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연중 제1주간 화요일
마르코 1,21ㄴ-28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첫 번째 사고 친 내용입니다.
마르코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행적은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일이었고,
그것은 일해서는 안 되는 ‘안식일’에 벌이신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첫 번째 행적은 안식일 법을 어기는 사고를 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첫 번째 행적인 악마 추방, 이 이야기는 그야말로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복음의 실현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하와를 속인 악마의 혀 놀림을 중지시키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코 1,25)
그러자 악마는 그 사람에게서 나갔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은 그 하신 말씀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로써 당신께서 선포하신
‘복음’인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사실이 지금 여기에서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 안에서 우리를 교란시키고 분열시키는 온갖 거짓의 혀 놀림을 멈추고
어둠을 몰아내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악마를 쫓아내는 일은 전혀 새로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히브리 구마자들도 그러한 일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구마와는 전혀 달랐던 것입니다.
이를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게 어찌된 일이야?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마르코 1,27)
그렇습니다. 놀라웠던 것은 그분의 ‘권위’입니다.
다름 아닌 바로 ‘말씀’이 이루어지는 권위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놀라워했던 것은 그분의 권위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권위’를 나타내는 ‘exusia’라는 말은 ‘힘’이란 뜻으로, 하느님께만 사용되는 말이라고 합니다.
곧 예수님의 말씀에는 하느님의 힘이 실려 있어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결국 이 구마 치유는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면서 당신 스스로 명령하실 뿐, 다른 누구의 이름에 의탁하여 행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이 바로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마할 때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엄의 영은
주 예수께로 가라.”고 명함으로써 예수님의 힘과 권위를 빌어 행하게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첫 번째 행적은 놀라운 기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권위 있는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처럼 오늘 우리도 당신의 ‘권위 있는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의 힘이
우리 안에 들어오고,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하느님의 능력을 체험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샘 기도>
주님!
진리를 알게 하소서.
진리를 받아들이고 믿는 자 되게 하소서.
진리를 따르며 받드는 당신의 제자가 되게 하소서.
거룩함 안에서 제가 새로 나게 하소서.
제가 관계 맺는 모든 것 안에서 당신의 거룩한 이름이 빛나게 하소서!
주님이신 당신을 믿습니다.
아멘.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토 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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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 바오로 신부
연중 제1주간 화요일
마르코 1,21ㄴ-28
오늘날 권위주의가 타파됨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철통같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정치가들이
민초들의 힘에 무릎을 꿇게 되고 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모든 사람의 동등한 인권이라는
본래의 모습으로 점점 돌아가고 있음은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지금까지 편중되게 권위를 누려왔던 가부장적 서열주의도 무너져
남녀간의 차별, 노사간의 차별, 선생과 학생의 차별, 상사와 부하직원의 차별 등
직위와 기능의 차이가 인간이 공통으로 누려야할 권위에 차별을 낳아서는 안 된다는
것은 참으로 기뻐할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참다운 권위를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부모의 권위, 스승의 권위, 정치가의 권위, 성직자의 권위가 점점 땅에 떨어지고 있습니다.
권위주의는 타파되어야 하지만 참다운 권위는 더 빛나야 합니다.
율법주의는 타파되어야 하지만 율법은 완성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마르코 1장 21절-2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그 가르치심을 듣고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났다고 전합니다.
하나는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마르코 1장 22절)라는 반응과
또 하나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마르코 1장 24절)라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강하게 거부하는 반응입니다.
두 번째 사람을 복음은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마르코 1장 23절)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회당에는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과 더러운 영이 들지 않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라워하는 깨끗한 영혼입니까?
아니면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라고
강하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입니까?
아니면 놀라지도 않고 거부하지도 않는 또 다른 부류의 사람입니까?
그런데 왜 사람들이 이런 반응을 보일까요?
만약 사람의 말을 들었다면 아무 반응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하느님의 말씀이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반응이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침을 시작하시기 이전에는 아무런 동요가 없었습니다.
모두들 똑같이 회당에 있었습니다. 누가 건강한 영혼인지 누가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인지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나서 이런 서로 상반된 반응이
나타난 것입니다. 서로 상반된 반응이 나타난 것은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다가 빛을 받고 평소의 삶이 드러난 것일 뿐입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라고 해서 평소에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또 건강한 영혼이라고 해서 평소에 눈에 띄게 드러나는 삶을 사는 사람도 아닙니다.
평소에는 잘 모릅니다. 각자 자기의 삶을 살기 때문이고
그리고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람의 속 마음을 우리의 눈으로는 알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말씀’ 앞에서만이 드러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 놓고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 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히브리서 4장 12절)라고
말씀하신 대로 마음 속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겉으로 볼 때에는 크게 차이가 없습니다.
회당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기 이전까지는 아무도 그가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인지 몰랐습니다. 다만 그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나서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마르코 1장 24절)라고 말했기 때문에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좀 더 구체적으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평소에 예수님과 아무 상관없이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 대로 살면 자기가 망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과는 아무 관계없이 자기 생각으로 가득 차서 사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에 대해 누군가가 이야기하면 금방 화를 내고 거부하고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 의견만이 최고인양 조금도 다른 사람한테
양보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더군다나 복음에서 말씀하신 대로 사는 사람은
바보이고 미친 짓이라고 생각하며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입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평생 예수님과 아무 상관 없이 살기 때문에 “예수님”이라는 말도
들어 보지 못한 사람, 예수님의 말씀을 한번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고 사는 사람입니다.
한 마디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란 예수님이 누구신지 잘 알면서도
그분과 아무 상관없이 제 멋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마르코 1장 24절)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란 반드시 신자가 아닌 사람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신자라고
하더라도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일 수 있습니다. 회당에 모여 있다는 것은(마르코 1장 21절.23절)
평소에 신앙생활을 한다는 사람들입니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예수님과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이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비록 평소에 전적으로 말씀대로 살아가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그래도 말씀을 듣고는 놀라고 무언가 새롭게 깨닫고
새로운 가르침으로 받아들이며 사는 사람이 신자입니다.
오늘 나와 예수님은 어떤 관계에 있는지 한번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이 나의 삶과 별로 관계가 없다면 나는 '더러운 영'의 지배를 받고 사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반면 예수님이 나의 삶의 주인이 되시고 그분의 말씀이 내 삶의 지표가
된다면 나는 그분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그 새롭고 권위있는 가르침에 놀라고
감동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영혼이 참으로 건강한 영혼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그런 영혼이시라 믿습니다. 아멘.
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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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기 요한 칸시오 신부
연중 제1주간 화요일
마르코 1,21ㄴ-28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권위 있게 가르치시고 악령들을 몰아내십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당신 자신이 하느님의 전권을 부여받은 존재임을 입증해 보이십니다.
예수께서 가파르나움의 회당에서 행하신 두 가지 일,
곧 권위 있게 가르치신 것과 더러운 악령을 몰아내신 일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예수님의 힘의 증거입니다.
곧 권위가 충만한 가르치는 말씀과 힘이 충만한 구마 말씀,
이 둘은 똑같이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표징입니다.
예수께서 사셨던 그 당시 팔레스티나에는 어디를 가나 회당이 있었고,
그 회당은 신앙생활과 종교 교육의 중심기관 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거기서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 가르치심을 듣고 놀랐다. 그 가르치시는 것이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22절)라고 성서는 전합니다.
예수께서는 회당의 관습에 따라서 성서를 읽고나서 말씀하셨지만
그분 말씀은 율법학자들과 달리 성서의 단순한 해석이 아니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종종 인간의 해석과 규정들을 지키기 위하여 하느님의 본래의 뜻을 행하는 데
실패하곤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뚜렷한 의식을 가지시고
당신 자신의 사명에 대한 넘치는 확신과 절대적인 권위로서 가르치시고
성서본문에 대하여 당신 자신의 해석을 가하십니다.
이렇게 커다란 권위로써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으로
그들에게 다가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청중에게 깊은 인상과 감동을 준 직후,
한 악령들린 사람과 당신과의 만남으로 이 감동은 더 커집니다.
악령들린 사람 안에 있는 하느님과 예수님의 적대자는
예수님의 구원활동과 하느님 나라의 개시를 멈추게 하기 위해
그의 세력 일체를 불러 모읍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더 강하심을 입증하시고 사탄의 나라를 격퇴시키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과 더러운 악령과의 대화는 적대자간의 교전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악령은 자기의 “거처”에서 자기를 제거하고자 하시는 분,
그리고 자기로 인해 고통받는 인간을 구하고자 하시는 힘있는 분의 현존을 감지하고는
탄원을 외쳐댑니다.
“나자렛 예수님, 어찌하여 우리를 간섭하시려는 것입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이십니다.”
이 큰 외침과 반항적인 질문은 구마자의 공격을 막아 보려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악령의 이 말은 신앙고백이 아니라 자기 방어의 수단인데,
타락하였을지라도 천사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악령이므로
예수님이야말로 자기 나라의 가장 무서운 적임을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그분이 자기 앞에 서 계심 자체가 자기에게 있어서는 말할 수 없는 큰 고통입니다.
악령은 곧 예수께 대하여 싸움을 걸려고 시도할 만큼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하여 아직도 세상에 드러내서는 안 될 예수님의 위격,
즉 감추어두어야 할 비밀을 재빨리 폭로하여 예수님의 구원사업을 좌절케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더러운 영의 외침에 대꾸도 하지 않으시고
단순히 명령하심으로써 악령을 복종시키실 뿐입니다.
이제부터 악령들의 힘은 그분에 의해 부서질 것이며 이 깨지고 부서지는 악마의 나라위에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려는데 그분의 복음 선포의 목적이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악령의 이 말들은 자기 눈앞에 다가온 패배 때문에 오는 공포와 격분을 나타내는
첫 비명소리인 셈입니다.
이렇게 처음으로 시도된 구마사건에 대해 하느님께서 승리를 보증해주고 있고
예수님의 우위성, 즉 예수님이 악령보다 강하고 위대하신 분임을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권위 있고 어떤 세력보다도 강하며 모든 존재는 그 명령에 복종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모든 존재보다 우월하신 예수님의 능력을 우리는 정말 믿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다른 종류의 우월함을 생각해봅니다.
예수님보다 인간적 전문가의 어떤 모습에 더 신뢰를 두고 있거나
혹은 복음의 원리보다 신문이나 잡지의 유명인사의 칼럼에
우리의 가치관을 따르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는 것을 듣기보다는 주식시장의 말을 더 따르거나
예수님의 계명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이야말로 참으로 우리를 모든 죄와 악에서
해방시키시는 구세주이심을 확신합시다.
예수님의 능력으로 우리는 우리를 억압하고 있는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세속과 육신과 마귀라는 3가지 구원의 적들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신 예수께 우리의 신뢰를 둡시다.
“오 사랑하올 예수여, 구원의 모든 적들로부터 저희를 보호해주소서.
저는 그것을 제 자신만으로 할 수 없사오니 당신의 강한 팔로 저를 붙들어주시어
그 어떤 것도 당신과 저의 사랑을 갈라놓지 말게 해 주소서. 아멘.”
부산교구 윤명기 요한 칸시오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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