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3]조선후기 ‘괴짜화가’ 최북崔北을 아는지요?
<조선후기 회화사繪畵史>하면 누구라도 정선鄭歚(1676~1759)과 단원丹園 김홍도金弘道(1745~?),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1758~?),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1843~1897) 등 ‘삼원三園’을 가장 먼저 떠올리겠지만, 거기에 그 이름을 빼면 말이 안되는 최북崔北(1712-1786?)이라는 괴짜화가를 아시는 이는 많지 않을 듯싶다. 하지만, 그의 몇 가지 일화를 들으면 ‘아하- 그 사람’ 하지 않을까.
중인 출신인 그에게 양반이 강압적으로 그림을 그려달라고 하자, “내가 나를 버린다”며 송곳으로 제 눈을 찔러 '애꾸눈화가'가 되었다던가? 그리하여 스스로 귀를 잘랐던 고흐라는 서양화가를 빗대어 ‘조선의 고흐’로 불린다던가? ‘최북’으로 이름을 바꾼 뒤 ‘북녁 북北’자를 파자破字해 ‘칠칠七七’를 자字로 삼았다던가? 술버릇이 심하고 기이한 행동을 일삼았기에 ‘칠칠맞다’는 말이 그에게서 나왔다던가? 금강산 구룡폭포에서 “천하명사가 마침내 죽을 곳을 찾았다”며 몸을 던져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던가? 산수 와 메추리를 잘 그려 ‘최산수崔山水’‘최순崔鶉’으로 불렸다던가? 눈을 좋아해 어느해(1786?) 눈 속에 묻혀 얼어죽었다던가? 자신의 호를 '붓 하나 가지고 먹고 산다'는 '호생관毫生館'으로 지었다던가?
어쨌든, 그의 이름과 작품을 여러 번 듣고 본 적은 있었으나, 그를 기리는 미술관이 전북 무주군 소재지에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활동한 김환태(1909-1944)라는 문학평론가의 <김환태문학관>과 함께 세워져 있다는 것은 최근 알았다(최북 탄생 300주년을 기념한 2012년 개관). 그의 본관이 초계草溪라고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어 흥미가 더 했는데, 본관이 경주이고 무주인茂朱人이라는 기록이 있다니 명백히 잘못 안 것이다. 어쨌든 “종씨 환쟁이인 것같다”며 봄바람을 쐬이게 할 겸 노부를 모시고 일요일인 어제 오후 왕복 150km를 차를 몰고가 작품 40여점을 감상하고 돌아왔다(진품 4점). 무료했던 문화해설사는 최고령 관람객과 그 아들을 반색했다. 커피를 타주며 귀찮을 정도로 어찌나 친절하게 설명해주려고 애쓰던지.
산은 긴 동면에서 깨어나 멀리 연두빛이 은근히 보이고, 물은 얼음이 녹기 시작해 오랜만에 푸른 빛을 드러낸 채 졸졸졸 흐르고 있었다. 완연한 봄날씨, 6일간 재미없는 ‘노치원’에 다니는 97세 아버지는 그림은 몰라도 나들이는 삶에 조금 숨통이 트였을지 모르겠다. 평소 입버릇처럼 “할 일이 없어 사는 게 아무 재미가 없다. 빨리 가야 할텐데, 목숨을 어찌할 수도 없어 큰일”이라며 “새장에 갇힌 새 모냥(모양)같다”고 푸념하는 아버지의 말을 들을 때마다 내 마음도 한없이 답답했으니, 효도도 하고, 그림까지 감상했으니, 이런 것을 일거양득一擧兩得이라고 해야 할까. 흐흐.
아무튼, 최북은 ‘괴짜화가’였던 모양이다. 그와 어울렸던 남공철의 <금릉집> 최칠칠전에는 “어떤 정승이 최북에게 산수화를 그려달라고 하자, 산만 그리고 물은 그리지 않았다. 이에 정승이 괴이하다고 힐난하자 붓을 던지며 벌떡 일어나 ‘이 종이의 여백이 모두 물’이라며 한탄했다”고 기록돼 있는가하면, 조희룡은 <호산외사>에서 “최북의 자 칠칠 또한 기이하다. 향을 피워놓고 깊은 구상에 잠기곤해, 마침내 자기의 뜻으로 일가를 이룬 사람”이라고 했고, 실학자 성호 이익은 일본을 가는 최북에게 한시 3수를 지어주며 부러워했다고 한다. 환쟁이라고 겁박하는 사대부에겐 반항하며 청을 거절하지만, 불우하나 착한 사람들에겐 막걸리 한잔 받고도 그림을 그려주었다는 그가, 평생 가난하게 살다 눈 속에 파묻혀 얼어죽었으니 애석한 일이다.
그런데도 120여의 그림을 남겼으며, 대표작 <고산구곡도> <송음관폭도> <매하쌍치도> <금강전도> 등은 국립중앙박물관, 서울대-고려대박물관 등이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중국의 산수화 대신 조선의 산수을 대담하고 파격적인 진경眞景으로 그려냄으로써 조선후기 회화발전에 이바지한 화가로 오래 기억될 것임을 믿게 됐다.
한편, 1989년 당시 문학사상사 주간 이어령 박사가 우리 문학비평사에 있어 35세에 요절한 김환태金煥泰(호 눌인)의 위상을 제대로 알아봐 <김환태평론문학상>을 처음 제정한 것이리라. 그를 초기 국문학사에서 순수비평문학의 선구자로 부르는 까닭은 ‘구인회’(1930년대 당시 중견작가들인 김기림 이효석 유치진 이태준 정지용 박태원 이상 김유정 등 9명이 만들어 모더니즘 문학활동을 추구한 친목단체) 활동을 하면서 ‘예술지상주의자’임을 자처하고, 정치성이나 사상성으로 경직된 문단에서 순수문학을 옹호하는 순수비평의 씨앗을 띄웠다는 점에서일 것이다. 또한 1936년 그의 결혼때 도산 안창호가 수저선물한 것도 특이한데, 이는 도산과 일본에서 투철한 항일정신으로 교유가 있었던 때문인 듯하다. 실제로 전주고보에 다니며 일본인교사를 쫓아내려는 항일운동에 참여해 보성고로 전학을 했다. 무학여고 교사를 하다 1940년 우리 문학이 친일문학 일색으로 바뀔 것을 예견하고, 폐병으로 요절할 때까지 절필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2004년 그의 60주년 추모문집인 <김환태가 남긴 문학유산>이 간행되었다고 한다.
어제의 교훈: 수많은 지방자치단체가 영양가도 별로 없는 온갖 축제들을 만드는 등 무모한 경쟁을 하는 대신, 그 지역 출신의 예술인(화가, 음악가, 조각가, 서예가, 전각예술인 등)과 문학가들을 발굴하고 부각하여 조명하는 문학관, 미술관 등을 많이 세워, 각박한 우리 현대인의 삶을 기름지게(윤택하게) 하는데 앞장섰으면 좋겠다. 하다못해 믿거나말거나 하는 옛 설화들을 시대적인 상황에서 각색하여 구현하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