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규 베네딕토 신부
주님 세례 축일
이사야 42,1-4.6-7 마르코 1,7-11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공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동시에, 메시아로서 그분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물로 베푼 세례는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주실 세례와
비교됩니다. 세례는 회개를 의미합니다. 공관 복음서가 모두 이러한 의미의 세례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마태오 복음서도 특별히 의로움을 강조합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이어 주는 주제는 의로움입니다.
오늘 독서인 이사야서는 희망에 찬 표현들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공정을 세울 것이라는
내용이 반복됩니다.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대화는 상당히 설득력 있어 보입니다.
예수님께 세례를 베푸는 것을 주저하는 세례자 요한과, 그것이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의로움은 마태오 복음서가 강조하는 특징적인 낱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침을 듣는
군중에게도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뛰어넘도록 요구하시고(마태오 5,20 참조),
요한이 가르치던 의로운 길을 걷도록 요청하시며(마태오 21,32 참조),
하늘 나라 또한 의로움과 관련되어 있다고 가르치십니다(마태오 5,10 참조).
의로움은 제자가 되고자 하는 이들이 추구해야 할 지향점이면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통하여 모든 의로움을 이루고자 하십니다.
그분의 길은 이렇게 공적 활동의 시작에서부터 하느님의 의로움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도 여기에 화답하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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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택 리노 신부
주님 세례 축일
이사야 42,1-4.6-7 마르코 1,7-11
주님의 세례, 그 위대한 겸손
지난 주일 우리는 나자렛 예수께서 모든 인간의 구원자, 즉 메시아이심을 공적으로 확인하고
드러내는 주님 공현 대축일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이 메시아 예수께서 당신 사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받으신 세례를 기념하는 주님 세례 축일을 거행합니다.
주님이 메시아로서 당신 사명의 수행을 세례 받으심으로써 시작하셨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합니다.
주님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온 인류를,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구원하는 위대한 사명입니다. 어디 인류뿐이겠습니까?
우주만물 삼라만상도 주님의 손길이 필요한 구원의 대상입니다.
이 위대한 사명을 주님은 당신의 세례 즉 물에 잠기심으로써 개시하시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 세례가 무엇을 의미하기에 주님은 이것으로 당신의 위대한 일을 시작하십니까?
무엇보다 중요한 세례의 의미는 바로 겸손입니다. 주님의 세례는 요르단강물에 잠기심이었습니다.
강은 땅보다 낮은 곳을 지나흐르고 강바닥은 땅바닥보다 훨씬 아래 놓여있습니다.
세례를 통해 주님은 강물에 잠기셨습니다. 강바닥까지 내려가셨습니다.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곳까지 내려가셨습니다. 겸손의 끝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겸손을 또한 지극히 겸손하게 받아들이십니다.
일찍이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도 없다.”라고 말했던 바로 그 요한에게 가서
세례를 받습니다. 그것도 죄인들의 무리에 끼여 그들과 꼭 같은 모습으로 말입니다.
가히 겸손의 철두철미함, 겸손의 극치라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겸손에 가장 어울리는 주님의 외적인 모습이 바로 온유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 제1독서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을 떠올립니다. 흔히 ‘야훼의 종의 노래’로 일컬어지는
이 예언의 말씀은 장차 오실 메시아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그는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마침내 세상에 공정을 세우리니, 섬들도 그의 가르침을 고대하리라.”
주님이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세상 구원의 위대한 사명을 시작하셨고 마침내 그 사명을
완수하셨다는 것은 주님이 바로 당신의 겸손과 온유로써 이 세상을 구원하셨음을,
그리고 우리 역시 주님의 겸손과 온유로 구원받았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겸손과 온유로 구원받은 우리는 주님께 겸손과 온유의 빚을 졌다고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하고 말입니다.
주님께서 당신께 배우라고 대놓고 말씀하신 것은 이 구절이 유일합니다.
겸손과 온유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얼마나 중요하고 소중한 가치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신 셈입니다.
우리는 지금 날이 갈수록 겸손과 온유가 실종되어 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겸손은 흔히 굴종이나 무능으로, 온유는 쉽게 나약함이나 우유부단으로 치부되는
오만과 편견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거칠고 험악한 시대에 우리 세례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 주님이 보여주신
겸손의 그 위대함을, 온유의 그 위대함을 우리의 삶을 통해 증거해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의 멍에를 더욱 기꺼이 메고 주님께 더욱 열심히 배워야겠습니다.
부러진 갈대를 확 꺾어버리기보다는 부드럽게 싸매어주고, 꺼져가는 심지를 훅 불어버리기보다는
정성껏 살려내는 주님의 그 마음을 우리의 마음으로 삼아야겠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그 위대한 사명에 동참하는 참 그리스도인이 되어야겠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9)
대구대교구 이상택 리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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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렬 모세 신부
주님 세례 축일
이사야 42,1-4.6-7 마르코 1,7-11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오.”
나는 태어난 지 3일 만에 내 의지와 상관없이 부모님이 신자라서 ‘물 부음 당하는 세례’를 받았다.
교우촌 공소라 전 국민이 성당에 다니는 줄 알았는데, 초등학교에 진학하니 신자는
우리 동네 사람들뿐이었다. 그리고 이름도 다두, 분도, 마리아가 아닌 또 다른 ‘속명(俗名)’이
있었고 우리가 부르는 이름은 ‘본명(本名)’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첫영성체의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십이단(十二端) 기도문’을외울 때는
‘나는 왜 천주교 집안에 태어나 이 고생을 하는가?’ 푸념도 했었다.
그럼에도 쉬지 않고 신앙생활을 이어 온 것은 주님 도우심의 은총이라 여긴다.
성탄 시기를 마치는 오늘 교회는
예수님이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심을 기념하는 축일 미사를 봉헌한다.
저마다 세례를 받은 이유는 각양각색이지만 대부분 세례를 받고 신앙에 입문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행복도 얻고 또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세례를 받고도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가 적은 걸 보면
예수님을 닮고 그렇게 살아가기가 어렵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세례받음에 대해 베드로 사도께서는
“세례는 몸의 때를 씻어 내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힘입어
하느님께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일”(베드로 1서 3,21)이라 말씀하셨다.
결국 우리가 세례를 받은 것은
천당 입장권을 획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보여주신 올바른 양심을 살아내고
이기적 욕심을 버리고 그리스도화 된다는 말씀으로 이해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보여주셨던 공생활의 삶은 욕심 없는 마음,
이타적인 마음으로 살아가는 삶, 손해 보고, 고통스러운 삶도 가치와 의미가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부모가 자녀에게 세례를 줬거나 스스로 개인이 세례를 받는 것은 원초적으로
가진 우리 인간의 이기심과 욕심을 버리기 위한 약속의 행위이다.
우리 각자가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기 위해서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을 비우고 내가 받은 세례를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해주 관찰사가 김대건 신부님께“당신이 천주교인이오?”라고 물었던 질문에
나는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부산교구 김정렬 모세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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