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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에 의하면 터키는 기원전 2000년경 중앙아시아 동북부에서 기원하였으며, 조상은 중국 고전에 나오는 훈족으로 기원전 220년에 수립된 터키의 테오만야부그 왕국을 중국에서는 흉노(匈奴)로 불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들은 중세에 아랍지역을 횡단하여 서쪽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대부분이 회교로 개종하였으며 한 때 아랍문자를 도입하여 사용하기도 하였다.
터키 국민은 오스만 제국의 영광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고 조상들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자연 숭배사상과 풍습을 오늘날까지도 간직하고 있는데, 근본적으로 상당부분 우리와 비슷한 점을 볼 수 있단다. 한 예로써 터키어는 한국어와 동일한 우랄알타이어족에 속하여 문장구성순서 모음조화 어미활용에 우리말과 같은 원칙을 따르고 있단다.
6.25 한국동란 때는 연인원 1만 5천명을 파병하여 그중 천명이나 죽고 3천명이 부상당한 우리에게는 은인(恩人)의 나라이고, 한국인을 '코렐리’라고 부르면서 매우 우호적으로 대해 준다.
터키는 지리적으로 보스포루스 해협, 마르마라 해, 다르다넬스 해협을 경계로 아시아지역인 아나톨리아와 유럽지역인 트라케로 이루어진 아시아와 유럽 양 대륙에 걸쳐있는 나라이고, 문화적으로는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맞닿은 곳으로 이슬람의 전통과 관행을 그대로 중요시 하고는 있으면서도 많이 서구화된 면모도 보이고 있는 나라이다. 이슬람권 다른 국가와는 달리 정교(政敎)가 완전히 분리되어있고, 하루 다섯 번 아잔(Azan)소리에 맞추어 메카를 향한 예배도 강요하지 않으며, 여인들은 차도르(Chador)로 얼굴을 깊숙이 가리지 않아도 되고, 일부일처(一夫一妻)제와 토요일 일요일을 공휴일로 지정한 것 등 종교적 규율을 그리 엄격하게 적용하지 않는다,
터키는 고대 트로이문명에서부터 로마, 비잔틴, 오스만제국에 이르기까지 긴 역사가 거쳐 간 곳이라 시대별 문화유산이 다양하고, 내륙 아나톨리아의 넓은 고원지대에는 오랜 풍화작용이 빚어낸 특이한 자연경관의 볼거리도 많아 세계적인 관광지로 알려졌다. 특히 중세 200년간 십자군전쟁의 현장이라 기독교인들에게는 성지순례지로도 널리 각광받고 있다.
경고 39산악회 남동마(남편 동창생 마누라)들이 근 20년 동안 매달 꼬박꼬박 친목을 다지면서 푼푼이 모은 기금을 한꺼번에 털어서 큰마음 먹고 터키 여행을 가기로 했다는데, 고맙게도 남편 영택(영감택이)씨들도 데리고 간단다. ‘터키는 죽기 전에 꼭 한번 가 볼만한 곳’이라고 언제 누군가로부터 들은 적도 있는 것 같아 얼씨구나 하고 따라나섰더니 막상 당일 남편 족(族)들이란 이 핑계 저 핑계로 다 빠지고 미련한 나만 홀로 동행하게 되었는데 신세(身世)는 마치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 같고, 모양새는 ‘소 팔러 가는데 개 따라가는’ 꼴이었지만 그래도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을 가게 됨에 마음이 설레었다.
여행 일정표를 받아보니, 밤새워 이스탐블 까지 가서 곧바로 국내항공으로 환승하여 네브쉐히르로 또 가고, 그 후는 전용버스로 카파도키아 - 카라만 - 안탈랴 - 파묵칼레 - 보드룸 - 쿠사다시- 에페소 - 쉬린제 마을을 숨 가쁘게 돌아 본 후 이즈밀에서 비행기로 이스탐블로 다시 와서 그 다음날 하루 종일과 밤늦게까지 시내관광을 하고 당일 밤 비행기로 귀국하는 일수(日數)는 8일이지만 호텔숙박은 단 5회 뿐이다. 알뜰여행이기는 한데 70대 중반 노인으로는 다소 고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관광이라 하면 세계 어디를 가나 한국사람 빠지면 문 닫게 된다는 농담도 있지만 이번 여행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경향각지로부터 무슨 모임, 무슨 기념, 무슨 축하라는 핑계나 건목 하나씩은 다 만들어서 남녀노소가릴 것 없이 많이들 빠져 나간다.
제1일(4/28, 일요일)
밤 11시55분에 인천공항을 떠나 중국 - 몽고 - 카자흐스탄 - 카스피해 - 흑해 상공을 거쳐 약 12시간을 지루하게 날아서 터키 이스탐블 공항에 도착하니 현지시간으로 다음날 새벽 5시였다. 비행기는 터키항공으로 앞뒤 좌석간의 간격도 비교적 넓고 기내식 써-비스도 퍽 좋았다.
제2일(4/29, 월요일)
이스탐블 국제공항에서 입국수속을 마치자 곧바로 인접한 국내항공 청사로 걸어서 이동하여 서둘러 네브쉐히르 행 비행기에 올랐고, 1시간 10분간을 더 날아서 네브쉐히르에 도착하니 아침 8시20분이었다. 여행 짐을 찾아 미리 대기한 전용버스로 옮겨 실고 숨고를 틈도 없이 첫 번째 관광지로 직행했는데 이번 여행에서 끝까지 같은 차로 관광할 일행은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합하여 전부 31명이었다.
입국수속 때 터키 출입국 관원(官員)들의 ‘안녕하세요?’라는 우리말 인사와, 우리가 한국인임을 어떻게 알아보고 지나가면서 ‘강남스타일’. ‘젠틀멘’하며 건네는 현지인들의 말 한마디는 밤새 기내에서 새우잠으로 지친 피로를 약간 풀어주었다.
오늘은 해발 고도 1200미터의 아나톨리아 고원 한가운데에 자리하며 유네스코 자연유산인 카파도키아지역을 관광하는 것이다. 카파도키아는 타우루스 산맥의 전략적 통로이기 때문에 11세기까지 동로마 제국의 보루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실크로드가 통과하는 길목이라 대상(隊商)행렬이 근대까지 이어졌단다.
이 지역은 약 3백만 년 전 인근 에르지예스 산의 화산 폭발로 화산재가 날아와 수 십 미터 두께로 쌓이고 이것이 굳어서 생긴 응회암(凝灰巖)과 그 위에 용암이 뒤덮여 생긴 현무암(玄武巖)이 오랜 세월 비바람에 씻기고 닳아서 기묘한 온갖 형상으로 빚어졌는데, 영화 ‘스타워즈’의 촬영지로도 알려졌고 특히 ‘파샤바 계곡’, ‘데르벤트 계곡’, ‘괴레메 골자기’, ‘데린구유’가 가장 볼만하다. 카파도키아 전체의 신비로운 경관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은 열기구를 타고 상공에서 내려다보는 것이라는데, 열기구 투어는 1시간정도이고 요금은 약 25만원으로 조금 비싼 편이지만 좋은 추억이 된단다.
‘파샤바 계곡’은 송이버섯모양으로 깎여진 암석들이 널리 펼쳐져 있는 골짜기인데 버섯의 줄기는 연 회색 응회암이고 버섯 삿갓은 검정색 현무암이라 색체조차 버섯과 닮았다.
‘데르벤트 계곡’은 낙타모양암석이 있다고 하여 낙타계곡이라고도 하는데 낙타모양 뿐만 아니라 물개모양 성모마리아 상 등 각자 연상하는 대로 온갖 모양으로 보이는 기암괴석들이 널려있는 만물상계곡이다.
‘괴레메 골자기’는 마치 만화 속의 스머프 집 같은 버섯모양의 암굴집이 수백 채 들어서 있고 석굴교회도 많이 남아있다는 곳이다. 공기에 노출된 응회암은 약간만 단단한 연장으로도 쉽게 파낼 수 있으므로, 사람들은 바위를 뚫고 깎아 거주공간을 마련하여 바깥의 덥고 건조한 기후를 피해 내부의 서늘하고 적당한 습도가 유지되는 암굴 속에서 사는 지혜를 터득했다. 그리고 비잔틴시대에 기독교화한 이 곳 사람들은 먹고 마시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깎아지른 계곡 사이로 밧줄에 의지하지 않고는 다다를 수도 없는 가파른 절벽을 파서 교회를 짓고 벽면과 천장에 프레스코(fresco) 화(畵)도 그리면서 기독교의 꽃을 피웠단다.
‘데린구유’는 터키 기독교의 아픈 역사현장이다. 카파도키아 지역은 원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로마인들을 피해 도망 온 기독교도인의 터전이었는데, 7세기 중반에 이슬람 왕조의 침공을 받게 되자 지하의 바위 층에 개미집처럼 동굴을 뚫어 그 속으로 생활터전을 옮기고, 외부의 통제와 감시를 피해가며 신앙을 지키고 살았단다. 데린구유는 깊이 50미터에 걸쳐 지하7층으로 되어있는 지하도시이고 수 킬로 떨어진 다른 지하도시와도 지하통로를 이용하여 상호 교류할 수 있었단다.
오늘 관광을 끝내고 호텔로 가는 도중에 터키에서 가장 명품 카펫을 만드는 공장에 잠간 들렀다. 모(毛), 면(綿), 잠사(蠶絲)를 이용해서 신기(神技)에 가까운 손놀림으로 일일이 섬세한 문양을 만들어가며 카펫을 짜고 있었다. 한 장 짜는데 18개월 이상 소요되는 것도 있고, 금액으로는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예술적인 명작도 선보였다.
카파도키아 시내의 ‘Crystal Kaymakli' 호텔에 투숙 하고, 저녁을 먹은 후 야간에 인근 지하공연장으로 이동하여 귀빈처럼 자리 잡고 와인과 과일주스를 무료로 무제한 제공받으면서 터키 민속춤과 밸리 댄스를 관람했다.
제3일(4/30, 화요일)
오늘은 약 3시간 거리의 카라만(Karaman) 구시가지에 있는 ‘암벽 속의 아파트’를 관광한 후, 이어서 4시간 거리의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안탈랴(Antalya)까지 가는 강행군 날이다.
아침 일찍 열기구를 타고 어저께 본 카파도키아를 또 한 번 구경하고 오는 일부 일행의 도착에 맞추어 조식을 한 후 곧 출발하여 호텔에서 그리 멀지않은 터키석 가공공장을 견학했다. 12월의 탄생석이라는 터키석은 최초 시나이 반도에서 채굴되었는데 이것이 터키를 거처 유럽으로 수출되면서 터키석이라 이름이 붙었단다. 청색 또는 녹색의 색상과 그 속에 박혀있는 무늬의 세맥상(細脈狀)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데, 예쁜 온갖 모양의 노리개와 장신구로 둔갑하여 사람의 넋을 다 빼놓는다.
카라만으로 가는 길 양쪽은 끝이 안 보이게 넓은 고원지대 대평원인데 연강우량이 적어 준 사막화 되어있고, 가끔 푸른 초지(草地)와 저 멀리 흰 눈 덮인 토로스산맥만 계속 보일 뿐 가도 가도 그 풍경이 그 풍경이라 매우 지루했다. ‘카라만’이란 원래 ‘모래의 땅’에서 유래된 지명이란다.
카라만 구시가지(舊市街地)는 마치 우리나라 한탄강유역처럼 넓은 평원 한가운데가 깊게 파져 큰 협곡을 이루었는데 그 협곡의 절벽 비탈면에 위치하고 있다. 눈이 오는 겨울에는 차량 접근이 어려워 관광이 불가능한 곳이다. ‘암벽 속의 아파트’란 이 사암(砂巖) 절벽에 층층이 방을 파고 바깥쪽으로 창문인지 출입문인지를 규칙적으로 내어서, 넓고 높은 암벽 전체가 마치 고층아파트가 서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붙인 이름이다. 4-5천 년 전에 만들어 졌으리라고 추정하지만 세상에 알려진지는 오래지 않아 아직 발굴과 연구가 진행 중인데 관광지로 알려진 것은 아주 최근이란다.
카라만 구시가지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신시가지로 이동하여 오후 3시가 넘어서야 늦은 점심을 먹은 후, 다시 황량한 고원지대를 지루하게 지나서 흰 눈이 덮인 토로스산맥을 넘어 지중해 연안의 안탈랴에 도착하니 밤 9시가 지났다. 숙소는 넓은 비치를 끼고 지은 깨끗하고 아름다운 리조트 호텔 'Soho Beach Club‘ 이었다.
제4일(5/1, 수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 팜나무가 줄지어 늘어선 한적한 비치를 따라 걷다가 아이들처럼 모래위의 예쁜 조약돌도 주우며 이국에서의 정취에 흠뻑 젖어봤다. 오늘은 안탈랴 시내구경과 유람선을 타고 바다로 나가 안탈랴 만(灣) 주위 경관을 둘러본 후, 로마시대에 축조되었다는 오래된 성곽 내의 구시가지(舊市街地)를 관광한다. 그리고 다시 어제 저녁에 넘어왔던 토로스산맥을 반대로 넘어서 4시간가량 걸리는 곳 ‘파묵칼레(Pamukkale)’와 ‘히에라폴리스’를 관광하는 것이다
안탈랴 항구는 기원전 2세기로부터 비롯되었으며, 아탈루스 3세가 로마에 유증(遺贈)했고, 사도 바울로와 바르나바가 선교활동을 위해 안티오크로 떠날 때 이 항구를 이용했단다. 그리고 중세에는 비잔틴의 요새였으며 십자군 원정 때는 팔레스타인으로 떠나는 군대의 주요 승선지 이었단다. 아열대성 기후로 따뜻한데다가 근처에 고대 유적지가 많아 지금은 지중해연안 터키 최고의 휴양지이면서 주요 관광지로 되었다. 유적지로는 ‘도심속 구시가지’, ‘이블리 미나레’, ‘하드리아누스 문’ 등이 있다.
비잔틴의 요새였던 구성(舊城) 밑 선착장에서 유람선을 탔다. 부두를 꽉 메운 유람선 중에는 해적선(海賊船)분위기로 꾸미고 해골깃발을 펄럭이는 배들이 많았는데 이는 이곳이 한 때 해적선이 많이 출몰했던 낭만에서란다. 유람선을 타고 옥색 물빛 지중해로 나가서 안탈랴 항구 해안선과 해안선 뒤쪽으로 병풍처럼 둘러있는 흰 눈 덮인 토로스산맥을 감상했다. 바다에서 보이는 구성(舊城)의 모습, 구성에서 절벽을 타고 바다로 이어진 돌계단 밑의 목욕탕 같은 아담한 해수욕장, 재주도 정방폭포처럼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큰 해안 폭포가 인상적이다.
‘도심속 구시가지’는 부두가 내려다보이는 낮은 절벽 위에 있는 옛 도시를 말하는데, 로마, 비잔틴, 셀주크 시대에 여러 번 개축되었던 4.5킬로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유명한 유적으로는 한 때 등대로 사용된 것으로 짐작되는 옛 탑과 1250년에 세워진 셀주크의 종교대학 겸 모스크가 있다. 성 안에는 오스만시절의 오래된 집들이 좁은 골목길을 따라 민속촌처럼 남아 있는데 성 안 구석구석을 걸어서 다 둘러보는 데는 1시간 정도 소요된단다.
부두가 내려다보이는 구성 성벽 위의 한 카페에 자리 잡고 차 한 잔을 마시며 잠간의 망중한도 즐겼다.
‘이블리 미나레’는 비잔틴 시대에는 교회였다가 셀주크 시대에는 모스크로 바뀐 일부가 지금은 지역고고학 박물관으로 쓰이는데, 이곳에는 인근 지역에서 발굴한 히타이트, 그리스, 로마, 비잔틴, 투르크의 유물들이 소장되어 있다는데 내부는 직접 들어가 보지 못했다.
‘하드리아누스 문’은 3개의 아치로 된 대리석 문으로 서기130년에 이곳을 방문한 하드리아누스를 기념하여 지어져 ‘황제의 문’이라고도 한다.
‘파목칼레’는 터키어로 ‘목화의 성’이라는 뜻이고, 중탄산염이 함유된 온천수가 수세기동안 흘러내리며 침전된 하얀 계단모양의 넓은 비탈면 지역이 마치 목화가 높이 쌓인 것처럼 보인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란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고 지금도 온천수가 흘러나온다. 신발을 벗고 흐르는 온천수에 발을 담구고 반시간 이상 족욕(足浴)하며 피로를 풀었다.
‘히에라폴리스’란 그리스인들이 ‘신성한 도시’라는 뜻으로 불렀다는 이름이고, 파묵칼레 뒤편 넓은 언덕에 기원전 197-159년에 건설되었던 거대한 휴양도시를 말한다. 극장과 신전,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목욕할 수 있는 온천 등이 발달했었다는 데 오래전 지진으로 파손되어 지금은 대부분 흔적만 남아있고 1만 5천 명을 수용할 수 있다는 원형극장만이 비교적 뚜렷하다. 이곳에서 발굴된 출토품은 유적으로 남아있던 증기 목욕탕을 일부 개조하여 꾸민 ‘히에라폴리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는데 직접 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허물어진 각종 석재(石材)와 벽돌이 나뒹구는 벌판에는 야생으로 자란 새빨간 양귀비꽃이 역사의 무상함에 애태우는 듯 했다. 그런데 한 때 이곳 온천에서 사람이나 동물에게 매우 해로운 성분을 포함한 증기가 뿜어 나와서 이것이 히에라폴리스를 황폐화시킨 원인이 되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단다.
저녁에는 파목칼레 인근 깨끗한 'Polat Thermal' 호텔에 투숙했는데, 온천수가 흔한 지역답게 호텔의 실내온천수영장과 옥외 노천온천장에서 수영과 목욕을 즐길 수도 있었다.
제5일(5/2, 목요일)
아침 7시에 일찍 파묵칼레를 출발하여 4시간 거리인 에에게 해에 접한 보드룸(Bodrum)에서 ‘보드룸 성’을 관광한 후, 또다시 2시간 거리의 쿠사다시까지 가는 날이다.
보드룸으로 가는 길 양편은 평지나 산지를 막론하고 온통 올리브, 무화과 과수원천지이고 도로연변에는 군데군데 진홍색 야생 양귀비꽃이 코스모스처럼 나부끼고 있는 것이 신기하다. 많은 나라에서는 마약의 원료라 재배까지 금지하는 양귀비가 저렇게 허술하게 방치될 수 있을까 의아했지만 알고 보니 터키에서는 국민의 7활이 농업에 종사하는데 양귀비는 올리브, 무화과, 장미와 함께 국가 주요작물로 오히려 장려된단다.
보드룸은 역사학의 아버지 헤로도토스(Herodotus)가 태어난 곳으로도 유명한데, 1년 4계절 맑은 날씨 때문에 유럽인들에게 에에게 해 최고의 휴양지로 각광받는 도시란다. 도시 전체가 흰 빛의 작고 예쁜 집들이 초록빛 언덕을 배경으로 촘촘히 들어서서 마치 동화책의 그림같이 아름답다. 법적으로 하얀 페인트의 집만을 짓도록 되어있고 심지어 맥도날드 헴버거 집의 상징색인 붉은 색도 여기에서는 흰색으로 바꾸어서야 영업이 인가되었단다.
도시의 이면도로는 모두 좁고 가파른 비탈길에다 일방통행이 많아 운전하기 매우 힘들 것 같다. 우리가 탄 버스도 비치의 멋진 고급식당에서 점심 잘 먹고 나오다가 한번 길을 잘못 들어 좌왕우왕하며 수 십분 간 고생했었지.
'보드룸 성'은 보드룸을 대표하는 명소로 15세기 이 지역을 점령한 요한 기사단(Knights)이 20년 동안 건설한 요새다. 독일,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등지에서 온 기사단이 각기 자기 나라를 상징하는 탑을 세워 근거지로 삼았는데, 성이 완성된 뒤에는 '베드로의 성'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이 도시는 베드로의 성이 있는 곳이란 뜻의 ‘페테리움’이라 불렸는데 그것이 보드룸이란 지명이 되었다고 한다.
이 성은 현제 침몰선에서 인양한 다양한 해저유물을 전시하는 수중고고학 박물관으로 사용되며 십자군 유물도 다수 보관돼 있는데, 아직도 영국탑, 독일탑, 프랑스탑 등의 명패가 붙어 있다. 성위에서 바라본 에에게 해의 옥색 물빛, 아름다운 해안선, 그리고 레고 블록으로 쌓은 것 같은 작고 예쁜 집들의 전경(全景)은 오래 잔상으로 남을 것 같다.
보드룸 성(城) 밑의 부두에는 빽빽하게 정박한 크고 작은 각양각색의 요트들이 관광객을 유혹하고 있다. 성을 끼고 발달한 거리에는 각종 잡화상, 카페, 레스토랑 등이 모여 있고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해안 산책로를 거니는 휴양객들과 아베크를 즐기는 젊은이로 붐볐다.
약간의 자유 시간을 가진 후 오후 4시가 넘어서 출발하여 저녁 7시 무렵 쿠사다시에 도착했다. 해변에 접한 절벽위에 넓게 자리 잡은 5성(星)급 호텔 ‘ADAKULE’ 에 투숙하여 에에게 바다와 온통 각종 휴양 위락시설들로 꽉 들어찬 절벽 밑을 한눈에 내려다보면서 만찬을 즐겼다.
제6일(5/3, 금요일)
또다시 올 수 없을 아쉬움의 감상(感傷)에 젖어 새벽 일찍 일어나 절벽 밑으로 내려가서 해변도 거닐고 바다와 위락시설들을 배경으로 이것저것 기념사진도 많이 찍으면서 여유를 부리다가 8시 반에 에페소로 출발하였다. 오늘은 1시간 거리 가까운 에에게 해 연안의 최대 유적지인 ‘에페소(Ephesus)’를 관광한 후, ‘쉬린제 마을’에 잠시 들렸다가 ‘이즈밀(Izmir)’ 로 가서 비행기로 ‘이스탐블’에 가는 날이다.
에페소로 가는 도중에 가죽제품을 세계의 온 유명 브랜드로 납품한다는 ‘Nature Coco’라 써진 가죽공장에 들렀다. 늘씬한 남여 젊은 페션 모델들이 온갖 가죽 신제품의 옷을 번갈아 바꿔 입고 교태를 부리며 선보이는데 이 상술(商術)에 넘어가지 않을 장사(壯士) 누구랴?
에페소는 서부 소아시아의 에에게 해 연안에 위치한 기원전 7-6세기에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 의해 건립된 식민도시인데, 스파르타, 페르시아, 페르가몬, 로마 등의 흥망성쇠에 따라 식민지 역사도 여러 번 바뀌었으나 꾸준한 상업발달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울로가 전도와 사목을 한 교회 중 하나인 ‘에페소 교회’가 있어 기독교 초기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도시이다.
에페소는 고대 로마제국의 화려한 역사를 잘 보여주는 역사도시로 유명하다. 도시는 4세기 때 지진으로 완전히 폐허로 변해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남게 되었으나 영원히 묻혀버릴 뻔했던 유물들이 속속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주변에 나뒹구는 유물들 모두 자세히 눈여겨보아야 할 것들이지만 제한된 시간으로 꼭 볼만한 것은 ‘오데이온’, ‘크레테스 도로’, ‘하드리아누스 신전’, ‘셀수스 도서관’, ‘원형 대극장’ 이다.
‘오데이온’은 집회 장소이자 콘서트나 강연 등의 목적으로 사용되었던 소극장에 해당한다.
‘크레테스 도로’는 연변에 하드리아누스 신전과 오데이온 소극장, 승리의 여신 니케의 조각이 있는 대리석 바닥으로 꾸며졌던 거리이다.
‘하드리아누스 신전’은 2세기경에 지어진 건물인데 다른 유적들처럼 많이 손실되었지만 남아있는 부분만으로도 그 아름다움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입구에 있는 기둥은 아치를 이루고 있는데 조각이 매우 아름답고, 안으로 들어서면 아테네, 아폴로신 등 여러 신들과 데오도시우스 황제, 그의 아버지, 아내, 아들도 조각되어 있다.
‘셀수스 도서관’은 서기135년 줄리어스 아킬라가 아버지 셀수스 폴레마이아누스를 기리기 위해 지은 것으로 폐허가 된 유적 가운데 유일하게 앞면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어 당시의 화려함을 엿볼 수 있다. 도서관에는 문이 3 개가 있는데 각 문의 상단에는 지혜, 운명, 지식을 상징하는 여신상으로 장식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도서관 바로 앞에 인접하여 홍등가(紅燈街)가 위치하는데 도서관 지하통로가 여기로 통하고 있다는 점이다.
‘원형 대극장’은 3단 구조로 각 단이 22개 계단으로 이뤄져 있고. 총 높이는 18미터에 이른다. 거짓말 같이 여겨지지만 무대에서 낮은 목소리로 말을 해도 맨 꼭대기에 앉은 사람이나 무대 가까이 앉은 사람이나 같은 음량으로 들을 수 있었다고 하니 상당히 과학적으로 설계되었다는 말일거다. 최대 수용 관객이 약 2만 5천명이라니 당시 이곳에 거주했던 인구의 규모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건축 초기에는 공연을 위한 곳으로만 이용되었지만 나중에는 영화 쿼바디스에서 보았듯이 검투사끼리 또는 맹수와의 결투가 벌어지기도 하였고, 사도 바울로가 이곳에서 선교 중에 수난을 받았다고도 한다.
에페소 관광을 끝마치고 12시 반에 인근 한식 식당으로 걸어서 이동하여 모처럼 우리식 비빔밥 점심을 먹고, 쉬린제로 향했다.
‘쉬린제 마을’은 15세기에 머나먼 이국땅 터키로 끌려와 노예생활을 하던 그리스인들이 노예의 속박에서는 풀려났지만 고향에 돌아갈 엄두를 못 내고 그들의 고향과 비슷한 산골 이곳을 찾아 옛 고향집을 떠올리며 집을 지어 정착한 곳이란다.
좁은 산길을 꾸불꾸불 10여분 이상 올라가니 야산 위에 조그만 쉬린제 마을이 나타났는데, 주위에 나뒹구는 돌을 쌓고 돌과 돌 사이를 석회로 발라 벽을 만들어 지붕에 빨간 기와를 얹었다. 이 마을은 와인이 유명하지만, 관광 보다는 빡빡한 관광여행일정 중간에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배려한단다.
동네가 온통 과수원이라고 해도 될 만큼 주위에 포도, 사과, 자두, 오디 등 과일이 풍부하고, 이들 과일로 와인이나 과일주를 만들어 방문객에게 시음토록하고 현장판매도 하는데 사지 않고는 미안해 못 배길 만큼 친절하다. 약 1시간가량 여러 가지 와인과 과일주를 시음하고 마을을 대충 둘러본 후 15분 거리 가까운 도시 이즈밀로 떠났다.
이즈밀 공항에서 16시 발 이스탐블 행 비행기를 탔고, 약 1시간 후 17시에 이스탐블 공항에 내리니 마침 주말 금요일 저녁이라 이곳의 교통체증도 대단하여 호텔까지 가는대만 3시간을 잡아야한다니 그를 바에는 교통체증이 풀릴 때까지 내일 볼 시내관광 일부인 ‘피에롯티 언덕’과 ‘갈라타 다리’를 오늘 미리보고, 내일은 또 다른 볼거리를 덤으로 추가하기로 중론을 모았다.
어둡기 전에 먼저 찾은 곳이 피에롯티 언덕이었다. 이 언덕은 이스탄블 시민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장소인데, 연인, 친구끼리 많이 와서 이스탐블 구시가지와 신시가지가 나누어지는 '골든 혼(Golden Horn)'을 내려다보며 차를 마시기를 좋아한단다. 시민들에게 사랑받는 이유인즉 이 언덕에 얽힌 애틋한 사연 때문이란다. 옛날 군에 입대한 해군장교 피에롯티가 군복무중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 사랑을 키웠는데 군 복무를 마친 후 그 여인을 잊지 못해 이스탐블을 찾아 왔으나 그 여인은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고, 피에롯티는 늘 이 언덕 찻집에 앉아 그 여인을 그리워하며 쓸쓸히 여생을 보냈다는 사연이다.
이 언덕은 걸어서 올라갈 수도 있지만 케이블카를 올라갔다. 언덕 주위는 전체가 공동묘지이지만 묘지로의 혐오감이란 전연 없고 오히려 공원을 꾸미기 위한 조형물들 같다. 정상은 이스탐블 구시가지와 신시가지, 골든 혼이 한눈에 담기는 최적의 조망대이다. 산책로에는 잡화점, 케밥집, 노상 카페가 즐비한데 우리말로 ‘안녕하세요?’라며 호객하는 인사가 싫지 않았다.
‘갈라타 다리’도 필수적으로 방문해야 할 곳이다. 이 다리는 남쪽 구시가(舊市街) 에미노뉴와 북쪽 신시가(新市街) 카라쿄이 부두를 연결한다. 처음 목조다리로 만들어진 것을 그 후 몇 번이나 뜯고 새로 만들어서 반포대교처럼 2층 구조인 현재 모습을 갖추게 되었단다. 위쪽다리는 차도와 인도인데 인도는 많은 낚시꾼들이 점령하고 아래쪽다리에는 다양한 해산물 레스토랑과 술집 등으로 꽉 들어차있다. 일행은 한 카페에 자리 잡고 앉아서 교통체증 시간이 끝날 때까지 맥주, 음료수를 마시면서 아름다운 보스포루스 해협의 야경을 즐겼다. 특히 난생 처음으로 터키의 명물이라는 고등어 케밥을 맛보았고, 이 나라 전통 이라는 ‘물담배’도 빨아 보았다.
늦은 밤 교통체증 시간이 지나서 시원하게 뚫린 길 따라 국제공항에서 가까운 이스탐블 교외의 ‘ESER DIAMOND’호텔로 이동하여 투숙했다.
제7일(5/4, 토요일)
아쉽게도 이번 여행의 마지막 날이 다가왔다. 오전에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크루즈관광한 후 '그랜드 바자르'를 둘러보고, 오후에 이스탐블 시내의 ‘히포드럼 광장’, ‘성 소피아 박물관 ’, ‘롭카프 궁전’, ‘술탄아흐멧 모스크’를 답사하고, 밤에는 귀국 시간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신시가지의 번화가인 이스티크랄 거리와 탁심 광장의 화려한 밤 분위기를 느껴보기로 했다.
보스포루스 해협 크루즈 관광은 갈라타 다리 옆의 ‘에미뇌뉘’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아시아와 유럽을 있는 보스포루스 대교까지 왕복하면서, 해협 동쪽 주거지역이 대부분인 아시아 지역과 무역, 상업의 중심지가 된 서쪽의 유럽지역을 두루 바라보는 것이다. 멀리 가까이 보이는 수많은 모스크, 우뚝 선 첨탑, 크고 작은 형형색색의 건물과 주택 들이 서로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경화를 연출한다. 도중에 ‘돌마바흐체 궁전’, ‘크즈쿨레시’, ‘위스퀴다르 항구’도 보이는데 구전되는 이야기가 모두 애련하다.
‘돌마바흐체 궁전’은 해변을 흙으로 메우고 50만 금화, 현재 돈 5억불에 맞먹는 기금으로 1856년에 완공된 궁이다. 오스만 제국의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어가는 시점에 압두메짓 1세가 이를 만회하고자 서구화를 추진하고 국력 쇄신을 도모하여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을 본떠 초호화판으로 건립하였지만 막대한 건축비 지출은 어려웠던 왕실 재정을 더욱 악화시켜 오스만 제국의 멸망을 초래한 결과를 낳았단다. 궁의 내부 장식과 방들을 꾸미기 위해 총 14톤의 금과 40톤의 은이 사용되었고, 좌우 대칭 3층 구조인 궁의 내부에는 285개의 방과 43개의 홀, 280개의 화병, 156개의 각종 모양의 시계, 36개의 4톤과 2톤짜리 샹들리에, 58개의 크리스탈 촛대, 560점 이상의 그림, 대형 카페트 등이 전시되어 있단다.
‘크즈쿨레시’는 ‘딸의 탑’ 이란 뜻이라는데, 술탄의 딸이 뱀에게 물려서 죽을 것이라는 점술가의 예언을 듣고, 뱀이 없는 작은 섬에 집을 짓고 밥을 일일이 날라다 주었다. 그러다가 16세 생일을 맞게 되자 이를 축하하기 위해 과일바구니를 보냈는데 그 바구니 속에 뱀이 숨어들어 결국에는 물려 죽었단다.
‘위스퀴다르 항구’는 6.25 한국동란 때 유엔군으로 파병되던 터키 군이 출정했다는 항구이고, 젊은 여인이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며 부른 ‘위스퀴다라’ 터키 민요의 고장이다. 젊은 시절 귀에 익은 추억의 가사를 회상해보면
1절 ; 위스퀴다라 기데리캔 알드다 빌 야물 (위스키다르 가는 길에 비가내리네)
캬티비민 세트레시 우쥰 에테이 차물 (내님의 외투자락이 땅에 끌리네)
캬팁 우이쿠단 우얀므쉬 괴즐레리 마흐믈 (내님이 잠 덜 깨어 눈이 감겼네)
후렴 ; 캬팁 베님 벤 캬티빈 엘 네 카르쉴 (우리 서로 사랑하는데 누가 막으리)
캬티비메 콜라흐다 굄렉 네 귀젤 야르쉴 (내님의 깃 다린 셔츠도 너무 잘 어울리네)
2절 ; 위스퀴다라 기데리캔 빌 멘딜 불둠 (위스키다르 가는 길에 손수건을 놓았네)
멘디리민 이치네데 로쿰 돌둘둠 (내님을 위한 손수건에 사랑을 담았네)
캬티비미 아라리켄 야~늠다 불둠 (어느새 내님이 바로 옆에 있네)
'그랜드 바자르'는 비잔틴 시대부터 무역의 중심지였단다. 18개의 출입구와 4천개 이상의 각종 상점들이 빼곡한 세계에서 가장 큰 바자르 중 하나인데, 터키를 방문하는 외국관광객들에게 손꼽히는 명소라지만 비좁은 길, 복잡한 인파에 파묻혀 동서남북을 구별할 수 없으니 치매 노인이 아니더라도 길 잃기 꼭 알맞다. 토요일은 일찍 문을 닫으며 일요일이나 종교적 휴일에는 모두 폐점한단다.
오후의 시내관광은 ‘히포드럼(Hippodrome) 광장’에서부터 시작했다.
‘히포드럼 광장’은 본래 서기196년 로마의 황제 세비루스(Severus)에 의해 검투경기장으로 지어졌는데, 4세기 무렵 비잔틴 황제인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검투경기가 금지되고 대신 말이 끄는 전차경기장으로 바뀌어 영화 벤허의 전차경주의 배경이었단다. 10만명 정도 수용이 가능했다고 하는 이곳은 왕위 계승을 놓고 벌어진 수많은 전쟁의 무대가 되기도 했단다. 13세기 초 십자군의 침입으로 이 광장에서 비잔틴군과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는데 이때 광장 내 대부분의 유적은 파괴되었고 현제는 ‘디킬리타스’, ‘오르메 수툰’, ‘셀팬타인 기둥’의 귀중한 3개의 기념비만 보존되어 있다.
‘디킬리타스(Dikilitas)’는 원래 기원전 1550년에 메소포타미아 전투에서의 승리를 기념하는 의미로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헌납한 사원에 세워졌던 두 개의 오벨리스크 중 하나인데, 당시 왕족들의 일상을 양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오르메 수툰’은 일명 ‘콘스탄티누스의 기둥’이라고도 하는데 콘스탄티누스 7세가 할아버지를 위해 돌로 쌓아 만든 높은 기둥이다.
‘셀팬타인 기둥’은 아폴로 신전에서 가져온 3 마리의 뱀이 서로 뒤엉켜 직경 3미터의 황금 그릇을 떠받치고 있는 형상의 청동제 기둥인데 뱀의 머리 한 개는 없어졌고 2개는 이스탄블 고고학박물관과 영국 대영박물관에 나뉘어 보관되고 있단다.
‘성 소피아 박물관’은 이스탄불의 상징으로 성 소피아 성당이 더 어울리는 명칭이다.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이 지어지기 전까지는 규모면에서 세계 최대 성당이었고 비잔틴건축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힌다. 본당 넓이는 7,570 평방미터, 천장높이는 55.6미터, 돔의 지름은 33미터에 달하고, 40개의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오는 구조이다.
비잔틴제국시대에 그리스도교를 처음 공인하고,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머무르기로 정한 이곳 새 도시의 대 사원으로 325년 창건했던 성당인데,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명에 의해 532-537년에 다시 크게 개축되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이 들어서 이슬람 모스크로 용도가 바뀌면서 성당을 둘러 미나레트(아랍어로 ‘등대’ ; 이슬람 건축에서 기도시간을 알려주는 탑)가 세워지고, 성당 안을 회칠로 덧씌우기 하여 코란의 금문자와 문양들로 채워서 성모마리아의 모자이크가 모두 이 회칠 속으로 사라졌었는데, 그 후 복원작업으로 두꺼운 회칠이 벗겨지자 성모마리아를 비롯한 비잔틴시대의 화려한 벽화들이 일부 드러났지만 현재는 그 복원작업마저 중단된 상태란다.
‘톱카프 궁전’은 19세기 마흐무트2세 때까지 약 400년간 오스만 제국의 정궁(政宮)으로 사용됐다는데. 3개의 문과 4개의 정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문은 ‘황제의 문’ 또는 ‘술탄의 문’으로 불리고 이 문을 통과하면 제1정원이 나온다. 오스만 왕조 시절 일반 백성들은 제1정원까지만 왕래할 수 있었다. 제1정원의 ‘이레네 성당’은 6세기 동로마 제국 시기에 건립됐지만 오스만이 정복한 이후에도 모스크로 사용하지 않아 원형 그대로 남아있다.
제1정원을 지나면 두 번째 문인 ‘경의의 문’이 나온다. 경의의 문은 방추형의 석탑이 문의 양 끝에 세워졌는데 톱카프 궁전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제2정원에는 신하들이 국사를 논했던 건물과 황실 주방인 부엌 궁전이 있다. 전성기 시절 1천2백 여 명의 요리사가 있었다는데 지금은 부엌 궁전을 도자기 전시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제2정원에는 남성출입금지 구역인 ‘하렘’이 있다. 하렘은 이슬람 사회에서 부인들이 거처하는 방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남자들의 출입이 금지된다.
세 번째 문부터는 오직 술탄과 술탄의 측근들만 통과할 수 있다. 이 문 뒤의 제3정원에는 외국 사절을 접견하는 알현실과 제국의 온갖 보물을 전시한 보석관이 있다. 보석관에는 에메랄드가 수없이 박혀 무게가 3kg인 ‘톱카프의 단검’을 비롯하여 지상 최대 크기의 다이아몬드, 각종 보석이 찬란하게 박힌 수많은 보물급 단금과 장식물들이 감탄을 자아낸다.
‘술탄아흐멧 모스크’는 오스만 시대에 지어졌으며 내부의 벽과 기둥이 푸른색 타일로 장식되어 있어 '블루 모스크'라고 불리어 진단다. 모스크 규모면에서 터키 최대이며 바로 맞은편에 서있는 성 소피아 성당에 비해 이슬람 세력의 우위를 상징코자 그 양식을 모방도하고 더 발전시켜서 독특한 구조로 축조 했단다. 돔에 200개가 넘는 조그만 창은 스테인 글라스로 장식되어 이를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환상적인 신비를 연출한다.
저녁식사 후에 신시가지의 최대 번화가라는 이스티크랄 거리를 걸어서 둘러 봤다. 길 양쪽은 마치 먹자골목처럼 식당과 카페가 즐비하고 주말을 즐기려 몰려나온 남녀 젊은이들로 발 디딜 틈 없이 흥청거렸다. 길 복판 군데군데에서 밤, 옥수수를 구어 파는 장면이 군고구마 장사처럼 낯설지 않다. 탁심 광장이라는 곳에서 시작돼 비스듬한 언덕을 타고 이스티크랄 거리 1.6킬로 구간을 왕복하는 이곳 명물인 빨간 소형 전차 ‘튀넬’도 타봤다.
제8일(5/5, 일요일)
밤 12시 45분 이스탐불 공항을 떠날 때 내린 비행기 창문 셔터가 그대로 닫혀있어, 기내가 깜깜하니 계속 밤인 줄로만 알았는데 곧 인천공항에 착륙한다는 기내방송을 듣고서야 비로소 셔터를 올리니 우리시간으로는 이미 하루해가 저물어가는 오후 5시 이었다. 장시간 비행이라 머리도 멍했지만 짧은 기간에 너무 많은 것을 주마간산(走馬看山)하였으니 언제 무엇을 보았는지 잘 떠오르지도 않고 떠오르는 것조차 뒤엉켜 서로 구별이 안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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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진덕형, 좋은 여행하고 오셨네요.
그런데 터키인의 조상은 돌궐족(突厥族)이라는 것이 정설인 것 같습니다. 훈족은 흉노(匈奴)로 헝가리인의 조상으로 알려져 있지요.
실감나게 잘 엮은 여행기, 아직도 이런 여행기를 쓸 수 있다니 정교수 니는 교수를 더 하다가 퇴임했어야 했는데...너무 일찍 현직을 떠나서 애석하다는 생각이 또 드는구나. 어디서 그런 정력이 쏫아나는고? 혹시 태능골 정기 탓이 아닐까? 우정의 정열적인 글을 자주자주 보고 싶군요
헝가리와 터키, 몽골에서는 자기들을 모두 흉노(匈奴)의 후계 민족역사로 가르치고 있다는데 흉노가 누구인지 확실하지는 않다고 합니다. 돌궐족(突厥族)은 6세기 중엽부터 약 200년 동안 몽골고원을 중심으로 활약한 투르계 민족으로 나중에는 동돌궐과 서돌궐로 나뉘어 동돌궐은 당나라에 흡수되고 서돌궐이 이동하여 투르계 민족이 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만 아마 중국에서는 이민족을 모두 야만족 취급하여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노(北奴) 하며 돌궐족도 흉노족으로 묶은 것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