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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책
그것이 무엇이든,
사람을 만나는 일이 가장 어렵고
감정을 가장 많이 소모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어쩌면 우리는 모두 감정노동자.
가볍게, 빨리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새 위로 받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 수도 있어요.
아마도 마음이 많이 힘들었을 때 읽어서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이 즈음에 다시 읽어 보니,
마음에 다가가는 일보다 약물 처방을 우선시하는
정신의학계에 대한 안타까움이 많이 드러나 있어서
그 부분을 중심으로 옮겨봅니다.
정신의학계이든 어떤 '계'든, 그리고 나 또한
어쩌면 우리는 본질은 잊은 채 변죽만 울리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은,
어떤 마음이 들든, 무슨 생각을 하든,
“당신이 옳다.”
*
정신의학은 신경증, 정신 질환 등의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하기 위한
임상적, 학문적 틀 위에 세워진 의학의 한 분야다.
이 틀은 어쩔 수 없이 인간의 고통과 갈등을 질병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전통을 유지한다.
그래서 정신의학은 사람을 ‘사람’보다는 ‘환자’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의사들에게는 수련의 때부터 시작된 거의 무의식적 과정이다.
그런 시선은 나를 비롯한 정신과 의사들에게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사람 마음의 유익을 위해서 복무해야 하는 정신의학이나 심리학이
학문 본연의 역할과 다르게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와 서서히 괴리된 것이다.
오래된 일이다.
...
정신과 의사들은 트라우마 현장에서도 그들의 슬픔과 고통을 충분히 듣기 전에
약물 처방전을 꺼내는 경우가 많다.
이는 피해자의 고통을 증상을 중심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며 증상은 질병의 근거가 된다.
우울증의 원인을 생물학적 기전으로 설명하며 약물로 증상을 줄여주는 일은
의사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하고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런 면도 있다.
불면이나 불안 등의 증상이
그 사람이 겪고 있는 스트레스에 대한 심리적 저항력을 떨어뜨리고
일상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다면
약물치료로 증상을 줄이는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아이 잃은 고통을 조롱하고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자들에 의해
영혼이 갈가리 찢겨나가는 고통을 느끼는 피해자들은
자신을 환자로 바라보는 의사의 시선에 의해 다시 상처를 입는다.
*
지금의 나는,
나를 포함해 자격증 가진 이들의 사람에 대한 인식의 한계를 절감하고 또 절감하지만,
예전엔 그러지 못했다.
나 자신도 지금 내가 문제를 제기하는 바로 그런 공기 속에서 공부하고
수련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 인식의 한계에서 자유롭기 어려웠다.
그러니 지금부터 하는 말은 일종의 고백이다.
*
근자에 정신 질환뿐 아니라
우울이나 불안, 부끄러움 같은 우리 일상의 불편이나 곤란의 원인들을
뇌의 생화학적 문제로 몰아가는 추세가 도를 넘었다는 느낌이다.
이런 치우친 주장들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나와 비슷한 의견을 가진 정신과 의사들도 적지 않지만
이런 생각이 세상에 퍼지는 속도는 거북이 걸음이다.
현대 정신의학이 의학적, 과학적 영역의 문제를 떠나
산업의 문제가 된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산업의 힘이 임상에 미치는 영향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막강하다.
불안이나 우울 등의 문제가 뇌의 병이라는 일반적 인식에 의미있는 틈을 만들어내려면
제약회사라는 거대 자본과 정부, 언론의 공고한 연결을 넘어서는
새로운 힘이 필요한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거의 모든 심리적 어려움의 원인을 뇌에서 찾고 있는 이 시대에
나는 공 모양의 물통처럼 소박하지만 강력한 위력을 지닌 심리적 힘을 말하고자 한다.
그 힘은 즉시 작동한다.
약물치료보다 더 빠르게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다.
삶의 고통에 실질적으로 대처하는 실용적인 힘이다.
그 힘의 중심이 공감이다.
*
일상의 회복이나 일상적 교감에 집중하지 않고 전문가적 치유에만 기대려는 행위,
그게 일상의 외주화다.
예를 들어 아이가 급성 천식 증상이 있는 부모들은 항상 분무제를 준비해 다닌다.
응급 상황이 닥치면 무조건 병원으로 달려가거나 119를 부르는 게 아니라
엄마가 아이와 호흡을 맞춰 조치한다.
비상 상황이지만 내용을 미리 잘 알아서 일상 속으로 끌어들이면
내 일상을 전문가에게 맡기지 않고도 대처가 가능하다.
오히려 그게 더 안전할 수 있다.
일상의 외주화로 인한 결과는 어떤 모습일까.
예를 들어 내 삶의 고통과 외로움이
우울증이라는 의사의 진단 영역으로 한계가 지어지는 순간
나의 존재 자체는 다시 소외되고 우울증 환자 일반으로 대상화되기 쉽다.
고통으로 피폐해졌을 때 사람은 무엇보다 정서적 공급이 시급한데,
그런 순간에 결정적으로 정서적 소외가 일어나는 것이다.
약 처방이라는 고도의 전문적 치료를 받는다는 기대와
나의 정서적 결핍이 충전될 기회를 맞바꾸고
이유도 모른 채 다시 시든다.
나의 혼돈과 고통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의지처라고 생각하고 전문가에게까지 갔는데
더 외롭고 힘들어진다면 포기하고 체념하게 된다.
체념과 무력감이 잘못된 전문가 시스템에 의해 결정적으로 강화되는 순간이다.
역설적으로 우울증이라는 진단이 한 개인에게 위험을 초래하는 경우도 있다.
일상적 허기처럼 갈등과 상처들이 찾아오는데
그것들을 내 손으로 해결하는 최소한의 방법을 익히지 못하면
우리의 삶은 점점 늪이 되고 지옥이 되어간다.
우울증에 대한 정신의학적 진단은
오랜 세월에 걸쳐 우리의 집단 무의식 속에 형성된
건강하고 자연스러운 치유적 반응의 작동을 방해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의학적 진단은 힘도 있지만 동시에 부작용도 있다.
우리 삶의 고통은 정신과의사와 상의해야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
현대 정신의학은 사회 구조적인 요인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한 개인의 심리적 문제들을
여러 연구와 실험을 동원해서 생물학적 원인으로 돌려놓는 일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만질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인간이라는 한 우주의 광활한 내면을
세로토닌 등 몇 가지 신경 전달 물질을 앞세워 지나치게 단순화하기도 했다.
*
대기업 CEO였다가 은퇴한 남자가 있다.
퇴직 후 몸이 가라앉고 쉽게 화가 났다.
본인도 감지할 만큼 피해 의식이 생기고 사소한 일에도 예민해졌다.
무력감을 떨쳐보려고 운동도 시작하고 중국어 학원에도 등록했다.
다음날 특별한 약속이 없어도 현역 시절처럼 기상 알람을 새벽 5시에 맞추고 잠자리에 든다.
긴장이 풀어질까 봐 그런다고 했다.
그의 아내는 남편이 “은퇴 후에 우울증으로 고생한다”고 귀띔한다.
그의 무기력은 은퇴 후 우울증이라는 병인가.
해결하고 극복해야 할 과제인가.
아니다.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순하게 수용해야 할 삶의 중요한 감정이다.
그의 무력감은 은퇴 이후의 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서 생긴 병적인 감정이 아니다.
은퇴 후에 이런 감정이 없다면 그게 외려 정상적이지 않은 것이다.
퇴직 후에도 여전히 의욕과 활력이 넘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게 될 것이다.
방부제를 많이 넣어서 썩지 않는 햄버거처럼
퇴직이라는 삶의 자연적인 흐름을 무언가로 계속 막다 보면 결국에는 터진다.
어차피 한 번은 직면하고 받아들여야 할 삶의 중요한 숙제를 계속 뒤로 미루다 보면
이자까지 붙은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
현대 정신의학은
‘삶에서 예상되는 많은 문제들은
알고 보면 화학적 불균형으로 인한 정신 장애이므로
약을 먹어서 해결하라’고 세뇌하는 쪽으로 너무 많이 나갔다.
그런 방식으로 지적, 물적 토대를 쌓아올린 의료 산업은
이제 어찌해 볼 수 없는 진격의 거인이 되었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이 어째서 우울증인가.
말기 암 선고를 받은 사람의 불안과 공포가 왜 우울증인가.
은퇴 후의 무력감과 짜증, 피해 의식 등이 어떻게 우울증인가.
학교에서 왕따를 당한 아이의 우울과 불안을
뇌 신경 전달 물질의 불균형이 초래한 우울증 탓으로 돌리는 전문가들은 비정하고 무책임하다.
흔하게 마주하는 삶의 일상적 숙제들이고
서로 도우면서 넘어서야 하는 우리 삶의 고비들이다.
누구도 혼자서는 넘기 어려운 가파른 언덕에서,
어떤 태도로 서로를 대할 것인지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
허둥지둥 전문가를 찾는 일보다 먼저여야 우리의 삶은 편안할 수 있다.
*
우리가 살면서 겪는 모든 감정들은 삶의 나침반이다.
약으로 함부로 없앨 하찮은 것이 아니다.
약으로 무조건 눌러버리면 내 삶의 나침반과 등대도 함께 사라진다.
감정은 내 존재의 핵이다.
*
내 눈앞에 한 사람이 있는데
그를 더 천천히 느끼고 묻고 들어보지 않은 채,
자수성가한 사람이니까, 모름지기 교육자니까라는 붕어빵 같은 틀로
상대를 짐작하고 넘겨짚는다.
자수성가한 이력이나 교육자라는 직업은 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까, 장애물이 될까.
내 경험에 의하면 2:8 정도로 장애물이다.
자수성가한 누구도, 어떤 교육자도 그 집단의 표상이 될 수 없다.
경력이나 그가 속한 집단의 특성으로
한 사람을 미루어 짐작하고 규정하는 것은 집단 사고다.
집단 사고에 의해 파악된 그는 ‘그’가 아니다.
‘그’는 집단 사고에 의해 규정된 모습 그 이상이다.
*
집단 사고는 유일성이나 개별성 같은 한 존재의 심리적 S라인을 두루뭉술하게 지워버린다.
… 그럼에도 사람들은 집단 사고로 상대를 파악하고 대우한다.
… 우리 사회의 이런 집단 사고들은
자연의 곡선을 직선으로 밀어버리는 포크레인 같은 심리적 폭력이다.
*
타인을 공감하는 일보다 더 어려운 것은 자신을 공감하는 일이다.
자신이 공감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타인에게 공감하는 일은 감정 노동이든 아니든 공감하는 시늉이라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자기를 공감하는 일은 시늉할 수 없다.
남들은 몰라도 자기를 속일 방법은 없다.
*
한 사람이 제대로 살기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할 스펙이 감정이다.
감정은 존재의 핵심이다.
한 사람의 가치관이나 성향, 취향 등은
그 존재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중요한 구성 요소들이지만
그것들은 존재의 주변을 둘러싼 외곽 요소들에 불과하다.
핵심은 감정이다.
내 가치관이나 신념, 견해라는 것은
알고 보면 내 부모의 가치관이나 책에서 본 신념, 내 스승의 견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 감정은 오로지 ‘나’다.
그래서 감정이 소거된 존재는 나가 아니다.
희로애락이 차단된 삶이란 이미 나에게서 많이 멀어진 삶이다.
*
나는 그럴 때 언제나
“그렇구나, 다 때려치우고 싶을 만큼 지쳤구나,
다 불태워버리고 싶을 만큼 화가 나는구나,
그럴 만한 일이 있었나 보구나”라고 온 체중을 실어 말한다.
그 다음에 “그런 맘을 들게 했던 그 일이 구체적으로 뭔데?”라고 묻는다.
그가 누구이든 어떤 상황의 하소연이든 예외 없다.
사람은 괜히 집을 나가지 않으며 괜히 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하물며 괜히 사람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 수는 없다.
그런 얘기를 꺼냈을 때는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스스로 백 가지 이상은 찾아본 이후다.
그래서 나는 언제든 우선적으로 그 마음을 인정한다.
그런 마음이 들 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그러니 당신 마음은 옳다고.
첫댓글 문해력 문제로 동영상으로 보겠습니당
https://youtu.be/x0CpV_4aJq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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