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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심판과 왕의 찬양 (단4:29-37절)
벨기에의 여왕이 폴란드를 국빈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데 공산당 간부가 뒤를 따라왔습니다. 당 간부는 신앙이 좋은 사람 같아서 여왕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기독교 교인입니까.’ 그랬더니 당 간부가 하는 말이 ‘여왕이여 저는 믿기는 하지만 실천하지는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여왕이 조금 이상하게 여기면서 다시 물었습니다. ‘아, 그러면 당신은 공산주의자로군요.’ 했더니 당 간부가 하는 말이 ‘공산주의를 실천하기는 하지만 믿지는 않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교회를 다니고 하나님을 믿기는 하지만 그 신앙대로 실천하는 삶을 살지는 않고, 공산주의를 실천하고 유물주의 이론대로 살아가지만 그것을 신앙하는 것은 아니라는 이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믿으면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하고 믿지 않으면 실천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 믿으면서 실천하지 않고 믿지 않으면서 실천하는 참으로 이상한 사람입니다. 우스운 이야기 같지만 이런 점이 바로 우리들의 문제점인 것입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찬양도 했지만 그분을 믿지는 않았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 보려고 했지만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 믿음은 점점 희미해지고 다시 자기의 본성이 도로 날아난 것인지도 모릅니다.
왕의 꿈에 대한 다니엘의 해석과 충고가 있은 지 1년이 지났습니다. 이 기간은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로 하여금 다니엘의 충고대로 그 자세를 변화시키고 겸손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기회를 주신 기간이었습니다.
그 명백하고 확실한 해몽과 함께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진리의 예언자 다니엘의 충언을 충분히 새길 수 있는 기간이었습니다. 확실히 하나님은 인간의 죄에 대해 오래 참으십니다.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인내와 긍휼을 무시할 때 집행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려 1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느부갓네살이 회개하도록 인내하고 긍휼과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주신 기회를 선용하지 못하는 사람은 더욱 심한 슬픔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단4:29 열두 달이 지난 후에 내가 바벨론 황궁 지붕에서 거닐새..
당시의 지붕은 사람이 거닐 수 있는 평탄한 지붕입니다. 마치 오늘 날 슬라브 콘크리트 지붕과 같은 구조입니다. 그러나 ‘황궁 지붕’이라는 말 ‘헤칼 말르쿠타’는 ‘궁전’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왕이 성 안의 장엄한 성벽과 망대를 둘러보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는 바벨론 왕궁에 심히 만족하고 흡족하였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하는 말로 자문하고 있습니다.
*단4;30 나 왕이 말하여 이르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바벨론 도성은 676 구역으로 구성되었으며 그 장엄함과 위용은 가히 놀랄만한 것이었습니다. 고대 국가에 있어서 왕의 권세는 그 수도의 장엄함과 웅장함에서 곧잘 비교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가 바라본 성의 웅장함은 자신이 누리는 영화의 상징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말에는 중대한 요소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나 왕이, 내 능력과 권세로, 내가 건설, 내 도성, 내 위엄과 영광.’ 이라는 말들입니다. 바로 그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죄가 ‘내, 나.’입니다. 이것은 인본주의의 발상이요, 이기적이요, 배타적이며, 자기만족주의입니다. 자기 자랑의 극치인 것입니다.
자기 제일의 교만함입니다. 그는 건축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건축한 거대하고 방대한 바벨론 성위를 거닐면서 화려하기 그지없는 왕도를 내려다 본 것입니다. 그 성은 참으로 넓고 컸습니다.
그 성 안에는 세기적인 인물들이 왕래하고 있었습니다. 성 안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수준은 부유하고 화려했습니다. 그 도시는 황금으로 장식된 도시였습니다. 집과 성곽과 망대와 건물들은 한 점의 손색이 없었고 성 안에 직선으로 뻗어 있는 도로는 아름다운 돌로 바닥을 깔았습니다.
너무나 훌륭한 성을 보면서 왕은 자신도 모르게 그 성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주위 신하들을 보고 말하기를 ‘내 능력과 권세로 건설한 도시를 보라. 이것으로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나의 위엄과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고 자기를 극대화시켜 버렸습니다.
이 무서운 교만과 자만이 바로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의 천벌을 받는 죄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의 경고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바벨론 제국 건설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신의 공적으로 돌리는 교만을 드러낸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큰 죄는 이처럼 자기가 지상 최고의 존재인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며 자기가 하나님처럼 되거나 그보다 더 높아지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종류의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는 아비가일의 남편 나발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내가 어찌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어디로서인지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고 했습니다. 실상은 그가 평안하고 아무 걱정 없이 들에서 양을 칠 수 있었던 것은 다윗과 그의 군대의 보호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윗과 그의 군대를 무시하고 어디서 온 자들인지 알지 못한다고 하면서 그 모든 부의 원인이 자기에게 있다고 자랑하면서 교만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미련한 나발을 심판하시고 그를 징계하시자 그가 낙담하고 열흘 후에 죽어버렸습니다.
예수님도 이와 같은 부류의 사람을 소개한 바 있습니다. 그는 밭의 소출이 풍성한 자였습니다. 그는 심중에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부자는 ‘내가’라는 말을 여섯 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교만한 자를 방치해 두지 않습니다. 바로 그 날 밤에 그 영혼을 회수해 버린 것입니다. 그 사람이 계획한 것, 예비한 것, 하나도 자기의 것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에게 대하여는 부요하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너무나 가난한 자였습니다. 철저한 인본주의자요, 유물주의자요, 현세주의자요, 이기주의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천벌을 받고 말았습니다.
느부갓네살 왕도 자기도취, 자기만족, 자기 영광, 자기 위엄, 자기 권세에 미쳐버리고 말았습니다. 자기 이성을 완전히 잃은 것입니다.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를 바라보는 순간 사탄의 도구가 되고 맙니다.
자만에 이끌리는 순간 생각이 혼미해지고 판단이 흐려지면서 이성을 잃고 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하늘에서 하나님의 심판의 나팔소리가 들렸습니다.
*단4:31-32 이 말이 아직도 나 왕의 입에 있을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내려 이르되 느부갓네살 왕이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왕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 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면서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 하더라.
그 음성은 초자연계에서 들려온 소리였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음성이요, 심판을 행하시는 주의 사자의 음성이었습니다. 그 소리는 다른 사람의 귀에 들려진 소리가 아니라 느부갓네살 왕에게 직접 들려온 음성이었습니다.
바로 다메섹 도상에서 길을 가던 사울 청년에게 들려온 음성과 같았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던 그 음성이었습니다. 이 음성은 왕의 말이 입에서 채 끝나기도 전에 들려왔습니다. 이는 심판의 신속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다는 것은 느부갓네살의 정신병이 자연 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권적 섭리에 따른 것임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이 소리는 네 가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첫째, 왕의 주권 박탈의 소리입니다.
‘나라의 왕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그의 보좌의 권세가 상실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의 보좌는 난공불락의 보좌였습니다. ‘떠났느니라.’라는 말 ‘아다트’는 ‘가져갔다.’라는 뜻으로 왕권의 박탈이 무너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도로 가져가신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그 영화의 보좌에서 밀어 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보좌를 가져가신 것입니다. 이제 왕국의 보좌는 그에게서 떠나버렸습니다. 그와 아무 상관이 없는 물건이 되고 말았습니다.
둘째, 영광과 명예 박탈의 소리입니다.
‘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라고 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열국의 왕들 중에 왕입니다. 왕 중의 왕의 영광과 명예를 누렸습니다. 그는 세계의 모든 인간들로부터 찬사와 존경과 영광을 한 몸에 받고 살았습니다. 만인이 그 앞에 무릎을 꿇었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지금까지 그는 수많은 사람을 쫓아내었고 학대했습니다. 그런 그가 이제는 반대로 사람들에게서 쫓겨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쌓았던 모든 명예와 영광을 한 순간에 잃어버린 것입니다. 사람에게 버림을 받고 사람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는 것입니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일이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왕의 보좌에서 내려오는 일도 대단한 것이지만 사람들에게서 쫓겨난다는 것은 치욕 중의 치욕이요, 죽기보다 더한 모욕인 것입니다.
셋째, 인간성 박탈의 소리입니다.
‘들짐승과 함께 살면서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라고 하였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꿈을 꾸었을 때 하늘에서 내려온 순찰자가 말하기를 ‘그 마음이 변하여 사람의 마음 같지 아니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아 일곱 때를 지난다.’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심판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상실되고 그 자리에 짐승의 마음이 들어온다는 것은 그가 짐승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짐승 그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성이 철저히 상실되고 인간의 이성 작용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지성이나 감성이나 의지가 없어지는 상태로 바로 타락한 인간상입니다. 죄로 타락한 인간상은 신상에서 인상으로 내려오고, 그 다음에는 인상에서 물상으로 내려오고, 물상에서 축상으로 전락해버리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인데 생각하고 말하고 먹고 활동하는 상태가 짐승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나는 인생은 사람에게서도 쫓겨납니다. 사람에게서 쫓겨나는 인생은 짐승들의 세계로 들어가서 짐승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넷째, 일곱 때를 지나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일곱 때를 지내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기간은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의 다스리심을 확신하는 기간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기간은 완전한 기간입니다. ‘일곱’은 완전수이기 때문에 인간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하나님의 징치의 완전한 기간입니다. 이것은 사람에 따라 다를 수도 있습니다. 빠른 사람도 있고 느린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한 시간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그 때를 알지 못합니다. ‘때와 시기’는 아들도 알지 못하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반드시 그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는 순간 그 일이 왕에게 즉시 임하였습니다.
*단4:33 바로 그 때에 이 일이 나 느부갓네살에게 응하므로 내가 사람에게 쫓겨나서 소처럼 풀을 먹으며 몸이 하늘 이슬에 젖고 머리털은 독수리 털과 같이 자랐고 손톱은 새 발톱과 같이 되었더라.
그 시간 후에 그에게서 총명이 떠났고 모든 판단력과 의사소통 능력과 분별력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성적이고 정신적이고 영적인 능력이 모두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인간 중에서 야만적인 동물로 전락한 것입니다.
자신을 짐승으로 생각하고 짐승의 생활 방식을 따라 사는 질병을 현대 의학에서는 ‘인사니아 조안 트로피카’라고 하는데 이 병은 정신병으로 분류됩니다. 그는 벌거벗고 스스로 인간 속에서 도망을 쳤습니다.
숲과 나무 사이에 거하며 독수리처럼 새처럼 뛰놀다가, 배가 고프면 소처럼 풀을 뜯어 먹으며 밤이 되어도 비나 이슬을 피할 줄도 모르고 들짐승처럼 땅에 누워 잠을 잤습니다. 그의 몸은 온통 털로 덮었고 소처럼 울고 타조처럼 울부짖었습니다.
그는 만물의 왕이 아니라 만물의 찌꺼기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백약이 무효가 되었고 모든 의술이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화려하고 찬란하던 제국의 영화가 그에게는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바벨론 왕국을 보고 기염을 토하던 그의 기상은 땅의 풀만 바라보고 괴성을 지르는 괴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상아 침대가 무슨 소용이 있으며 비단 금침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짐승에게는 인간의 영광이 아무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교만한 자를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저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에게 하나님은 악령의 지배를 받게 하셨습니다. 악신이 그를 괴롭히면 머리가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이 세상 왕들에게는 너무나 흔히 있는 일이며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23:9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것을 정하신 것이라. 모든 누리던 영화를 욕되게 하시며 세상의 모든 교만하던 자가 멸시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렘13:9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이같이 썩게 하리라. 이 악한 백성이 내 말 듣기를 거절하고 그 마음의 완악한 대로 행하며 다른 신들을 따라 그를 섬기며 그에게 절하니 그들이 이 띠가 쓸 수 없음 같이 되리라.
*렘13:15-16 너희는 들을지어다. 귀를 기울일지어다. 교만하지 말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라. 그가 어둠을 일으키시기 전, 너희 발이 어두운 산에 거치기 전, 너희 바라는 빛이 사망의 그늘로 변하여 침침한 어둠이 되게 하시기 전에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라.
나라의 위정자나 지도자들이 교만하면 그 나라는 망할 징조입니다. 교만한 지도자는 미치게 되기 때문에 미친 왕이 다스리는 나라는 나라 전체가 미치광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 유명한 실례로 로마의 네로나, 독일의 히틀러, 이탈리아의 무소리니, 일본의 도조 등이 그런 미친 자들입니다.
이들이 전쟁을 일으켰고 사람들을 광분시켰고 미치광이가 되게 하여 전 세계를 죽음의 도가니로 몰아갔던 것입니다. 겸손은 존귀한 결과를 낳지만 교만은 이처럼 비참한 결과를 낳습니다. 교만은 자기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더욱 비참한 지경에 이르는 것입니다.
일곱 때의 고초를 겪으면서 느부갓네살 왕은 인간이 아무리 강대하여도 결국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무력한 존재이며 언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르는 무능력한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단4:34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이를 찬양하고 경배하였나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이 고백은 느부갓네살이 자연적으로 질병에서 회복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권고하시고 그에게 겸손과 회개의 영을 부어 주셔서 그가 빛을 찾았다는 말입니다. 미친 사람의 마음이 저절로 회복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불신자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일 역시 사람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회개하는 심령을 부어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나무를 베었지만 그루터기를 남겨 두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그에게 역사하신 것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라고 했는데 이 말은 ‘나의 눈을 하늘을 향하여 들었다.’라는 말입니다. 느부갓네살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바랐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왕이 회개했다는 것과 하나님을 인정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121:1-2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시123:1-2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는 그 순간이 하나님을 뵙는 순간이요 그가 살아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시고 그를 믿는 자마다, 그를 바라보는 자마다 구원을 얻게 하셨습니다.
*요3: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죄인이 하늘을 우러러 쳐다보는 것은 천지의 대주재이신 하나님을 앙망하는 태도입니다. 자기나 이 세상으로부터 떠나는 태도입니다. 하나님께 회개하고 자복하는 태도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기도하는 태도입니다.
짐승이 되어버린 왕에게 하늘을 우러러 보는 영의 지각 작용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지금 생명의 부활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를 돌아보신 증거입니다. 멸망 받을 짐승 같은 인간에게 거룩한 은총을 베푸신 것입니다.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총명’이라는 말 ‘만다’는 지혜, 명철, 이성, 지식, 등 다양한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인간다운 온전한 의식이 회복되었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고유한 이성 작용이 모두 회복된 것입니다.
잃어버린 인간성이 돌아왔습니다. 인간의 순수한 마음이 살아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적 산물로 인간 외에는 다른 피조물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짐승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감성과 이성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인간은 스스로 자기를 주장하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총명은 하나님을 알게 하고 하나님을 보게 하였습니다.
*단4:35 땅의 모든 사람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사람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고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
인간들의 수가 아무리 많고 세력이 강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한낱 미약한 존재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군사인 천군천사와 땅의 사람들을 자기의 뜻대로 다스리시는 분으로 그의 통치 영역은 천계, 영계, 지계를 총괄하는 전 우주적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자신의 절대 주권 속에서 피조 세계의 그 어떤 간섭도 받지 아니하시는 유일한 전능자라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은 하나님에 대하여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로 돌아간 인생의 본분입니다.
그가 회개하였을 때 그의 왕권이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단4:36 그 때에 내 총명이 내게로 돌아왔고 또 내 나라의 영광에 대해서도 내 위엄과 광명이 내게로 돌아왔고 또 나의 모사들과 관원들이 내게 찾아오니 내가 내 나라에서 다시 세움을 받고 또 지극한 위세가 내게 더하였느니라.
참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행사는 불가항력적입니다. 주신 자도 하나님이시오, 취하신 자도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이 영광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다시 그것을 복권시켜 주신 자도 하나님이십니다.
느부갓네살은 언제 그런 병을 앓았느냐는 듯이 그의 건강과 정신과 심성이 온전히 회복되었습니다. 그는 왕으로서의 위엄을 되찾았고, 걱정과 근심이 사라진 왕의 당당한 권위를 회복했던 것입니다.
그동안 국정을 맡았던 나라의 관리들이 모두 왕 앞에 머리를 조아렸으며 왕권을 그에게 돌리고 하례를 드렸습니다. 왕은 병을 앓기 이전보다 더욱 위세가 당당하고 권위가 높아졌으며 모든 존경과 영광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의 그 어느 나라에 이런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까. 왕좌를 두고 모략과 살상이 판을 치는 세상에 7년 동안이나 미치광이로 지냈던 사람을 다시 왕으로 추대한 것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국가의 총리를 맡고 있던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하나님의 정하신 뜻을 알고 왕이 회복하고 등극하는 그 날을 고대하며 국정을 아무 사고 없이 잘 운영한 덕분이었을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단4:37 그러므로 지금 나 느부갓네살은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경배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라.
첫째, 그는 하늘의 왕에게 찬양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위대성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물론 이 말은 다신론적 이방 신관에서 유래한 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신들의 왕이라는 말입니다. 34절에 그는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이를 찬양하고 경배하였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 인격적인 분임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또 시작과 끝이 없는 영원 자존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한다고 했습니다. 영생하시는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분으로 영원무궁한 분입니다.
둘째, 영원한 통치자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34절에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느부갓네살은 비로소 세상 왕국은 유한하고 가변적이요, 불완전하고 유동적이며 끝내는 쇠잔하는 나라임을 깨닫고 반면에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하고 불변하고 진실하고 영광스러운 나라라는 것을 인식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하늘의 왕이시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셋째, 절대 주권의 하나님을 고백하고 찬양했습니다.
땅의 거민이든지, 천사든지, 어떤 피조물이라도 하나님은 없는 것 같이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주장에 대해 그 어느 인생도 감히 항거할 수 없고 불평할 수 없고 대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롬9:19-21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넷째, 진실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37절에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다 의로우시므로’ 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시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우신 통치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섭리와 간섭이 온전히 공의롭다는 사실을 천명한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어둠이나 불의가 조금도 없으시기 때문에 그의 판단은 다 진실하고 의롭고 정직한 것입니다.
다섯째,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무릇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라.’고 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참으로 하나님 앞에 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성전의 기물을 빼앗아 자기의 우상 신의 창고에 두었습니다.
그는 신상의 꿈에 대한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금 신상을 세워 경배하라는 악법을 세워 진리의 사람들을 시험하고 괴롭혔습니다. 그는 불복종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불태워 죽이려고 했으나 이 일로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교만했고 급기야 자기의 권세와 영광을 하나님 앞에 드높이고 자기의 치세를 자랑했습니다. 이런 교만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고 결국은 그가 하나님을 우러러 보도록 역사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시며 그가 참 회개를 하고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은 이제야 자신의 교만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항복 선언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경배하고 고백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고난을 주시기까지 역사하시며 사람을 회개시키고 겸손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느부갓네살 왕이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징계를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으로 여기면서도 인간이 근본적으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을 볼 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경배했지만 진정한 회개, 생명을 이루는 참 회개를 이루지 못한 것이 아쉽지마는 그러나 당시의 유대인들의 신앙 역시 구원의 은총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도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인간이 세운 대제국의 통치자로서 이만한 고백과 찬양과 감사를 드릴 정도로 하나님을 체험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과 그의 종들인 다니엘과 친구들의 합작품인 것입니다.
저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으나 그곳의 왕 앞에서도 당당히 하나님을 증거하고 증인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바벨론의 왕까지도 회개시키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 마지막 때에 불신 세상의 모든 왕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고 회개시키는 역사가 믿는 성도들을 통하여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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