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거 우즈의 진정한 귀환을 고대하며
‘흉악한 식인귀, 소굴에서 탈출’
‘코르시카의 악마, 주안 만(灣)에 상륙’
‘호랑이, 그레노블에서 일박’
‘찬탈자, 리옹 통과’
‘폭군, 수도 60리 인근 임박’
‘황제 퐁텐블로 귀환’
‘황제폐하, 어제 뛸리르 궁에 귀환. 신민, 환호로 맞이하다’
1815년 프랑스의 관제언론 ‘르 모니뙤르 유니베르셀’이 나폴레옹의 엘바 섬 탈출과 파리 입성, 그리고 황제의 자리를 되찾는 과정을 다룬 제목이다.
타이거 우즈의 귀환을 다룬 현대의 언론 역시 나폴레옹을 다룬 19세기 언론의 행태를 답습했다.
2011년 12월 이벤트대회인 쉐브론 월드 챌린지에서 우즈가 잭 존슨에게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자 언론들은 다투어 황제의 귀환을 예고했다. 이어진 아부다비 HSBC 챔피언십에서 공동 3위에 오르자 언론들은 서슴없이 우즈가 사실상 부활에 성공했다고 보도했다.
그런 우즈가 2012년 3월 PGA투어 아놀드 파머 인비테이셔널 대회에서 전성기 때의 기량을 발휘하며 우승하자 언론들은 ‘기다림은 끝났다(Wait is over)’ ‘가뭄은 끝났다(The drought is over)’라며 우즈의 부활을 선언했다. 2009년 BMW 챔피언십 우승 이후 거의 3년 만에 맛보는 우승이었다. 그는 같은 해 메모리얼 토너먼트와 AT&T 내셔널 대회에서 우승을 보태 황제 귀환을 증명했다.
이듬해인 2013년엔 WGC챔피언십, 아놀드 파머 인비테이셔널, 더 플레이어스 챔피언십, WGC 브리지스톤 인비테이셔널, 파머스 인슈어런스 오픈 등 6개 대회에서 우승, 그의 골프황제 자리는 아무도 넘볼 수 없었다.
그러나 2014년부터 2017년까지 무승의 기간을 보내며 그의 골프 인생도 저무는 듯했으나 2018년 메이저인 투어 챔피언십, 2019년 메이저 마스터스 토너먼트, 2020년 조조 챔피언십에서 우승하며 샘 스니드의 PGA투어 통산 82승 기록과 타이를 이루고 잭 니클라우스의 메이저 최다승 기록(18승)에 3승 차이로 따라붙었다.
우승을 보탤 때마다 그는 부활했고 황제의 이름으로 귀환했다. PGA투어 통산 우승기록이 그의 차지가 될 것은 시간문제로 여겨졌고 잭 니클라우스의 메이저 최다승기록도 우즈에 의해 깨질 것이란 기대는 유효했다.
항상 우즈의 부활에 환호할 준비가 되어 있는 골프 팬들에게 그의 교통사고 소식은 충격이다.
우즈는 지난 23일(현지시간) 오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외곽에서 현대자동차의 SUV 제네시스 GV80을 몰고 내리막길을 달리다 전복사고를 당했다.
외신을 종합해보면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다리를 심하게 다쳤다. 전문의들이 총동원돼 수술을 받았지만 다시 걸을 수 있을 때까지 빨라야 6개월이 걸릴 것이란 소식이다. 과거 허리 수술의 이력까지 있어 선수 생활은 힘들 것 같다는 게 의료진의 전망이다.
“골프를 다시 하는 상황을 말하기에는 좀 먼 이야기”라는 담당 의사의 표현으로 미뤄 우즈가 선수로 다시 활동하기는 비관적으로 보인다.
우즈는 교통사고와 악연이 많다. 2009년 추수감사절 휴가기간 중 수면제에 취해 SUV를 몰다 소화전과 나무를 들이받고 의식을 잃어 부인이 골프채로 유리창을 깨고 우즈를 구했다. 이 사고는 그의 섹스 스캔들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 2017년에는 진통제와 수면제를 먹고 운전하다 사고를 내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허리 수술 등 알려진 수술 횟수만도 10회가 넘는다.
타이거 우즈가 다시 필드로 돌아올 수 있을까.
그냥 물러나기엔 너무 아쉽다. 이런 식으로 그를 보내는 것은 골프 팬들로서 가슴 아프다.
그가 해야 할 일도 남았다. PGA투어 최다승 타이에서 한 발 더 나가 최다승기록을 세우고 메이저 18승에 다가가는 일이 남았다.
사고와 부상으로 골프를 할 수 없는 상황에도 불굴의 의지로 극적인 재기에 성공한 벤 호건(William Ben Hogan, 1912~1997)과 켄 벤추리(Ken Venturi, 1931~2013)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벤 호건은 텍사스주 스티븐빌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대장장이 아버지와 재봉 일을 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셋째로 태어났다. 호건이 9살 때 아버지가 권총을 머리에 쏴 자살한 뒤 집안이 어려워지자 형은 학교를 그만두고 자전거로 배달일을 하고 벤은 기차역 주변에서 신문을 팔았다. 그때 동갑내기 친구가 동네 9홀 골프장에서 캐디 일을 하자고 제안해 골프와 인연을 맺었다. 그 친구가 바로 전설적인 골퍼 바이런 넬슨이다.
34세에 은퇴하기까지 52승을 올린 넬슨은 113개 대회 연속 컷 통과, 11개 대회 연속 우승, 한해 18개 대회 우승 등의 진기록을 세웠다.
호건은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18세 때인 1930년 샌 안토니오에서 열린 텍사스오픈에 참가하면서 프로로 나섰으나 10년간 우승과 인연이 없었다. 1940년 3개 대회 연속 우승하며 전성기를 맞았다. 2차 세계대전에 육군 항공대 중위로 참전했고 심한 교통사고를 당하고도 PGA투어 통산 64승을 올렸다
그는 1949년 피닉스오픈 연장전에서 패배한 뒤 부인과 함께 집으로 가다 그레이하운드 버스와 충돌하는 사고를 당했다. 버스가 안개 낀 좁은 길에서 앞차를 추월하려다 호건이 운전하는 캐딜락과 충돌한 것. 호건은 부인을 보호하려 핸들을 급히 꺾으면서 골반이 으스러지고 목뼈와 무릎, 갈비뼈 등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의사는 다시 걷기 어려움은 물론 평생 고통과 함께 살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눈물겨운 재활로 두 달 만에 퇴원한 호건은 1950년 시즌 PGA투어로 복귀해 US오픈 우승으로 부활에 성공했다.
이 내용은 이듬해 할리우드에서 ‘태양을 좇아서(Follow the Sun)’란 전기영화로 제작되어 인기리에 상영되었다.
호리호리한 체격으로 끊임없는 연습을 통해 스윙을 개발하고 1957년 ‘모던 골프’라는 골프 교습서를 냈다.
1950년대 미국 프로골프의 슈퍼스타였던 켄 벤추리는 이곳저곳 안 아픈 곳이 없어 깊은 슬럼프에 빠졌다. 그의 명성도 시들고 그의 이름조차 사람들의 뇌리에서 지워져 가고 있었다.
이대로 잊혀질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1964년 US오픈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기로 결심했다. 성적이 시원찮아 초청자 명단에서도 빠져 어쩔 수 없이 지역 선발대회를 거쳐 출전권을 따야 했다.
그는 왕년의 슈퍼스타라는 생각을 잊고 지역 선발대회에 참가했다. 몸 상태가 엉망이었던 벤추리는 “하느님, 저를 이 지경에서 데려가지 마십시오. 제가 다시 우승하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다만 제가 아직도 열심히 배우고 연습한 대로 골프를 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도록만 허락해주십시오!”하고 기도했다.
그가 지역 선발대회 마지막 라운드를 위해 클럽하우스를 나서는데 한 남자가 자기 아들에게 “저 사람이 켄 벤추리란다. 왕년의 슈퍼스타지.” 하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순간 벤추리는 자기를 ‘왕년의 슈퍼스타’라고 소개한 것이 잘못임을 증명하겠다고 스스로 약속했다. 이 다짐이 효력이 있었던지 그는 3위로 US오픈 출전권을 따냈다.
1964년 US오픈은 워싱턴DC의 콩그래셔널CC에서 열렸다. 마지막 3일째 날엔 하루에 36홀을 도는데 무더위와 습한 공기로 벤추리는 심한 탈수증과 열사병으로 시달렸다. 14번 홀에서는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였고 17번 홀 그린에서는 어지럼증으로 홀이 세 개로 보여 2피트짜리 짧은 버디 퍼트를 놓쳤다.
전반 18홀을 끝냈을 때 US오픈 의무관은 그에게 18홀을 더 도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며 경고했다.
그러자 그는 “이미 나는 죽어가는 몸이다. 특별히 찾아가 죽을 곳도 없다. 제발 이곳에서 죽도록 놔달라”고 말한 뒤 후반 18홀을 돌기 위해 일어섰다.
클럽 멤버인 한 의사가 얼음주머니와 비상약과 소금 등을 챙겨 따라나섰고 USGA회장 조셉 C. 디이도 그를 보살폈다.
10번 홀 티잉 그라운드에 올라섰을 때 리더보드 맨 꼭대기에 벤추리의 이름이 올라있었다.
USGA회장이 그를 격려하기 위해 “스코어가 궁금하지 않은가?”하고 말을 건넸다. 그러자 벤추리는 “궁금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 스코어를 유지할 수 없어요. 그저 있는 힘을 다해 한 샷 한 샷 할 뿐입니다.”라고 말하고 리더보드를 외면했다.
17번 홀 티 샷을 한 후 벤추리는 여전히 1등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거의 혼수상태에 빠졌다.
“회장님, 저에게 지연 플레이로 벌점 두 타를 주십시오. 도저히 걸을 수가 없습니다. 천천히 걸어갈게요.”
회장이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이봐 여기서부터 18번 홀 그린까지는 내리막이야. 얼굴을 들고 힘 있게 걸어 보라구. 그래야 갤러리들이 챔피언의 얼굴을 볼 게 아닌가?”
18홀에서 우승 퍼트를 마친 벤추리는 그린에 쓰러져 울며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 그리고 “하느님 제가 US오픈에서 우승했습니다!”라고 외쳤다.
그가 사투를 벌이며 생애 첫 메이저 우승컵을 끌어안은 장면은 60년대 가장 드라마틱한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이후 벤추리는 그해 2승을 추가하며 ‘올해의 선수상’을 획득,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다. 이후 2승을 추가해 통산 14승을 기록하고 1967년 은퇴, 2013년 골프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1965년부터 US오픈에서 마지막 날 36라운드를 돌던 것을 하루 더 늘려 나흘간 72홀로 치르도록 일정이 변경된 것도 열사병으로 쓰러진 켄 벤투리 덕분이다.
은퇴 이후에도 방송 진행자로 필드를 지키다 2013년 82세로 세상을 떠났다.
타이거 우즈가 과연 벤 호건이나 켄 벤투리 같은 골프영웅들처럼 인간승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
벤 호건, 켄 벤추리, 잭 니클라우스와 아놀드 파머 등 골프영웅들이 은퇴 직전까지 진정한 골퍼의 멋진 모습을 지켜냈듯 타이거 우즈도 역사적 대기록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기를 고대한다.
대기록 도전의 성공 여부에 상관없이 불굴의 의지로 도전하는 우즈의 모습을 보는 것 자체가 골프 팬들에겐 축복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