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대
등대는 바다를 건너지 않는다. 파도를 가르지도 않고, 항구를 떠나지도 않는다. 그저 한자리에 서서 밤을 밝힌다. 움직이지 않지만 가장 먼 길을 안내하는 존재, 그것이 등대다.
여행길에서 만난 등대 앞에 오래 발걸음을 멈추었다.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묵묵히 서 있는 하얀 등탑은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 침묵은 수많은 이야기보다 깊었다. 밤마다 불을 밝히며 이름 모를 배들을 무사히 항구로 이끌었을 시간들이 그 안에 고스란히 쌓여 있었다.
등대는 누구에게도 박수를 받지 않는다. 배가 무사히 돌아와도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폭풍우가 몰아쳐도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언제나 같은 곳에서 같은 빛을 비출 뿐이다.
나는 문득 사람도 등대를 닮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세상은 늘 앞에 나서는 사람을 기억한다.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 화려한 성공을 거둔 사람에게 시선이 머문다. 그러나 누군가의 삶을 오래 비추어 준 사람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부모가 그렇고, 스승이 그렇고, 평생 곁을 지켜 준 친구가 그렇다. 그들은 등대처럼 자기 삶을 태워 다른 사람의 길을 밝혀 준다.
빛은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등대의 불빛도 바다를 떠도는 배를 위해 켜진다. 자신의 어둠을 밝히기보다 누군가의 길을 비추는 일에 평생을 바친다. 그래서 등대는 가장 외로운 곳에 서 있으면서도 가장 따뜻한 존재인지 모른다.
살아오며 나에게도 여러 등대가 있었다. 길을 잃었을 때 조용히 손을 잡아 준 스승,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나라고 등을 토닥여 준 부모, 말없이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준 벗. 그들은 정답을 알려 주지 않았다. 다만 어디쯤 길이 있는지 빛으로 알려 주었을 뿐이다. 생각해 보면 좋은 인생은 앞에서 끌어 주는 사람이 아니라 뒤에서 비추어 주는 사람 덕분에 만들어진다.
등대는 배를 대신 항해하지 않는다. 길을 비출 뿐이다. 결국 키를 잡고 파도를 건너는 것은 선장의 몫이다. 삶도 그렇다. 누군가 대신 살아 줄 수는 없다. 그러나 방향을 잃지 않도록 작은 빛 하나가 되어 줄 수는 있다.
철학자들은 삶을 선택의 연속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선택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다. 아무리 빠르게 달려도 방향을 잃으면 길을 잃는다. 반대로 천천히 걸어도 방향이 바르면 언젠가는 목적지에 닿는다. 등대는 속도를 알려 주지 않는다. 오직 방향만 알려 준다.
바다는 날마다 얼굴을 바꾼다. 잔잔한 날도 있고, 성난 파도가 이는 날도 있다. 그러나 등대는 날씨에 따라 자신의 빛을 바꾸지 않는다. 맑은 밤에도, 비바람 부는 새벽에도 같은 자리에서 같은 빛을 지킨다. 사람의 신념도 이와 같아야 하지 않을까.
형편이 좋을 때만 친절하고, 여유가 있을 때만 따뜻한 것은 진심이라 하기 어렵다. 어려운 순간에도 품위를 잃지 않는 사람, 흔들려도 끝내 자기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야말로 한 사람의 등대가 된다. 나이가 들수록 등대가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젊은 날에는 배가 되고 싶었다. 세상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고 싶었고, 누구보다 멀리 항해하고 싶었다. 그러나 세월은 내게 또 다른 꿈을 가르쳐 주었다. 누군가의 길을 밝혀 주는 사람이 되는 일도 얼마나 귀한 삶인가를.
빛은 스스로를 태울 때 비로소 생긴다. 촛불도 자신을 녹이며 세상을 밝히고, 별도 먼 우주에서 긴 시간을 견디며 밤하늘을 비춘다. 등대 역시 자신의 시간을 태워 수많은 생명을 지킨다. 세상을 밝히는 모든 빛에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희생이 숨어 있다.
해 질 무렵 등대 앞을 떠나며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붉은 노을이 바다를 물들이고 있었고, 등대에는 하나둘 불이 켜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둠이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일을 시작하려는 모습이 경건하게 느껴졌다.
문득 깨달았다. 인생의 마지막에 우리가 남겨야 할 것은 얼마나 멀리 갔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오래 누군가의 길을 밝혀 주었는가라는 사실을. 그래서 등대는 오늘도 말없이 서 있다.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 무사히 삶이라는 항구에 닿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