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티의 힘 / 김미량
잠잘 때
남자의 트렁크 팬티를 입어요
세상의 모든 깃발을 다 걸 것 같았던
팬티의 주인으로부터
나부끼며 나는
사람들을 응원하는 세상을 상상합니다
새 애인이 생기면 깜짝 놀라
내 팬티를 야단칠지 모르지만
어쩌면 팬티 때문에 망설이지 않고
새 애인을 버리게 될지도 몰라요
여러 장의 사각팬티로 사계절을 견뎌볼까
사각지대에서라면
위험한 사고는 빗나갈 거야
꽃이 바람에 휘어집니다
트렁크 팬티를 몰라서 꽃은 믿음보다
일찍 지는 걸지도 몰라요
팬티를 입어본 적 없는 꽃들이
몸 둘 바를 모르는 꽃들이
눈앞에서 나체로 활짝 피었습니다
숨을 곳을 찾다가
빨리 들킨 얼굴부터 칸나 장미 달리아
붉어지는 순간 꽃으로 핍니다
꽃이 팬티를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꽃을 예뻐하는지도 모르죠
밤마다 갈아입는 트렁크 팬티
헐렁한 팬티의 힘을 믿으면
악몽이 새어나가고
팬티를 걸치고 장화 신은 예쁜 나의 우산을
어둠 속 문밖에 꽂아놓았습니다, 꽃처럼
- 시집 『신의 무릎에 앉은 기억이 있다』 (달아실, 2023.10)
* 김미량 시인
1970년 대전 출생
2009년 『시인시각』(현 『시인동네』) 등단
시집 『신의 무릎에 앉은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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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티의 힘」이라는 시에서는 김미량 시인이 가지고 있는 본연의 발랄함이 잘 드러나 있다.
헐렁한 남자의 사각팬티를 입고 사계절을 견뎌볼까라고 말하는 동시에 사각팬티에서
바로 사각지대라는 펀을 등장시키면서 헐렁하기 때문에 더 이상 사고가 안 날 거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몸에 딱 달라붙는 삼각팬티가 섹시미를 강조하는 상징이라면
이제는 헐렁한 남자의 사각팬티를 입었으니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겠다는 여유로 읽힌다.
그러면서 “팬티를 걸치고 장화 신은 예쁜 나의 우산을/어둠 속 문밖에 꽃아놓았습니다”라는 진술을 통해
화려했던 자신의 과거를 어두운 문밖에 부적처럼 꽂아뒀다는 자신감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 출처 : 충남일보 조서정 기자 (http://www.chungnam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