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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과 유대인
로마서 11:1-2a, 29-32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성령강림 후 제12주일이다. 이제 여름이 다 가고 가을이 점점 다가온다. 올 여름은 너무 무더워 가을을 기다리는 마음이 클 것이다. 바야흐로 가을과 함께 찾아올 창조절을 준비한다.
오늘 주인공은 유대인이다. 두 가지 유대인이 있다. 그래서 ‘유대인과 유대인’이란 제목을 붙였다. 두 종류의 유대인은 우리가 아는 유대인과 우리가 알지 못하는 유대인이다.
하나의 경우는 억압당한 슬픈 눈빛의 유대인이고, 다른 경우는 억압자의 입장에 선 유다인이다. 억압당한 유대인은 홀로코스트 영화로 끝없이 재생산되고 있으며, 지금도 역사교육에서 생생하게 반복된다. 억압하는 유대인은 중동 현대사에서 자기 땅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 난민의 억압자로 종종 분쟁의 한복판에 등장한다.
유대인 역사가 곰브리치는 그의 세계사에서 자기 민족을 이렇게 서술한다. “처음에는 유대인들이 다른 민족으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켰는데, 이제는 다른 민족들이 점점 이 유대민족을 배척하기 시작하였다.”
유대인은 인류의 많은 유산을 만든 장본인이다. 오늘의 세상은 많은 부분 유대인들이 만들어 놓은 세계관에서 비롯되었다. 모세를 비롯해 마르크스, 프로이드, 아인슈타인에 이르기까지 유대인들은 종교, 이데올로기, 심리학, 과학 등 오늘의 세계를 자신이 기초했다는 자부심이 강하다.
나사렛 출신 젊은 예수는 유대인 중에서 이단아와 같았다. 유대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은 배경은 무엇일까?
1)
사도 바울이 기록한 로마서는 믿음과 구원에 대한 기록이다. 로마서는 크게 3등분한다. 전반부 1-8장은 그리스도교의 구원의 진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이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된 인간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에서(5장), 죄에서(6장), 율법에서(7장) 그리고 죽음으로부터(8장) 자유롭다.
후반부인 12-16장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의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삶에 대한 교훈이다. ‘믿음과 행함의 조화’, 이것은 로마서가 갖는 복음의 핵심이다.
그리고 한복판에 있는 9-11장이 있다. 이 부분은 연결고리이다. 구원의 중심이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으로 이동하였음을 설명한다. 그것은 구약성경의 선민(選民)과 만민(萬民) 사상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바울 사도는 자기 동족 유대인이 하나님의 계획을 잘못 이해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박해한 까닭에 구원에서 멀어진 것에 대해 안타까움과 연민을 갖고 있다.
바울은 자기 동족 유대인에 대해 슬픔을 토로한다. 그는 유대인이 지닌 ‘일곱 가지 자부심’(9:4-5)을 손꼽으면서, 어떻게 이런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절했는지, 놀라워한다.
유대인들은 그 잘난 특권의식 때문에 하나님의 위대한 선물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들은 율법주의에 사로잡혀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이스라엘은 목이 곧고, 완고하여 하나님의 사랑의 언약을 저버리고 말았다.
하나님은 은총으로 그들을 초대하셨는데, 사람들은 잔치상을 거절하였다. 어머니가 정성껏 음식을 준비하고 그 자녀를 불렀는데, 만약 자녀들은 응하지 않는다면 부모의 심정은 얼마나 안타까운가?
유대인들은 완고하였고, 분별을 잃었으며, 굳은살이 박이듯 영적 감각을 상실하였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총을 거절하고, 거역하였다.
하나님께 향한 열성으로 말하자면 유대인이 이방인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다. 그들이 자랑하는 율법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만 빛을 얻는다. 은혜를 거절한 유대인의 율법은 오히려 그들의 감옥이 되었다.
이렇듯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거절한 유대인의 어리석음을 마음 아파하면서, 다시 하나님께 호소한다. 그는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일조차 마다하지 않겠다고 비장한 마음으로 고백을 한다(롬 9:3).
바울은 이러한 처지가 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생각하며 ‘하나님께서 영영 버리셨는가’를 묻고 또 스스로 대답한다. 아니다! 내가 증인이 아닌가?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1).
‘내가 회심 후에 그리스도인이 되고, 사도로 부름받고, 이방인에게 복음전도자가 된 것을 보면, 유대인이라고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것은 아니다’라는 증거 아닌가?
그러면서 바울은 마침내 이스라엘의 구원을 확신하고 있다.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9:26).
2)
바울 사도는 자기가 유대인의 전통 속에서 성장한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결코 그 뿌리를 부정하지 않는다. 역사를 살펴보더라도 그리스도교는 유대교를 배척하고, 갈등해 왔지만, 늘 같은 뿌리임을 인정해 왔다.
우리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하나님의 구원사의 부분으로 이해하고, 구약성경을 옛 언약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울은 결론적으로 단정한다. 애초에 하나님의 계획은 바뀌지 않았으며, 이미 허락하신 구원의 선물과 초대는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29).
김종일 집사님이 ‘바이블 25’ 오늘의 책에 <7가지 키워드로 읽는 오늘의 이스라엘>(최용환)을 썼다. 꼼꼼히 정리한 독후감에서 현대 이스라엘을 이해할 수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스라엘 사람이 지닌 선민의식이었다.
비행기를 탈 때 이스라엘 사람(유대인)이 옆 좌석에 있으면 그 여행은 최악이라고 하였다. 또 호텔에 유대인이 투숙하면 호텔이 시끄러워 여행의 즐거움을 느낄 수 없다는 이야기도 있다. 유대인들의 선민의식 때문이라고 한다.
이스라엘 국민의 특성을 보여주는 ‘후츠파’(Chutzpah)라는 단어가 있다. 히브리어 ‘후츠파’는 무례함, 당돌함, 건방짐, 뻔뻔함, 남을 배려할 줄 모르고 후안무치함 등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그들의 선민의식은 독선적이다.
이런 부정적인 편견에 대해 유대인들은 실은 자신들은 ‘사브라’(Sabra)와 같다고 변명한다. 선인장의 한 종류인 사브라는 겉에는 가시가 돋고 딱딱하지만, 속에는 부드럽고 달콤한 과즙이 들어 있다며, 다시 말해 이스라엘 사람들이 겉보기에만 까칠하게 보일 뿐이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주장이다.
신명기에서 모세는 이제 광야에서 가나안 땅을 눈앞에 바라보는 그의 백성을 향해 말한다. 그들은 광야 생활을 마치고 요단강을 건너면 약속의 땅을 차지할 것이다. 그들에게 새로운 삶이 기다리고 있다.
모세는 이방인의 땅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각별히 경계하고 있다. 너희는 가나안 사람의 풍속인 우상숭배와 악습을 따르지 말고 거룩한 삶에 힘써야 한다는 다짐이다.
그 이유는 너희는 하나님께 선택받은 성민이기 때문이다.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신 7:6).
그러나 그들의 선민의식에 대한 오만함은 그들의 운명을 바꾸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두 아들’ 이야기가 있다(마 21:28-32).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 아버지는 맏아들에게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말하였다. 맏아들은 공손히 “아버지 가겠나이다”하였으나, 실제로는 포도원에 가서 일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똑같이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둘째 아들은 불손하게도 “싫소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둘째 아들은 그 후에 뉘우치고 포도원에 가서 일하였다.
예수님은 너무나 뻔한 이야기에 뻔한 대답을 듣고자 질문하신다.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여러분 생각에는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 자인가? 당연히 둘째 아들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함정이 없다. 본문에서 맏아들은 처음에 순종했지만 결과적으로 불순종하였고, 둘째 아들은 거절했지만, 결국 나중에 뉘우치고 순종하였다.
마태복음은 두 아들을 이렇게 분류한다. 맏아들은 하나님을 위해 일한다고 말하면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는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한다.
맏아들은 유대지도자들과 같다. 둘째 아들은 율법을 잘 알지도, 지키지도 못하며 스스로 죄인임을 알지만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음으로써 새 사람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말 그대로 그 시대의 죄인들이었다.
예수님의 비유는 맏아들과 둘째 아들을 선민과 만민, 의인과 죄인으로 나눌 수 있다. 맏아들은 이미 선민으로 선택받았음을 자랑하는 유대인을, 둘째 아들은 새 이스라엘이 되려고 주께로 돌아오는 이방인들을 상징한다.
맏아들과 같은 유대인들은 특권의식에 젖어 겉모양과 형식을 번지르르 치장하였지만, 선민으로서 진정한 사명은 깡그리 잊어버린 위선자들이었다. 율법과 의를 강조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의 가르침과 사랑의 권위를 부인함으로써,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들, 유대인은 하나님께 대해 ‘예’라고 말하고는 사실상 하나님의 뜻을 행치 않았다.
그러나 둘째 아들은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그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해 예수님께 나아온 사람들이다. 그들은 부도덕하고, 비종교적이라며 무시당하고 소외된 채 살았다. 그들은 자비와 긍휼이 풍부하신 예수님께 나아와 상한 심령으로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며 가슴을 치는 자들이었다. 그들, 이방인과 세리와 창기들은 ‘아니오’라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함이었다. 나는 맏아들인가? 둘째 아들인가? 중요한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나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기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다. 두 아들도 마찬가지다. 누구에게나 두 아들의 모습을 다 갖고 있다. 오만한 유대인과 회개한 유대인의 모습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의 회개, 나의 신앙, 나의 구원의 문제이다.
마틴 루터가 “종교의 핵심은 인칭대명사에 달려 있다”고 한 배경이다.
비록 유대인이 당장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을 거부함으로써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기회가 되어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문이 열렸다. 마치 유대인이 자살골을 넣어 이방인이 기회를 얻은 셈이다.
본래 하나님의 계획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방인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도, 믿음의 조상도, 예배도 어느 것 하나 지니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방인이 먼저 복음에 참여한 것은 유대인들의 불순종에 따른 반대급부 때문이라는 것이다.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30).
마찬가지로 이치로, 장차 이스라엘 민족은 이방인들이 누릴 하나님의 자비를 보고, 회개함으로써 마침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얻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확신하길,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유대인을 포함하여 흔들림 없이 계속될 것임을 고백한다.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
바울의 말에는 자기 민족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희망이 담겨 있다.
3)
이제 새로운 언약 이후에 이스라엘의 선민의식은 더 이상 보편적 의미가 없다. 복음의 시대는 좁은 선민의식을 넘어 모든 인류 곧 만민을 향하여 구원을 베푸신다. 베드로전서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벧전 2:9).
아프리카교회의 고백문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백성을 자기 성민으로 삼으신다.
“주님은 히브리인 어머니로부터 태어나시고 페르시아 출신 박사들에게 경배를 받으셨습니다. 시리아 여인과 로마 군인의 믿음을 보고 기뻐하셨습니다. 당신을 찾는 헬라인을 기쁘게 받아주셨습니다. 당신이 지신 십자가를 아프리카인이 짊어졌습니다. 주님 우리가 당신께 속해있음을 감사드립니다. 모든 민족이 당신의 나라에서 유산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하나님의 구원 앞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이 없다. 의인과 죄인의 구분이 없다. 그저 무릎을 꿇어라!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에서 배제된 사람은 없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32).
바울이 말하는 유대인의 불순종과 이방인의 순종에 따른 구원이야기는 그 시대의 사람들 뿐 아니라, 현대인들에게도 묻는 질문이다. 여전히 선민과 만민, 의인과 죄인 속에서 헷갈려 하며 살고 있는 바로 우리들을 향한 말씀이다. 사회적인 관점에서 의인과 죄인을 향하여 하신 말씀이다.
하나님은 죄 가운데 사는 나를 구원하셨다. 그 극진하신 사랑과 은혜로 구원의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 죽을 자인데, 은총으로 구원을 얻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품어주시는 긍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두 사람을 품으시는 하나님의 긍휼이다. 우리도 그 사랑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구원의 선물은 참으로 깊고 신비하다. 그 사랑의 신비가 내 삶을 바꾸고, 온 세상을 바꿀 것이다.
그 사랑을 받아 들인 사람인 나는 그리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오직 은총이었다. 죄인인 나일지라도 그 은혜와 자비를 부요하게 누리도록 초대받았다. 얼마나 놀라운 사건인가?
하나님은 내게 은혜를 베푸신다. 그런 은총의 삶을 누리는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