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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느끼는 영봉(靈峰)
전호준
2017년 5월 9일 화요일 어느 날보다 일찍 잠이 깨여 밖으로 나왔다.
잔뜩 찌푸린 회색 하늘에 궂은비가 하염없이 내리고 있다. 하필이면 오늘, 나도 모르게 마음이 우울해지고 걱정이 된다.
정보화 시대, 실시간 기상정보가 손안에 있지만 그래도 저녁 뉴스 끝자락 기상정보는 빠짐없이 보는 편이다. 완전 백수가 기상정보는 무슨 씨잘 데 없는 관심인가 하겠지만, 지난 농사꾼 시절 배어버린 습관 때문인지 모르겠다.
매월 둘째 주 화요일, 오늘은 건우 한마음 산악회 산행 일이다. 박아둔 말뚝이라 어쩔 수 없는지 비가와도 강행한다는 연락이다. 전국적으로 비가 내린다는 예보에 망설이던 중 함께 했으면 좋겠다는 회원님의 우정 어린 권유에 일단 참여하겠다는 문자를 보내고 말았다.
산행도 산행이지만 오늘은 나라의 앞날에 명운이 걸린 질게 터진 대통령 선거 날이기도 하다. 혹여 하는 생각에 지난주 수성 못 산책길에 두산동 사무소 투표소에서 사전 투표라는 편리한 선거법에 따라 일찌감치 투표는 했다. 아무런 의의(意義)도 느끼지 못한 채 그저 국민 된 도리로 주권행사를 했을 뿐이다.
사상 초유 탄핵이란 격랑 속에 촛불이니 태극기니 온통 나라가 들끓었다.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파면이란 방망이 소리 한방에 이미 모든 것이 끝났다. 뒤집어진 운동장에서 벌어지는 경기라 무관심에 흥미를 잃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장미 대선이란 미명(美名) 아래 장밋빛 공약을 내건 사상 초유 15명이란 많은 구국용사들이 저마다 출사표를 던졌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12척 배보다 3척이나 많은 예비 선장들을 보며 이렇게 국가와 국민을 위해 충성 봉사하겠다는 애국자가 많은가? 하는 생각에 마음 한편 든든하기도 하다.
계획된 산행보다 나라의 지도자를 뽑는 경사스러운 날 하늘이 울고 있으니.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우울해진다. 천문 지리도 주역 팔괘도 점술사도 아니다. 하늘을 우러러 느낀 것은 이미 정해진 조국의 앞날을 하늘은 예견하고 있는 것 같아서다.
일설하고 애를 태우던 강원도의 큰 산불이 대선에 맞추어 내리는 비에 진화되고 잔불 걱정을 덜게 되니, 그나마 이번 대선이 속 타는 민심을 시원하게 해갈해주는 행운의 비가 되어주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우중의 여인이 아닌 우중의 산행도 현실도피 차원에서 그런대로 묘미가 있을 것 같다. 서둘러 우의도 배낭에 챙겨 넣고 작은 우산을 들고 집을 나섰다.
아침 8시 10분 전 어린이 회관 앞에 도착하니 벌써 대절차가 기다린다. 언제나 일찍 나와 반가이 맞아 주시는 산악회 총무님의 수고에 감사드린다. 누군가의 봉사와 희생이 여러 사람을 기쁘게 한다. 십 수 명의 대선 주자들도 이런 마음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오전 9시가 가까워 도심을 벗어나 한동안 달리니 논공 휴게소다. 빗속에 먹어보는 국 밥맛은 여전하다. 차는 어느덧 광주~대구 고속도로를 달린다.
영, 호남의 인적 물적 교류는 물론 소통을 통한 영, 호남이 하나가 되도록 81년도 착공, 올림픽 이전 개통한 88올림픽고속도로라 부른 최초 시멘트로 포장된 왕복 2차선 고속도로였다. 지금은 왕복 4차선으로 확장, 광주~대구 고속도로 그 명칭이 변경되었지만 대선 정국에서 바라본 동서화합은 아직도 도로 길이만큼 요원한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뿐이다.
빗물이 흐르는 흐릿한 차창으로 스쳐 지나가는 산천을 바라본다. 자욱한 운무에 가려진 산자락에 아카시아 꽃들이 오월의 녹음 속에 설경처럼 이어졌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아름답다는 생각보다. 예측할 수 없는 나라의 앞날이 산을 뒤덮고 춤추듯 변화하는 안개처럼 오리무중이다.
오전 11시가 조금 지나 오늘 산행 예정 코스인 바래봉 주차장에 도착했다.
백두에서 시작한 백두대간이 나라의 허리 태백을 거처 남쪽 지리산에서 그 웅장한 똬리를 틀고 한반도를 떠받치고 있는듯하다.
비가 오는 날씨에도 몇 대의 관광버스가 주차장에 비를 맞고 서 있는 걸 보니, 부질없는 대선을 도피한 사람이 나만은 아니라는 착각에 빠져든다.
헌 가죽에 빗물이 스며들까? 우의로 중무장하고 산행 길에 올랐다. 길 왼편 넓게 펼쳐진 철쭉꽃은 늦게 찾아준 나그네를 원망하듯 시든 꽃잎을 떨구지 못하고 눈물을 머금고 있다. 미안하다는 생각보다, 너를 보려 수 백리 빗길을 달려온 나그네를 기다려 주지 않는 네가 더 야속하다. 적반하장 아쉬움에 해본 소리다.
비를 핑계 삼아 바로 오르지 않고 왼쪽 임도를 따라 넓은 길을 선택했다.
자연석을 바닥에 깔아 포장까지 해놓았다. 등산객의 편의도 편의지만 폭우에 도로 유실 방지를 위한 방편인 것 같다. 아무튼 정말 살기 좋은 세상이다. 십 수 년 전 이탈리아 폼페이에 여행 갔을 때 화산재로 묻혔던 폼페이 시가지에서 본 자연석 포장도로가 연상된다.
비는 쉬지 않고 오락가락 모처럼 찾아온 손님을 귀찮은 듯 맞이한다. 높이 오를수록 늦둥이 철쭉들이 들쑥날쑥 피어 객들을 반긴다. 명색이 철쭉 산행인데 중년에 가까운 철쭉꽃을 배경으로 몇 컷을 휴대폰에 담았다.
바래봉 정상에 오르면 오늘의 목적 철쭉꽃을 볼 것 같은 기대감에 무거운 발걸음을 재촉했지만 가로막는 빗줄기에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적당한 장소에 자리를 잡고 빗속에서 먹어보는 도시락은 비를 맞으면 모내기하던 그 옛날 빗속 점심밥이 생각나게 한다. 비 때문에 바래봉 정상을 코앞에 두고도 산에서 내려와야 하는 아쉬움도 적지 않다.
산 아래 자그마한 운지사라는 절에 들렸다. 여느 절 작은 암자보다 못한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찰이다. 그래도 운지사란 이름은 아마도 백년이 넘는 긴 세월 모진 풍파를 이기고 구도의 길을 걸어온 부처님 자비인 것 같다.
지리산 허브 밸리 내 자생 식물관과 생태 체험관을 둘러보았다. 다양한 식물과 희귀한 곤충들의 표본이 설명과 함께 잘 정리되어 있다. 그 옛날 초등시절 방학 숙제를 한다고, 풀을 뽑아 책갈피에 끼워 말리고 잠자리며 매미를 잡아 가시를 꽂아 만들던 식물 채집 곤충 채집하던 생각이 난다. 지리산은 정말 자연 생태계의 보고로 잘 보존하고 관리해야 할 귀중한 자산이다.
밖으로 나왔다. 눈을 들어 비 내리는 영봉(靈峰) 지리산을 바라본다. 저 멀리 병풍처럼 나를 감싼 지리산 신령스러운 봉우리들이 흐르는 비안개에 사라졌다 보이고, 보이는 듯 가려지길 반복하며 희뿌연 안개비에 속절없이 젖고 있다.
60여 년 전 동족상잔의 슬픈 역사의 현장에서 심한 몸살과 비극을 온몸으로 겪은 지리산이 흐느껴 울고 있는 것 같다. 이런 비극의 역사가 두 번 다시 되풀이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 오늘 치러지는 대통령선거에서 진정 나라와 국민만을 바라보는 훌륭한 지도자가 선출되어, 제발! 온 국민의 박수와 환호 속에 임기를 마치고 청와대를 나오는 대통령이 탄생되길 영봉 지리산을 향해 합장배례 염원하는 심정으로 차에 올랐다.
2017. 5. 9
첫댓글 우중에 오르는 산행이라 다소 마음이 무거웠지만 그나마 빗님이 많이 도와 주어 보람된 산행이 된 것 같습니다.
대선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떨쳐 버릴 수는 없었지만, 지리산 영봉이 보우하사 하산주까지 즐겁게 하고 좋은 하루가 된 것 같습니다. 그날의 기분과 일정을 섬세하게 잘 표현한 글, 공감하면서 잘 읽었습니다.
한겨울 눈밭에서, 한여름 소낙비를 맞으며 한 등산이 더욱 오래 추억이 갑니다. 비록 은퇴하셨어도 나라사랑 하시는 선배님의 마음이 들어나는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지리산 바래봉 우중 산행은 궂은 날씨에도 고고한 산의 자태를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여러 회원들과 함께 한 보람찬 산행이었습니다.
등산을 할 때마다 느끼는 건, 같은 산이 늘 그자리에 있는데도 갈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는 것이었습니다.
계절에 따라 다르고, 날씨에 따라 다르고, 동행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고....
그날 빗속을 함께 등산하면서 참 즐거웠습니다.
등산가는 날이 대선 날이라고 하셨습니다. 우울하시다는 말씀 조금씩은 다 느꼈으리라 생각됩니다. 산불도 그 큰 산불이 선거전에 그렇게 많이 태웠으니 더욱 무거운 맘이 나라를 점치는 듯 불안했습니다.태극기와 촛불의 대결, 아니 누가 되더라도 행복 보다는 불안하지 않는 나라에 살도록 해주는 지도자가 뽑히기를 바랬습니다. 잘 하도록 빌 뿐입니다.
그날 비가 내려서 목적지에 가보지 못한 것이 뭇내 아쉬웠는데, 비오는 날을 해학적으로 감상할 수 있는 여유도 부릴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이 마음이 일체유심조입니다. 비가오면 오는데로 날이 개이면 개인데로 좋게 해석해보는 여유가 느껴집니다. 그날 즐거운 산행이었습니다.
정상을 눈 앞에 두고 정말 아쉬운 우중의 등산을 그래도 무사히 선생님의 댁까지 오실 수 있어 다행입니다.나라운명의 전환점인 대선일 저도 참 우울했 습니다. 공약이 남발한데 잘 되길 바랄뿐입니다.좋은글 공감하며 잘 앍었습니다.
비오는 날 산행. 어쩌면 더 잊을 수 추억으로 남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
바래봉 정상까지는 비가 내려 못가셨지만 더 큰 자연의 소리를 듣고 오셨습니다. 영봉이 흐느끼는 비오는 날의 산행을 그림처럼 묘사해주셔서 잘 읽었습니다.
글속에 대선과 비오는 우중산행, 영호남등 다각적으로 잘 묘사하셨습니다. 망설이는 선생님들을 산행에 동참시키는데 일조를 하여 미안한 마음이 많습니다. 그러나 극한상황에서 등산은 오랫동안 기억되리라 위로하며 잘 읽었습니다.고맙습니다.
우산을 쓰고 향교에서 주권행사를 할 무렵 선생님은 비오는 산자락을 오르셨네요. 뜻깊은 우중속 산행의 이모저모를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