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봄날은 간다
그날, 마침 대학 동문회가 청수원 뒤편 삼겹살 집에서 있었다.
2차를 가자는 것을 무시하고 청수원을 찾았다.
몇 년 만에 가보는 동문회였지만, 역시 예전과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의례적인 회장의 인사말과 숨 돌릴 틈도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술잔과 뻔한 대화, 같은 과를 나왔다는 것만으로 강요되는 어설픈 파시즘, 그것은 마치 일본의 골수 우익 제국주의를 닮아 있었다.
그곳에 나라는 존재는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축산업과는 전혀 관계 없이 살아 온 나는, 그곳에서는 영원한 축산인 이어야 했다.
나로서는 차라리 청수원에서 홀로 앉아 마시는 편이 이런 따스한 봄날에는 더 어울리는 편이었다.
이런 날 노래방에서 그들과 어깨를 감싸 안고 술이 취해 악악대며 노래를 부르는 것도 못할 짓이었다.
청수원 뒷마당에 차를 주차시켜 놓고 화장실에 갔다가 뒤편으로 나있는 주방문을 여는 순간이었다.
“형수........미안해요. 잘못했어요. 크흐흑.....”
“왜 울고 그래요? 뭘 잘 했다고......”
“알아요. 안다고요. 잘못 한거 다 안다고요. 그러나 어쩔 수 없었어요. 저 형수를 사랑하잖아요. 흑흑흑........”
“사랑한다고요? 웃기네요. 사랑한다는 사람이 그런 행동을 해요?”
“미안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형수가 자고 있길래.....”
“형수는 무슨 형수예요. 그러고도 형수라고 부를 수 있어요? 형이 알면 어떡 할거예요?”
“형이 형수를 버렸으니, 내가 책임진다잖아요.”
“뭘 책임져요. 삼촌 같은 인간에겐 책임지우기도 싫어요. 그리고 삼촌, 지금 가정을 책임 질 능력이라도 있어요. 삼촌 애도 혼자 겨우 키우잖아요. 그러고도 무슨 사랑한다니 어쩌니.....”
“저 잘할게요. 제발 형수......흐흐흑”
“인간이라면 그럴 수 있어요. 형수라면서 그럴 수 있어요. 사랑한다면서 그럴 수 있어요?
술이 취해서 자는 사람을 깨워서 집에 들어가라고 해야지, 어찌 그렇게 살아요. 저는 삼촌 같은 사람은 지겨워요. 애 아빠에게 질린 것도 모자라서 내가 삼촌하고 살아요?”
“행복하게 해 줄게요. 잘 할게요. 저 지금 하는 직업소개소.....잘 될거예요.”
“누가 모를 줄 알아요. 그거? 술집 애들 등쳐먹는 거 아니예요. 그거?”
“형수 제발....으흐흐흑”
“됐어요. 이제 가세요. 손님들 오기 전에......흐흑”
급기야는 그녀도 울기 시작했다.
남자의 목소리가 귀에 익어 있었다. 누구인가. 굵직하고 쉰 목소리는 사내의 애원 섞인 울음소리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아! 혹시........문을 살짝 열고 가게 안을 보았다. 초등학교 동창이었다. 바로 살인 전과를 가진 바로 그였다.
게다가 그는 그녀 앞에서 무릎까지 꿇고 있었다. 그녀는 얼굴을 감싸고 울고 있었다. 가게 안은 두사람의 흐느낌 소리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경포 호수 옆 도로가에는 벚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가로등이 켜져 있지 않았지만, 벚꽃의 흰색이 주위를 밝히었고 바람에 떨어진 이파리가 반딧불처럼 흩날리면서 춤을 추고 있었다.
호수 면에도 꽃잎은 떠다니고 있었다. 봄이 활짝 피어 있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다시 나와야 했다.
운전을 하면서 무릎을 꿇고 애원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 흉악한 인간이 그런 약한 모습을 보이다니. 그와 그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어쩌다 술이 취해 가게에서 피곤하게 자고 있는 그녀를 그가 겁탈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그런데 사랑한다니. 그에게도 사랑의 감정이 남아 있단 말인가.
그리고 형수라는 말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내가 모르고 있는 사연이 숨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사연은 그렇다고 쳐도 도무지 그가 그녀 앞에서 무릎을 굻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좀처럼 가셔지지 않았다.
“그래서 같이 잤어?”
“같이 자진 않았어요. 그러나 남편이 우는 모습이 불쌍했어요. 아무리 미운 사람이래도 애들 아빠니까요.......”
“그렇지........”
작년 성탄절 다음 날, 전 날 그녀의 남편이 자고 갔다고 그녀가 말했을 때, 난 그렇게 밖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녀의 남편이 자고 가든, 그녀와 같이 잤던 내가 따질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오히려 나는 그녀의 남편이 자고 갔다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졌다. 내가 그녀와 몇 번 같이 잠자리를 했다고 해도, 그녀와 아무리 사랑의 밀어를 수 없이 속삭였다 해도 나는 그녀의 남편에게는 당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아이들의 아버지였고 그녀와 5 년을 연애했었고 그녀 앞에서 십 여 년 이상을 군림했던 폭군이었다.
나는 마치 승용차 트렁크 안의 스페어 타이어처럼 잠시 이용당하는 새털 같은 존재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내가 제시한 시험 기간을 거친 후 그녀의 남편에게 다시 가버린 것이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순리였다.
초등학교 동창인 그가 청수원의 그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모습에서, 문득 그녀의 남편이 성탄절 이브에 그녀의 집에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비는 장면이 겹쳐지기 시작했다.
사내라는 존재가 불쌍해지기 시작했다. 강한 사내일수록, 어쩌면 초등학교 동창이나 그녀의 남편처럼 더 불쌍한 존재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행히 문학이라는 지푸라기를 잡았던 것이다. 문학이 나를 어떻게 구원해 줄지 아직은 모를 일이지만, 적어도 그녀의 남편이나 초등학교 동창처럼 무릎은 꿇지 않을 터였다.
문학은 자존도 강하지만, 얼마나 약삭빠른 존재인지 나는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저히 불쌍한 여자 앞에서 약하게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녀들을 연민이라는 미명하에 철저히 까발리는 일만 남아 있을 뿐이다.
차라리 그들처럼 무릎이라도 꿇을 수 있다면 당당할 것이다. 얼마나 솔직한 일인가.
내가 그녀에게 남편에게로 돌아가라고 한 것을, 처음에 나는 마음이 아팠지만 스스로 대견하다고 위안을 했었다.
그러나 가면 갈수록 글을 쓰면 쓸수록 그것은 솔직하지 못하고 비열한 짓 이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기 싫은 그녀를 강제로 보냈다. 나는 대신에 가정으로 돌아 올수 있었다.
그러나 어찌 보면 명쾌한 해답처럼 보이는 그 일이, 초등학교 동창인 그가 청수원의 그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장면을 보는 순간, 야비하게 느껴졌다.
황사 섞인 바람이었지만 후덥지근해서 차창을 열어야 했다. 꽃잎 하나가 차 안으로 날아들었다. 봄이 흠뻑 다가와 있었다.
청수원에 다시 갔을 때, 그녀는 혼자였다.
“경포에 벚꽃이 활짝 피었어요.”
“네...... 벚꽃 구경 갔다 오셨어요?”
“아니요. 지나다 그냥 보았어요.”
그녀가 맥주 한 병을 들고 내 앞에 앉았다.
“요즘 동창 녀석 자주 와요?”
“네.......좀 전에 들렸었어요.”
그녀는 다행히 거짓말은 시키지 않았다.
“요즘 뭐 한데요?”
“직업소개손가 뭔가 한데요. 다 그렇고 그런 일이죠 뭐”
“그 친구 부인은 있어요?”
“부인이 아마 도망갔데지요.”
“그렇군요.”
“불쌍한 인간이지요. 세상에 어디 근본적으로 나쁜 사람이 있나요. 어쩌다 보니 죄를 진거죠.”
“그렇죠. 인간이란 불쌍한 존재죠. 특히 사내라는 인간들은.........”
그녀와 나는 이런 대화로 그 화사한 봄 날 밤을 보내고 있었다. 밖에는 벚꽃이 휘날리는데........
“사실 그 인간, 남편 친한 후배였어요.
그래서 영창 갔다 나와서 저를 많이 도와주려고 애는 써요. 인간이 저질이어서 저 모양이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아요.”
“네........썩 나쁜 친구는 아니군요.”
취해서 돌아오는 길, 거리는 여전히 벚꽃이 휘날리고 있었다. 남대천 뚝에는 진달래도 활짝 피어 있었다.
그런데 꽃잎이 휘날리는 벚나무 밑에, 할복을 하려고 칼을 빼어 든 일본 무사가 비장하고도 애처로운 얼굴로 무릎을 꿇고 있었고, 진달래에게서 망제의 혼이 깃든 피를 토하듯 붉은 울음을 우는 두견새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몽롱했다. 술이 많이 취했던 것이다. 그렇게 봄날은 가고 있었다. 아! 역시 4월이었다. 잔인한 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