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과 성경
-소설 ‘큰 바위 얼굴’과 성경과의 대비(對比)
어느 날 스승님은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그 내용은 첩첩 시골 산골에서 복음을 전해 달라는 주민들의 염원을 담고 있었다. 그래서 스승은 제자 세 사람을 골라 보냈다. 첫 번째 길에서 어느 왕국의 공주가 병에 걸려 있었다. 그 병을 고치는 동안 공주와 정이 들어 공주와 결혼하고 거기에 머물렀다. 두 사람이 어느 마을에 지나는데 전염병이 돌아 고치기 위해 한 사람이 남았으며 또 한 사람은 길을 떠났다. 마지막 한 사람이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어떤 일을 시작해서 마치려면 여러 난관이 많이 봉착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도 여럿이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것은 그런 모습이 아닐까.
어쩌다가 우리도 한 통의 편지를 받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은 하느님께서 부르시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며 관심을 기울이며 살고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배우고 경험한 것, 지식이나 체험을 이웃을 위해서 쓸 수 있는가. 우리 사회와 교회는 고령화되고 있다. 우리가 배운 지식을 그들에게 나눔을 주는 것도 배운 우리의 몫이다. 그래서 본당에서 노인 사목으로 성경 대학의 문을 열고 개강을 시작했으며 행복과 건강을 주제로 하고 있다.
성서에서 에덴의 뜻은 기쁨과 환희이며 행복이다. 우리는 그 행복을 잃어버렸다. 그 행복을 찾기 위한 노력이 구원 행위이다. 그래서 성경 대학에서 영적인 양식을 얻고 또한 트레킹과 파크골프 날로 조직되어 있다. 이 세 개가 통합되어 운영하고 있으며 힐링과 건강, 영적인 양식으로 행복을 얻고 있다.
오늘 강의는 ‘인문학과 성경’인데 먼저 작품의 줄거리와 작가가 말하고 있는 언어와 이 작품의 모티브가 되는 성경의 언어를 비교하며 또한 교회의 가르침을 병행해서 말하고자 한다. 이 강의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주신 인간의 변하지 않는 가치를 성찰하고 그 가치를 실천하는 것이다. 그것은 삶의 언어로 표현하면 행복이고 신앙의 언어로 구원이다.
너세니얼 호손의 단편소설 ‘큰 바위 얼굴’에서 주인공 어니스트의 이야기다. 이것은 마태복음 4장 1절에서 11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광야 유혹에서 모티브를 얻어서 썼다고 한다. 그래서 인간의 욕망과 참 행복이라는 주제이다. 큰 바위 얼굴에서 나오는 세 인물과 예수께서 광야에서 받은 세 가지 유혹을 비교한다. 성경 말씀은 문학, 미술, 음악, 조각, 건축 등 모든 예술 작품에 영감을 주고 있다.
큰 바위 얼굴처럼 예부터 사람의 형상을 닮은 큰 바위 얼굴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었다. 대부분 전설에는 그 시대의 영웅이 있다. 전설에서 민초의 삶을 실제 경험을 반영하기 때문에 사실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래서 행복한 결말보다는 비극적인 결말로 끝나는 경우가 있다. 비극적일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애틋한 사랑, 안타까움을 안고 있다.
작품 속에는 고난을 겪는 민초들과 결핍을 채워줄 강한 힘과 이에 따르는 유혹이 있다. 그리고 세상을 구해 줄 인물에 대한 깨달음과 전설 속에 그 마음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예수님 시대에도 그랬으며 모든 시대, 우리 시대에도 그랬다. 홍길동 이야기, 임꺽정 이야기, 녹두장군 이야기 등 모두 세상을 구해줄 사람을 기다렸다. 해서 이 작품을 통해서 인간의 욕망이 어떤 것인지,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인생의 가치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를 알아본다.
예언의 작품 속의 이야기와 성경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비교한다. 큰 바위 얼굴이라고 불리는 얼굴 모양의 바위가 있었으며 언젠가는 이 마을에서 그 바위와 닮은 위대한 사람이 나타날 것이라는 예언이 대대로 전해져 내려왔다. 이와 비교하여 성경에는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가장 작은 고을이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
소년 어니스트는 목수 일을 하면서 어머니가 들려주신 그 예언을 굳게 믿으며 큰 바위 얼굴과 닮은 인물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성경에는 어머니 마리아는 천사가 들려준 하느님의 증언을 가슴 깊이 간직했다. 나자렛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예수는 목수 일을 배우면서 소년 시절을 보냈다.
어니스트가 첫 번째로 만난 인물 개더골드는 막강한 재력가이며 두 번째는 엄청난 명예를 얻은 전쟁의 영웅이며, 세 번째는 세상의 권력을 가진 정치가였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세 가지 유혹을 받았다. 돌을 빵으로 만드는 유혹, 성당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유혹, 높은 산에 올라 절하면 세상 모든 것을 주는 유혹이다.
어니스트는 마지막으로 시인을 만난다. 그러나 시인도 그가 기다렸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마을 사람들에게 연설하는 어니스트를 보고 시인은 외친다. “보시오! 어니스트가 저 바위 얼굴과 똑같지 않나요.” 하지만 자신은 아니라며 훌륭한 인물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라 했다. 성경에도 마찬가지로 세례자 요한은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며 저분 예수야말로 하느님의 아들 어린 양이라고 증언했다.
어니스트는 세 사람을 만나서 그들이 하는 행위를 보고 실망에 차 있었을 때 큰 바위 얼굴은 ‘실망하지 마라’고 위로하며 반드시 나타난다고 말해 주는 것처럼 들렸다. 세월이 지나 게드골드는 초라하게 몰락했으며, 비참하게 죽었다. 소년은 여기에서 재물에 대한 인식이며, 재물은 탐욕을 가져다줄 뿐 결코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님을 인식했다. 두 번째 만난 전쟁 영웅은 명예로 지혜롭지 못했으며, 세 번째의 정치가고 권력의 그림자만 비칠 뿐 마찬가지였다.
예수님은 광야 유혹을 마치고 첫 번째로 산에 오르시어 ‘진복팔단(眞福八段)’의 산상 설교를 하셨다. 사람이 살아야 할 참된 길은 탐욕과 명예와 권력이 아니라 나눔과 겸손의 관용이다. 어니스트가 한 설교도 예수님처럼 그런 내용을 담지 않았을까. 그렇게 살면 누구나 큰 바위 얼굴을 담는 인물이 될 수 있다고 말이다.
다음은 성경 이야기이다. 에던 동산의 유혹과 광야에서의 유혹이다. 에덴과 광야에서 첫 번째 유혹은 열매나 빵(재물)의 욕망이다. 재물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그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지만, 인간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고 욕심과 이기심을 자극한다고 한다. 따라서 재물은 개인의 절대적인 권리가 아니고 하느님의 계획에 따른 필요와 수단으로 다루어야 한다.
두 번째는 명예이다. 성전 꼭대기에서 몸을 던지라는 유혹은 전쟁 영웅의 명예에 대비시킨 것이다. 영예로운 최고의 자리에 앉게 되면 어떤 행위에도 죽지 않을 것이라는 유혹이다. 에덴동산의 열매, 꼭대기에서 뛰어내림이 그런 유혹이다. 거기에 반하여 겸손은 의인이 지닌 기본적 성품이며 자신을 낮춘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권력욕이다. 정치가의 권력은 높은 자리로 오르며 다스림이고, 성경의 높은 산에서 아래로 내려옴은 낮은 자리로 겸손의 자리로 서로 대비시키고 있다.
예수님과 작품에서의 결정은 유혹의 물리침이다. 유혹은 보상이 약속되기에 쉽게 물리치지 못한다. 최고의 자리에서 하나하나 상처를 입으며 사라지게 된다. 우리는 현실에 상주하여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다. 무엇을 보고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삶의 얼굴과 인생이 달라진다.
그래서 삶의 가치를 소유에 두느냐 아니면 존재에 두느냐,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행동 양식이 달라진다. 얼굴은 인생의 이력서라고 한다. 살아온 내 이름이 내 몸속에 기록되고 보관되며 하나의 얼굴이 비로서 완성되어 간다. 우리가 행복하게 살면 수많은 클로버 속에 네 잎 클로버가 숨어 있듯 행운이 들어있다. 해서 우리가 존재의 삶을 살다 보면 그 안에 소유하는 삶의 가치도 누리리라.
이제 우리가 그 스승이 받은 편지처럼 편지에 답을 해야 할 차례이다. 우리가 배우고 익힌 것을 나만이 아닌 어떤 대상에게 활용이나 적용을 해야 한다. 참 행복은 재력, 명예, 권력이 아니라 이웃과 함께 나누는 데 있다. 복음 말씀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사랑과 행복을 위해 그의 외아들을 보내주셨으며 그를 믿는 사람은 영생하며, 아들을 보낸 이유는 심판이 아니라 구원(행복)을 위한 것이다.(요한 3,16-17)
신학대학원 동문 유스티노회. 동문 홍준표 비오(문화 영성학 박사)강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