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차 성지순례 4일차
(2022.11.30)
21. 남방제
신창 남방제는 현재는 충남 아산시 신창면 남성1리 마을로
성 조윤호(1848~1866, 요셉)가 태어나서 성장한 곳이다.
조윤호는 성인 조화서 베드로의 아들이며, 1839년에 치명한 조 안드레아의 손자이다.
병인박해가 확대되면서 조화서와 조윤호 부자는 1866년 12월 4일
성지동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정원지(일명 원조, 1846~1866, 베드로),
이명서(일명 재덕, 1821~1866, 베드로)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전주 감영에서 부친과 여러 차례에 걸친 신문과 형벌을 받았으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부친이 형장으로 갈 때에는 서로 천국에서 만날 것을 기약하였다.
부자를 한날, 같은 장소에서, 같은 칼로 처형할 수 없다는 국법에 따라
부친이 참수된 지 10일 후인 12월 23일(혹은 12월 18일, 12월 28일)에
조윤호는 전주 서문 밖 서천교 형장에서 죽도록 매를 맞고
끝내는 노끈으로 목이 졸려 순교하였다.
당시 나이 18세였다.
이로써 조윤호 집안은 3대에 걸쳐 순교자를 배출하게 되었다.
원뿔 형상의 조형물은 신창지역 출신 순교자 36명이
천상의 세계를 향해 계단을 올라가는 모습을 표현했다.
상부는 십자가 형상의 소나무와 함께 성 조화서 베드로와
성 조윤호 요셉이 서 있는 모습으로 형상화 하였다.
조형물 기단부에는 성 암브로시오의 사은 찬미가의 한부분인
'눈부신 순교자들의 무리가 하느님 아버지를 높이 기려 받드나이다'라고 새겨 놓았다.
22. 공세리 성당
공세리 성당은 일찍이 조선조 때 아산 · 서산 · 한산을 비롯해
멀리 청주 · 문의 · 옥천 · 회인 등 40개 고을의
조세(租稅)를 쌓아 두던 공세(貢稅) 창고가 있던 곳이다.
이 창고 건물은 1523년(중종 18년)에 개설됐다가 고종 때 폐지됨으로써
그 자리에 1897년 구(舊) 성당 및 사제관 건물이 들어섰다.
그 크고 화려함으로 건축 당시 아산 지방의 명물로
멀리서까지 많은 구경꾼을 불러왔던 현재의 성당 건물은
중국인 건축 기술자들을 불러 지휘 감독하면서 지은
1922년도의 성당이다.
23. 성거산 성지
경기도와 충청북도 경계선에 자리 잡고 있는 성거산 성지는
천안시 북면 납안리 46-1번지로 되어 있다.
한국의 성지 중에서 보기 드물게 해발 500m의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는 이 성지는
차령산맥 줄기로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성거산이란 명칭은 고려 태조 왕건이 수행원들과 함께 성환 지역에 머무르면서
잠시 쉬는 동안 오색구름이 맴돌며 신령한 기운이 감도는 모습을 보고
‘거룩할 성(聖)'자에 '거할 거(居)'자로 이름을 지어준 다음
이 산에서 제사를 지낸 데서 유래한다.
또한 태조 이성계와 세종대왕도 온양 온천에 목욕을 하러 올 때마다
이곳 성거산에 들려 제사를 드렸다고 한다.
이곳 성거산 성지 주변은 박해 때 신앙의 선조들과 순교자들이 피신하여
신앙생활을 영위했던 삶의 터전인 교우촌 7개가 산재되어 있어
선조들의 신앙의 향취를 물씬 느낄 수 있는 곳이다.
1860년대부터 1920년 사이에 세워진 교우촌을 보면 서덕골(서들골), 먹방이, 소학골,
사리목, 매일골, 석천리, 도촌 등이 있었으며, 이 교우촌 중 목천 서덕골 교우촌은
뮈텔 주교가 배티 삼박골 교우촌까지 사목 방문을 할 때 거쳐 가는 경로였다.
또한 소학골 교우촌에는 병인박해시 10명의 순교자가 탄생했는데,
5명은 공주 감영에서 참수형을 당했고 나머지 5명은 서울 포도청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공주 감영에서 참수당한 최천여 베드로, 최종여 라자로, 배문호 베드로, 고 요셉,
채서방 며느리는 성거산 성지 제1줄무덤에 안치되어 있다.
현재 제1줄무덤에 총 38기, 제2줄무덤에 총 36기의 묘봉이 있는데,
시신(屍身)들이 겹쳐 묻혀 있어 실제 이곳에 안장된 순교자의 수는 훨씬 더 많다고 한다.
24. 배티 성지
천혜의 피신처라 할 수 있는 배티는
충북 진천군과 경기도 안성시가 경계를 이루는 지점에 위치한 깊은 산골이다.
이 지역은 서쪽으로 안성, 용인, 서울,
남쪽으로는 목천, 공주, 전라도 그리고
동쪽으로는 문경 새재를 지나 경상도로 이어져
박해 시대에는 내륙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배티 인근의 교우촌으로는
은골, 삼박골, 정삼이골, 용진골, 절골, 지구머리, 동골, 발래기,
퉁점, 새울, 지장골, 원동, 굴티, 방축골 등 배티를 포함해 모두 15곳이나 된다.
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에 위치하고 있는 배티는
동네 어귀에 돌배나무가 많은 배나무 고개라서 ‘이치(梨峙)’라고 불렸고
이는 다시 순 우리말로 ‘배티’라고 불리게 됐다.
배티를 중심으로 진천 일대에서 1866년 병인박해와 1868년 무진박해 때에
60여 명의 순교자가 났는데,
그 가운데 교회 순교록과 관변 기록에 그 순교 행적이 전해지는 순교자는
현재 시복시성이 진행 중인 ‘하느님의 종’ 8명을 포함하여 모두 34명에 이른다.
나머지는 배티 일대에 이름 없는 묘소들로 산재해 있다.
25. 죽산 성지(竹山聖址)
조선 태종대 죽산은 광주 부사의 관할하에 ‘현감’이 다스리는 작은 고을이었다.
병인박해가 시작되자 전국에서 다수의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작은 고을이었던 죽산에서는 22명이나 되는 신자들이 순교하였는데,
이들에 대한 기록은 《치명일기》와 《병인 치명사적》, 《박순집 증언록》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자료들을 근거로 하였을 때 병인박해 당시 죽산에서 확실히 순교한 신자는 18명이며,
죽산 포교에게 체포된 것은 분명하나 어디서 죽었는지 불분명한 신자들은 4명이다.
26. 미리내 성지
경기도 안성에서 북쪽으로 40리쯤 떨어져
'은하수'라는 뜻의 아름다운 우리말로 불리고 있는 미리내는
한국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의 묘소와 그의 어머니 고(高) 우르술라,
김 신부에게 사제품을 준 조선 교구 제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
그리고 김 신부의 시신을 이곳에 안장했던
이민식 빈첸시오의 묘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성 김대건의 일생은 짧았다.
26세의 나이에 생을 마친 그는
그러나 '뛰어난 지식, 열렬하고 꾸밈 없는 신앙, 놀랄 만한 언변'으로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정든 부모 형제와 생이별을 하고
낯선 이국 땅에서 선진 서구 문명에 정진하기 10개 성상.
그 숱한 어려움을 무릅쓰고 최초의 방인 사제가 되어 이 땅에 돌아온 그는
극히 짧은 사목 활동을 마치고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당시 김 신부의 처형 소식을 들은 페레올 주교는 그
의 빼어난 인품과 재능을 두고
"과연 그에게는 어떤 일이든지 맡길 만하였고
그의 성품이나 일하는 태도로나 지식 등
어느 모로 보든지 성공을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 그를 잃은 것은 무엇으로도 대상(代償)하지 못할 재앙"
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심지어 조정에서조차 많은 대신들이
외국 문물에 능하고 박학 다식한 그의 재능을 아쉬워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굽히지 않는 신앙으로
결국 헌종에 의해 직접 그의 사형이 선고되고
이튿날인 16일엔 떠들썩한 규모로 새남터에서 처형된다.
김 신부는 형장에서도 추호의 두려움도 없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의 최후의 시각이 다가왔으니 여러분은 나의 말을 잘 들으시오.
내가 외국 사람과 교제한 것은
오직 우리 교(敎)를 위하고 우리 천주를 위함이었으며
이제 죽는 것도 천주를 위하는 것이니
바야흐로 나를 위해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려 합니다.
여러분도 죽은 후에 영보를 얻으려거든 천주교를 믿으시오."
마침내 희광이의 칼을 대하고서도 김 신부는 태연하게
"이 모양으로 있으면 칼로 치기 쉽겠느냐?"고 묻고
"자, 준비가 되었으니 쳐라."하고 말했다.
국사범으로 형을 받은 죄수는
통상 사흘 뒤에 연고자가 찾아 가는 것이 관례였으나
김 신부의 경우 장례마저 막아 참수된 자리에 묻고 파수를 두어 지켰다.
하지만 죽음을 피해 살아 남은 신자들은 이를 그대로 둘 수 없었고
그들 중 한 사람인 이민식(1829-1921년)은 파수의 눈을 피해
치명한 지 40일이 지난 후 김 신부의 시신을 빼내는 데 성공했다.
그는 시신을 등에 지고 험한 산길을 틈타 1백50리 길을 밤에만 걸어
일 주일이 되는 날 자신의 고향인 미리내에 도착했다.
미리내 순례를 마치고 감곡성당 가는 도중 늦은 점심을 먹었다.
고기를 먹으려고 배티성지, 죽산성지를 거쳐 계속 찾다가
겨우 찾은 한우전문 식당으로 시장하기도 했지만 정말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감곡 성당은 여주에 살 때 여러번 방문한 적이 있다.
서울 성가복지병원 봉사자들이 순례왔을 때 합류했고,
스승예수제자 수녀회 수녀님들이 부활 엠마오 길에 차량봉사,
그리고 우리 부부가 다녀온 적이 있다.
모두 김웅열 신부님 계실 때였다.
느티나무 카페에서 활동할 때 김웅열신부님에게서
성경 신구약 완필로 축복장과 천국의 반지를 받기도 했다.
27. 감곡 매괴성모 순례지 성당
감곡 본당은 1896년 9월 17일 ‘장호원 본당’(長湖院本堂)이란 명칭으로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매괴(묵주기도)의 성모이다.
이 성당은 충청북도에서 가장 먼저 건립된 성당으로
1930년 10월 7일에 고딕식으로 지었으며,
1934년에 석조 건물로 2층의 사제관(현 매괴 박물관)이 건립되었다.
이 성당은 본래 여주군 강천면 부흥골 본당 관할이었는데,
1894년 소신학교가 자리한 부흥골 본당 신부로 부임한 부이용(任加彌)신부가
1896년 9월 감곡 매산(玫山)밑에 임오군란 때(1882년)에 명성황후가 피신해 있었던
민응식의 집이 있었던 곳(현 매괴고등학교)으로 본당을 이전하여
장호원본당이라고 하였다.
이때에 사제관 겸 소성당을 완공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최초의 감곡성당이다.
1903년에 한옥과 서양식을 절충한 사제관과 구 성당(아랫성당)을 신축하게 되었으며,
'매괴의 성모'를 주보로 삼고 뮈텔 주교 집전으로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이 성당은 일제하에 지방민의 교육과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1907년에 매괴학당을 설립하였으며,
1914년에 지방에서는 처음으로 성체거동행사를 시작하였다.
감곡 성당은 성모마리아께 첫 봉헌된 성전인
'리베리오 교황 성모 대성전'과 영적유대성당으로 선정된 곳이다.
1930년 전국에서 18번째, 충청북도에서는 최초로 건립된 감곡 성당은
1996년 1월 5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88호로 지정되었다.
제대 정면에는 한국전쟁 때 인민군에게 7발의 총탄을 맞았다는
본당 주보(主保)인 ‘매괴 성모상’이 설치되어 있다.
프랑스의 루르드 성지에서 제작되어 1930년 성당 봉헌 당시
제대 중앙에 안치된 성모상은 7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건재했다.
지금에 와서는 그 총탄 흔적을 통해 성모칠고(聖母七苦)를 기억하며,
주보로서 본당을 수호해주고 전쟁을 겪은
우리 겨레의 아픔에 동참하고자 한 성모의 마음을 깨닫고 있다.
청주교구는 2006년 10월 7일 감곡 성당을 ‘매괴 성모 순례지’로 공식 선포했다.
장봉훈 주교는 본당 주보인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을 맞아
교서를 발표하고 감곡 성당을 매괴 성모 순례지로 승인했다.
성모 순례지 지정은 1991년 10월 7일 성모께 봉헌된
수원교구 남양 성모성지에 이어 한국 교회에서 두 번째이다.
오늘 배티성지 순례를 마치고 안성에서 숙박을 하려고 예약했는데
죽산, 감곡성당 순례를 마치고 나니 제 3고향이나 다름없는 도전리 생각이 났다.
원고향(용인 12년), 2고향(서울 30년), 3고향(은퇴 후 10년), 4고향(제주7년), 기타 10년.
갈멜수녀님들이 여주에 꼭 한 번 방문하라는 말씀도 있었고
여주에서 얻은 영세및 견진대자도 보고싶고
또 마을 교우분들의 소식도 궁금했기에 전화를 하고 도전리로 향했다.
먼저 4시 반경 수원 순교 가르멜 봉쇄 여자 수도원을 방문하여
2시간 가량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도원 설립 준비하실 당시 스페인 본원으로 연락하는
서신을 주고 받을 때 우리집 컴퓨터로 작업을 하시기도 했고
매일 새벽미사 시간에 만나기도 했던 수녀님들이다.
서로 궁금했던 이야기에서 시작했지만 결국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
영성적인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은총의 시간이었다.
홍시 한 상자 밖에 드릴 것이 없었는데 나올 때는 곶감, 빵 등 간식을 싸 주셨다.
후원금 약간 드리고 약속시간에 맞게 수도원을 나왔다.
숙소는 대자집에서 신세를 지기로 하고 7시에 저녁약속을 했다.
대자 부부와 바오로형제와 어머님과 우리 부부가 함께하며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많은 분들이 돌아가시거나 요양원으로 가셨다는 말,
이제는 수도원 미사에 마을교우분들이 참례하지 못해 불편하다는 점,
도전리를 떠난 지 7년 밖에 되지 않았는데 많은 것이 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수녀님들과 자주 은행을 주우러 다녔던 반계리 은행나무가 유명해져
지금은 축제도 열리고 차량행렬로 무척 붐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바오로씨가 찍은 사진을 몇 장 받고 동영상도 찾아 보았다.
식사 후에 집으로 가는 길에 대자가 치킨집에 미리 주문한
치킨과 생맥주를 찾아와 집에서 맥주를 마시면서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 도중 대자부부가 성지순례를 하고 싶다는 말을 해서
틈틈히 가까운 곳부터 방문할 것을 권유하고 제주에 도착해서
김대건신부님 표착성지에서 2권을 구입해 택배로 보내주었다.
여주에서 출발하다보니 예정에 없었던
풍수원 성당과 홍천 성당까지 순례를 할 수 있었다.
'계획은 인간이 세우지만 좋은 길로 이루어주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라는 말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반계리 은행나무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반계리)
이 나무는 높이가 34.5m(일반건물 10층 정도 높이),
가슴높이의 줄기 둘레가 16.9m,
남북으로 31m 정도로 넓게 펴져 있다.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지만, 대략 800년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