놀라운 ‘대기만성형 인물’로 분류하게 되었다. 그의 뒤늦은 명성은 이제 그를 미국까지 건너가게 했고 거기서도 그는 열광적인 반응을 누렸다. 시카고의 한 언론은 그를 ‘살아있는 독일 지휘자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로 묘사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전에 쾰른에서 그랬듯이 그는 함부르크에서 자신의 작업에 점점 더 몰두해 나갔다.
그는 함부르크에서 브람스와 베토벤 교향곡의 스튜디오 녹음을 포함한 여러 녹음과 CD 시리즈를 내는 것과 병행하여 그곳의 음악 홀에서 정기적으로 공연을 가졌으며, 머지않아 쾰른 귀르체니히 시절과 비교해도 결코 덜 모험적이지 않은 프로그램으로 공연장을 연속 세 번 채우게 되었다(한 프로그램을 세 차례 연이어 공연했다는 의미 - 옮긴이). 반트가 지휘하는 북독일 방송 교향악단과 그가 ‘수석 객원지휘자’가 된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에든버러에서 열린 음악제 공연과 텔레비전 중계 음악회뿐만 아니라 매년 로열 페스티벌 홀과 거대한 로열 앨버트 홀에서 열린 ‘프롬스’ 공연에도 정기적으로 참여했다. 또한 그는 베를린 독일 교향악단(오늘날의 베를린 방송 교향악단)의 수석 객원 지휘자이기도 했으며, 훗날 이 악단의 계관 지휘자가 되었다.
귄터 반트는 1991년에 상임지휘자 자리에서 물러나기 훨씬 전이었던 75세 때 북독일 방송 교향악단 단원들로부터 종신 명예 지휘자 칭호를 받았다. 그는 음악감독 자리를 그만둔 뒤에도 이 직함으로 활동을 계속했으며, 함부르크 음악홀과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음악제, 라인가우 음악제, 에든버러 페스티벌 등에 꾸준히 모습을 보였다.
그는 인생의 마지막 10년 동안에 ‘실황 녹음’(각각 두세 차례의 연주회를 기초로 별도의 사후 혹은 사전 작업 없이 녹음된 것)을 선호했으며, 이렇게 만들어진 녹음들은 그에게 국내외에 걸쳐 더 많은 상을 안겨주었다. 1986년에는 현저한 예술적 공로를 인정받아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상’을, 1992년에는 ‘독일 비평가상’을 받았고 1994년에는 독일 연방 공화국 대훈장 견장과 최고등 연방 수훈 십자상을 수여받았다.
반트는 인생의 최만년에 독일 녹음 아카데미의 ‘에코’ 상과 독일 녹음 비평가상 그리고 그 자신이 간절히 바라던 프랑스의 ‘다아파종 도르’ 상을 수상했다. 일본 녹음 아카데미 역시 1998년에 그해의 상을 수여함으로써 반트를 기렸다. 독일 음악 잡지인 ‘스칼라’의 독자들은 그를 ‘올해의 예술가’로 선정했다. 반트에게 특별히 뜻 깊었던 것은 베를린 필하모닉의 단원들이 1949년 이래 이어져온 협력 관계와 그의 비범한 예술성을 기리는 의미에서 한스 폰 뷜로 메달을 수여했던 일이었다.
귄터 반트의 쾰른 귀르체니히 연주회는 연속으로 2~3회 예약 초과 혹은 매진 사태를 빚곤 했으며, 훗날 함부르크나 베를린, 뮌헨에서 열린 공연도 마찬가지였다. 대개 공연 주최측에서는 그를 연이어 이틀 혹은 사흘 동안 무대에 세우고 싶어했으며, 그가 어디서 공연을 하건 간에 표는 사전에 매진되었다. 언제나 기대에 차 있는 팬들(이 가운데는 매표소 앞에 서서 예매되지 않았거나 환불된 표가 있기를 바라면서 맨 마지막 순간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어린 학생들도 있었다)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항상 이런 식이었다. 만년에 반트는 공연이 끝날 때면 거의 언제나 열광적인 청중의 기립 박수를 받곤 했으며, 언론은 그에게 언제나 새로운 찬사를 퍼부었다. 반트는 ‘음악적 질서의 상징’ 혹은 ‘곡예를 부리는 신비주의자’로 일컬어졌다. 겸손한 성격의 거장은 이런 식의 헤드라인을 전혀 달가워하지 않았으며, ‘거인’ 혹은 ‘살아있는 브루크너의 정신’ 따위로 정형화될 경우에는 특히 그러했다.
그러나 진지한 비평가들도 오직 ‘나이가 들어감에도 반트는 많은 사람들과 달리 소진되거나 진부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며 무궁무진한 재생력을 지닌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베를린의 비평가 클라우스 가이텔은 반트가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했던 슈베르트 연주회에 대한 글에서 이 지휘자에 대해 ‘턱시도를 입은 채로 노익장을 과시했다’고 지적함으로써 핵심을 찔렀다. “그는 단호함과 절대적인 우아함으로 더 나은 음악 세상을 향해 분투했다. 그는 작품의 뼈대뿐만 아니라 그 몸과 정신까지도 그대로 보여주었다. 그는 해석을 하지 않는다. 자신을 음악 앞에 세우지도 않는다. 그는 반트가 아니라 슈베르트가 연주하게끔 한다.”
가장 분명한 것은, 반트가 하고자 했던 바는 그 자신의 말을 빌자면 음악을 한 방향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인식하고자 시도하는 것’이었다. 이것이야말로 그의 음악 재현 방식의 핵심을 정확하게 설명해준다. 반트는 연주자들과 청중에게 작품이 ‘달리는 어떻게도 될 수 없고 오직 바로 이렇게만’ 연주될 수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의 공연은 스스로의 힘으로 진행되었다. 그는 음악을 온전하고도 정확하게, 언제나 깨어 있는 정신으로 그러면서도 동시에 충심을 다해 연주했다. 아마도 이것이야말로 그가 일본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전보다 훨씬 더 많은 청중을 상대하게 된 말년의 스타일에 깃든 비밀일 것이다.
물론 반트는 철학적인 의미에서 절대적인 완벽함이란 근본적으로 달성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괴테의 파우스트와 같이 문제점을 이러한 목표에 가까이 가져가고자 항상 노력했다. 위대한 음악에 대한 평생에 걸친(그는 대략 65년에 걸쳐 쉬지 않고 지휘했다) 작업은 음악 해석의 완벽함에 대한 그의 비전을 드러내 보여주며, 그 자신도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 비전이 더 분명하고 명쾌해진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스스로 해석가로서 궁극의 지점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느꼈지만, 연주회를 거듭할수록 가능한 한 자신의 비전에 가까이 다가가도록 새롭게 자극받았다.
말년에 귄터 반트는, 이전에 현대음악에 대해 그랬던 것만큼이나 모차르트와 베토벤, 슈베르트, 슈만, 브람스 그리고 특히 안톤 브루크너의 음악에 몰두했다. 그는 스스로를 이들 작곡가의 유언 집행자로 여겼으며 우리 시대의 브루크너 이해에 특별히 크게 기여했다. 그는 이들 교향곡을 오직 모든 부기와 변경 사항이 삭제된 국제 브루크너 협회의 에디션에 기초해 지휘했으며, 한 작품에 복수의 버전이 있을 경우에는 ‘작곡가의 의도를 가장 선명하게 반영하는’ 버전을 선택했는데 그것은 언제나 작곡가의 마지막 자필본이었다.
반트는 이 작곡가를 찬양한 게 아니라 베토벤 이후 가장 위대한 교향곡 작곡가로서 브루크너가 지니는 의의와 그 내적 드라마를 강조한 것이었다. 젊은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한스 첸더는 브루크너 지휘자로서 귄터 반트에 대해 이렇게 썼다. “반트와 함께 하는 시간은 힘차고 격렬하며 극적으로, 긴장감이 가득한 채 쏜살같이 지나간다.”
이 지휘계의 위대한 거장은 브루크너의 교향곡을 강력하면서도 과도한 강제 없이, 투명하면서도 음색을 잃지 않고, 깊은 호흡으로 그러면서도 호흡이 멎을 만큼 아찔하게 지휘했다. 반트는 이러한 방식으로 음악의 정신적인 특징을 뚜렷하게 보여주었고, 이로써 자주 그릇되게 이해되어 온 이 작곡가를 ‘대성당 안을 떠도는 짙은 향훈’에서 해방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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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다시피 분량이 상당히 많죠... 번역하는 동안 애 좀 먹었습니다만,
그래도 정말 행복한 기분으로 작업했던 번역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번역의 대가가 바로 반트 박스였으니까요. 수지맞는 장사 아닙니까? ㅎㅎ
첫댓글 술술 읽히는 문장, 쉽지 않은 일이었을텐데
고생 많으셨네요. 짝짝짝 ^^
네 배추님, 옳으신 말씀입니다. 출퇴근이나 점심 시간에 잠깐 이어폰으로 듣는 음악에도 감동받을 수 있는 것이지요. 제게 그런 정도의 음질은 무시할 만한 수준이지만 오디오는 또 다른 관심 분야이기에 새로운 세계에 대한 탐구 가능성도 언제든 열어두고 음악을 들으려고 합니다. ^^
아, 제 번역은 라이센스반(이 경우엔 아마 없는듯)에 실린 게 아닙니다. 라 무지카라는 잡지에 실렸던 거예요^^;
네 뭐 더러 있긴 하죠^^;
잘 읽었습니다. 쵝오^^
감사합니다^^
아아... 다시봐도 좋습니다. 거장의 삶은 모름지기 이러해야 한다는 뭉클함이 있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아 그게요, 반트 박스에 실린 내지 중 일부분(그렇다고 해도 태반이지만요)을 번역한 것이란 뜻입니다. 제가 옮긴 부분은 이게 다예요^^;
저 역시 도리안님의 명쾌한 문장에 한 표!
번역도 이리 술술 쓰시다니 정말 대단하세요~^^
특히 반트의 부르크너 전곡 음반은 꼭 들어보고싶어집니다.
깊이있는 글, 감사해요~*^^*
아이고~ 제가 봐도 울퉁불퉁하구만요 ㅋㅋ 그냥저냥 읽을 만하다는 뜻으로 알겠습니다^^; 하긴 촉박한 시한 내에 이 정도로 옮겼다는 데 자부심을 가져도 되... 려나? ㅡ.ㅡ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