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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서 가장 미스터리한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장영실이 1순위일 겁니다.
노비 출신인 장영실은 세종의 발탁으로 '혼천의', '자격루', '앙부일구', '측우기' 등을
개발해 조선의 과학기술을 최첨단 수준으로 끌어올렸고,
한글 창제를 제외하면 세종이 이룬 업적의 절반은 장영실의 공이라고 보는
전문가들도 있죠.
이런 업적을 인정받아 종3품 대호군의 벼슬까지 받았는데,
어느 순간 역사에서 사라져버렸습니다.
우선 그가 사라진 이유는 간단합니다.
1442년 3월 16일, 세종이 타야 할 가마를 부실하게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의금부의 탄핵을 받아 곤장 80대를 맞고 파직한 것으로 세종실록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본가인 아산 장씨 족보에 따르면 "동활자주조, 채광제련을 감독하였고,
1442년 세계 최초로 천문측우기를 발명하였다.
그 후 관직은 상호군에 이르렀으나,
선생의 업적이 세월이 흐를수록 높이 평가되어
1983년 전국의 후손과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모여 과학선현의 기념사업회를 결성하고,
이듬해 선생의 뜻을 담아 충남 아산군 인주면 문방리에 있는
동래시조 서의 표착지에 추모기념비를 세워 유지를 기리고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종의 총애를 받아 조선의 과학기술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 장영실은 541년이 지난 1983년이 되어서야 추모비를 세우고 그 가묘를 만들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노비 출신으로 종3품 벼슬까지 한 조상에 대한 대우 치고는 기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결혼을 했는지,
자손은 있는지 등 아무런 자료가 남아있지 않은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럼 족보에 나타나있듯 장영실이 세종 시절 '동활자주조', 즉 놋쇠활자를 만드는 것을
감독했었다는 족보 내용을 기억해두고, 잠시 2005년으로 이동해보겠습니다.
사실 "장영실이 구텐베르크에게 금속활자 인쇄술을 알려줬을 것이다."라는
추론이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은
2005년 5월 18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개최된 '서울 디지털포럼 2005'에서였습니다.
이날 개회식에 참석한 전 미국 부통령 엘 고어는
"스위스 인쇄박물관에서 전해 들은 이야기인데,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할 즈음 한국으로부터 막 귀국한 교황의 사절단에
금속활자에 관한 그림 등의 자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사절단은 구텐베르크가 알고 지내던 친구였습니다.
구텐베르크가 1453년 이 놀라운 인쇄술의 발명을 유럽에 알릴 때
아마 한국을 언급하는 것을 잊은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참고로 이 연설은 영상으로도 남아 있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의문이 하나 생깁니다.
1450년 경, 교황 사절단은 실제로 유럽에서 한국을 방문했을까 하는 의문이죠.
그런데 이는 사실입니다.
동양과 서양 금속활자 발명 사이에 숨겨진 관계를 밝히기 위해 제작된 다큐멘터리 영화
[직지코드]는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합니다.
1455년 이전 고려와 유럽의 문화 교류 흔적을 찾기 시작하다
마침내 로마 바티칸 수장고에서 1333년 교황 요한 22세가
고려왕에게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를 찾아냈죠.
"고려왕이 우리가 보낸 그리스도인들을 환대해줘서 기쁘다"는 내용의 이 편지는
한국에 온 최초의 유럽인이 1594년 세스페데스 신부가 아님을 밝혀내는 놀라운 발견이자, 고려와 유럽의 연결고리가 될 중요한 발견이었죠.
이미 1333년 경부터 교황사절단이 왕래할 정도였다면
유럽에 고려의 금속활자 인쇄술이 전파되었다는 주장이 힘을 받으니까요.
그렇다면 엘 고어 전 부통령이 주장했던 "구텐베르크는 고려를 방문해 인쇄술 기록을 가져온 교황사절단 친구를 만난 후 금속활자를 만들었다"는 말도 충분히 이해됩니다.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 인쇄술을 발명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여러 경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영국의 동서문명교류 학자 허드슨은 1931년 [유럽과 중국]이라는 저서에서
"구텐베르크가 동양의 활자 인쇄술에 관해 누군가로부터 들은 것이라도 있다면
이미 기술의 절반은 성공한 것이다.
구텐베르크는 동서교역로를 통해
동양의 인쇄 기술에 관한 정보를 들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독자적 발명 과정을 밝힐 의무가 있다."라며
구텐베르크의 독자적 발명일 가능성은 적으며,
한국의 금속활자 인쇄술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제기했죠.
이러한 추론은 미국 뉴욕타임스 기사를 통해서도 가능하다.
2001년 1월 27일, 뉴욕타임스에 실린
'역사는 구텐베르크에게 너무 관대했는가'라는 기사에서
기자는 "한국인들은 금속활자를 만들기 위해 모래 주형을 사용해
이미 최소 30년 동안 책을 대량 생산해 왔지만,
학자들은 구텐베르크가 그들과 접촉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를 찾지 못했다"고 적었다.
뿐만 아니라 [서구 문명은 동양에서 시작되었다]라는 저서로 유명한
영국 셰필드 대학교의 존 홉슨 교수는
2014년 대구 MBC 특집 다큐멘터리 [구텐베르크, 고려를 훔치다]에 출연해
"보다 많은 한국인은 한국의 역사를 연구해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 인쇄술을
한국에서 얻은 것이 맞는지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위 [직지코드] 영화팀의 취재 결과,
구텐베르크보다는 프랑스 남부 아비뇽의 인쇄업자 왈드 포겔이
1444년쯤 금속활자를 전파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하기도 했는데,
이 시기는 장영실의 실종 시기와 교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세종실록에는 "장영실은 1442년 3월 16일에 곤장 80대를 맞고 파직되었다"는
단 한 줄의 기록만 존재할 뿐, 이후 그 어떤 기록도 남아있지 않는다.
그의 사망연대는 물론 결혼 여부 등에 대해서도 아무런 기록이 없죠.
그렇다면 이런 추론도 가능할 겁니다.
"장영실은 파직 후 독일로 건너가 금속활자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추론 말이죠.
이런 추론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우선 문명이라는 것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기 마련이다.
현대 문명의 총아로 불리는 반도체 역시
처음 진공관을 대체하기 위한 트랜지스터로 개발됐다가 차츰 8비트, 16비트, 32비트, 64비트로 발전하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삼성전자 역시 64kb D램을 국내 최초로 개발해
지금은 테라 단위의 반도체를 개발하고 있죠.
조선의 자랑거리 중 하나인 영롱한 비색의 청자도 수천 년의 세월을 필요로 했다.
처음에는 아무런 무늬도 없는 토기를 만들다
차차 무늬를 새기기 시작해 고려청자에 이르렀다.
일본은 임진왜란까지 자기를 만들지 못해 목기를 사용하다
조선 도공들을 납치해서야 비로소 도자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렇듯 금속활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수많은 시행착오와 과정이 필요하다.
처음엔 조잡한 목판인쇄부터 시작해 팔만대장경이라는 걸출한 보물이 나왔고,
목판인쇄에서부터 금속활자가 개발됐을 겁니다.
점차 개선되어 활자를 만들기 위한 재료들을 변경해가며 시도하다
1434년 세종대왕에 이르러서야 인쇄술의 백미라는 '갑인자'를 완성했죠.
갑인자를 개발하기까지는 수양대군을 비롯한 왕족과 이천,
장영실, 이순지, 집현전 직제학 김돈과 김빈 등등 당대 내로라하는 과학자와 문신들이
총동원됐습니다.
이미 오래전 고려시대에 금속활자가 개발됐음에도 제대로 된 활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내로라하는 과학자들이 전부 동원해야 가능했던 프로젝트였던 겁니다.
그런데 엘 고어의 주장처럼 "구텐베르크가 친구가 전해준 이야기만으로
금속활자를 만들어 인쇄했다"는 것은 어림없는 주장이다.
당시 전 세계에서 으뜸가는 과학기술을 가진 조선에서도
모든 전문가들이 총출동해야 가능한 일을 개인인 구텐베르크가 혼자 개발했다는 것일까?
더구나 구텐베르크 금속활자는 조선의 그것보다 훨씬 뛰어나고
인쇄 속도와 분량도 많은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일본이 도자기 만드는 상식이 없어서 만들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숙련된 도공이 없어서 만들지 못했던 것이다.
금속활자도 마찬가지로 엄청나게 숙련된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
원 개발국인 한국보다 더 뛰어나고, 더 빨리, 더 많은 인쇄를 가능케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유일한 가능성은 금속활자로 이미 책을 만들어내고 있던
조선에서 건너간 숙련된 전문가가 도왔다는 것이고,
그 인물이 세종 시절 '동활자주조'를 감독했던 장영실이라는 추론이 충분히 가능합니다.
엘 고어는 "교황청 사절단 친구를 만난 뒤 금속활자를 만들었다"고도 했는데,
구텐베르크의 생애로 볼 때
그의 교황사절단 친구가 기록으로 남아있는 1333년 조선을 방문했다는 것은
시기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장영실과 구텐베르크는 같은 시대 사람으로 엘 고어가 말한 그 친구가 교황사절단을 따라 유럽으로 건너간 장영실이 아니었을까요?
장영실은 갑인자 제조에 참여해 금속활자를 개발했던 경험이 있었고,
당시 독일의 합금 기술과 합해져 개선된 금속활자를 개발했다고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겁니다.
장영실과 같은 천재적인 과학자라면 조선에 있을 때보다
더 발전된 기술을 개발했을 수 있으니까요.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만든 과정은 다음과 같다.
'수동주형기'를 발명한 후 글자들을 단단히 고정해주는 '죔틀',
그리고 '죔틀' 위 종이를 일정한 힘으로 눌러주는 '인쇄용 누름틀'을 개발했다.
그리고 금속활자들 위 종이 위에 적당한 점성으로 묻어나게 하는 잉크 제조법을 완성했고, 인쇄에 적합한 종이를 만드는 기술도 발명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가 발명한 것만 보더라도 수동주형기, 죔틀, 인쇄용 누름틀, 잉크, 인쇄에 적합한 종이에 이르는데, 이들 하나하나가 전부 수많은 장인들이 수백 년은 매달렸어야 할 수 있는 발명품들입니다. 이걸 불과 몇 년 사이 혼자서 개발하는 것이 가능했을까요?
일례로 수동주형기만 하더라도 모래 주물사를 이용해 주형틀을 제작하는 기술인데,
당시 유럽에는 주형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르네상스 시기에 잠시 성행하다가 19세기 중흥을 맞이해 이후 가장 활발하게 사용됐죠.
하지만 우리 조상들은 이미 2500년 전 모래 주형틀을 이용해 '다뉴세문경'을 만들었고,
이는 국보 제141호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이미 이러한 주형틀을 이용한 현대시대의 슈퍼컴퓨터로도 그릴 수 없는 무늬를 새기는
기술을 2500년 전에 우리 조상들은 가졌던 겁니다.
또 한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인쇄에 적합한 잉크를 만들었다는 점인데,
이 방식이 우리나라에서 먹물을 만드는 방법과 동일하다.
구텐베르크는 램프 그을음과 아마씨 기름을 혼합해 인쇄에 적합한
새로운 잉크를 만든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 방식이 우리가 먹물을 만드는 방법과 같다.
우선 아마씨는 옷감이나 수의를 만드는 삼베의 씨앗을 말하는데,
전 세계에서 삼베를 옷으로 만들어 입는 민족은 한민족이 유일하다.
더구나 먹은 크게 송연묵과 유연묵으로 나뉘는데,
송연묵은 소나무를 태워 얻은 그을음으로 만들고,
유연묵은 식물 씨앗에서 얻은 기름을 태워서 생긴 그을음을 재료로 만든 먹입니다.
이 먹을 만드는 방법은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비법이라서 절대 타인에게 전수하지 않으며, 그 때문에 붓, 종이, 벼루 등은 인간문화재가 있지만, 먹은 없다.
또한 서양 최초의 잉크는 목탄을 갈아서 만들었고, 이후에는 오징어 먹물을 사용해 동물의 뼈나 깃털 등의 재료를 이용해 양피지의 글씨를 쓰는 것이 고작이었다.
18세기까지 서양에서는 필기구로 깃털펜을 사용했죠.
인쇄술이 발달하면 자연스레 그에 적합한 잉크가 발달하기 마련이고,
목판에서 시작해 금속활자로 발전하는 과정에서도 자연스레 잉크가 발달한다.
금속활자를 세계 최초로 사용한 한국 땅에서 수백, 수천 년에 걸쳐 발전한
기술이 단 몇 년 만에 구텐베르크가 발견해냈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 아닐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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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소개했던 책 《창발의 시대》에는 세계를 뒤흔든 40년의 역사(1490~1530년)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동양보다 못 살았던 서양이 어떻게 세계의 중심으로 거듭날 수 있었는지, 그중에는 종교개혁과 서양의 지식산업에 영향을 미친 인쇄술이 포함되어 있었다.
1440년대 후반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금속활자 인쇄술이 40년 역사의 주춧돌이었던 셈이다. 나는 의문이 들었다. '정말 구텐베르크가 발명했던 것이 맞을까?'
현존 세계 최초 금속 활자본은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인쇄한 '직지심체요절'이다. 다만 현존하지 않아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할 뿐이지 최초 금속활자 인쇄술은 1234년에 만들어진 '상정고금예문'이다. 즉 구텐베르크보다 200년이나 앞서있다.
의문이 든다.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게 맞을까? 아무리 옛날이라고 하지만 200년은 몇 대에 거쳐 몇 번이고 고려에서 베네치아를 오고 갈 수 있는 거리이다. 1950년대 영국 학자 버널은 세계 과학사에서 우리나라의 금속활자 인쇄술이 구텐베르크의 인쇄술과 관련이 있을 거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미국의 전 부통령 앨 고어 또한 2005년에 15세기 교황청 사절이 우리나라에서 인쇄술을 배워 갔는데, 그 사절이 구텐베르크의 친구였고 구텐베르크에게 가르쳐 주었음을 주장했다.
우리는 근대 과학이 오롯이 서양과 유럽의 힘으로만 발명되고 발전한 것으로 아는 경우가 많다. 바로 이런 점이 책 《과학의 반쪽사》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내용의 핵심이다.
역사는 단편적으로 편식을 하게 되면 문제가 생길 수 있고 후대에게 올바른 지식을 전달할 수 없다. 역사는 씨줄과 날줄로 켜켜이 쌓고 검증했을 때만이 진정한 학습의 효과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과학의 반쪽사》는 과학과 역사에 반쪽만 알고 있었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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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정치사상에 대한 통념은 그 초기 시작과 발전과정이 르네상스 인문주의와 계몽주의에 기반한 지극히 세속적 질서의 맥락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신화에 가깝다. 하버드 대학교 역사학자 에릭 넬슨(Eric Nelson)은, 근대 초기 종교개혁으로 인한 개신교의 신학적 법철학과 가톨릭의 정치론 및 교회법, 그리고 유대교의 사상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세속 이론만큼이나 서구 정치사상과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를 통해 촉발된 종교개혁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붙인 그의 대자보가 전 유럽을 휩쓴 종교개혁의 신호탄으로 작용하게 한 매우 실질적이고 중대한 일전의 한 사건을 먼저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그로부터 약 70년 전 점화된 구텐베르크 인쇄혁명이다. ‘구텐베르크 인간’ 신성 로마 제국 마인츠 출신의 요하네스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 1400? ~ 1468)는, 1440년 경 자신의 야금기술과 주조기법에 와인프레스 등을 응용·접목해 새로운 ‘가동형 금속활자(movable metal type)’ 인쇄술을 창안했다. 기존의 베껴서 기록한 필사 방식이나 목판 인쇄술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높은 생산력과 양질의 인쇄물을 훨씬 더 싸게 제공하는 획기적인 출판기법이었다. 구텐베르크는 라틴어 문법책, 가톨릭교회의 미사 전서 및 면죄부 등을 인쇄하면서 이 금속활자 인쇄술을 마스터하였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1450년대 초부터 거금의 투자를 받아 라틴어 성경 대량 인쇄에 착수했다. 결과는 가히 혁명적이었다. 일일이 베껴 쓰는 기존 필사 방식으로는 3년에 겨우 한권 정도 복제·생산되었던 성경이 같은 기간에 무려 180권이나 ‘찍혀’ 나왔다. 필사본에서 종종 발생된 오·탈자나 왜곡도 물론 없었다. 무엇보다 구텐베르크가 개발한 이 ‘신기술’은 이전의 인류가 알지 못했던 ‘책의 시대’를 열었다. 과거 책 한권을 출간하는 데 평균 2, 3개월이 걸렸었다면, 이제는 한 주에 500권의 책이 생산 가능해졌다. 또한 구텐베르크 인쇄기법은 그 원리만 알면 금방 모방·응용이 가능했기 때문에 유럽 전역에 기하급수적으로 퍼져나갔다. 1462년 마인츠에서 일어난 전쟁은 구텐베르크 인쇄소에서 일했던 많은 기술자(장인)들을 본격적으로 유럽 곳곳으로 흩어지게 했다. 1500년에 이르러선 유럽 236개 도시에 약 1,000곳의 인쇄소가 생겨났고, 이곳에서 일하는 인쇄 기술자(공)들은 약 1만에서 2만 명에 이르렀다. 구텐베르크 이전 1천여 년의 중세시대를 통틀어 유럽에서 약 10만여 권의 책이 생산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구텐베르크 이후 불과 50년 만에 최소 3만 종의 책이 대략 1,500만 부에서 2,000만 부가 생산되었다고 하니, 이 ‘문자의 폭발’이 인류에게 가져다 준 문명적 기여는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막대하다. 1999년 타임지, 그리고 2000년 대영박물관은 ‘지난 1천년의 인물(Person of the Millenium)’로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를 선정했다. 저명한 미디어이론가이자, ‘지구촌(global village)’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내기도 한 문명비평가 마샬 맥루한(Marshall McLuhan)은 근대의 인간을 아예 ‘구텐베르크 인간’이라고 불렀다. 청각-촉각 등을 포함한 오감을 통해 정보를 수용했던 과거와 달리, 이 시각적 문자홍수 속의 ‘활자인간’은 그 선형적(linear)이고 정형화된 질서에 의해 보다 내성적이고 이성적이며 개인적인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맥루한은 그런 인간을 ‘조각난’ 인간이라며 비판적으로 바라보지만, 결과적으로 이 문자문화는 유럽인들로 하여금 부족주의 및 집단적 세계관을 벗어나 표준화된 객관성과 합리성 및 자율성을 추구하는 독립된 개인들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준비시켰다. 이처럼 ‘개혁을 위해 준비된’ 바탕에서 1517년 10월 31일, 33세의 마르틴 루터는 마침내 비텐베르크 성(Castle)교회 정문에 95개조 논제를 써 붙였다. 종교개혁과 자유주의 95개조 논제의 요지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모두가 그 존엄성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 평등하다는 것이었다. 또한 모든 사람이 각자 ‘하나님 앞에 홀로 선,’ 즉 ‘독립(獨立)’된 개인으로서의 주권과 자율과 양심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성직을 사고팔거나, 교회의 권위를 이용해 개인의 구원을 거래하는 면죄부를 팔아 이익을 꾀하는 것은 크리스토교(기독교)의 본래 정신에 전면 위배되었다. 구원은 오직 회심을 통한 개인의 믿음으로(sola fide) 주어지는 것이었다. 미 의회도서관에 전시된 구텐베르크 성경 이내 루터는 일반인들이 성직자를 통하지 않고 성경을 직접 접할 수 있도록 독일 언문(vernacular language)으로 성경을 번역했다. 그의 대자보가 그랬듯이, 루터의 독일어 성경을 비롯한 그의 설교문 및 논증들은 물론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을 통해 빠른 속도로 보급되었다. 그의 설교문 중 최소 2건은 2, 3년 만에 20쇄를 찍기도 했다. 한 추정에 따르면 1518년부터 1525년까지 독일에서 출판된 모든 책의 무려 3분의 1이 루터의 저작이었다고 한다. 이후 루터의 개혁은 스위스의 츠빙글리(Zwingli), 프랑스의 칼뱅(Calvin), 스코틀랜드의 녹스(Knox), 그리고 영국의 틴데일(Tyndale) 등에 의해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다. 국가체제의 압제와 집단의 불합리에 ‘저항하며’ 죽음을 무릅쓰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는 프로테스탄트(Protestants, 개신교)들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들은 그 어떤 왕이나 교황보다 더 높은 권위인 헌법이 있다고 설파하며, 더 나아가 개인의 자유에 의거한 공화정을 주장했다. 이들의 저항 정신은 오늘날 서구문명이 누리고 있는 근대 자유주의의 뿌리가 된 것이다. 영국의 교회사학자 알렉 라이리(Alec Ryrie) 교수는 『Protestants(프로테스탄트)』라는 저작에서 개신교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을 관찰하며 종교개혁의 정신이 어떻게 근대 서구문명을 이루어냈는지 잘 보여준다. 그는 특히 ‘사상의 자유’와 ‘민주주의,’ 그리고 ‘비정치성(apoliticism)’이 근대 사회에 기여한 개신교의 정신이라고 설명한다. 개인이 자유로이 의문을 품는 것을 장려하는 프로테스탄트 정신은 민주주의에 힘을 실어주었고 시민들로 하여금 부당한 권위에 민감하게 대처하게 했다. 또한 끊임없는 혁신과 개혁을 가능하게 하여 인류에 공헌했다. 그러면서도 이생의 유토피아가 아닌 천국을 바라는 개신교의 신념은 그들의 혁명적 열기를 식히고 신정(theocracy)의 기대를 잠재워 비정치성을 유지하게 했다. 물론 때로는 신앙의 자유를 침해하는 통치세력에 대해서는 담대히 맞서거나 뒤집어엎기도 했지만 말이다. 한국의 구텐베르크와 프로테스탄트 정신은? 마지막으로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보다 무려 80여년이나 앞섰던 ‘한국의 자랑’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1377년 고려 청주에서 찍어낸 ‘직지심체요절’이다. 심지어 구텐베르크의 인쇄기술에 ‘직지’가 영향을 미쳤다는 식의 억지스런 다큐영화(‘직지코드’)도 있었고 유명작가의 소설도 있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직지’는 자랑이라기보다 한국인에게 반성해야 할 주제다. 기술이 그렇게 빨랐음에도 인류는커녕 한반도에서조차 아무런 공헌이나 정보혁명을 일으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개발과 거의 동시에 있었던 조선왕 세종의 한글 창제(1446)도 마찬가지다. 한글은 이후 수백 년 동안 아무런 문화나 문학도 만들지 못했다. 물론 한글은 자모의 결합을 통해 각 글자가 표현되기 때문에 금속활자 인쇄술을 활용하기 위해선 한자보다도 더 많은 활자를 주조해야 하는 기술적 문제도 있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인쇄술 개발의 주체와 동기에 있었다. 구텐베르크 금속활자는 민간 개인이 상업적 목적으로 제작한 것이었지만, 직지와 한글은 국가의 필요에 의한 정책적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왕조시대 책의 출간은 모두 왕의 결정이었고, 책값은 터무니없이 비쌌으며, 인쇄기술과 정보는 국가가 독점했다. 심지어 민간의 책 생산이나 배포를 처벌하기까지 했다. 근대로의 발전은커녕 오히려 중세 질서를 고착화한 것이다. 결국 한국인은 서구문물을 받아들이면서 근대에 들어선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 결정적인 매개역할을 종교개혁의 열매인 개신교가 감당했다. 심지어 한글에 띄어쓰기를 더해 실제 활용 가능한 ‘언문’으로 만들어준 인물은 만주에서 활동하던 스코틀랜드 출신의 존 로스(John Ross) 선교사였다. 물론 한글로 된 최초의 단행본도 성경이었다. 한글로 된 최초의 신문 「독립신문」 또한 그 창간과 발행에는 선교사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최근 한국 사람의 근원을 추적하는 방대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함재봉 교수는, 한글이 “개신교 선교사들에 의해 재발견되고 재창제”되었다고 말한다. 한국인이 최초로 선거와 자치를 경험한 것도, 1948년 건국 당시 5.10선거보다 훨씬 전인 1887년 한국 최초의 조직 장로교회 새문안교회를 공식 창립하면서 투표로 두 명의 장로를 선출하면서였다. 이후 1894년에 세워진 곤당골교회(서울 승동교회 전신)에서는 백정이 양반 후보들을 누르고 장로로 선출되기도 했다. 바로 훗날 인권운동가가 된 박성춘이다. 또 1905년에 시작된 전북 금산교회에서는 한 집에서 자기 주인을 제치고 먼저 장로로 선출된 머슴도 있었다. 바로 이자익 목사다. 그가 섬겼던 주인 조덕삼 장로는 자신의 머슴인 이자익 장로를 아예 평양신학교에 보내 목사로 키운 것이다. 이렇게 한국인은 종교개혁의 프로테스탄트 정신을 통해 아래로부터 ‘탈조선’하며, 개인 자유와 권리를 서서히 확장하고 다가오는 민주주의를 준비했다. 이러한 정신적 토양이 있었기 때문에 훗날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자유민주공화국을 건국할 수 있었던 것이다. &&&&&&&&&&&&& -> 생산력의 비약적 발전 *1455년 뒤 인쇄기술의 향상으로 성서 출간 : 42행 성서( 총1275페이지) 42행 성서 (총 1275페이지) *1997년 미국의 시사주간지 <라이프>는 지난 1천 년 동안 인류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그 첫 번재로 금속활자를 발명해 성경을 찍어낸 일. *활자 인쇄술의 발명에 따른 영향 : -르네상스 운동(문예부흥)이 이탈리아에서전유럽으로 확산 -종교개혁 운동 -대학의 증가 13세기부터. 교과서 출판을 촉진 -시민계급의 출현 : 자신들의 사상을 출판물을 통해 전달 *인쇄술은 50년 만에 유럽 전체에 전파됨 *인쇄술의 발명 결과 : 1)고전에 대한 지식을 소생 2)지식과 정보의 대량생산 및 보급이 가능해짐 3)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됨. *출판혁명의 영향 : -콜럼버스의 신대륙발견 : -> 그리스의 천문학자 톨레미(ptolemy)의 책과 아랍의 지리책이 영향 -중세사회가 근대로 넘어감 &&&&&&&&&&&&&&&&&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은 (2005. 5.) 19일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디지털 혁명은 커뮤니케이션 부문에서 인쇄술에 이어 세계에 주는 두 번째 선물이라고 말했다. ... “서양에서는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는 당시 교황 사절단이 한국을 방문한 이후 얻어온 기술”이라고 말했다. 그는 ...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할 때 교황의 사절단과 이야기했는데 그 사절단은 한국을 방문하고 여러 가지 인쇄기술 기록을 가져온 구텐베르크의 친구였다”고 전한 내용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미국의 대통령 후보가 한국을 높이 평가해 준 것을 좋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리둥절 하는 모습이었다. 얼마 전 청주TV방송국에서 활자실크로드라는 다큐멘타리가 실감나게 방영되었으며 인기가 좋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뭍으로 떠난 서방님을 기다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많은 가능성을 제시했지만 근본적인 답을 얻을 수 없었다. 비록 중국,일본,프랑스, 독일 등 전 유럽과 전 세계를 돌아다녔지만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을 것이다. 옛 말에 칭찬은 많이 하고 병은 알리라 했듯이 멀리서온 벽안의 손님이자 미국의 큰손인 앨 고어 부통령이 “한국의 디지털 혁명은 역사적으로 보면 인쇄술에 이어 두 번째로 획기적이고 혁신적인 기술발전에 기여하는 사례가 될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그 교황사절단이 조선에는 왔었다는 이야기를 암시적으로 하였다. 그의 발언은 1997년 이후 2번째 발언으로 그는 미국 부통령 출신으로 미국 극비정부문서를 접근할 수 있는 신분이었으며 극비문서를 통하여 구한말 미국이 한 짓을 잘 알고 있을 것이며 그러한 정보를 바탕으로 이야기 한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조선은 이성계의 건국이후 고려의 인쇄문화를 충실히 계승하여 더욱 발전시켰으며 계미자(1403년),경자자(1420년),갑인자(1434년) 등 전성기 조선의 활자는 고려의 ‘상정예문’ 이래 200년 가까이 실험을 거듭해 탄생했다. 반면 구텐베르크는 1455년 성서 인쇄에 성공할 때까지 고작 10년을 투자했을 뿐이다. 조선 활자가 수많은 사람들의 집단 창작품인 반면, 구텐베르크는 어느 날 갑자기 세계적인 발명품을 만들어냈다. 이 때문에 구텐베르크가 중국의 교니 활자나 조선 계미자 등으로부터 영향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학자도 있다. 중국의 목판 인쇄술이 널리 유럽까지 전파된 것과 달리, 활자 인쇄술은 아랍에도 닿지 못했다. 14세기 초 페르시아의 대재상인 라시드 에딘의 ‘역사집성’을 보면 목판 인쇄술에 대해서만 서술하고 있을 뿐 활자 인쇄술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없다. 아랍에 닿지 않았다면 독일에 중국의 활자 인쇄술이 전해졌을 가능성은 더욱 희박하다. 그렇다면 구텐베르크가 조선 활자를 만났을 가능성은 없을까. 조선 활자 인쇄의 전성기는 15세기 초반으로 구텐베르크보다 20∼30년 앞선다. 당시에는 해상 실크로드가 활발했고 조선은 명나라와 티무르, 위구르를 거쳐 유럽까지 사신을 보내고 무역 교류를 했다. 활자가 전해졌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런 교류 사실을 토대로 영국의 허드슨은 그의 저서 ‘중국과학사’에서 “한국의 금속활자가 볼가 강을 넘어서 서양에 전파됐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학자도 있지만 19세기 서세동점은 세계사적인 변화와 자본주의 첨병이자 제국주의의 리더국가인 영국을 중심으로한미국,프랑스,독일,일본,중국의조선의 의 분할 전략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고려시대의 금속활자 발명은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을 것이다. 구텐베르그는 좋은 친구 덕분에 최고의 장사아이템을 얻었고 그는 로마교황청에서 보낸 사절단의 일행이 조선을 방문하여 얻어간 금속활자를 이용하여 알파벳으로 바꾸어 크게 히트한 것이 구텐베르그 금속활자인 것이다. &&&&&&&& 세계 최고(最古) 금속활자 인쇄본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직지)’은 1972년 프랑스국립도서관(BnF) 임시직으로 일하던 한국인 박병선(1928~2011) 박사가 도서관 수장고에 보관돼 있던 것을 처음으로 발견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프랑스국립도서관에서 11일 개막한 ‘인쇄하다! 구텐베르크의 유럽’ 전시를 계기로 새로운 증언이 나오고 있다. 이 전시에서 ‘직지’를 50년 만에 일반에 공개한 프랑스국립도서관은 13일 “1952년 ‘직지’를 기증받기 이전부터 이 서적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고 밝혔다. 도서관 측이 세계 최고 금속활자 인쇄본이란 사실을 모르고 방치하던 유물을 박병선 박사가 새롭게 발견한 것이 아니라는 지적이다. 프랑스국립도서관은 이날 본지 질의에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1853~1924)가 직지를 구입해 프랑스에 가져갈 때부터 금속활자로 만든 가장 오래된 책임을 알고 있었고,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한국관에 전시될 때도 ‘금속활자로 인쇄된 가장 오래된 책’으로 소개했다”고 했다. 그리고 “동양학자 모리스 쿠랑이 1901년 펴낸 ‘한국 서지’에도 직지가 세계 최고 금속활자본이라는 언급이 있다”며 “그때부터 직지의 존재와 (직지를 만드는 데) 사용된 기술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틈만 나면 서고를 뒤져 먼지 쌓인 서고에서 ‘직지’를 발견했다.” 생전 박병선 박사는 본지를 포함해 여러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암 투병 중이던 2009년 병실 인터뷰에서 그는 “6·25전쟁 직후 프랑스에 건너갔다. 애초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취직한 것은 외규장각 도서를 찾기 위해서였는데, 직지를 먼저 발견했다”며 “고활자본을 해독하기 위해 백지 상태에서 공부를 시작했다”고 했다. 최고 금속활자본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활자를 직접 만들어 찍어보다 세 번이나 집에 불을 낼 뻔했다는 언급도 있다. 국내 서지학자들은 “프랑스국립도서관에서 도서의 가치를 알고 귀중본으로 관리해왔기 때문에 박병선 박사가 ‘직지를 발견’했다는 건 과장을 넘어 왜곡”이라고 말했다. 직지는 1377년 충북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간행됐다. 초대 주한 프랑스 공사를 지낸 플랑시가 조선에서 구입해 프랑스로 가져간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프랑스 경매에 나온 직지를 수집가 앙리 베베르(1854~1942)가 매입했고, 1952년 베베르의 상속자가 프랑스국립도서관에 기증했다. 황정하 세계직지문화협회 사무총장은 “한국학 학자인 고(故) 다니엘 부셰 박사에 따르면, 경매시장에서 직지가 앙리 베베르에게 팔린 후 프랑스국립도서관은 직지의 세계사적 가치를 알았고, 도서관장이 세 번이나 베베르를 찾아가 팔거나 기증해달라고 요청했다”며 “사후 기증하겠다는 약속을 받았고 상속자가 이를 지킨 것”이라고 했다. 직지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건 본지 특종 보도였다. 1972년 5월 28일 자 1면 머리기사로 보도된 ‘고려 금속활자본 직지심경 세계 최초 공인’ 기사다. 신용석 당시 파리특파원은 “유네스코가 ‘책의 역사’ 종합전에 새로 발견된 고려 ‘직지심경’을 전시함으로써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임이) 공인됐다”고 썼다. 이 기사에 박병선이라는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신 전 특파원은 통화에서 “평소 친분을 쌓았던 도서관 동양문헌실 책임자 마리 로즈 세규이 여사로부터 ‘한국에서 오래 전 금속활자로 인쇄한 책이 전시된다’는 얘기를 들었고, 열흘 뒤 세규이 여사가 수장고의 귀중본 보관소에서 장갑을 끼고 책을 직접 보여줬다”고 했다. 그런데도 왜 ‘직지 대모(代母)’의 신화가 만들어졌을까. 청주고인쇄박물관 학예실장을 지낸 황정하 사무총장은 “1996년부터 박병선 박사를 만나기 시작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직지는 내가 찾았다고 하지 말라’고 본인이 얘기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직지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고, 본인이 부각되면서 어느 순간부터 언론에서 물으면 그냥 씩 웃고 대답을 안 했다. 기자들은 그걸 긍정으로 받아들이고 ‘직지 대모’라고 계속 썼다. 말년이 되면서는 본인도 자신이 발견했다고 굳게 믿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박병선 박사는 당시 프랑스국립도서관에서 일주일에 15시간 일하는 임시직으로 근무했다. 도서관에서 그의 역할은 사서들의 한국 관련 자료 정리를 도와주는 일이었다. 1972년 ‘세계 도서의 해’ 전시회가 끝난 후 그는 동료 직원에게 부탁해 인화한 직지의 흑백 사진을 가지고 12월 17일 한국에 왔다. 당시 강주진 국회도서관장 등 3인이 사진을 감정했으나 의견이 서로 달라 금속활자본이라는 명확한 근거에 대한 답을 얻지 못했다. 12월 27일 관련 학자 20여 명이 국회도서관장실에 모여 ‘직지’ 사진을 재감정했고, 이 자리에서 금속활자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지난 2021년 ‘직지, 이제는 말할 수 있다’를 펴낸 황 총장은 “박병선 박사의 공은 원본 크기 사진을 가지고 와서 국내 서지학자들이 연구할 수 있도록 발판을 놓은 것”이라며 “이제라도 잘못 알려진 진실은 시정돼야 한다”고 말했다 &&&&&&&&&&&&&&&&&&&&&&&& 직지 하권(下卷) 이양우 청주 흥덕사에서 쇠북을 울리며 1377년 7월 간행한 직지 역사의 빛으로 탄생하나니 총 38장 1책의 직지 하권 세상 천지를 다 둘러보아도 단 1권의 불조(佛祖) 가르침 용광로에서 녹인 쇳물로 주조한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금속활자본 직지 대웅전 연화문 열고 삼배 석탑 탑돌이 소원을 빌고 빌어 주자소의 뜨거운 활자에 유연 먹물을 칠하여 천년 한지에 찍어 간행된 직지 프랑스 도서관에 보관된 민족의 자부심을 박병선 박사가 찾아낸 집념 2001년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천지 자연 속에 기운이 넘치네 세계 인류문명에 이바지한 인쇄의 창조적 선구자 지구촌의 풍요한 생활을 이룬 직지는 영원하리라 고려인의 문화예술이 숨 쉬는 문화 강국 대한민국 직지의 꽃은 세계 문화에 찬란히 빛나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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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일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에서는 한국 문화사에 길이 남을 전시가 끝났다.
지난 4월부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 실물로 널리 알려진 14세기 후반 고려시대 불자들의 책이 살포시 펼쳐진 모습으로 세계적인 인쇄문화 기획전의 서두를 수놓았다. 이 고서의 이름을 한국인들은 대부분 안다. <직지> 또는 <직지심체요절>이란 약칭으로 알려진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다.
‘구텐베르크 인쇄를 말하다’란 제목의 파리 기획전은 기실 유럽의 인쇄문화에 혁명을 일으킨 15세기 활판업자 구텐베르크의 업적을 재조명하는 자리였다. 하지만, 북원 황제의 연호인 선광 7년인 1377년 부처와 역대 고승들의 어록을 간추려 간행된 <직지>를 전시 맨 앞머리에 놓음으로써 세계 인쇄문화사에서 가장 선구적인 유물이자 금속활자 실물 최고본의 자리에 있음을 확정적으로 전세계 학계에 선포하는 상징적 의미가 지대했다.
많은 한국인들이 1972년 파리에서 유네스코가 개최한 책의 해 기획전에
프랑스국립도서관에 묻혀있던 <직지>가 출품됨으로써 세계 최고본 금속활자로 공인됐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당시 이 작품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전시도록에 사진조차 실리지 못하고
14세기 수도승 백운에 의해 수집된 승려교육교본으로 1377년 흥덕사에서 인쇄됐다는
단 두줄 정도의 설명만 실렸기 때문이었다.
그런 면에서 이번 전시는 1972년 전시 이상으로 역사적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익히 알려진 대로 <직지심경>의 문화사적 가치를 한국과 전세계에 처음 주도적으로 알린 이는
‘직지대모’로 일컬어지는 고 박병선(1929~2011) 박사다.
1967년부터 1980년까지 프랑스국립도서관의 임시직으로 일하며
한국 등 동양 고문서 자료수집을 도왔던 스승 이병도로부터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이 강화도의 외규장각에 침입해
약탈해간 왕실문서 의궤를 찾아내라는 당부를 학자 인생의 지상목표로 삼았던
그가 1960년대 말 서고를 뒤지다 뜻밖에 발견한 것이 바로 직지심경이었고
그것이 세계 최고 금속활자본임을 주장해 72년 전시를 성사시키게 된 계기가 됐다고 알려져 있다.
<직지심체요절>.
그런데 그의 사후부터 이런 박 박사의 업적이 과장, 왜곡됐다는
국내 일부 학자들의 지적이 나왔고
지난해엔 이런 내용이 일부 지방 언론에 처음 소개되면서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이 책을 구한말 조선에서 수집한 프랑스 외교관과
이를 분석한 학자들이 최초의 금속활자본이란 정보를 알고 기록했으며,
나중에 책을 입수한 국립도서관도 이런 사실을 알고 1972년 전시에 출품했다는 것이 근거다.
19세기 말 재조선 프랑스공사로 재직 중 이 작품을 수집한
콜랭 드 플랑시가 이미 간행연도를 포함한 관련 정보를 책의 표지에 적었고 그
의 수집 서적들을 토대로 <조선서지>를 펴낸 서지학자 모리스 쿠랑도 자신의 저술에서 언급했을뿐 아니라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 전시 때도 금속활자로 찍은 최고의 인쇄본이란 사실이 이미 언급됐다는 것이다.
도서관 쪽도 이 책을 1950년 원 소장자 베베르의 기증으로 입수한 뒤
한국본 장서 도서번호 109번을 정식으로 붙여 보관하면서 서지정보를 갖고 있었기에
<직지>에 대한 기본 정보는 몰랐던 게 아니라 진작부터 파악하고 있었다고 일부 연구자는 지적한다.
그런데 이런 지적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1972년 <직지>의 발견 사실이 한국에 보도된 뒤로 구한말 프랑스인의 수집 경위와 쿠랑의 <조선서지>,
도서관에 책이 기증돼 입고된 상황은 이미 언론에 후속 보도되었다.
문제는 1950년 기증 뒤 이 장서를 도서관이 계속 주목하고 연구했느냐다.
1972년 전시 전에는 한국 학계가 <직지>의 존재는 물론
프랑스인들이 관련 서지정보를 남긴 사실도 알지 못했다.
도서관 전문가들이 잘 관리하고 연구해서 출품했다면 1960년대 말
얼굴이 먼지로 새카매지도록 찾아서 직지를 발견했다고 증언한 박 박사의 말은 거짓이나 식언이 된다.
당시 직지를 출품한 공식책임자는 동양문헌실 책임자인 마리 로즈 셰귀로 도록에 공식 명기되어 있지만,
그가 구체적인 출품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알려지지 않았다.
<직지심체요절>. 문화재청 제공
당시 선광 7년 연호 같은 <직지>의 문자 텍스트 자체나
한국 문헌 등에 대한 정보에 정통한 도서관 내부의 현지인 전문가가 정말 존재했을까?
정작 그들이 20세기 초 프랑스 수집가들이 남긴 서지정보를 주목했다면,
책이 기증으로 들어온 1950년부터 전시된 1972년까지 왜 반세기 넘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는가.
인쇄사를 다시 쓸 정보가 있었다면 논문을 쓰고 공개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도서관 쪽은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20년 이상 묻혀있다가 박 박사가 임시직으로 도서관에 입사하고 수년이 지난 뒤인
1972년 전시에 돌연 책을 출품한 것이 프랑스 당국의 혜안에 의해서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박 박사는 박물관 도서관에서 일개 평직원, 그것도 일개 촉탁 임시직원에 불과했기에
획기적인 사료를 발굴했어도 도록에 기명이 들어갈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게 상식적이다.
활자사를 연구해온 중견 학자인 정재영 한국기술교육대 교수는
“20세기 초 직지의 서지 정보를 파악해 분류했다는 프랑스국립도서관 쪽이
책이 들어온 1950년부터 1972년까지 20년 넘게 서고에
왜 아무런 후속 연구 없이 놓아두었는지는 설명하지 않은 채 박 선생의 발굴 성과를 폄하하는 건
약소국의 작은 고서에 대한 도서관 쪽의 무지와 무관심을 덮으려는 의도로까지 비친다”며
“한국 고문서에 박식한 전문가가 당시 도서관에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수십만권의 고서들 가운데 박 박사의 도움을 받지 않고
한국 것만 탁 집어서 출품했을 가능성은 전무하다”고 논박했다.
외규장각 의궤를 찾겠다는 집념과 역사학도로서의 안목,
식견으로 똘똘 뭉친 한국 출신 연구자의 노력이 없었다면, <직지>는
지금도 서고 어딘가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꼬레앙 109’란 1952년 기증 당시 일련번호만 덩그러니 붙인 채로 말이다.
50여년 전 이국땅 도서관 장서고 구석에서 우군도 없이 고립된 채 고독하게 고서
더미를 뒤졌을 박 선생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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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일부
직지심경 337 /지공 화상 42 /십사과송(十四科頌) 1-2 /큰 도가 눈 앞에
一念之心卽是어늘 何須別處尋討리오
大道皎在目前커늘 迷倒愚人不了로다
佛性天眞自然이오 亦無因緣修造로다
한 순간의 마음이 바로 그것인데
어찌 다른 곳에서 찾는가.
큰 도가 눈 앞에 환하게 나타나 있는데
미혹하여 어리석은 사람은 알지 못하도다.
불성은 천진하여 저절로 그러하여
인연을 지어서 닦거나
지을 것이 아니로다.
해설 ; 깨달음 [보리]과 번뇌가 둘이 아니라는 내용의 두 번째 게송이다.
옛 선지식들이나 성현들이나 뜻이 있는 선비들의 한결같은 화두가
인생의 진실하고 바른길, 또는 가장 위대한 삶, 큰 인생과 같은 이와 같은 명제였다.
그것의 옛 언어로는 도(道), 대도(大道), 지도(至道), 보리, 열반, 해탈, 불법과 같은 말을 사용하였다.
그런데 그것은 과연 어떻게 실현하는가가 문제이다.
무슨 노력과 방법으로 어디서 얻어지는가이다.
지공 화상의 말씀은 “지금 이 순간의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라고 한다.
그래서 다른 시간과 다른 장소나 다른 환경에서 찾을 일이 아니란다.
바로 지금의 눈 앞에 우리들의 가장 소중하고 지극한 큰 삶이 있다.
달리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서는 있을 수 없다.
불성은 천진 자연이라 인연을 빌리거나 조작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흔히들 대도를 위해 피나는 수행을 해야 하는 줄을 알지만 그것은 미혹이요 착각이다.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든 부디 지금 이 순간에서 진정한 삶의 가치를 누려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