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라파의 소
조병화
어차피
끝내는 도살장을 거쳐서
정육점으로, 혹은 통조림 공장으로
산산이 흩어져 사라져 갈 생애이지만
떠가는 흰구름 아래
구라파 푸른 목장에서
온종일
비옥한 목초를 배불리 씹으며
유연히 누워 있는 소들은
지상에서 천복을 누리고 있는 게 아닌가
낳아서 죽을 때까지
근심 걱정 하나 없이
평안하게 살 수 있다는 건
얼마나 운수 좋게 타고난 한평생이랴
같은 하늘 아래
같은 세월에
같은 시간에
온종일 허기져
타는 황무지만 뒤적이고 있는
모로코의 나귀와 양떼들아
끝내는
어차피 도살장을 거쳐서
정육점으로 혹은 통조림 공장으로
산산이 흩어져 사라져 갈 운명이지만.
詩想노트
미국의 소설가이며 비평가인 R. P. 워렌(Robert Penn Warren, 1905~1989)은 다음과 같이 말을 했습니다.
“작품이라는 것은 그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는 육체肉體의 땀과 같은 것이다. 작가는 자기자신에게 없는 것을 장식한다든지 타인에게서 빌려온다든지(차용借用)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즉, 긴 인생경험을 거쳐서 자기 자신에게 적응하는 말(언어)이 자연히 나와서 자기자신의 독자적인 스타일이 완성되는 것이다. ” 또 그는
“글의 스타일은 그 작가의 육체적 사상(남에게서 빌려온 것이 아닌)으로 창조되는 것이다. 사상이라는 것은 체험과 지성의 결합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작품은 어디까지나 그 작가의 육체적인 땀에서 나오는 겁니다.
다른 사람을 모방해서는 안 되는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서 차용(借用)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오로지 작가(시인)의 경험에서 그 육체적인 땀에서 우러나오는 사상이나 이미지나 그 영혼의 세계가 작품으로 전개되어야 하는 겁니다.
어느 이즘이나, 사조나, 유행이나, 집단적 행동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나의 주장입니다.
어디까지나 작가(시인) 자신의 확립이 중요하며 그 작가(시인) 자신의 세계가 확립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출발서부터.
공부를 한다는 거와, 안다는 거와, 작품을 쓴다는 것은 다르다고 생각을 합니다.
또 영국의 문학비평가 존 미들턴 마리(John Middleton Murry, 1889~1957)는
“글(시)에 있어서 스타일의 비밀은 생(生)의 파악(把握)에 있으며 오늘날 어느 시인, 어느 작가들과 같이 이미지를 위한 이미지의 추구는 새로운 현식문(衒飾文)에 끝날 뿐 혼란만 일으킨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시는 모로코와 유럽 천지를 여행하면서 본 모로코의 가난한 동물들과 유럽의 부유한 동물들을 비교하면서 생존의 운명을 나대로 그려 본 겁니다.
머리말
이 시는 나의 과거의 시집 속에서 손이 가는 대로 뽑은 100편의 시에다가 그 시에 얼킨 나의 인생 경험과 시적 경험을 적어서 써내린 일종의 나의 인생과 나의 시의 자전적 편모라고 하겠습니다.
100편의 시는 출판사측의 요청이었습니다.
나의 시는 독자 여러분들이 이미 읽어서 아시다시피 해설이나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그만큼 나는 여러 독자들과 가까운 거리에서 시 작업을 내 인생처럼 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의 인생철학인 순수고독(純粹孤獨)과 순수허무(純粹虛無)에 있어서는 그 깊이에 있어서 다소 설명이 필요할지는 모릅니다.
요컨대 누구나 삶이 원천적으로 고독하다는 것이 나의 순수고독의 개념이며 누구나 죽는다는 것이 나의 순수허무의 개념입니다. 나는 이 고독과 허무를 열심히 살아왔을 뿐입니다. 인생처럼.
1992년 5월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편운재片雲齋에서 조병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