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88
2월1일[연중 제4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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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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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oFeJ5JZPivI (한덕훈 스테파노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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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도 또 다른 예수님께서는 이런저런 모습으로 변장하시고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성모님의 동정성과 관련해서 개신교 신자들이 자주 공격하는 소재로 활용되는 성경 구절이 있는데, 바로 오늘 우리가 봉독하는 마르코 복음서의 내용입니다.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겨 살고 있지 않는가?”(마르코 복음 6장 3절)
그렇다면 과연 성모님께서 예수님 이외에 또 다른 자녀들을 요셉과의 사이에서 출산하신 것인가요?
장로교와 일부 개신교 종파에서는 이 복음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고 수용합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요셉과의 사이에서 예수님 외에도 4명의 아들과 두 명의 딸을 낳았다고 간주하고 있습니다.
동방 정교회는 해석이 좀 다릅니다. 요셉은 전처와 사별하고 마리아와 재혼했다. 여섯 명의 자녀들은 요셉이 전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무염시태, 평생 동정 교리를 굳게 믿고 선포하는 우리 가톨릭교회는 이 성경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아주 간단하게 해결합니다. 우리 가톨릭교회는 이 부분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성경을 사랑했고, 성모님도 극진히 사랑했던 예로니모 성인의 해석을 따릅니다.
당시 유다 사회 안에서 ‘형제’라는 단어는 굉장히 폭넓게 사용되었다고 이해합니다. 형제! 하면 단순히 한배에서 태어난 친형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촌 형제, 오촌 형제, 팔촌 형제도 형제라고 칭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교회 공동체나 수도 공동체 안에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서로를 형제요 자매라고 칭하지 않습니까? 그런 언어 관습 안에 해석하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부분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마을 사람들,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잘 알고 있던 사람들,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지혜와 경륜이 묻어나는 말씀을 당당하게 선포하시자, 다들 긴가민가했습니다.
불행하게도 가깝다는 이유 하나로 자신들의 눈앞에 등장하신 메시아 하느님을 몰라보고 인정하지 않는 중대한 과오를 범한 것입니다.
오늘도 또 다른 예수님께서는 이런저런 모습으로 변장하시고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 눈앞을 스쳐 지나가십니다.
우리의 둔감함과 완고함, 불신앙과 폐쇄성으로 인해 우리에게 찾아오신 메시아를 몰라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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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육의 눈은 육을 보고, 영의 눈은 영을 본다>
물질을 쪼개고 또 쪼개면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상태가 이르게 됩니다.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분자, 원자, 양성자, 중성자, 전자, 광자, 쿼크 등 계속해서 쪼개어도 새로운 작은 단위를 발견하게 된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물질과 반물질까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즉 세상에 물질로 존재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에 상응하는 만큼의 물질이 아닌 반물질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주 미세한 물질세계에 이르면 많이 듣게 되는 말이 ‘불확정성의 원리’라는 것입니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라고도 하는데, 1927년 독일의 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어떤 물체의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한 이론을 말합니다.
차와 같이 큰 물체는 위치와 속도를 측정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전자와 같이 작은 입자의 위치에너지와 속도에너지를 동시에 측정하는 것은 물리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말하면 미시세계에서는 입자인지 파동인지 확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차와 같은 큰 물질은 위치에너지와 속도에너지를 계산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미시세계로 들어가면 위치를 찾으면 전자가 갑자기 튀어나와서 운동량을 측정할 수 없고, 운동량을 측정하려하면 위치를 찾을 수가 없게 되어 입자와 파동의 관계가 모호해진다는 것입니다. 즉 입자를 찾으려면 파동을 동시에 볼 수 없고, 파동을 보면 입자를 동시에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불확정성의 원리를 가장 잘 설명해 내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사람이 닐 보어입니다. 닐 보어는 상보성이론을 내어 놓았습니다. 즉 관찰자에 따라서 하나의 사물을 파동으로 보려고 하면 파동으로 보이고, 입자로 보려고 하면 입자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음과 양의 상호보완관계로 이루어져있는데 매우 모호해서, ‘관찰자의 주관’에 따라 보이는 세계가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관찰자의 주관’, 즉 ‘내가 보려고 하는 대로 보인다는 것’, 이것은 우리 삶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누가 황홀경에 빠져서 하늘을 보며 기도를 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사람은 우리가 보는 하늘(sky)을 보는 것일까요, 영적인 하늘(heaven)을 보는 것일까요? 혹은 누군가 꽃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있다면 그는 꽃을 보는 것일까요, 아니면 아름다움을 보는 것일까요?
물질인 꽃을 보고 있다면 눈에 보이는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이고, 아름다움을 보고 있다면 비 물질세계인 창조주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사제가 미사 때 제병을 높이 들어 올리면 어떤 이들은 그것을 밀떡으로 보고 어떤 이들은 그것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봅니다. 이는 마치 사람도 눈에 보이는 육체와 보이지 않는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육체를 보고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의 영혼상태까지도 봅니다. 어떻게 보이느냐는 그 관찰자의 주관에 따른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이런 것입니다. 관찰자의 주관, 즉 보고 싶은 대로 보이는 것입니다. 즉 무엇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 보는 사람의 상태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체를 밀떡으로 보는 사람과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는 사람은 그 보는 것의 차이로 하느님의 자녀와 단순한 사람의 자녀로 구분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대부분의 예수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개중에는 예수님을 믿어서 기적을 체험하기도 합니다.
이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자아의 눈으로 보는 사람은 예수님이 어둠으로 보이는 것이고, 은총의 눈으로 보는 이는 예수님이 빛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이느냐는 외적인 문제가 아니라 바로 자신이 어떤 안경을 끼고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탈출기에서 하느님께서 아홉 번째 재앙으로 어둠을 내리셨는데,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빛이 비추이고 파라오와 이집트 백성들에게만 어둠이 내렸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이 어둠이면 세상도 어둠이고, 마음이 빛이면 세상도 빛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빛으로 보기 위해서는 내 안에 빛이 있어야 하는데 오직 자신의 주인을 빛으로 받아들인 백성이라야 세상이 빛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무학대사가 이성계에게 부처 눈에는 부처가 보이고 돼지 눈에는 돼지가 보인다고 말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만약 우리 눈에 무언가가 선으로 보인다면 우리 안에 선이 들어있기 때문이고, 악으로 보인다면 우리 안에 악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법정 스님은 꽃이 아름다운 이유는 우리 안에 꽃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안에 아름다움이 들어있지 않으면 일반 동물들처럼 아름다움을 구별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안에 선에 있으니 선을 볼 수 있고, 악도 있으니 악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전지전능하신 하느님만이 악을 악으로 보지 않고 모든 것을 사랑으로 바라보십니다. 그러나 유다에게서 보듯이 마귀가 되어버린 사람은 어떤 선도 다 악으로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꿀벌이 꽃만 보고 똥파리가 똥만 보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의 존재가 선과 악, 어떤 것을 택하느냐에 따라 그렇게 바라보고, 또 본질도 그렇게 변해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가 많은 사람은 절대로 긍정적일 수 없습니다. 내가 은총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은총이고, 죄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못마땅하게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요셉이 꿈을 꾸었습니다. 부모와 형들이 자신에게 절을 하는 꿈이었습니다. 형제들은 이것의 부정적인 면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런 말을 하면서도 부정적인 면을 보지 못했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뻔히 미움 받을 것을 알면서 그 꿈을 형제들에게 이야기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결국 긍정적인 면을 본 요셉은 온갖 어려움도 잘 받아들일 수 있었고 그 꿈이 실현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나의 존재가 어떠한 상태인지 알고 싶다면 하루에 감사를 얼마나 하는지, 혹은 불평을 얼마나 하는지 살펴보면 됩니다.
똑같은 세상을 보면서도 어떤 사람은 부정적인 것만 보고 또 어떤 사람은 긍정적인 면만을 봅니다. 어떤 사람은 감사하고 어떤 사람은 불평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한 이들은 매사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인성만을 보고 신성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만을 보는 이유는 그것을 보는 사람이 지극히 사람이기 때문이고 영적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인간만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음과 양, 육체와 영혼, 인성과 신성을 다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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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뉴욕에는 국내선을 주로 운항하는 라과디아(LGA) 공항이 있습니다. 제가 있는 곳에서는 차량으로 10분이면 갈 수 있는 가까운 공항입니다. 공항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뉴욕의 브로드웨이에서 상영하는 대표적인 뮤지컬의 홍보물을 볼 수 있습니다. “알라딘, 라이언 킹, 위처드, 팬텀오브 오페라”입니다. 직원들과 함께 보기도 했고, 서울에서 손님이 오면 보기도 했습니다. 최근에는 후배 신부님과 ‘팬텀오브 오페라’를 보았습니다. 화려한 무대와 강열한 음악이 관객을 압도하는 뮤지컬입니다. 처음 본 것은 2006년 토론토였고, 그 다음은 2010년 서울에서 였습니다. 그리고 2023년 1월에 뉴욕에서 다시 보았습니다. 남자 주인공은 외모 때문에 뛰어난 실력이 있음에도 무시당하고, 외면당했던 에릭입니다. 여자 주인공은 에릭으로부터 노래를 배우는 크리스틴입니다. 뮤지컬 초반에 에릭과 크리스틴이 함께 부르는 노래는 ‘압권’입니다. 뮤지컬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존중하는 크리스틴의 따뜻한 마음을 에릭이 받아들이면서 끝이 납니다.
이번 뮤지컬을 보면서 저 자신이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자 주인공 역은 주로 백인이 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번 공연에는 여자 주인공 크리스틴 역을 흑인 배우가 하였습니다. 노래도 연기도 무척 잘 하였는데 처음에 제가 받은 느낌은 능력보다는 배우의 피부색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공연에 몰두 할 수 있었고, 주인공의 연기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민주주의 사회에서 모두가 평등하게 살고 있지만 불과 2세기 전만 해도 세상은 엄격한 신분과 계급이 존재하는 사회였습니다. 능력과 재능으로 존중받는 사회가 아니었습니다. 먼저 신분과 계급을 타고 나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숙명처럼 받아들였습니다. 민주화된 사회에서도 여전히 이민자에 대한 차별이 있고, 종교에 대한 차별이 있고, 피부색에 대한 차별도 있습니다. 신앙은 직분과 직책은 존중하지만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소중한 존재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일과 모래는 서울대교구 부제, 사제 서품식이 있습니다. 멀리 있지만 부제와 새 사제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지난 32년 사제생활을 돌아보면 감사할 일이 많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부족한 저를 이끌어 주셨고, 교우분들을 저를 이해해 주셨고, 저를 위해 기도해 주셨습니다. 성사를 정성껏 집전하지 못한 적도 많았습니다. 기도를 소홀히 한 적도 많았습니다. 저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만나기보다는 제게 필요한 사람을 만난 적도 많았습니다. 몇 번 넘어졌지만 성모님의 전구하심과 부모님의 기도가 있어서 다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부족하지만 제가 하고 싶었고, 사제라면 당연히 해야 할 직무를 새 사제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사제는 ‘시대의 징표’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의사는 환자의 아픈 곳을 정확히 진단해야 올바른 처방을 내릴 수 있습니다. 시대의 징표는 사색, 독서, 경청을 통해서 찾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꾸준한 독서가 필요합니다. 사제는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교회의 서적, 가르침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말씀은 강론을 통해서 선포되기에 강론 준비를 충실하게 해야 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말씀이 우리와 함께 하셨고, 말씀이 하느님이 되셨습니다. 사제는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기도는 갈망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는 여유를 가지고 해야 합니다. 기도는 꾸준히 해야 합니다. 기도는 규칙적으로 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제는 샘이 깊은 물과 같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와 같습니다. 사제는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는 삶을 사셨습니다.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가셨습니다. 가난한 이, 아픈 이, 외로운 이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행동하는 사제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고향에서 많은 기적을 보여주지 못하였습니다. 고향 사람들이 마음을 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편견과 선입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우 분들이 마음을 열어도 시대의 징표를 모르는 사제가 있다면,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는 사제가 있다면, 기도에 게으른 사제가 있다면, 행동하지 않는 사제가 있다면 복음의 꽃은 피기 어려울 것입니다. 새 자세들이 가는 새로운 임지에서 복음의 꽃이 활짝 피기를 기도합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만나서 성령의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이 만나서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사제와 교우가 만나서 믿음이 자라고, 사랑이 꽃피고, 희망이 열매 맺으면 좋겠습니다.
“내 아들아,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도록 힘쓰십시오. 거룩해지지 않고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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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6,1-6: 고향에서는 예언자라도 존경을 받지 못한다
예수님은 당신의 고향 나자렛으로 가신다. 그 마을은 갈릴래아 호수에서 30km 떨어진 곳으로 인물다운 인물을 내지 못한 고장이었다.(요한 1,46 참조)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셨을 때,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 같았는데 다섯 가지 의문을 제기하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2-3절) 예수님의 업적에 대해서 그 기적들과 가르침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즉 하느님인가 인간인가?(11,30 참조) 혹은 사탄인가?(3,22 참조)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 사이에 장인으로 통했다. 목수, 미장이, 석공, 대장장이 일을 두루 다 하신 기술자였을 것이다. 그리고 한동네에 살았기 때문에 누구의 아들인지도 알고 있다. 관례에 따르면 “요셉의 아들”(마태 13,55 참조)이어야 하는데 “마리아의 아들”(3절)로 표기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일하지 않고 빈둥거리며 살아가지 않도록 이러한 상징들을 통하여 가르쳐 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5절) 나자렛에서 어떤 기적도 행하실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불신 때문이었다.(6절 참조) 치유되기 위해서는 환자에게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치유하는 분에게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 상대방이 없으면 기적을 행할 수가 없다. 그분의 은총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막혀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당신 고향인 나자렛에서 고향 사람들의 불신앙을 이상히 여기신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배척한 예언자들과 당신을 비교하시면서(4절) 당신 자신도 결국 백성들에게 배척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암시하신다. 그분이 기적을 행하실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이 신앙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적이란 신앙이 있거나 적어도 믿으려고 하는 자세가 되어있을 때,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자유로운 행위라고 하였다. 신앙이라는 배경이 없으면 기적이란 무의미하며 불가능하다. 믿음이 있어야 기적의 혜택도 있는 것이다.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주시다.”(5절)는 것은 당신을 믿지 않는 이들 가운데서도 작용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내고자 하신 것이다. 은총은 당신을 믿는 이들 가운데에서 더 힘차게 작용한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그분의 능력은 그들의 불신조차 이겨 내셨다는 뜻이다.
우리도 많은 경우에 다른 사람을 외모로만 판단하고 그 사람을 안다고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마음이나, 내적인데 볼 줄도 모르고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외적인 것도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내 멋대로 판단을 하는 것이 문제이다. 외모로만 판단하여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나자렛 사람들의 잘못을 우리도 저지르고 있다. 좀 더 이웃의 장점을, 내적인 면을 볼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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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자렛의 목수>
2월 1일의 복음 말씀은, 안 믿는 사람들에게는 ‘사람이신 예수님’만 보지 말고, 그 예수님이 ‘하느님이신 그리스도’ 라는 것을 믿으라는 가르침입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믿고 있는지, 또는 무엇을 목표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반성해 보라는 가르침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십자가의 복음’에 관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1코린 1,23)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1코린 1,28-29)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이 ‘시골의 가난한 목수’ 라는 점이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그런 식으로는 세상에 오시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인들 같은 이방인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 신앙인들을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비웃었습니다. 그들은 신은 신이고, 인간은 인간일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을 ‘하느님이신 그리스도’로 믿은 이유는 단순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았기 때문이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의 믿음은 어떤 이론을 공부해서 얻은 것도 아니고, 수행이나 수련을 통해서 얻은 깨달음도 아니고, 생생한 체험을 통해서 갖게 된 확신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처음에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몰랐을 때에는 ‘높은 자리’를 원하기도 했지만(마르 10,37), 즉 세속에서의 출세와 성공 같은 것을 바라기도 했지만, 나중에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완전히 알게 되고 믿게 된 다음에는,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충실하게 따라갔고, 영적인 구원을 향해서 나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마르 6,1-3)
예수님께서 나자렛으로 가신 것은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입니다. 단순히 고향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에서 병자들을 고쳐 주신 다음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 1,38) 복음 선포를 하면서 여러 고을을 다니신 예수님에게는, 나자렛은 ‘여러 고을들’ 가운데 하나였을 뿐입니다.
<그곳이 예수님의 고향이라는 점에 너무 특별한 의미를 둘 필요가 없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한 말은, 예루살렘 사람들도 했던 말입니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요한 7,27)
이 말은 ‘나자렛 예수’에게는 메시아다운 ‘신비감’이 없다는 뜻입니다.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성경에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그리고 다윗이 살았던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았는가?”(요한 7,41-42)
예수님의 소문이 널리 퍼졌을 때,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려고 애를 썼던 것 같은데, 그들이 알아낸 것은 “예수는 갈릴래아 나자렛 사람이며 가난한 목수”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출신이나 직업 같은 것은 상관하지 않고 믿었는데, 안 믿는 사람들은 바로 그런 것들 때문에 못 믿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이 한 말에서, 우리는 그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후손으로 인정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는 것을 그들이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태어난 것만으로는 베들레헴 출신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잘 알기 때문에 못 믿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요한 7,28)
출신과 직업을 아는 것만으로는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곧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알고 싶다면, 먼저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나자렛의 목수 아들이 아니라, 로마 황제의 아들로 태어나셨다면 사람들이 좀 더 쉽게 믿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알 수 없지만,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더욱 소외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보잘것없는 시골 마을의 보잘것없는 집안에서 태어나신 것은,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없는 것을 선택하셨다.” 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은 바로 그 뜻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분이니,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부귀영화를 바라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헛일’을 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을 믿는 종교가, 또는 성직자들이 세속의 특권층처럼 변하는 것은 죄를 짓는 일입니다. 그것은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 예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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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집’이나 ‘고향’이라는 말은 많은 경우 우리 마음을 설레게 하고 애틋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당신의 고향으로 가신 이야기를 전합니다. 성경에는 “이스라엘 집(안)”이라는 표현이 무려 119번이나 나오는데, 이 표현이 늘 좋은 뜻으로만 쓰인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전통’이라는 틀에 매여 자기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서 하느님의 뜻을 거절하는 이들을 가리키기도 하였습니다.(예레 11,17; 바룩 2,26; 에제 3,7 참조)
성경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의 하느님”(탈출 20,2; 신명 5,6)이라고 소개하십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첫 말씀은 아브라함이 제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창세 12,1 참조) 이처럼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된 자유와 행복을 얻으려면 우리는 우리가 사는 집이나 고향, 곧 과거의 전통과 자기의 예전 생각에서 떠나와야 합니다. 그래야만 주님께서 보여 주시는 새로운 삶의 양식을 배우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고향 나자렛을 떠나 카파르나움에서 첫 공생활을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서 하느님 말씀을 전하실 때 가장 먼저 하신 일은 제자들을 뽑으신 것이었는데(마르 1,16-20 참조), 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새 가족을 만들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만드신 이 가족을 교회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우고 만드신 새 가족이 나자렛의 옛 가족과 충돌하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곧잘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넘어집니다. 나자렛 주민들처럼 우리도 여러 가지 이유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믿는 이는 과거의 전통과 생각과 신념으로 살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 말씀을 믿고 자신의 옛 집과 고향(자기 생각, 신념, 전통, 문화 등)에서 끊임없이 나오려 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하느님을 자신보다 앞세우는지 아니면 하느님보다 자신을 앞세우는지에 따라 믿는 이의 삶이 결정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요한 17,17)라고 고백하시며 늘 당신보다 하느님 아버지를 앞세우셨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르는 데에서 큰 걸림돌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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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회 故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고향으로 가셨는데>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지?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우리는 복음을 듣고 놀라야 한다. 왜냐하면 오늘 내가 읽은 복음 말씀의 내용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씌어진 것이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해서 쓰였고, 내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 내가 읽는 말씀은 바로 오늘 나에게 이루워져야 할 말씀이다. 즉 묶여 있는 나를 해방시켜 주시고, 눈먼 나를 보게 해주시고, 청각장애인을 듣게 해주시고, 무거운 짐으로 억압받고 있는 나를 해방해주시고, 하혈하는 병을 낫게 해주시고, 죽은 나를 살려주시고, 무덤에서 나오게 하시기 위해 들려주시는 말씀이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을 읽을 때마다 놀래야 한다. 내가 먼저 놀라고 내 주위 사람들도 놀래야 한다. 내가 오늘 복음을 받아들인 만큼 내 안에서 놀라운 일들이 이루워 질 것이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듣고 사람들이 놀라면서 많은 궁금증을 갖게 되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모두 6가지인데 이 중 셋은 긍정적인 것이고 셋은 부정적인 것이다.
첫 번째,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라는 질문은 예수님의 능력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하느님한테서 힘을 받아서 하는 것이냐, 아니면 사탄의 힘을 빌린 것이냐? 하는 것이다. 율법학자들이 "그는 베엘제불이 들렸다. ……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마르 3, 22) 하고 떠든 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예수님의 능력의 출처가 어디인가 하는 의문을 갖고 던진 질문이다.
사람들이 좀 더 예수님의 말씀을 귀 기우려 들었다면 이런 혼동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고 오히려 하혈하던 부인처럼 예수님 앞에 나아와 엎드려 경배드렸을 것이다.
두 번째,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지?"라는 질문은 가르침의 출처를 따지는 질문이다. 즉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지혜는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지혜의 출처가 어디냐? 하는 것이다.
지혜를 그리스어로 '소피아'라고 한다. 지혜와 지식은 차원이 다르다. 지식은 어떤 사물에 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이다. 어떤 사물에 관하여 많은 것을 알려면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을 박사라고 한다. 즉 그 분야에 대하여 공부를 많이 해서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혜는 단순히 지성과 이성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집회서에 보면 지혜에 대한 말씀이 있다. "모든 지혜는 주님께로부터 오며 언제나 주님과 함께 있다.
지혜의 근원은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말씀이며 지혜의 길은 영원한 법칙이다. 지혜로우신 분은 오직 한 분, 두려우신 분이시며, 당신의 옥좌에 앉아 계신 분이시다.
그분은 지혜를 만들고 지켜보며 헤아리시는 주님으로서 당신이 만드신 모든 것과 모든 인간에게 지혜를 너그러이 내리시고, 특히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지혜를 풍부히 나누어 주신다."(집회 1, 1-10 참조)
지혜는 인간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하느님께 나아가야 한다. 하느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고 실천하는 생활이다. 왜냐하면 "지혜의 근원은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저 사람의 용기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어떻게 해서 저 가정은 늘 화목하게 지낼까? 저 사람의 평화스런 모습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저 사람의 기쁨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저 사람의 지혜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라고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이런 신앙인의 삶은 참으로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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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상호 세례자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은 고향을 찾아가신 예수께서 안식일이 되자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셨다는 내용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예수의 가르침을 들은 고향의 많은 사람들이 놀라며 "저 사람은 어떤 지혜를 받았기에 저런 기적들을 행하는 것일까? 그런 모든 것이 어디서 생겨났을까?" 하며 궁금해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강론을 통하여 예수의 지혜가 어디서 왔는지를 설명해 드림으로써 그 궁금증을 풀어드릴까 합니다.
예수님 고향 사람들은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로 그의 아버지는 목수이며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한, 유다, 시몬이고 그의 누이들은 다 결혼을 하여 고향에 함께 살고 있으며, 예수 자신도 아버지 직업을 이어받아 목수 노릇을 하며 살았던 것을 예수의 고향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습니다.
삼십년 간을 고향 나자렛에서 동네 사람들과 함께 살았기에 조그마한 마을 나자렛에서는 어릴 때의 예수와 청년 때의 예수를 다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의 기억을 종합하면 예수는 크게 촉망받은 젊은이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예수를 장래성이 있는 젊은이로 보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저 성실하고 착한 보통의 젊은이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젊은이가 고향을 떠난 지 1년 후에 놀라운 가르침을 주는 사람으로 탈바꿈하여 고향에 등장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을의 회당에서 지혜로운 가르침을 주었기에 마을 사람들은 놀라며 예수의 지혜와 예수의 기적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또 예수의 가르침을 믿으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지혜와 기적의 능력에 대한 출처에 궁금증을 가지게 되었기에 저 사람의 모든 것이 어디서 생겨났을까? 하고 묻게된 것입니다.
몇 가지 대답을 생각해보면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시기에 하느님의 지혜를 태어날 때부터 부여받았다고 우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대답도 틀린 대답은 아니지만 따라오는 우리의 생각은 예수는 크게 위대한 인물이지만 우리를 감동시키지는 못한다는 점입니다.
태어날 때부터의 하느님 아들은 당연히 하느님의 아들로 처신하여야 하고, 태어날 때부터 사람의 아들인 우리 인간들은 인간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라고 생각되어지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점은 고향 나자렛에서 평범하고 착한 젊은이로 살아가고 있는 예수께 세례 때처럼 성령의 비둘기 모양으로 찾아와 예수께 하느님의 지혜를 부여하였다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당시 겁에 질려서 뿔뿔이 도망쳐 갔던 예수의 제자들이 부활하여 발현하신 예수를 체함하고는 용감한 복음의 선포자로 갑자기 둔갑한 것처럼 예수님도 고향을 떠나서 일 년 동안 어떤 중대한 사건을 체험하고서 출현하여 하느님의 지혜를 갖추게 되었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 역시 일리는 있지만 결국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은 하느님의 길을 가야 하고 선택되지 못한 우리들은 우리 인간의 길을 걸으면 된다라는 결론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러면 세 번째로 예수의 그 지혜는 어떤 방법으로 하느님께서부터 왔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예수의 그 지혜는 예수의 고뇌와 갈등, 번민과 회의, 좌절과 희망, 그리고 믿음과 깨달음의 결과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예수는 쉬운 방법으로 하느님의 지혜를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때어날 때부터 하느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셨기에 그 모든 지혜를 하느님께서부터 선천적으로 타고났다는 해석이나, 우연한 기회에 돌발적인 사건을 통하여 하느님의 지혜를 깨닫는다면 그것은 너무나 쉬운 방법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런 방법으로 하느님의 지혜를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죄 외에는 모든 점에 있어서 우리와 똑같은 예수께서는 우리 인간들이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깨닫는 방법과 비슷한 방법으로 하느님의 지혜를 깨달으셨습니다.
고뇌와 번민, 기도와 묵상의 방법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성서는 자주 예수께서 산으로 기도하러 가셨다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기도와 묵상, 그리고 회의와 믿음의 방법으로 하느님은 예수께 하느님의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예수의 그 방법을 예수만큼 노력하여 기울인다면 하느님의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젊은이가 행한 것을 우리는 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신분의 차이도 아니고 선택의 차이도 아니고 바로 노력의 차이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의 지혜와 기적을 잘 믿지 않으려는 예수님 고향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또 예수의 지혜가 어디서 왔을까 궁금해하는 그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지켜 주시고 도와주시며 인간이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는 방법으로 하느님의 지혜를 깨달을 수 있지, 그저 우연히 또 자신의 노력과는 관계없이 태어나면서 선천성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가 가진 지혜에 우리도 참여하기 위해서는 예수가 사용한 그 방법을 우리도 사용함으로써 가능하다는 말씀을 드리면서 강론을 맺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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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고향사람들도 예수를 불신하다.>
마르코복음에 의하면 세례자 요한이 잡혀 옥에 갇히고 난 뒤부터 예수께서는 본격적으로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공생활을 시작하셨다.(1,14)
복음선포는 제자들을 부르심과 권위 있는 말씀과 기이한 행적으로 이루어진다. 예수님의 선교무대는 주로 갈릴래아 주변지방들이었고, 활동 기간은 약 3년으로 추정되며, 선교효과는 복음의 수용과 믿음보다 불신과 거부가 더 많았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헤로데 당원들은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했고(3,6), 친척들은 소문을 듣고 예수를 미쳤거나 정신나간 사람으로 여겼으며(3,21.31), 백성들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알아듣지 못하고(4,12), 그분을 배척하였으며(5,17), 선발된 12제자(3,13-19)들까지도 예수께 대한 믿음이 부족했고(4,40), 예수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다.(4,41) 이렇게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은 철저하게 곡해되었던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자라났던 고향을 방문하시지만 거기에서조차 푸대접을 받으신 내용을 들려주고 있다.
3년이라면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닐 터인데, 왜 예수님의 열정적인 노력이 모두 공염불이 되고 말았는가? 무엇이 잘못됐는가? 무엇이 부족한가? 문제는 믿음이다. 복음사가의 의도는 복음과 믿음의 불가분의 관계를 피력하려는데 있다.
여기서 믿음은 복음의 주체인 화자에 대한 청자(聽者)의 모든 인간적인 면을 배제한 후 결정짓는 긍정적인 태도를 말한다. 이런 관계를 오늘 복음이 보여주고 있다.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오신 예수께서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자 많은 사람들이 그 말씀을 듣고 처음에는 놀라운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곧바로 꼬리에 꼬리를 문 의문을 제기하였다.
사람들은 예수가 가진 지혜의 정체에 대하여, 그 지혜의 출처에 대하여 묻고, 그들이 예수에 대하여 알고 있는 직업, 부모, 친척, 인척들에 대하여 논하면서 포괄적으로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어디에서나 존경받는 예언자라도 자기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을 받지 못하는 법이다"(4절)라는 속담으로 대응하셨다.
결과는 단지 몇 명의 병자들만 고쳐주시고 다른 기적은 행하실 수 없었던 것으로 나타난다.(5절) 이유는 그들에게 이상하리만큼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다.(6절)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크고 대단한 믿음을 요구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믿음이 없는 곳에는 구원도 기적도 없다는 것이다.
구원과 기적에 대한 믿음의 중요성은 앞서간 복음에 잘 나타나 있다. 예수께서는 겨자씨 같은 아주 작은 믿음 속에서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싹튼다고 가르치셨다.(4,31-32)
12년간 하혈병으로 초죽음이 되었던 한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진다면 나을 것이라는 한 가닥 믿음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실제 치유의 은혜로 응답하셨다.(5,25-34)
또한 병든 딸을 예수께서 고쳐 주실 수 있다는 회당장 야이로의 믿음에 예수께서는 이미 죽은 그의 딸을 다시 살려 돌려주셨다.(5,22-24.35-43)
이렇게 믿음이 있는 곳에는 그것이 아무리 작다 하더라도 치유와 기적이 있고 용서와 구원이 베풀어진다. 이는 곧 사랑이신 하느님의 인간 믿음에 대한 응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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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분 곁의 사람들>
마르코 6,1-6 (나자렛에서 무시를 당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그분 곁의 사람들>
그분 곁에
늘 사람들이 있다
그분 곁에
그분을 몰랐지만
그분의 부르심에
기꺼이 스스로를 열고
그분을 따름으로써
그분을 알아가며
마침내
그분과 하나 되는
사람들이 있고
그분 곁에
그분을 알았지만
그분의 부르심에도
기어코 스스로를 닫고
그분을 밀어냄으로써
그분을 몰라가며
마침내
그분과 갈라서는
사람들이 있다
그분 때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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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 아버지께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악마와 병마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심으로써 정신적, 육체적 죽음에서 구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당신의 고향 나자렛에서는 무시를 당하셨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자신과 같은 신분의 예수님이 자신들보다 월등한 능력과 지혜를 지니게 된 것을, 이해하지 못했고 편견과 시기, 질투심에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듯합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나자렛이 아닌 다른 지역 출신으로서 훌륭한 가문과 번듯한 학벌을 갖추고 등장하셨다면 그렇게 반응했을까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법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라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마르 6,2) 하고 말하였습니다.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물론 주님의 능력은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나왔습니다.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지혜도 역시 인간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나옵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하느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또 실천해야 합니다. 지혜의 근원은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실행함으로써 그 능력을 더 얻게 됩니다. 믿음으로 실천한 사람은 그것을 압니다.
집회서 1장 1절 이하를 보면 “모든 지혜는 주님에게서 오고 영원히 그분과 함께 있다. 지혜의 근원은 하늘에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이며 지혜의 길은 영원한 계명이다…주님의 사랑은 영광스러운 지혜이며 그분께서는 당신을 보여주실 이들에게 지혜를 나누어 주시어 당신을 알아보게 하신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분명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지혜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을 우선순위에 두어야 하는지를 구별하는 사리 판단력입니다. 또한 지혜란 인생의 올바른 방향 감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올바른 방향을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제시하십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또 생활화합니다. 그렇게 되면 균형과 조화를 통해 삶이 풍요로워집니다. 사실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에게서 배움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놀라운 지혜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균형과 조화가 깨지면 소리가 나게 마련입니다.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 경제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 자연과 인간의 조화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균형과 조화는 올바른 사리 판단력과 방향 감각을 기반으로 합니다. 그러므로 지혜의 근원이신 하느님께로 다가가는 정성 된 노력이 필요합니다. 과거의 전통과 나의 고정관념을 버리고 내 생각의 틀을 넘어서 열린 마음으로 주님을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새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많이 아는 사람을 유식한 사람, 지식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학문이나 지성만으로 살아가는 것보다는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며 슬기롭게 사는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지식인은 넘쳐나고 지혜로운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세상의 많은 일들이 하느님의 지혜를 담은 사람들에 의해서 계획되고 해결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 봅니다.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하였을 때 서슴없이 “하느님께 받았다.” 하고 고백할 수 있다면 지혜를 넘어 영성적인 사람입니다. 영적인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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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아는 지인이 있는데, 이분의 차는 늘 상처투성입니다. 차 옆에도 또 뒤에도 어디에 긁힌 자국이 보이고, 어디에 부딪혔는지 찌그러져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차는 소모품이라서 잘만 굴러가면 그만이라는 말씀만 하십니다. 얼마 전에는 새 차를 뽑았다고 하는데, 또 얼마 못 가서 벽에 부딪혀서 또 큰 수리를 해야만 하셨습니다. 운전경력이 30년 넘었음에도 왜 이렇게 운전에 미숙할까요? 이에 대해 차량 전문가의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운전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차를 사랑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차를 사랑한다면 함부로 운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그만큼 귀하게 여깁니다. 정말로 아끼는 물건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소중하게 다루고 혹시라도 상처가 날까봐 더 조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입으로는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얼마나 그 사람을 귀하고 있었습니까? 혹시라도 상처를 입지 않을까 싶어서 귀하게 대하고 자기 말과 행동에 있어서도 조심할 것입니다.
그러나 입으로는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내 배우자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또 내 자녀, 부모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친한 친구와 회사 동료에 대해서는 어떠했습니까? 귀하게 여겨야 사랑하는 마음도 생깁니다. 내 뜻만을 내세우고, 상대방이 변화되기만을 바라는 마음은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아닙니다. ‘있음’ 자체로 귀하게 여길 수 있는 마음, 그때 사랑이라는 소중한 감정이 내 안에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을 방문하셨습니다. 그런데 고향 사람들의 반응이 영 좋지를 못합니다. 예수님의 신분, 직업, 그리고 가족을 이야기하며 못마땅하게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을 귀하게 여기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귀하게 여기지 않는 곳에 사랑도 없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사랑이 없으니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도 없었습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얼마나 예수님을 귀하게 여깁니까? 가장 가까운 나의 이웃도 귀하게 여기지 않으니, 주님도 귀하게 여기지 못하면서 매일 같이 ‘무엇을 달라.’, ‘남보다 더 잘 살게 해 달라.’, ‘편하게 살 수 있게 해 달라.’ 등의 요구만 하면서, 마치 주님을 나의 명령을 무조건 따라야 하는 종처럼 여기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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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주님께서 훈육하실 때>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 주님은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이를 채찍질하신다.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오늘 히브리서는 주님의 권고와 훈육을 얘기합니다. 영어로 얘기하면 ‘Exhortation and discipline of the Lord’입니다.
맥락을 뜯어볼 때 주님께서 한 번 또는 여러 번 권고를 해주셨는데도 그 권고를 듣지 않을 때 주님께서 훈육을 하시는데, 이때 그 훈육의 형태는 책망의 형태, 채찍질의 형태, 시련의 형태를 띱니다.
한 번이나 두 번 권고해서 바로 말을 들었으면 이런 형태의 훈육을 하지 않으셨을 텐데 그러지 않으니 훈육을 하신다는 말이고, 아비가 아들에게 하듯 주님도 우리를 아들로 사랑하기에 하시는 거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제가 앞에서 친절하게 훈육이 영어로는 ‘Discipline’이라고 얘기했습니다. 훈육의 의미를 더 잘 설명하기 위해섭니다.
이 ‘Discipline’이 수도 생활 그것도 수도승들의 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물론 군대에서도 중요하고 군대에서는 계속되는 훈련으로 한편으로는 군인 정신을 기르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투 능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훈련에서 중요한 것은 반복입니다. 한 번에 정신이 길러지지 않고 능력이 습득되지 않기에 반복하는 것입니다.
수도 생활에서도 이 ‘Discipline’의 목적과 원칙은 같습니다. 밖에서 제멋대로 살던 사람을 수도자로 양성하기 위함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수도원 규율과 관습에 맞는 사람이 될 때까지 반복 훈련 또는 훈육을 하는데 이것을 Discipline이라고 합니다.
습관은 제2의 성격이라고 합니다. 습관이 잘못 들면 성격처럼 고치기 어렵다는 뜻이 들어있는 것이고,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그런 뜻이 들어 있는 거지요.
‘버릇’, 한자어로 ‘습’, ‘습관’, 이 말들은 오랫동안 반복으로 인해 형성된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습득(習得)’이라는 말도 반복을 통해 얻는다는 뜻입니다. 한자어 習이라는 말 자체가 ‘익히다’, ‘반복하여 행하다’는 뜻이 있잖아요?
그런데 이 버릇이나 습관이 오랫동안 잘못 형성된 것이라면 그것을 고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시간과 반복된 교정이 필요하겠고, 그것을 고치는 것이, 마치 오래 잘못된 자세를 고치는 것처럼, 고통스럽겠지요.
주님의 권고나 가르침이 훈육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는 이유이고, 그 훈육이 책망과 채찍질과 시련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이 형태의 훈육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고 받아들여야 하고, 이 훈육이 사람이나 사건을 통해 주어진다는 것을 알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히브리서가 책망을 듣거나 시련을 당할 때 낙심하거나 슬퍼하지 말고 오히려 은총으로 받아들이라 하는데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은 사실 훈육을 받는 사람뿐이 아닙니다.
어쩌면 훈육하는 사람이 더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한두 번 권고해서 안 되고, 계속 훈육해도 안 될 때 낙심하여 훈육을 포기하기 쉬운데 그것은 사랑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훈육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기 위해서, 받는 이나 주는 이 모두 인내의 사랑이 필요함을 마음에 새기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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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회개의 훈련>
-믿음에 대한 답은 회개뿐이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시편103,1-2)
오늘 화답송 시편이 참 좋습니다. 찬미의 기쁨입니다. 찬미할 때 회개요 회개할 때 찬미입니다. 찬미와 함께 가는 믿음입니다. 어제 수도원 입회하는 형제의 오리엔테이션 시간에 앞서 부르도록 한 성가 480장 1-2절입니다. 수도생활 소개에 마침 어제 강론이 좋다싶어 이 성가를 부르도록 한 후, 강론을 읽게 했습니다.
“믿음으로 믿음으로 저산도 옮기리 믿음으로
믿음으로 믿음으로 바다도 가르리 믿음으로
믿음으로 믿음으로 한생명 다하리 믿음으로
믿음으로 믿음으로 한넋을 다하리 믿음으로”
어제 강론은 믿음의 전사, 믿음의 훈련에 대해 강조한 내용이었는데 수도자의 자세에 대한 가르침으로 참 좋다 싶었습니다. 믿음의 훈련은 동시에 회개에 대한 훈련임을 깨닫습니다. 그렇습니다. 회개의 훈련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도, 믿음에 대한 답도 회개뿐임을 깨닫습니다.
회개와 믿음은 함께 갑니다. 끊임없는 회개와 더불어 좋아지는 믿음입니다. 믿음의 전사는 그대로 회개의 전사라 할 수 있겠습니다. 어제 강론중 일부 인용합니다.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에게 평생 훈련은 필수입니다. 영적전쟁은 단거리 100m 경주가 아니라, 평생 한결같이 달려야 할 장거리 마라톤 경주와 같습니다. 아무리 잘 달려도 도중 하차하면 말짱 도루묵입니다. 지금까지보다 지금부터가 중요합니다. 늘 새롭게 시작하는 파스카의 삶이어야 합니다.”
늘 새롭게 시작하는 파스카의 삶, 바로 회개의 삶이자 믿음의 삶입니다. 교황님의 “매일이 은총의 시간이자 새로운 기회”라는 말씀 역시 회개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깨달음입니다.
지금도 잊지 못하는 아름다운 선종의 추억입니다. 나이는 저보다 5-6세 적지만 수도생활은 저보다 6년 정도의 선배 수도사제입니다. 간암으로 투병 중 임종 전 사흘 전에 병문안 갔을 때 평화로이 환대해 주는 모습에 큰 감동과 더불어 위로를 받았습니다. 죽음을 예감하여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는 미소 가득한 평화로운 얼굴이었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자작 좌우명시도 읽어 드렸더니 “참 좋다”, “참 감사하다” 했습니다. 특기할 모습은 굵은 열 알 짜리 묵주를 늘 손에 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기도를 통한 끊임없는 회개의 훈련이, 믿음의 훈련이 바로 이런 내적평화의 비결임을 깨달았습니다. 이렇게 병문안한 후 이틀 후에 선종했으니 참 기막힌 은총의 방문이었음에 하느님께 많이 감사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기도와 회개는 함께 갑니다. 회개와 믿음은 함께 갑니다. 무지에 대한 답도, 믿음에 대한 답도 기도와 회개뿐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그렇게 명성을 떨치던 예수님께서 고향 땅, 나자렛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당하고 무시당하다니 참 불가사의입니다. 많은 고향 사람이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은가?”
그대로 우리라도 이렇게 반응했을 것입니다. 비교로 인한 질투심에 선입견과 편견도 크게 작용했을 것입니다. 질투, 선입견, 편견은 바로 무지의 표현이요 마음의 고질병인 무지에 대한 유일한 처방은 회개뿐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나자렛 고향 사람들은 전혀 회개의 훈련이 안 되었기에 믿음 역시 부족할 수밖에 없을 뿐이었습니다.
놀람의 반응이 급전하여 예수님을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이에 대한 주님의 결론 말씀이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끊임없는 회개가 편견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깨끗한 마음에 넓은 시야를 지니게 합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만고불변의 진리같습니다. 함께 살면서 동료 형제자매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기는 참 힘들고 이런 경우가 있다면 이들은 두말 할 것없이 성인들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에 놀랐던 고향 사람들과 이들의 믿음 없음에 놀라는 예수님의 대조가 인상적이며, 복음 후반부의 묘사가 우리에게 참 의미심장한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 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믿음 없이는 기적이 불가능하고 무의미합니다. 일방적인 주님의 기적은 불가함을 깨닫습니다. 믿음에 응답된 은총의 기적입니다. 이들의 믿음 없음에 놀라시는 주님이요, 이 또한 무지의 질병인 편견이 얼마나 힘든 장애인지 깨닫습니다. 얼마전 인용했던 토마스 아퀴나스의 어록중 한 마디가 생각납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설명이 필요없다.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회개도 기적도 불가능함을 깨닫습니다. 회개의 은총, 회개의 훈련이 참 절실합니다. 정말 청해야 할 바 회개의 은총이요 끊임없이 수행해야 할 바 회개의 훈련입니다. 새삼 ‘회개의 시스템’ 같은 기도와 노동과 공부가 균형잡힌 수도원 매일의 일과표가 고맙습니다.
참으로 회개로 깨끗해진, 지혜로운 영혼들은 매사 시련을 주님께서 주시는 훈육으로 여길 것입니다.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 것입니다. 회개한 영혼들은 다음 히브리서의 충고를 그대로 공감하여 감사히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대로 회개의 훈련에 충실한 믿음의 전사들에게 선물로 주는 은총입니다.
“여러분이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은 자녀로 대하십니다.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 줍니다.
그러므로 맥 풀린 손과 힘 빠진 무릎을 바로 세워 바른길을 달려가십시오.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도록 힘쓰십시오. 거룩해지지 않고서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무도 하느님의 은총을 놓쳐 버리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십시오.”
복음의 회개가 절실한 나자렛 고향 사람들에 대한 답을 오늘 제1독서 히브리서가 줍니다. 질투와 편견의 무지로 인해, 회개와 믿음의 부재로 인해 하느님의 은총을 놓쳐 버린 어리석은 예수님의 나자렛 고향사람들이요 바로 우리의 부정적 모습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고맙게도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무지를 치유해주시어 끊임없는 회개와 더불어 한결같은 믿음의 여정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의 자애는 영원에서 영원까지,
그분을 경외하는 이에게 머무르고,
그분의 의로움은 대대손손,
그분 계약을 지키는 이들이게 이르리라.”(시편103,17-18ㄱ).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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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르6,4)
<예수님의 소외!>
오늘 복음(마르6,1-6)은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서 무시를 당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고향으로 가셨을 때,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는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 안에서 일어난 일들을 믿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고향에서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십니다.
'참으로 이상한 역설입니다.'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요즘은 큰 상을 받거나, 경사스러운 일이 있으면 마을 사람들이 여기저기에 현수막을 걸고 난리인데... 예수님 고향 사람들도 "우리 고향 나자렛에서 큰 예언자가 나타나셨다."고 사방에 현수막을 걸고 환영해야 할 일인데... 이상하게도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또 이상한 역설이 있습니다.' 하느님과 메시아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그를 기다려온 이들이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이 결국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소외'는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의 삶 속에서도 종종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소외를 당하십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땀 흘리시고, 가시관을 쓰시고, 매 맞으시고. 침 뱉음 당하시고, 옷 벗김 당하시고, 마침내는 십자나무에 달려 돌아가십니다. 그리고 부활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나도 부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사다난했던 1월을 뒤로하고, 새달인 2월을 맞이했습니다. 2월 한 달을 다시 구원의 기회(선물)로 주신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주님 마음의 드는 날들로 가득하기를 기원하면서 힘차게 출발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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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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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마르 6, 6)
편견의 아픈 땅을
뚫고 올라오는
2월의 새싹을
만납니다.
다시 처음인
만남입니다.
믿음은 선입견을
내려놓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선입견이
무서운 것은
주님께서 개입하실
작용의 여지마저
두지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는 관계는
서로를 아프게 하는
아픈 관계입니다.
아픈 관계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싸워야 할 대상은
고정관념의
상대가 아니라
고정관념에
갇혀있는
우리자신입니다.
하느님이 나타나도
고정관념으로
하느님을 바라봅니다.
오만과 편견의
위선을
반성합니다.
사람을 다시
돌아오게
하는 것은
따뜻한
사랑입니다.
사랑과 믿음을
놓치지 않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면 모두가
소중한 공동체의
사람들입니다.
마음을
무너뜨리는 일은
이제 그만입니다.
공동체로
다시 돌아오는
것은 물건이 아닌
소중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시간을 사는 것이지
물건의 시간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환영하지 않은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이심을
뒤늦게 깨닫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사람들입니다.
환영과 친절의
마음으로
서로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드리는
2월의 첫날
새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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