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 / 한여진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 읽던 소설 속에서 인물들이 서로를 미워하고 있었고 그것이 이 책의 유일한 결말은 아니니까 가장 많은 미움을 샀던 인물처럼 나는 징검다리를 건넜다 개울에 빠져 죽었다던 그와는 달리 반대편에 잘 도착했는데 돌아보니 사방이 꽁꽁 얼어 있었고 그애는 여름에 죽었겠구나 죽은 이를 미워하던 사람들이 모여 흐르는 땀을 연신 닦다가
미워하던 마음이 사라진 텅 빈 구멍을 들여다본다 그것은 검고 아득해서 바닥이 보이지 않고 돌멩이를 던져볼까 아서라, 죽은 이는 다시 부르는 게 아니야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는 찰나에도 두부는 아주 평화롭게 구워진다 이것은 소설일까 아닐까 고개를 들면 온통 하얀 창밖과 하얗게 뒤덮인 사람들이 오고가는 풍경 모든 것이 끝나도 어떤 마음은 계속 깊어진다
- 시집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 (문학동네, 2023.10)
* 한여진 시인 1990년 출생. 연세대 건축공학과 졸업 2019년 <문학동네> 등단 시집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 ************************************************************************
[시인의 말]
이 시들을 엮는 동안 여러 번의 겨울이 왔다 갔고 살아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자주 졸았는데 가끔은 이대로 계속 잠들어도 좋겠다 싶은 밤이 있었다.
2023년 10월 한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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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진 시인의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에는 읽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에게 주어진 ‘끝’이라는 형식에 대해, 소설 바깥에서 ‘끝없는 삶’을 감당하던 이가 고민하는 모습이 나온다. 언뜻 이 시는 “소설”과 같은 가상 세계의 경계가 사라진 지금 시대에 관한 얘기를 하는 것 같다. “개울에 빠”진 “그”의 얘기가 너무 생생해서, 거기에 몰입해 있던 독자는 “그애”를 두고 소설 바깥으로 쉽게 나가지 못한다. 책장을 덮고 “고개를 들면” “온통 하얀 창밖과/ 하얗게 뒤덮인 사람들이 오고가는 풍경”이 펼쳐진다 해도, 누군가에 대한 마음을 깊이 가졌던 독자의 경우라면 쉽게 “그애”에 대한 마음을 다른 데다 내다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시는 여러 매체를 통한 추체험이 가능한 시대, 우리는 이를 통해 어떻게 우리의 경험을 재구성해나가는지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시의 마지막 구절 “모든 것이 끝나도/ 어떤 마음은 계속 깊어진다”까지 읽는다면, 이 시는 좀 다르게 읽힌다. 재현된 세계가 차마 봉합하지 못하는 인간의 끝없는 마음을 드러내는 순간, 이 시가 경험이 재편되는 요즘 방식을 마냥 수용하지만은 않는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시의 처음과 중간에 살짝씩 끼어드는, 소설을 읽는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두부를 굽는 일’이 신경 쓰인다. 시의 인상적인 첫 문장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는 겨울이 오는 신호를 ‘생활의 감각’으로 알아차리는 방식에 대해 떠올리게 한다. 변해가는 계절 풍경을 지켜보다가 사진 찍기에 급급한 구경꾼의 자리가 아니라, 하얗고 단단한 두부를 잘라 굽고 이를 그릇에 잘 담아내고자 의식을 치르는 사람의 자리에서 겨울은 으레 오지 않고 ‘겨울이’ 비로소 오는 것을 체감할 수 있게 된다. 시인은 하얀 설원과 이어질 수 있는 형상인 ‘두부’를 제시했지만 계절을 맞이하려는 이에게 두부만이 답은 아니다. 계절과 계절 사이에 만두나 김치, 붕어빵 같은 것을 챙겨 먹으며 사람은 따뜻한 음식을 천천히 다 먹을 때까지 유지되는 평화로운 시간을 통해 끝나버린 한 계절이 다음 계절의 모습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체감한다. ‘생활의 감각’은 생이 계속된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일러준다. 생활의 감각은 많은 사람의 삶은 가상의 것이 아니라는 감각이다. 이는 많은 사람이 다치고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 꽤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진상 규명조차 이뤄지지 않는 어떤 ‘죽음’들의 소식이 신문을 통해 전해지는 요즘, 우리가 복원해야 할 감각이기도 하다.
- 양경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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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엇도 단언할 수는 없지만 여러 작품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어떤 경향성을 바탕으로 그에 대한 일말의 추측은 가능할 듯 싶다.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 에서 인물들이 꿈꾸고 바라는 이상향의 '그곳'은 과거 세대, 혹은 아름다운 이전 시절의 이야기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예컨대 [어떤 공동체]에는 "양과 함께 살던 그 시절"을 추억하는 '나'가 등장한다. 그 시절의 '나'와 친구들은 양처럼 걷고 잠들며 스스로 양이 되길 바랐던 "그런 어리석은 종교"에 속해 있었다. 하지만 양을 객체로 대하도록 가르치는 학교와 '나'와 친구들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 때문에 그 믿음과 신앙은 조금씩 옅어져갔다. 이 세계는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 다는 말로 "단순노동"과 "몸 쓰는 일"을 권장하며 그들의 마음에 이상한 생각이 자라나는 것을 경계하는 듯했다. 이제 '나'는 는잠이 들었을 때에만 양의 모습을 그릴 수 있다. 가끔 바람 너무 전해지는 이상한 간지러움과 어떤 징조들을 느끼더라도 이내 놓쳐버리고 만다. "마음에 남은 여덟 명의 노인들" 만이 모두가 잃어버린 기억과 "좋았던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회한처럼 늘어놓을 뿐이다.
_ 조대한 (문학평론가) 해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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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 출판사 서평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라는 제목과 새하얀 표지가 건네는 첫 느낌대로 한여진의 시에서는 유독 흰색이 도드라진다. 표제작을 포함해 여러 시의 배경이 하얀 눈으로 가득한 겨울날인데다 양(「어떤 공동체」)과 흰고래(「기다렸다는 듯 나타나는 밤은 없고」)부터 순무(「순무는 순무로서만」), 밀가루 반죽(「미선의 반죽」), 그리고 “하얀 문”(「검은 절 하얀 꿈」)까지 주요 이미지가 온통 하얀 까닭이다. 이 넉넉한 흰빛은 시집 전체를 눈 덮인 세상과도 같은 고요한 아름다움 속에 자리하게 만든다. 그런데 이처럼 시집의 고즈넉한 정경에 힘을 실어주는 흰색은 한여진의 화자와 만나 또다른 사유를 가능케 한다. 그것은 바로 흰색이 무언가를 써내려갈 수 있는 하얀 종이의 모습으로 드러나면서다. 검은 솥을 들여다보면 아무리 채워도 넘치지 않는 검은 물이 있다 그 속엔 대체 무엇이 있길래 솥은 한없이 검은가 나는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쓰지 않는다 솥이 없는 하루에 대해 쓴다 솥에서 유래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 쓴다 마당을 둘러싼 담장 밖에 대해 쓴다 큰할머니와 할머니와 엄마와 이모와 언니가 아닌 것들에 대해 쓴다 _「솥」에서 신촌 골목길을 걸으며 네가 해준 이야기 누군가 그 얘기를 듣고 한참을 울더니 소설로 쓰겠다고 했다 너는 희미하게 웃었고 사실은 말야, 나도 뭔가를 쓰는 중이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그때 기차가 굉장한 소음을 내며 지나갔다 _「소설처럼」에서 앞서 인용한 시편들에서 알 수 있듯 한여진 시의 화자는 많은 경우 ‘쓰는’ 사람으로 존재한다. 그런데 그의 쓰기는 어째서인지 계속해서 실패하는 것처럼 보인다. 같은 이야기를 공유한 누군가가 그것을 “소설로 쓰겠다고” 선언하는 동안 ‘나’는 “나도 뭔가를 쓰는 중이라고” 말하지 못한다(「소설처럼」). 방금 전까지 선명했던 꿈은 “글로 옮기는 순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게 되고(「초기화」), 완성한 줄 알았던 글은 어느 순간 ‘초기화’되어 ‘나’는 “눈을 뜨면 다시 빈 노트 앞”에 있다(「초기화」). 서사를 지닌 한 편의 이야기처럼 읽히기도 하는 한여진의 시들을 따라가다보면 우리는 몇몇 힌트를 통해 그 이유를 짐작해볼 수 있다. 이를테면 솥뚜껑에 맞아 죽은 ‘나’의 이모와 솥 아래서 불타 죽은 ‘나’의 언니(「솥」), 그리고 영동고속도로에서 트럭 전복 사고로 죽은 ‘나’의 삼촌(「영동고속도로 끝에는 미래가」)을 통해, 더 정확하게는 그들이 맞이한 ‘결말’을 통해서다. 한여진의 화자에게 있어 기록은 일어난 일을 고정시켜버리는 행위인 듯하다. 문장의 마침표를 찍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유일한 결말”(「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미래를 고정시키지 않기 위해 화자가 택하는 것이 바로 ‘다시 쓰기’이다. 그는 하얀 종이 위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검은 글씨를 다시금 하얗게 덮어버리고, 그렇게 만들어낸 흰색 위에 또다시 새롭게 쓴다. “해피 엔딩은 믿을 수가 없”(「미선의 생활」)다던 미선 언니는 아마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실로 두려운 것은 끝도 없이 펼쳐진 막막한 현실이 아니라, 모든 가능성이 다 사라진 채로 너절하게 모습을 드러낸 미래가 아닐까. 그렇기에 시인은 과거의 기억들을 붙잡고 닫힌 엔딩을 거부한 채 초기화된 첫 문장으로 자꾸만 되돌아가려는 것 같다. _조대한(문학평론가), 해설에서 그러니 ‘미선 언니’가 ‘해피 엔딩’을 믿지 못하는 건 당연한 것일 테다. 문학평론가 조대한이 짚어 보였듯 그것은 미래의 가능성을 닫으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여진의 화자는 이미 쓴 종이 위에 계속해서 흰색을 덧입히고 또 덧입히며 끊임없이 미래를 다시 써낸다. “계속 아무것도 아닌 상태”로 남은 하얀 반죽만이 우주가 될 수도 있고 이불보가 될 수도 있으며 천사가 될 수도 있는 가능성을 얻으므로(「미선의 반죽」). 내가 숨쉴 수 없는 공간인 줄도 모르고 공허와 폐허인 줄도 모르고 다른 건 배운 적 없는 나는 그런 세계를 만들겠다고 했다 (…) 눈을 뜬다 숲속에 앉아 있다 고요하지만 살아 있는 것들로 가득한 숲 안경원숭이 비단고사리 하늘말나리 소사나무 코럴블루 양떼구름 새털구름 이런 이름 말고도 그들에겐 다른 이름들이 있을 것이다 진짜 이름들 기록되지 못한 것들 나에게도 나만의 노래와 시와 그림과 소설이 있다고 하면 보지 않을래? 숲의 경계선에 서서 마을로 이어지는 길을 바라본다 오래된 길 하지만 오랫동안 인적이 없던 길 손에 불씨를 들고 그리고 생각한다 말랑한 것들, 역사가 아닌 것들, 기록되지 못한 것들, 내가 나일 수 없던 것들, 그것들에게 이름 붙여주는 일을 하겠다고 그리고 오래 살았다는 남자를 찾아가 그에게 손을 내밀고 나만의 방식으로 그의 이름을 지어주게 될 나의 미래를 _「제목 없는 나의 노래와 시와 그림과 소설」에서 그렇게 한여진의 화자가 다시 쓰고자 하는 미래는 그 자신만의 것이 아니다. 화자는 “오래 살았다는 남자”가 만들어놓은 “내가 숨쉴 수 없”는 세계 위에 “남자 아닌 여자/ 아닌 여자/ 아닌 여자”들도 숨쉴 수 있는 세계를 세우겠다고(같은 시), 오늘 현장에서 죽은 동료의 이름을 기억하고(「기호와 소음」) 끝없이 총성이 울리는 곳에서 스러져간 이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다시 써내려가겠다고 말한다. 잊혀진 기억의 실마리를 끈질기게 붙들고 미처 기록되지 못한 자들에게 이름을 붙여주려는 한여진 시인이야말로 무명의 위 세대들이 남긴 유산의 정당한 계승자일 것이다. 그 미래와 과거가 충돌하는 틈바구니 속에서, 아직 도착하지 못한 존재들과 실패한 기억의 흔적 위에서, “내가 잊어버린 것”과 “네가 잊어버린 것// 사이의 간격”(「초기화」) 너머에서, “지나간 기록에 대한 기록”과 “앞으로 일어날 이야기들”(「제목 없는 나의 노래와 시와 그림과 소설」)이 겹쳐지는 바로 그곳에서 시인의 시는 시작되는 것 같다. _조대한(문학평론가), 해설에서 그러므로 조용하고 둥근, 아름다운 흰빛을 연상케 하는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 「검은 절 하얀 꿈」 「밤 친구」 「나이트 사파리」 같은 시편들에서부터 시작해 여성주의적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오는 「솥」 「캐넌」 「제목 없는 나의 노래와 시와 그림과 소설」과 ‘미선 언니’ 연작, 시사적인 메시지를 강렬하게 전달하는 「팔레스타인에서」 「화염」 「Beauty and Terror」 「혁명과 소음」 등의 작품들까지 경유하고 나면 우리는 비로소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가 지닌 흰색이 마냥 무구하고 투명한 빛깔이 아니라 다양한 색과 “공허와 폐허”마저 모두 감싸안은, 부드럽고도 강인한 눈과 같은 빛깔임을 알 수 있다. 창밖으로 하얀 눈이 내리고 두부는 평화롭게 구워지고 있는 가운데 다시 마주한 빈 노트 앞에서(「초기화」),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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