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강의 녹음하고 있는 오늘은 수요일이 아니라 화요일입니다.
오늘 청주 체육관에서 사제 서품식이 있었죠.
내 마지막 본당인 서운동 본당에서 새 신부님이 14년 만에 나왔습니다.
강신남 미카엘, 정말 때가 하나도 안 묻은 원석 같은 새 신부입니다.
새 신부님이 늘 깨끗하고 아름다운 마음과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 중에 기억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원래는 내일 첫 미사도 나갈 계획이었는데, 오늘 오후부터 눈이 많이 와 내일은 도저히 갈 형편이 되질 않아,
점심시간에 그냥 새 신부님 앞에 무릎 꿇고 첫 강복을 따로 받고 왔습니다.
새 신부님 강복 받고, 새 신부님 양 손바닥에 입 맞추며 ‘거룩한 사제 되세요.’ 했습니다.
꽤 여러 날 만에 여러분을 만나는 것 같습니다.
제게 목 감기가 심하게 왔었죠.
아직도 완쾌는 아닌데, 2년 전에도 제주도 피정 다녀온 후 한 열흘 동안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목이 안 좋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당시 병원에 가서 검사는 안 해봤지만, 지금 생각하면 코로나였던 것 같아요.
그 이후로는 자꾸 자주 목이 쉽니다.
코로나 후유증들이 많죠?
어떤 분들은 허벅지가 아파서 바닥에 앉지 못하는 분도 있고, 허리가 아프신 분도 있고.
하여튼 그 다양한 코로나 후유증에서 저는 목이 망가진 것 같습니다.
옛날 같으면 1년에 약 130회 하루 종일 피정을 시켜도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정상.
요즘은 거의 매일 목이 약간 쉰 듯하고 목에 이물질이 끼어 있는 것 같아요.
가끔 교우분들이 도라지청 팩 등을 보내주시는데, 그분들 정성을 생각하면 빨리 회복해야 하는데 잘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1년에 한 번 정도는 말이 안 나올 정도로 목이 잠기는 목감기가 심하게 옵니다.
‘아담과 하와 이야기’를 4번에 걸쳐 해드렸는데 다 잊어버리셨어요?
오늘부터는 ‘카인과 아벨 이야기’를 몇 번에 나누어서 같이 묵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제가 지난번 마지막에 ‘카인과 아벨’을 시작하니 읽어보라고 말했는지 잘 기억은 안 나요.
하지만 읽어보셨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안 읽어보셨다고 해도 오늘 이 강의 들으신 후, 한 줄 한 줄 짚어가면서 읽으시면 오늘 묵상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제 기억 속에 ‘카인’이라고 하는 단어가 떠오르는 시기가
초등학교 6학년 때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라고 하는 책을 읽었던 때 같습니다.
그 책에 ‘카인의 표’라는 문구가 있었는데, 그것이 무슨 뜻인지 12살인 저는 알 수 없었죠.
그 후 ‘카인의 후예’라는 소설을 카인은 어떤 자일까 흥미를 갖고 읽은 기억이 납니다.
나중에 성경을 읽어보니 그 카인이라고 하는 자는 아담과 하와의 장남이었던 겁니다.
그리고 그 카인은 놀랍게도 인류 최초의 살인을 저지른 살인범이었습니다.
그것도 단 하나밖에 없는 동생 아벨을 죽인 흉악범이었죠.
우리가 알다시피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에 의해서 흙으로 만들어졌다고 나옵니다.
그리고 이 남녀가 낙원에서 추방당하고 낳은 첫아들이 바로 카인이었습니다.
카인이야말로 인간의 성생활에 의하여 탄생 된 인류 최초의 인간이었습니다.
인류 최초의 인간이 살인을 범했다는 사실은 인간에 대한 공포와 죄의 뿌리 깊이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왜 카인은 단 하나뿐인 동생을 죽였을까?
성서 창세기 4장 2절 이하를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하와는 또 카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가 되었고 카인은 밭을 가는 농부가 되었다.
때가 되어 카인은 땅에서 난 곡식을 야훼께 예물로 드렸고, 아벨은 양떼 가운데서 맏배의 기름기를 드렸다.
그런데 야훼께서는 아벨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시고, 카인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지 않으셨다.
카인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몹시 화가 나 있었다.
야훼께서 이것을 보시고 카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왜 그렇게 화가 났느냐? 왜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느냐?
네가 잘했다면 왜 얼굴을 쳐들지 못하느냐?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잘못 먹었다면, 죄가 네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릴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그 죄에 굴레를 씌워야 한다.’
그러나 카인은 아우 아벨을 들로 가자고 꾀어 들로 데리고 나가서 달려들어 아우 아벨을 쳐 죽였다.
이상은 인류 최초의 살인 경위입니다. 살인하게 된 그 첫 번째 이야기입니다.
이 사건은 하느님께 바친 제물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카인은 농사짓고 있어 땅의 소출을 제물로 삼고, 동생 아벨은 첫 새끼로 살진 것을 바쳤다.
우리 성경에는 살진 것이라고 나오지 않고 맏배의 기름기를 드렸다 나오죠.
아마 같은 말일 겁니다. 지방이 많이 차 있으면 당연히 살이 찐 거죠.
그런데 문제는 뭡니까?
하느님은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뻐하셨지만, 카인과 그의 제물은 거들떠보지 않으셨던 겁니다.
저는 처음 이것을 읽었을 때 좀 이해가 안 됐습니다.
사랑의 하느님이신데 왜 이렇게 이해가 안 되는 행동을 하셨을까?
카인도 분명히 땀 흘리며 지은 농산물을 바쳤죠.
그럼에도 아벨의 제물만 기뻐하셨다면 이것은 분명히 불공평한 것이고 카인이 화내는 것도 당연하다, 이렇게 동정이 갔었습니다.
여러분들 사시면서 불공평을 당했을 때 화나신 적 많았죠.
불공평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싫어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똑같이 대우받기를 원합니다.
제가 시골 본당에 부임해서 신자들에게 설문조사를 간단히 한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이곳에서 어떤 사제로 기억되기를 바랍니까? 또 무엇을 어떻게 해드려야 되겠습니까?’
결과를 보니 많은 사람이 ‘편애하지 않는 신부님이시길 원합니다.’라고 답을 적었어요.
참 마음이 좀 아팠죠.
이곳 신자들의 마음에는 사제들은 굉장히 사람을 편애한다는 생각이 박혀있구나.
아무튼 미안한 마음이 참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있으면서 정말 똑같이 사랑하려고 애쓰고 살았습니다.
이렇게 ‘불공평’이라고 하는 것은 서로의 마음을 어둡게 만드는 원인이 됩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분명히 공정한 분이시지, 절대로 불공평한 짓을 하실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면 어째서 아벨의 제물만 받고 축복하셨을까?
여기에 대한 올바른 답을 찾아내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 그 답이 나옵니다.
여러분들이 꼭 읽어보셔야 합니다. 여러 번 읽어보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제껏 궁금하고 풀리지 않았던 것들의 답이 히브리서 11장에 많이 나올 겁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믿음으로’라는 말씀이 24번이나 나옵니다.
그 24번 중에는 ‘믿음으로 아벨은 카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느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는 그 증거를 얻었다’라는
의미의 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시 창세기 4장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아벨은 양떼 가운데서 맏배의 기름기를 드렸다.’
다른 말로 양의 첫 새끼와 살진 것으로 드렸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카인은 그냥 ‘땅에서 난 곡식을 야훼께 드렸다.’
이렇게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카인은 첫 이삭을 드린 것도 아니고, 윤나고 잘 익은 곡식을 드린 것도 아니었던 겁니다.
아벨이 첫 번째 새끼 또 살찐 좋은 것으로 바친 일을 믿음으로 행한 일이라고 히브리서에서는 강조하고 있죠.
이제 답이 나옵니다.
‘드릴 때 믿음으로 드렸느냐, 아니면 믿음이 없이 드렸느냐?’ 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거냐 아니면 쳐다보지도 않으실 거냐?’의 기준이 된다는 겁니다.
아벨은 분명히 깊은 감사와 진실한 참회와 믿음으로 하느님께 제물을 바쳤고, 그 제물을 선택할 때 굉장히 신중했을 겁니다.
그러나 카인은 감사하지도 않고 죄의 용서를 구하는 마음도 없었고, 그냥 믿음 없이 바친 겁니다.
그래서 저는 감히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 믿는 이들이 하는 모든 일을 믿음으로 하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죄다, 아니면 죄로 이끄는 방향이다.’
그래서 저에게 있어 신약 성서 히브리서 11장보다 더 엄격한 말씀은 없다고 생각됩니다.
믿음에 의하지 않는 일은 죄이기 때문에 카인의 제물은 돌보지 않으셨다.
결코 하느님은 불공평하지 않으셨던 겁니다.
하느님은 겉을 보시지 않고 그의 믿음을 보는 분이셨던 겁니다.
이 카인의 제물을 받아주시지 않았던 사건은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일 겁니다.
제가 피정이나 강론 때 자주 그런 이야기해 드렸죠.
구약 성경이나 신약 성경에서 하느님께 바치는 제물이 올바르게 봉헌되기 위해서,
다른 말로 하느님이 기쁘게 받아주시는 제물이 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의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기억이 나십니까?
첫 번째는 바치는 제물이 살아있어야 한다.
두 번째는 바치는 제물에 흠집이 나 있으면 안 된다.
세 번째는 바치는 제물을 들고 직접 제단 앞에까지 나와야 한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죽은 비둘기, 죽은 염소를 받지 않았습니다.
피가 돌고 있는 살아있는 제물만 받아들였던 겁니다.
신약적 의미로 살아있는 제물은 무엇일까?
많은 경우에 우리가 죽은 신앙생활 할 때가 많죠.
기도하더라도 살아있는 기도가 아니라 죽은 기도를 합니다.
묵주기도를 드려도 온통 분심 잡념이고, 미사에 앉아 있어도 사제 강론이 들리질 않습니다.
시계만 자꾸 보게 됩니다.
미사 오기 전에 누구와 다투었던 분노하는 마음에 성체를 영해도 화가 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은 봉헌, 죽은 봉사, 죽은 순명, 생명 없는 봉헌을 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흠집이 나 있는 제물은 하느님께서 받지 않았다.
흠집이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의 의미가 있죠.
정성 된 봉헌이 아니라 하느님에게 늘 자투리를 드리는 겁니다.
내가 한 달 동안 돈을 번다면, 그중 얼마를 먼저 하느님께 바치려고 준비를 해놓아야 하는데,
늘 쓰고 난 다음에 남는 것 중에서 주님께 바치려고 하니 늘 모자랍니다.
개신교 교우들은 십일조 생활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목사님도 굉장히 그걸 강조하고요.
그러나 신부들은 십일조 하라는 얘기 안 합니다.
그렇지만 십일조 하는 것이 맞는 얘기죠.
예수님께서도 십일조도 중요하나 그것과 함께 이런저런 것도 해야 한다고 얘기하셨지, 십일조를 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셨습니다.
개신교 신자들이 왜 십일조 합니까?
십일조 하면 봉헌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받는다는 것을 체험하기 때문에 하는 겁니다.
억지로 시켜서가 아니라 십일조를 통하여 봉헌의 참된 뜻을 알기 때문입니다.
봉헌의 정의는 뭐라고 그랬습니까?
‘내 것의 일부를 떼어서 하느님에게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것을 하느님에게 되돌려 드리는 것’이 봉헌이라고 그랬죠.
하느님 것을 되돌려 드릴 때 아벨처럼 하느님에게 칭찬받고 상을 받습니다.
그러나 카인처럼 아무 정성도 없고 믿음이 없는 흠집 난 봉헌을 할 때 하느님은 거들떠보시지 않는다는 얘기지요.
또 흠집 난 봉헌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죄를 지으면 내 마음과 영혼 속에 죄의식이 생깁니다.
내 영혼에 흠집이 생기죠.
사제들은 미사 전 항상 고해실에서 영혼에 있는 흠집인 죄 때문에 생긴 죄의식을 깨끗이 지우고
성체를 영하게끔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뭐라고 그랬죠?
제물을 들고 직접 제단 앞에 나가야 한다.
냉담자가 자기 부인에게 자기 몫에 헌금을 봉헌했다고 해서 주님께서 받으실 것이냐?
성서상으로는 받지 않습니다.
본인이 직접 들고나와야 합니다.
물론 병원에 입원하는 등 어쩔 수 없이 못 나가는 불가피한 경우는 예외고, 당연히 주일미사 나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에 취미 생활하면서 자기 몫의 헌금을 대신 내달라고 한다면 물론 안 내는 사람보다야 낫겠지만
그것은 올바른 제주의 모습이 아니라는 겁니다.
혹시 여러분들 타짜라고 하는 영화 보셨습니까?
화투 칠 때 속이는 것이 경지에 오른 사람을 타짜라고 그러죠.
그 타짜한테 걸리면 재산이고 뭐고 전부 다 뺏깁니다.
이런 타짜 생활을 십몇 년 하다 손을 끊고 결혼해서 땀 흘려가면서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가
인간극장에 5부작으로 나오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고구마 농사를 지어서 또 강에서 고기 잡는 면허를 취득해서 고기를 잡아 생계에 보탬을 합니다.
개신교 신자로 나오는데, 고구마를 팔고 트럭에 딱 앉자마자 뭐 하느냐? 감사 기도.
딱 앉자마자 감사 기도 올리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물론 그분이 십일조를 한다고 봉투에 돈을 넣는 것이 방영된 것은 아니지만, 그분은 십일조를 분명히 할 겁니다.
애초부터 내 것이 아니라 하느님 것을 하느님에게 돌려드린다고 생각하면 성경의 가르침대로
10분의 1을 하느님에게 바치는 것에 그렇게 인색함이 들지 않을 겁니다.
십일조 생활하면 많은 축복이 옵니다.
내가 우스갯소리로 ‘길을 가다가 넘어져도 금가락지 위에 넘어진다’라고 한 적도 있습니다.
제 강론과 피정을 들은 직후에는 십일조하고 싶은 마음이 들겠죠.
그러나 막상 교무금 낼 때는, 다시 또 옛날로 돌아가는 분들이 대부분일 겁니다.
각 성당에서 십일조 하시는 분이 몇 프로나 될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정리하면 이겁니다.
아벨이 믿음으로 제물을 바쳤다고 하는 뜻은 지금 제가 말씀드린 세 가지의 조건을 충족했다는 겁니다.
즉, 살아있는 제물을 바쳤고, 흠집이 없는 제물을 바쳤고, 그리고 본인 자신이 직접 하느님 앞에 나와서 바쳤던 겁니다.
이 3개가 충족될 때 그 제물은 믿음으로 바치는 제물이 됩니다.
그러나 카인은 땅에서 뽑은 것을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아마 대충하는 마음으로 바쳤던 겁니다.
여러분들 히브리서 아까 몇 장 읽어보라고 그랬죠?
히브리서 11장을 꼭 읽어보십시오.
그리고 또 창세기 4장 한 줄 한 줄 잘 짚어가면서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 영원에 영원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강의를 듣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청주교구 원로 사목자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