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 같은 밤이 찾아오고 비로소 별을 볼 수 있듯,
내 생에 어둠이 드리우고 나서야 우리의 빛나는 여정이 시작되었다!
자주색 옷을 입은 귀여운 악당 노부인 마고가 내게 이야기를 들려줄 때면
그녀가 내 옆에 있다는 사실 말고는 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열일곱의 레니. 글래스고 병원 메이 병동에 누워 왜 자신이 죽어가야만 하는지 알고 싶은 그녀에겐 지난 17년이라는 세월이 느슨하게 채워져 있다. 스웨덴에서 태어나 엄마, 아빠와 함께했던 첫 번째 생일이 그녀의 가장 첫 기억이자,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영국으로 이사를 와, 모든 것에 새롭게 적응해야 했던 건 비단 어린 레니의 몫만은 아니었다. 행복을 잃은 엄마는 아무것도 담지 않은 눈으로 레니 곁에 있었지만 없는 것과 다름없어지게 되고, 아빠는 그런 엄마를 그저 무기력하게 바라볼 뿐이다. 그렇게 엄마는 결국 레니를 아빠에게 맡겨둔 채 홀로 스웨덴으로 돌아가고, 그렇게 레니의 ‘상실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누군가의 곁에서 겉돌기만 하던 레니는 자신의 삶에서마저 겉돌다가 ‘시한부 환자’ 병동인 메이 병동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메이 병동에서 지내며 만나게 된 신입 간호사, 계약직 직원, 미술실 선생님, 아서 신부님 그리고 마고를 만나며 그녀의 삶에서 어느 때보다 충만한 날들을 보내게 되는데……. 끊임없는 외로움과 상실 속에서 때론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때론 누군가를 절절히 사랑했던 레니가 마고를 만나기까지 어떤 삶을 살았을까. 마고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며 점차 자신의 삶이 외롭지만은 않았음을 느끼며, 그동안 숨죽여 감춰왔던 이야기들을 그림으로 그리게 된다. 작고 소중한 마고를 만나 남은 생의 하루하루가 기다려지는 나날을 보내게 된다.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한 그 아이가 내가 앉은 책상으로 걸어왔고,
마지막 순간만 기다리던 내 삶을 미처 헤아릴 수 없이 행복하게 바꿔놓기 시작했다.
여든셋의 마고. 글래스고 병원 병실에 누워 삶의 끝자락에 걸터앉은 그녀에겐 지난 83년이라는 세월이 빼곡히 채워져 있다.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누구보다 든든했던 아버지는 전쟁신경증 환자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고, 마치 기침 날 때 먹는 사탕이라도 되는 것처럼 쉽게 사랑을 주겠다고 약속한 조니라는 남자와 결혼을 했지만 이내 마고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노란꽃 같은 아들 데이비를 심장 문제로 잃고 만다. 마고의 눈에서 데이비를 볼 수밖에 없는 조니마저 더 이상 그녀 곁에 머물 수 없다며 떠나버린다. 혼자가 된 마고는 막연하게 런던으로 조니를 찾아 떠나지만, 스스로를 해방시키라는 여자를 만나 오롯이 혼자 일어서며, 때론 영혼의 짝꿍과 삶의 진정한 재미를 누리게 되는데…….
나란 사람은 데이비의 곰 인형을 들고 눈물 흘리며 보내야 하는 게 아닐지, 지금의 삶을 누려도 되는 것인지 끊임없는 번뇌와 상실과 관계 속에서 때론 사랑을 누리고 사랑에 아파하는 마고가 레니를 만나기까지 어떤 삶을 살았을까. 레니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어떤 그림을 그리게 될까. 마고는 천방지축 레니를 만나 그녀에게 스며들며 죽는 것이 부쩍 재밌어진 나날을 보내게 된다.
열일곱, 여든셋의 생이 저무는 무렵의 온기와
백 년의 삶의 조각이 모여 뿜어내는 빛과 색으로 가득 채워진 이야기
사랑스러운 두 여성의 시선으로 교차 진행되는 이 소설은 감정이 켜켜이 쌓이는 구성을 한껏 활용해 독자로 하여금 순식간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한다. 열일곱 살과 여든세 살이 각자 시선에서 보는 자신들의 지난 생에 대한 이야기는 다양한 공간과 배경, 시간대를 담아 다채로운 삶의 모습을 그려내고, 그들의 사랑과 우정, 가족, 관계, 상실과 슬픔까지 아우르며 두 주인공의 스토리 속으로 절절하고 생생하게 빠져들게 한다. 때론 고통이었지만 때론 그 고통을 전부 잊을 수 있을 만큼 행복했던 서로의 지난날을 나누며 그들의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도 밝게 빛나게 한다. 또한 레니와 마고의 병원 생활에 녹아있는 다양한 캐릭터들 역시 사랑스러움으로 무장되어 따듯함을 건네준다.
독자들은 소설의 시작과 끝을 동행하며 죽음의 어둠은 걷어지고, 그들의 유쾌한 우정과, 따듯한 사랑, 그리고 충만한 행복을 목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끝에 마침내 터뜨려내는 슬픔과 감동, 삶에 대한 경의를 느껴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