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를 맡은 노종 2
(창 24: 1-49)
주요내용 - 성령론
설교형태 - 영적비유설교
자료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주소 - http://cafe.daum.net/agaser
지난 시간에 이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아브라함의 노종이 하란으로 이삭의 신부감을 구하러 간 사건은 성령께서는 택한 자를 구원하셔서 예수님의 신부 삼으려 하심을 예표한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보기에 이렇게 하심에는 여러 가지 난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무지와 불신와 거역입니다. 무지란 사람들이 그 축복된 자리를 모른다는 것이고, 불신이란 가르쳐 주어도 경험치 못한 것이니 믿지 않는다는 것이고, 거역이란 믿어도 그 좁고 험한 길을 가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죄인들의 영적 상태입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성령께서는 이 모든 것을 극복하시고 죄인들을 예수님 앞으로 능히 인도하십니다. 오늘 계속되는 아브라함의 노종의 이야기를 통해 그 내용을 말씀드릴 때 신앙의 정상까지 따라가실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럼 죄인을 예수님께로 인도하시는 은혜는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의 선재공작이 있으십니다.
24:7에 “그가 그 사자를 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예비하심이 어떻게 나타납니까? 이삭의 아내 될 처녀의 마음에 호의로 나타납니다. 14절에 나에게 극진한 호의를 베푼 처녀가 이삭을 위해 하나님이 정하신 자인 줄 알겠다는 아브라함의 노종의 기도와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택한 처녀의 마음에 호의로 가득하게 하십니다. 그 호의가 얼마나 크든지 아브라함의 여러 종들은 물론 그 깊은 우물에까지 겸손히 내려가서 물 많이 마시기로 유명한 약대 그것도 열 필의 약대들에게 물을 다 먹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미리 앞서 가셔서 준비된 마음을 만드십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허무를 느끼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혹은 사업에 실패해서 혹은 질고를 통해서 삶에 방황하다가 혹은 더 어려운 일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다 하나님의 자녀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에요. 그래서 그 때 사람들이 그토록 거부하던 마음의 빗장을 풀고 호의적으로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약대에게 물을 먹이고 먹이듯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합니다.
저 역시 예수 믿기 전 초등학교 때 벌써 인생의 허무와 철학에 빠져 심히 방황했습니다. 중학 시절에는 죽지 않는 방법은 없는가 하고 그 어린 것이 한 뼘 두께가 되는 의학 사전을 몇 차례나 읽었습니다. 그랬기에 나중 복음을 전도 받았을 때 온전히 아멘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겉으로 보기에만 아무런 일이 없었을 뿐이지 누구든지 양상은 다르나 이 과정을 겪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막10:24-27에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노종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의 마음을 다 준비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선재공작이셔요.
2. 하나님께서 성령의 은혜와 은사를 주십니다.
24:22에 “약대가 마시기를 다하매 그가 반 세겔 중 금고리 한 개와 열 세겔 중 금 손목고리 한 쌍을 그에게 주며” 그랬습니다.
이 말씀이 리브가의 마음을 완전히 열도록 한 동기입니다. 리브가에게 말로만 하면 어떻게 믿겠습니까? 믿는다 해도 아무 선물이 없으면 재미없어 누가 따라가려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노종 엘리에셀이 여러 종들과 함께 와서 열 필이나 되는 약대에 보물을 가득히 싣고 와서 리브가에게 금고리와 쌍으로 된 금 손목고리를 줍니다. 알다시피 약대는 강인한 동물이어서 한 마리당 평균 300kg(최고 600kg까지 짐을 운반함)의 짐을 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여자분들, 재벌 쯤 되는 부잣집에서 가자하면 싫어할 사람 어디 있습니까? 또 여성 치고 패물을 싫어하는 사람 어디 있습니까? 당시 근동인들 특히 베드윈족들은 치장을 잘 할수록 미인으로 보고 그래서 치장물을 아주 좋아했다고 합니다. 더구나 여자에게 이토록 최선을 다하는 집안이라면 호감 가지 않을 수가 있나요?
이 여인들의 심리를 잘 알아야 합니다. 어느 교회에 청년들이 결혼하려고 신부감을 원하는데 보니까 다 떨어진 작업복에 고물 자전거 타고 다닙니다. 그래서 제가 멋있는 청년이 세단을 타고 다니면서 찾아도 어려운데 먼지 나는 작업복에 고물 자전거 타고 다니면서 신부감 찾느냐고 지적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요즘 같은 좋은 세상 잘사나 못사나 자동차 없는 사람 없는 세상인데 젊은 사람이 얼마나 콱 막혔으면 자동차도 타고 다니지 못하면서 신부감을 찾느냐 그 말입니다. 누가 그런 사람 따라가려고 하겠습니까? 아무리 집에 돈이 많을지라도 이런 구두쇠 같고 여자들의 심리도 모르고 꽉 막힌 그런 사람에게 누가 따라가려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들을 부르실 때 그냥 부르지 않으셔요. 그 마음 다 빼앗을 수 있도록 귀한 성령의 은사들을 주시면서 부르십니다. 은사란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열 필의 약대 즉 10이 만수요 온전수요 구비수요, 그 열필의 약대에 보물을 가득 실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기 위해서 온갖 은혜와 은사를 성령으로 우리에게 가져다 주시고 계심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천군천사와 지상의 수많은 종들을 보내셔서 하늘의 부요를 맛보게 하시고 성령의 은혜와 은사를 주셔서 우리의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끄십니다. 참으로 멋쟁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노종이 금고리를 주고 금손목고리를 주었는데 금고리는 무엇일까요? 먼저 금이란 신성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이 두 가지가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금고리는 47절을 보면 코고리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베드윈족들은 왼쪽 콧등을 뚫어 코고리를 했습니다. 저는 이 두 가지 고리를 내적인 은혜와 외적인 은사로 봅니다. 즉 코고리는 내가 주인의 것이라는 표시이듯 우리 마음을 사로잡으시는 내적인 은혜를, 손목고리는 아름다운 봉사, 그리고 쌍은 증거의 수로서 우리를 도우시고 여러 가지 증거를 보여주시는 여러 가지 은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생활 잘하려면 하나님의 은혜와 은사를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부패한 인간을 사람 힘으로 뜯어 고친다고 되는 것 아니고 은혜와 은사를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는 은혜와 은사 즉 성령의 내적 충만과 외적 충만이 있습니다. 내적 충만이 생명적이요 인격적인 변화를 주는 것이라면 외적 충만은 이적과 표적과 사역을 위해서 주시는 외적인 도우심입니다. 흔히 이것을 ‘프레레스’와 ‘프레레오’라는 용어로 설명을 합니다. 프레레스는 성령의 외적 충만을, 프레레오는 성령의 내적 충만입니다. 그 동안 우리 한국교회는 프레레스에 치중해 성령의 은사운동에 힘썼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은사를 주신 목적을 몰라 은사를 목적 삼고 거기 안주하여 열매도 없고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겨나자 지금은 은사의 목적을 찾아 프레레오로 돌아서고 있습니다. 이것을 흔히 영성운동이라는 용어로 부릅니다.
이 은혜를 주시는 유형에 따라서는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은 은사가 앞서고 어떤 사람은 내적인 면이 더 앞서고 어떤 사람은 두 가지가 균형을 이룹니다. 초대교회의 경우 이 두 가지가 복합적으로 균형 있게 임했습니다. 이것이 가장 이상적인 형태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너무 조용하기만 해도 안 되고 혹은 항상 불로 불로 소란하기만 해도 안 됩니다. 교회는 말씀도 있고 불로도 있고 이것을 적절히 잘 배치해야 합니다.
제 생각에는 어느 때나 말씀과 기도와 찬양은 있되 주일 낮에는 공과도 있고 설교도 있는 말씀 중심이면 좋겠고, 주일 오후에는 찬양 중심, 그리고 삼일기도회는 본래 선교사님들이 기도회를 만든 목적대로 기도중심이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상이 정규 예배 프로그램입니다. 그 외에도 더 깊은 은혜를 사모하는 분들을 위해서 따로 전문적인 성경공부반을 만들거나 철야기도회나 춤추며 찬양하는 경배와 찬양 등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프로그램들이 한 주간 동안에 적절히 배치되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변함없는 원칙은 프레레오와 프레레스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성령의 내적 충만과 외적인 충만을 받을 때 우리가 갈등 없이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일시에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3. 계속적인 은혜로 완고한 마음이 깨드려져야 합니다.
24:33에 “그 앞에 식물을 베푸니 그 사람이 가로되 내가 내 일을 진술하기 전에는 먹지 아니하겠나이다 라반이 가로되 말하소서” 그랬습니다.
본문은 노종이 자기 임무 완수를 성실히 완수하기 위해서 리브가의 오빠 라반에게 그 동안의 모든 일을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왜 이렇게 똑 같은 내용을 또 다시 더 자세하게 반복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더욱 증가 되는 그리고 반복적인 말슴과 성령의 은혜가 필요함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여기 라반의 등장은 아마도 아버지 부두엘이 나이 많아 전권을 그에게 맡겼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합니다. 어쨌든 욕심 많고 완고한 라반의 등장하는 것은 그 뜻하는 바가 큽니다. 그가 아브라함의 종들을 환대하는 것은 사실 친척이여서라기보다 돈에 매료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동생을 주긴 주겠지만 속히 보내지는 않겠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라반은 완고한 우리 심성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받아 계속하여 말씀을 사모하고 마음의 문을 열긴 여는데 100% 다 열어드리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마음 다 드려 하나님께 순복하면 얼마나 좋아요? 그렇다고 안 드린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겠다는 의미는 확고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리고 성령의 은혜와 은사를 경험하고도 하나님께 받은 그 은혜 보다는 덜 엽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은혜를 늘 소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라반이 예절을 갖춘 간곡한 노종의 말과 당사자인 리브가가 나서는 통에 어쩔 수 없이 보내고 말지요. 이처럼 하나님의 계속되는 은혜는 결국 우리의 완고함을 깨뜨리시고 온전히 주님을 따르게 하시고 만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얼마나 귀한 진리입니까? 어떤 종교 심리학자가 성경이 말씀하는 이런 내용을 스스로 말할 수 있을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역사적인 사건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사 온전한 자기 사람 만드시려는 우리 이야기입니다. 진실로 두 손 들고 예수 믿으시고 성령의 은혜와 은사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완고함이 따 부수어지도록 온전히 은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의 아름다운 신부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