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사스 레인저스의 지구 우승 현장. 이 부부의 포옹 장면이 많은 걸 느끼게 해준다.>
안녕하세요. 추신수입니다. 일기가 좀 늦었죠? 우리 팀이 지구 우승을 하고, 플레이오프를 준비하고, 캐나다 토론토에 가서 블루제이스랑 2연전을 치르고 오는 등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일들을 감당하느라 경황이 없었습니다.
지난 번 일기에 ‘일주일 후, 가능하다면 우승 소식을 안고 인사드리고 싶다’고 했는데 우승은 물론 ‘이달의 선수’상 까지 받는 등 겹경사가 이어졌습니다. 정말 많은 분들이 좋아해주셨고, 진심으로 축하해주셨으며, 그로 인해 저 또한 야구한 보람을 제대로 만끽했습니다.
지구 우승을 하면 선수들이 쓰는 모자와 유니폼에 패치가 붙습니다. ‘포스트시즌’이라고 씌어 있는 패치인데, 토론토 원정 1차전이 시작되기 전, 우리 팀 클럽하우스에 패치가 달린 모자와 유니폼이 전달됐습니다. 전 한참동안 자리에 앉아서 그 패치를 만지작거렸습니다. 그 모습을 본 선수들과 구단 관계자들이 지나가면서 한 마디씩 하더군요. “그렇게 좋냐”면서.
네. 정말 좋았습니다. ‘이달의 선수’ 상보다 지구 우승이 백배, 천배는 더 기쁩니다. 2013년 신시내티에선 피츠버그와 와일드카드 결정전을 치렀을 뿐이고, 진정한 의미의 포스트시즌은 이번이 처음인 터라 몸은 힘들고 부대끼면서도 마음속으론 계속 웃고 있는 기분이라고 할까요? 매일 경기에 나서는 지금이 정말 행복합니다.
선수 생활 은퇴하기 전에 지구 우승 한 번 해보는 게 꿈이었는데(물론 월드시리즈 진출을 꿈꿔 왔지만, 그러기 위해선 지구 우승이 우선입니다^^) 그게 현실로 이뤄지다보니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기도 합니다. 저를 찾는 기자들이 많아지고, 인터뷰 요청이 계속되는 등 제 상황에 어떤 변화가 있는 것 같긴 한데, 솔직히 현실적으로 와 닿진 않습니다.
우리 팀이 LA 에인절스를 꺾고 지구 우승을 차지하던 날, 상상만 해봤던 샴페인 파티를 경험했습니다. 전 클럽하우스에서 잠깐 샴페인만 흔들고 끝날 줄 알았는데, 그렇게 오랫동안 샴페인으로 샤워하게 될 줄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평소 춤과는 거리가 멀었던 제가 음악 소리에 몸을 맡긴 채 선수들과 함께 춤을 추고 있고, 선수들이 뿌려대는 샴페인, 맥주를 몸으로, 입으로 마시면서 온몸으로 기쁨을 만끽했습니다.
기자들과의 인터뷰 이후 가족들과 함께 클럽하우스에서 우승의 기쁨을 함께 나눴는데, 선수들이 춤추고 뛰노는 모습을 본 제 아내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선수들은 그 많은 끼를 어떻게 참고 야구를 했을까. 난 자기가 이렇게 춤 잘 추는지 몰랐어. 12년을 함께 살면서도.” 그리고 한 마디 더 덧붙였습니다. “살다 살다 이렇게 물 좋은 클럽은 처음 봤다”라고요. 아내 얘기를 듣고 한참을 웃었습니다.
정신없는 상황들 속에서 한 선수가 이런 얘길 하더군요. “오늘 파티가 마지막이 아니다. 앞으로 세 번은 더 이런 경험을 하게 될 거야!”라고. 디비전, 챔피언십, 월드시리즈를 떠올린 얘기였겠죠. ‘아, 이래서 우승하고 싶어 하는구나’ 하는 걸 절감했습니다. 그 맛을 알기 때문에 매번 우승하고 싶어 하는 것이고요. 그날 클럽하우스에서 펼쳐진 샴페인 파티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겁니다. 이후에 다시 그와 같은 경험을 한다고 해도, 그 순간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더 의미있는 순간으로 남아 있을 테니까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들. '추 패밀리'가 모였다>
우승하고 많은 사람들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 까지 올 수 있게끔 도와준 분들이었죠. 가장 먼저 떠올린 분은 부산고 시절 야구에 대해 눈을 뜨게 해주셨던 고 조성옥 감독님입니다. 만약 감독님께서 살아계셨더라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요. 생존하셨다면 미국에서 감독님과 함께 우승의 기쁨을 만끽했을 겁니다. 그리고 비록 1년 여 밖에 인연을 맺지 못했지만 불미스런 일로 생을 마감한 조현길 대표팀도 생각이 났습니다. 한국에서 제 매니지먼트를 담당하셨는데 2년 전 일찍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손 닿으면 제가 만날 수 있는 사람보다 손을 내밀어도 만날 수 없는 분들이 더 많이 그리웠습니다. 분명 제가 경험하고 있는 일들을 진심으로 좋아해주셨을 테니까요.
‘이달의 선수’ 상은 클리블랜드 이후 두 번째 수상인데, 솔직히 그때보다 지금 느끼는 감동이 훨씬 깊고 진한 것 같습니다. 올시즌이 반전 인생이라 더 그런 감정이 생기는 거겠죠.
올시즌을 치르며 개인적으로 인생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아무리 좋은 일이 있다고 해서 그게 전부가 아니듯, 아무리 나쁜 일이 생겼다고 해도 그 또한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 프린스 필더나 조쉬 해밀턴, 미치 모어랜드가 부진하다고 해도 누구 탓을 하지 않습니다. 저도 한때는 비난과 비판의 대상이었고, 슬럼프에서 헤어 나올 줄 몰랐으며, 스스로 제가 바보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으니까요. 이름이 있는 선수들은 기다림을 갖고 지켜봐주면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온다는 걸 전 믿고 있습니다.
내일부터 홈에서 블루제이스와 3,4차전이 펼쳐집니다. 욕심 같아선 3차전을 잡고 일찌감치 챔피언십시리즈 진출을 확정 짓고 싶은데 그게 과연 현실로 이뤄질까요? 야구 전문가들은 또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승리를 점치겠죠? 디비전시리즈 1,2차전을 치르며 느낀 점이라면 플레이오프는 팀 전력도 중요하지만 어느 정도의 운도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전 우리의 운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직접 확인해보고 싶습니다.
<다른 말 필요 없다. Go Rangers!>
* 이 일기는 추신수 선수의 구술을 정리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