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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0. 묵상글 (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 행복 의지와 사랑 의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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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0.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행복 의지와 사랑 의지
우리가 신앙인이라면 자기 행복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타인의 구원까지 챙길 수도자라면 더더욱 자기 행복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장미의 꽃을 보지 않고 가시만 보고는 불행하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새소리는 듣지 않고 욕하는 소리만 듣고 불행하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빛을 보지 않고서 세상이 어둡다고 나는 불행하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행복하기 위해서 행복 의지를 가져야 합니다.
나는 무조건 행복하겠다는 행복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행복하지 않으면 나만 손해기에 무조건 행복해야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조건에 의해 나의 행불행이 좌우되지 않게 하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누구에 의해 나의 행불행이 좌우되지 않게 하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원수에 의해 나의 행불행이 좌우되지 않게 하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사실 행복한 사람에게는 원수가 없고,
원수 때문에 불행한 사람에게만 원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한때 원수 때문에 불행했었습니다.
그래서 미워했고 불행을 곱씹을 때마다
더 미워졌으며, 더 미워하니 더 불행해졌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이때 깨달았습니다.
원수 때문에 불행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원수 때문에 과거 불행한 것도 억울한데 미래까지 불행하면 안 된다는 것을.
과거 불행 때문에 원수에 매였었는데 내 인생 미래까지 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더 다행인 것은 이때 하느님의 사랑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원수에게 향했던 시선을 하느님 사랑에 향하게 되었습니다.
원수와 미움의 지옥에서 하느님과 사랑의 천국으로 나의 시선을 바꿨습니다.
그러나 한 번에 바뀐 것이 아니라 바꾸려고 노력한 것이었으며
행복 의지로 바꾸려고 노력한 거였고 그래서 행복 의지는 사랑 의지가 되었습니다.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빛을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처럼
이웃이나 원수를 똑같이 사랑하는 완전한 사랑을 목표로 세우고,
그런 사랑의 의지를 계속 북돋웠습니다.
사랑의 의지는 강했지만,
사랑의 노력은 겸손했습니다.
‘목표는 높게, 시작은 낮게’ 입니다.
처음부터 큰 원수를 사랑하려고 하지 않고
작은 원수부터 단계적으로 사랑하였습니다.
계단을 오르는 것은 언제나 힘들지만
계단을 단계적으로 오르면 반드시 오를 수 있습니다.
태양광처럼 하느님 사랑을 받아 오르면 지치지 않고 오를 수 있습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이 말씀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부터 믿기로 한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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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0.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오늘 <복음>은 마지막 여섯 번째의 새로운 의로움으로, ‘완전한 사랑’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레위기> 19장 18절의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라는 말씀을 넘어서,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14)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이웃과 원수를 구분해서 처우를 달리 해온 그동안의 관행을 완전히 뒤엎어, 이웃이나 원수를 가리지 않고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원수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또는 우리 자신에게서 미움을 없애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혹은 단지 사랑에 한계를 두지 말라는 것만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는 모두를 ‘있는 그대로’를 ‘호의로’, ‘자애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부족한 이를 부족한 채로, 원수를 원수인 채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가 나를 미워하지 않게 되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한 채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나아가서는 그가 부족하기에, 바로 그 이유로 더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가 사랑이 더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죄인이기에 처벌받아야 하기보다, 용서받아야 할 대상이듯이 말입니다.
동시에, 이는 자기 자신만 구원받아야 할 존재인 것이 아니라, 타인도 구원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우쳐줍니다. 자기 자신만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인 것이 아니라, 타인도 사랑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에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고 덧붙이셨습니다. ‘사랑’은 애당초 자기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스테파노가 돌을 맞아 죽어가면서도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했던 것처럼(사도 7,60), 사도 바오로가 고난을 겪으면서도 박해하는 유대인들을 ‘위하여’ 기도했던 것처럼(1코린 4,12), 당신께서 십자가에서 죽어가시면서도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나 이웃만 사랑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자기에게 잘 해주고,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라고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사실, 친구를 사랑하는 사람은 죄는 짓지 않을지 몰라도, 의로움을 행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친구가 아닌 원수를 사랑할 때라야, 의로움을 행하게 됩니다. 악을 피하는 것을 넘어 선을 행할 때라야, 비로소 완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의로움은 단지 죄짓지 않고 무난하게 살기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베푸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사랑이 우리를 하느님과의 의로운 관계로 이끌어갑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10)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주님!
단지 사랑할 뿐만 아니라,
그 사랑이 그에게도 사랑이 되게 하소서.
내가 기도해해주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나의 기도가 가장 필요하고 나의 사랑이 가장 필요한 사람,
나를 힘들어 하고 나의 용서가 절실한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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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0.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나도 다른 사람의 원수가 될 수 있다
살아가면서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래서 나는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말합니다. 사실 상처를 주는 사람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나와 관련이 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상처가 되지 않고 쉽게 잊어버립니다. 아주 가까이 있기에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아내가 될 수 있고 남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식이 될 수도 있으며 부모나 이웃, 절친한 친구, 동료가 될 수 있습니다. 상처를 풀지 못한 채 시간이 흐르면 미움이 쌓이고 마음의 병이 되고 결국은 원수가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 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5,44-45). 고 말씀하셨습니다. 미움을 사랑으로 정복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는 원수와 박해하는 사람, 악인과 선인,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이 따로 없습니다. 다 내 자식이요,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베푸십니다. 오로지 사랑만이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원수를 만드는 것은 바로 나입니다. 사랑으로 충만하다면 원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그러니 상처를 받을 수 있는 연약함을 지녔고, 그렇기 때문에 상처를 받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처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것도 아니고, 혹 아픔이 이미 시작되었다면 그 아픔을 오래 가지고 있지 않아야 합니다. 더러운 것이 내 몸에 들어왔는데 왜 그것을 끌어안고 있습니까? 내보내야지요. 상처를 준 그 무엇이 내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인식하면 내 보내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 원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깊이 보면 우리 자신들이 다른 사람의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가끔 신자들의 기도소리를 들어보면 ‘세상에 못된 사람이 너무 많은데 회개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이러저러한 상태를 낱낱이 고발하는 식으로 얘기해 놓고는 ‘그러니 고쳐주십시오’. 하는 식입니다. ‘자기는 아무런 잘못도 없고 회개할 이유도 없는데 남들이 잘못해서 이지경이 되었으니 그들을 좀 어떻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다른 사람도 나도 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이고,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연약함을 지녔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무리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이미 원수가 없습니다.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시는 하느님만을 바라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나도 다른 사람의 원수이니 오늘은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으로 하느님의 마음을 닮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간직하여 모두가 사랑해야 할 사람으로 보인다면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라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람들로부터 온갖 멸시를 받고 죄인취급을 받았던 세리들도 서로를 사랑하며 서로 상대방을 헐뜯지는 않았습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이방인들 사이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우애를 베푸는 것은 아주 보편적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사랑해야할 소명이 있을 뿐입니다. “성인은 착한 사람을 착하게 대하고 착하지 않은 사람 또한 착하게 대하니 이는 덕이 오직 착하기 때문이다”(노자49장). “사랑은 사랑일 뿐, 상대에 따라서 달라지거나 있다가 없다가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이현주).
그러므로 지금의 처지에 안주하지 말고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하느님의 완전함을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많이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많이 행하십시오.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5,5).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요? 원수사랑!이죠. 그렇다면 가장 아름다운 사랑은? 당연히 원수사랑!이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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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0.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꽃동네 오웅진 신부님의 팔순 감사미사에 다녀왔습니다. 신부님과는 23년 전에 인연이 있었습니다. 수녀님과 함께하고 싶었는데 본당의 여건상 수녀님을 모시기 어려웠습니다. 꽃동네 오웅진 신부님께 꽃동네의 수녀님을 파견해 주실 수 있는지 청하였고, 오웅진 신부님은 기꺼이 2명의 수녀님을 파견해 주었습니다. 수녀님들은 꽃동네 수도회의 영성을 보여주었습니다. 늘 겸손한 자세로 신자들을 대하였고, 본당의 어려운 일들은 솔선해서 하는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수녀님들은 주일미사가 끝나면 성당에서 남은 주보를 정리하였고, 화장실 청소를 하였습니다. 예비자 교리, 가정방문, 봉성체에 함께 해 주었습니다. 제가 휴가를 가면 공소예절을 해 주었습니다. 수녀님은 김수환 추기경님께 예쁜 손 편지를 보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기꺼이 ‘대림특강’을 해 주셨습니다. 수녀님의 예쁜 손 편지가 한 몫을 했습니다. 당시 서울대교구에서 가장 규모가 작았던 성당에 대한 김수환 추기경님의 배려가 있었습니다. 저는 사제생활 32년 중에 가장 행복했고, 보람 있었던 시간을 수녀님들과 함께 보낼 수 있었습니다.
오웅진 신부님께서 뉴욕에 오신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팔순 감사미사가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예전에 있었던 인연을 생각하며 기쁜 마음으로 신부님의 팔순 감사미사에 참석하였습니다. 23년이 지났지만 신부님은 여전히 건강하였습니다. 3시간 미사에 2시간 넘는 강론을 하였는데 하나도 지친 모습이 없었습니다. 사랑하면, 내어주면 나머지는 하느님께 다 알아서 해 주신다는 신부님의 말씀이 가슴에 남았습니다. 마땅히 해야 할 것을 충실하게 하는 사람에게 볼 수 있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이제 막 서품을 받은 새 사제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평생 성무일도를 하였습니다. 나는 매일미사를 한 번도 거르지 않았습니다. 신부님도 그렇게 하세요.” 신부님은 새 사제에게 ‘강복’을 청하였고 새 사제는 신부님에게 ‘첫 강복’을 하였습니다. 신부님은 하느님과 함께 했기에 행복하다고 하였습니다. 과거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고, 앞으로도 행복할 거라고 하였습니다.
신부님은 21세기는 ‘융합의 시대, 영성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가?’를 늘 생각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성자에게 모든 권한을 주셨고, 성자는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였고, 성령께서는 교회를 통하여 은사를 주시는 것처럼 신앙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친교를 따르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독사, 저출산, 유산’과 같은 문제는 관계의 단절에서 비롯된다고 하였습니다. 꽃동네가 추구하는 영성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관계’의 회복이라고 하였습니다. 신부님은 60세가 되는 생일에는 노숙자 60명을 모시고 식사를 하였다고 합니다. 70세가 되는 생일에는 노숙자 700명을 모시고 소풍을 다녀왔다고 합니다. 80회 생일에는 한국에서 멀리 미국까지 와서 ‘영성센터’ 건립을 위한 모금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고독한 사람들을 위해서 평생 일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다른 모든 것들을 채워주셨다고 하였습니다.
신부님은 인간에게 있는 3가지 욕구를 이야기하였습니다. 소유욕, 지배욕, 사랑의 욕구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소유에 대한 욕구는 마치 바닷물을 마시는 것 같아서 가지면 가실수록 더욱 큰 욕망이 생긴다고 하였습니다. 지배에 대한 욕구는 갈등과 분열의 원인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사랑에 대한 욕구는 하느님께로부터 온다고 하였습니다. 소유와 지배는 문화와 역사를 발전시키는 동력이 되지만, 소유와 지배는 전쟁과 폭력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고 하였습니다. 기후위기, 자연파괴, 생물의 멸종은 지배와 소유의 욕망에서 비롯된다고 하였습니다. 사랑의 욕구는 하느님께로부터 온다고 하였습니다. 사랑은 온전히 내어 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체와 성혈’의 모습으로 모든 것을 내어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그 사랑에서 희망의 꽃이 핀다고 하였습니다.
3시간의 미사와 2시간이 넘는 강론이 자칫 힘들 수도 있었지만 제게는 가뭄 끝에 내린 ‘단비’와 같았습니다. 신부님은 ‘정의와 사랑’에 대한 이야기로 강론을 마무리 하였습니다. “정의는 사랑을 포용할 수 없지만 사랑은 정의를 포용합니다. 사랑이 없는 정의는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정의롭지 못한 상황에서는 억울하고, 분노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정의를 실현하였을 때라도 불안감이 생깁니다. 하지만 사랑하면 억울함도 사라지게 됩니다. 사랑하면 불안감도 사라지게 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오웅진 신부님은 예수님의 말씀을 온 힘과 정성을 다하여 따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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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0.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의 여정
-평생과제-
“사랑은 은총이자 선택이요, 훈련이자 습관이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평생이 사랑의 여정입니다. 삶은 선물이요 평생과제가 사랑입니다. 영적성장과 성숙도 결국 사랑의 성장이자 성숙입니다. 외적성장은 멈춰도 내적 사랑의 성장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수도원의 아름다운 아름드리 메타세콰이어 하늘길 가로수들이 상징하는바 내적성장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사랑 역시 은총이자 의식적 선택이요, 훈련이자 습관임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평생공부가 사랑이요 사랑에는 영원한 초보자요 평생 사랑의 학인임을 깨닫습니다. 제가 평생 사랑을 강조하며 수십년간 매일 강론 해온대로 살았다면 성인이 되고도 남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 깨달음은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영원한 초보자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5,48)
오늘 ‘원수를 사랑하여라’라는 6번째 마지막 대당명제의 결론이자 6개 대당명제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여 하늘 나라를 살게 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아, 바로 평생학인이 되어 완전한 사람되는 사랑 공부가 우리의 평생공부요 평생과제임을 깨닫습니다.
완전한(perfect)은 온전한(whole)을 뜻합니다.
온전함(wholeness)이 거룩함(holiness)이요 영어발음도 같습니다.
온전함은 원숙(圓熟)함과 원만(圓滿)함과 통합니다. 가을되어 익은 둥근 열매들을 보면 둥글 ‘원(圓)’자를 실감합니다. 바로 “둥근 삶, 둥근 마음” 바로 제 졸저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둥근 사랑”을 추가하고 싶습니다. 정말 사랑도 익어 갈 때 둥근 사랑일 것입니다. ‘원숙(圓熟)’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가을 열매는 태양의 자식들
호박, 배...태양을 닮아 둥글둥글 환하다
사람도 사랑으로 익어 열매되면
얼굴도 마음도 글도 말도 행동도 하느님 사랑 닮아, 성체를 닮아
둥글둥글 환하다”-1998.9.10.
무려 25년전 여기 배밭수도원에서 쓴글입니다. ‘배밭’하니 ‘별밭’이라는 어제 쓴시도 생각납니다. 초록빛 하늘 배나무에 달린 흰봉지의 배열매들이 꼭 흰별들처럼 생각되어 쓴 시입니다.
“날마다
별밭사이
흰별들 사이 초록빛 하늘길을 걸을 때마다
기쁨 가득
충만한 행복이다
가을 열매익어
흰별들 배열매 딸때까지 계속될 거다
이 설렘, 이 기쁨 이 행복에 산다
날마다”-
정말 배밭이자 별밭을 산책할 때의 마음입니다. 불가의 성철 스님 말씀도 생각납니다. “나는 모나게 살았지만 너희들은 둥글게 살라” 하시며 많은 제자들의 법명에 둥글 원圓자를 넣어 줬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완전한 사랑, 온전한 사랑, 원숙한 사랑을 살 수 있을까요? 바로 복음 앞부분에 상세하게 밝혀줍니다. 바로 대자대비하신 공평무사하신 아버지 하느님을 닮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들도 하지 않느냐?”
원수를 사랑하여라, 맞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 마음, 하느님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우리에 대한 믿음과 기대는 이처럼 높습니다. 내눈에 원수지 타인엔, 하느님께는 다를 수 있습니다. 원수에게도 피치 못할 원인이, 사연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을 닮아 한없이 너그럽고 자비로우라는 것입니다. 이건 이기적 심리적 사랑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보편적 연민과 존중, 배려의 사랑, 아가페 사랑입니다.
당장 저부터 실천해야 할 것이 낯선 피정자들을 봐도 소 닭보듯, 개 닭보듯 할 것이 아니라 상냥하게 웃으며 목례하고 다정한 인사말 던져야 하겠다는 반성을 합니다. 사랑의 침묵이자 사랑의 말과 표정입니다. 유유상종의 배타적 사랑을 한없이 부끄럽게 합니다.
결코 값싼 사랑은 없음을 깨닫습니다. 새삼 환대의 사랑에 각별 힘써야 함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은총과 더불어 부단한 선택과 훈련, 습관의 최우선 대상이 이런 대자대비의 사랑공부요 실천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의 빛나는 모범이 하느님 사랑의 화신인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참 적절합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
아, 바로 예수님의 사랑 은총이 우리의 작은 사랑을 격려합니다. 이웃 원수사랑과 더불어 우리 하느님을, 예수님을 열렬히, 한결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늘 선택하고 훈련하여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예수님을 치열하게 가열차게 한결같이 사랑할 때 주님은 지칠줄 모르는, 샘솟는 아가페 사랑을 선물하십니다.
바로 이 사랑이 두려움을 몰아내고 하느님 마음, 예수성심의 사랑으로 원수사랑도, 공평무사한 보편적 사랑을 하게 하십니다. 자주 고백성사시 보속으로 써드리는 말씀 처방전도 생각납니다.
“주님께 아뢰옵니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밖에 없습니다.”(시편16,2)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 저의 힘이시여.”(시편18,2)
삶은 선물이자 숙제입니다. 결코 값싼 사랑은 없습니다.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하는 사랑의 수행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평생학인이 되어 평생 해야할 평생공부가, 평생과제가 사랑입니다. 사랑에는 늘 초보자요 날마다 용기를 내어 새롭게 시작하는 사랑입니다. 날로 하느님을, 예수님을 닮아가게 하는 사랑이요 이 거룩한 미사가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그리고 다음 고백기도대로 살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하시고, 사랑의 수행에 분투의 노력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자,
새로움이요 놀라움입니다.
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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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0.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늘 주님의 말씀 역시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얼마 전 읽은 책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나 싫다는 사람은 신경 끄고, 나 좋다는 사람만 신경 쓰며 살아갈 것. 조금 더 나를 위한 관계를 지향하며 살아갈 것.’
또 이런 말도 있었습니다.
‘이미 시든 관계를 애써 붙잡지 말고, 잘 자라고 있는 관계를 힘써 망치지도 말 것.’
그런데 위의 내용을 읽다 보니 무언가가 명치에 ‘툭’하고 걸리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 내용 때문이지요. ‘원수를 사랑하고, 그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라고 가르치신 주님의 말씀이 제 명치에 걸린 것입니다.
사실 세상의 내용은 참으로 편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계명과 말씀은 늘 세상의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제 명치에 걸렸던 그 말씀은 아마도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의 명치에도 걸릴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자니 내가 지는 것 같고, 세상의 말대로 살자니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내 모습을 다시 보게 되는 것이지요.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벌써 뼛속까지 그리스도인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주님의 가르침을 모르면 명치에 그 말씀이 걸릴 일도 없기 때문입니다.
매번 주님의 말씀을 따르기 어려울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한 번이라도 눈 감고 원수를 사랑해볼 수는 없을까요? 그리고 그 한번이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살아 있다는 증거
리하르트 바그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방황과 변화를 사랑한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이 말은 생물학적인 육체의 죽음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육체가 살아 있다 하더라도
방황과 변화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변화를 사랑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변화는 대부분 시대의 젊은 사람들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햄버거 가게 키오스크(전자주문기) 앞에서, 국밥집, 국숫집 키오스크 앞에서….
우리 서로가 도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방황과 변화를 사랑할 수 있도록
변화에 무릎 꿇고 후퇴하는 모습이 아닌
젊은이 변화의 선두에 서서
그 변화를 따라오는 모든 사람을 도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모두 살아 숨쉬기를 희망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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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0.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빅터 플랭클의 ‘죽음의 수용소’를 보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도 사람들이 웃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웃을 일을 찾았습니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우스갯소리를 나누며 고통을 이겨냈습니다. 매일 밤 하나씩,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서 서로에게 들려주는 시간을 갖기도 했습니다. 주제는 ‘우리가 석방된 후에 벌어질 수 있는 재미있는 일들’이었습니다. 그날을 상상하며 배꼽 잡으며 웃었다고 하네요.
아우슈비츠라는 죽음의 수용소, 결국 가스실로 끌려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유다인 강제 수용소입니다. 말로만 듣고 책이나 영상을 통해 보게 된 ‘아우슈비츠’라는 공간은 죽음만이 있고 어떤 희망도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 죽음의 한 가운데에서도 유머를 통해 희망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이 죽음의 수용소에 감금되어 있지 않으면서도 웃을 일이 없다고 단정 짓고 있는 사람이 많아 보입니다. 우리 안에는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만들 힘이 있는데도 그 힘을 무시하고 그냥 그 힘을 버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우리 삶은 죽음의 수용소가 아닙니다. 특히 주님께서 희망을 간직하지 못하는 우리와 언제나 함께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따라서 안 좋은 상황만 볼 것이 아니라, 희망의 주님을 바라봐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주님께서 강조하신 말씀에 집중하고 따르면서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을 오늘 복음에서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4)라고 확대하십니다. 예수님 말씀 중에서 아마 가장 실천하기 힘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구약시대에도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것은 불가능한 명령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이는 이웃과 원수의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느 특별한 사람만을 사랑하시지 않지요. 악인이나 선인, 의로운 이나 불의한 이를 가리지 않고 모두 사랑하십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따른다면 하느님처럼 우리도 모두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악인에게 해를 비춰주시고, 불의한 이에게도 비를 내려 주시는 주님 사랑이 불공평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정의를 훨씬 뛰어넘습니다. 이렇게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마태 5,48 참조). 그래야 주님과 함께할 수 있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간직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지금 자리를 죽음의 수용소가 아닌, 하느님 나라로 만들 수 있게 됩니다.
주님과 함께하기 위해 과연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있습니까? 그 사랑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하느님 나라도 가까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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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움 앞에는 두 갈래 길이 있었다. 슬퍼하고 원망하며 두려움에 허우적거리는 길, 다시 사랑하고 감사하며 함께 헤쳐나가는 길. 나는 두 번째 길을 선택했다(이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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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0.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랑이 간다>
그것이 참으로
사랑이라면
너에게서
나에게로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그 어느 것도
오기 전에
나에게서
너에게로
늘 먼저
가는 것이다
그것이 참으로
사랑이라면
너에게서
나에게로
바라는 것이든
바라지 않는 것이든
그 무엇이
오더라도
나에게서
너에게로
늘 멈추지 않고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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